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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건ㆍ전쟁ㆍ혁명ㆍ학살

혁명- 1789.07.14~27 : 프랑스 대혁명 ③ 단두대ㆍ자코뱅파 (주도세력)

by 당대 제일 2023.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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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두대 (斷頭臺)ㆍ기요틴(Guillotin): 1792~1977까지 사용(1981년 폐기)"는 "프랑스 대혁명"과 뒤이은 공포정치 시대의 상징처럼 되었다. "프랑스 혁명" 당시, 죄수의 목을 자르는 형벌인 "참수형"을 가할 때, 사용한 사형기구였다. 처형 방법은 "총살형"도 많았지만, "단두대ㆍ기요틴 형"이 널리 알려져 있다. "기요틴"이라 불리는 단두대는 외형상 흉측하지만 원래는 인도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1. 1789년, "프랑스 혁명"을 주도한 세력

자코뱅파 (Jacobinsㆍ자유와 평등의 벗 자코뱅 결사단ㆍ1789~1794.11)→ 이후 "산악파"를 받아들임

공화주의ㆍ계몽주의 → 로베스피에르ㆍ마라ㆍ당통 (강경혁명세력)

유래는 "파리의 자코뱅 수도원"을 본거지로 한 데 유래되었다. "자코뱅"의 주도 세력은 주로 "몽테뉴파"였기 때문에, "자코뱅"은 "몽테뉴"와 동의어로 쓰이기도 하나, 엄연히 다른 의미이다.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가 중심이 되어, 급진적인 혁명을 추진한 시기로 유명하다. "프랑스 혁명"을 주도한 주류로, 공포 정치로 활약하고, "테르미도르의 쿠데타" 이후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지롱드파 (Girondinsㆍ1791.10~1793.10)

공화주의ㆍ자유주의ㆍ시장 경제ㆍ노예제 반대→ 피에르 베르니오ㆍ자크 피에르 브리소ㆍ마담 롤랑 (지롱드파의 여왕)

"지롱드" 지방 출신의 부르주아 계급이 다수를 차지했던 "보르도ㆍ자코뱅" 클럽 소속 의원(베르니오 등)을 핵심으로 한 것에서 유래한다. "중산층 부르주아ㆍ개신교" 등 이어지는 "온건 공화파" 계열의 여러 파벌의 집합체이며, "자주연방주의자"라고 불렸다.  1792년 "지롱드파"가 중심이 되어, "오스트리아"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지만, 혁명의 여파로 군대 및 지휘명령 계통이 없는 프랑스군은 각지에서 패전을 거듭했다.  따라서 "지롱드파"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정권을 "푀양파"에 넘겨준다.

 평원파 : 중도파         푀양파 : 입헌군주제 주장 – 라파에트

2. 자코뱅파 (주도세력) 파벌

자코뱅 세 거두 : 파벌 간 충돌이 심각해지기 이전에는 "로베스피에르ㆍ마라ㆍ당통"을 지칭

로베스피에르파 

"공안위원회"의 중심적인 위원이었던 "로베스피에르"가 이끌던 계파로, "몽테뉴" 내에서 "중도" 쪽에 위치한 성향을 가졌었다. "생쥐스트"도 이 계파에 속했으며, 공포정치 당시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나, "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 인해 완전히 몰락한다. 공포정치를 주도한 계파지만, 회원들에게 엄격한 "금욕주의"를 요구하는 등 도덕적인 명분을 중시하던 계파였다.

몽테뉴파 (산악파): 장폴 마라(급진적 저널리스트ㆍ내과 의사ㆍ철학자ㆍ과학자)가 속했던 계파

빈민ㆍ산업노동자ㆍ급진 지식인들로 구성된 "자코뱅"  "좌익 파벌"이었다. "몽테뉴"로 분류된 좌익 계파의 의석은 "국민공회" 의석에서 제일 위에 위치했기 때문에 산악파로 불렸으며(지롱드파의 평원파와 반대 개념), "급진적인 공화주의 개혁을 주장했다.

 당통파 :  "몽테뉴 파" 내 우익 세력으로, "관용파"로 불리기도 했다.

"조르주 당통"을 영수로 하고, "카미유 데물랭ㆍ에로 드 세셸" 등도 유력한 멤버이다. 술ㆍ여자ㆍ갬블 등 인생을 즐기고 있던 향락적인 인물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3. 단두대 (斷頭臺)ㆍ기요틴(Guillotin): 1792~1977까지 사용(1981년 폐기)

"기요틴"이라 불리는 단두대는 외형상 흉측하지만 원래는 인도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프랑스대혁명" 이전에는 사형 집행 방식이 참수였는데, 단번에 목이 잘리지 않는 경우가 많아 끔찍한 장면이 연출되고는 했다. 특히 참수에도 신분 차이가 있어서, 귀족은 날카로운 칼로 단번에 참수 당했지만, 평민은 무딘 칼로 여러 차례 맞으면서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1792년 정식 사형 도구가 되었는데, 1791년 "프랑스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국민의회"에서 계급에 상관없이 참수형에 처할 죄수들의 고통을 줄일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안토닌 루이 박사(왕의 주치의ㆍ외과학회 사무국장)ㆍ조제프이냐스 기요탱 박사(파리 의료기기부의 해부학 교수)"가 이 기구로 사형수들이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다고 제안하였다. 모든 사형수를 기계로 처형하라고 요구하며 2.3m 높이의 구조물에 40kg의 무거운 칼날을 매달아 순식간에 목이 잘려나가는 장치를 개발한 것이다.

"공포 정치"에서 "로베스피에르 파"는 "혁명 반대파ㆍ온건파ㆍ투사" 등 반대파의 인물을 차례로 숙청했다. 처형당한 인물은 "루이 16세ㆍ마리 앙투아네트(루이 16세 아내)ㆍ당통(프랑스 혁명 주도)ㆍ로베스피에르(단두대로 많은 사람을 죽임)ㆍ라부아지에(과학자)ㆍ에베르ㆍ라부아지에ㆍ카미유 데뮬랭ㆍ뤼실 두플레시(데뮬랭의 아내)" 등 수많은 인사들이 처형당했다. 그러나 "프레리알 22일 법" 제정에 따라, 사법 절차가 크게 간소화되었기 때문에, 정식 재판 없이 사형을 시켰고, 옥중사도 많아, 희생자와 피해자는 약 4만 명 이상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4. 공포 정치 (로베스피에르 파 (1793~1794))

1793.03.10일, "혁명재판소"가 설치되었다. 이것은 항소할 수 없었던 단순하고 강력한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위험한 기관이었다. 03.21~ 04.02일 사이에, 의회는 각 자치 단체에 "반 혁명파" 단속을 위한 "감시위원회"를 설치하고, 9명으로 구성된 "공안위원회"의 설치를 결정했다. 그리고 04.06일, "혁명재판소"의 1번째 법정이 열리고 "공안위원회"가 발족했다. 이것은 "공포 정치"의 개막이었다.

1793.05월, "로베스피에르"는 인민의 봉기를 선동하는 연설을 했다. 05.31일, "로베스피에르" 계획에 따라, "지롱드파"의 추방이 시작되었다. 06.02일부터 "자코뱅파"의 독재가 시작되었다. 06.02일에 "상 퀼로트"의 지지를 얻은 "자코뱅(좌파)"의 지도자 "로베스피에르"는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로베스피에르"는 "만민의 자유ㆍ평등 실현ㆍ불평등을 유발하는 모든 정치 제도ㆍ구습에 대한 영원한 추방"이라는 "루소의 평등주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이에 반대하는 반대파인 "지롱드파(우파)ㆍ 보수파"들을 "공안위원회ㆍ혁명재판소" 등을 이용하여 숙청하면서 "자코뱅" 정책을 하나씩 실행해나갔다. "루소"의 저작에서 언급되어 있는 사회를 목표로 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처음에는 "산악파"가 "상 퀼로트" 등 시민에게 지지를 받아 공포 정치 속에서도 인정받았지만, 일반 시민들도 체포 되었고, 또한 비교적 평화기가 찾아오면서, 공포 정치는 점점 힘을 잃어 갔다. 이런 정치 형태는 1794.07.27일 "테르미도르의 쿠데타"로 "로베스피에르"가 실각할 때까지 이어졌다.

5. 그림 :  "토네"의 단두대의 승리 : 대혁명 당시, 공포정치가 소재

지옥을 배경으로 단두대 처형을 묘사함으로써 공포정치를 풍자적으로 비판했다. 화면 전체가 붉은 색조여서 피의 살육이 자행되는 분위기를 극대화했다. 중앙의 단두대에서는 이미 처형이 집행 중이다.  사형집행인이 양손에 잘린 머리를 들어 올리고 뒤편으로 새로운 죄수가 끌려 나오고 있어서 쉴 새 없이 머리를 자르는 중임을 알 수 있다. 잘린 머리가 얼마나 많은지 단두대 아래로 피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린다.

광장에서는 공포정치의 상징인 "로베스 피에르마라"가 가마를 타고 마치 개선장군처럼 당당하게 들어선다. 주변으로는 자코뱅의 상징인 붉은 모자를 쓴 단원들이 칼과 창을 들고 행군한다. 단두대만이 아니라 "자코뱅" 단원이 지나가는 길목마다 대대적 살육이 벌어진다. 여성이든 노인이든 가릴 것 없이 피를 흘리며 쓰러진다. 지옥의 괴물들조차 놀라서 달아날 정도로 잔혹하다.

6. 1794.07.26일 : 테르미도르의 반동(Thermidorian Reaction)ㆍ쿠데타

"프랑스 대혁명" 이후 권력을 잡게 된 "로베스피에르"가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하는 공포정치 끝에 결국 살해당한 사건이다. 공포 정치는 의심암귀의 악순환을 만들어 냈고, "로베스피에르 파"를 고립시켰으며, "테르미도르 쿠데타"를 야기한다. "테르미도르(Thermidor)"는 혁명 때 제정된 "프랑스 혁명력(후에 나폴레옹에 의해 폐지)" 중 11번째 달을 의미한다. 이 사건으로 인해 "프랑스 혁명"은 실질적으로 끝나게 되고, "시민 혁명"은 종말을 고했다.

"자코뱅파"가 1793~1794년 사이에 "프랑스" 내외의 전란을 수습한 후, 국민은 공포 정치에 싫증을 느끼게 되었다. 1794년 봄, "에베르 파ㆍ당통 파"가 숙청을 당하면서, "자코뱅파"의 일부는 "국민 공회"의 중도파와 긴밀하게 협력하여, "로베스피에르"를 타도하려고 했다. 또한, 공포 정치의 선봉으로 파리보다 더 심한 탄압을 했던 지방 파견 의원(조제프 푸셰ㆍ장 랑베르 탈리앵 등)들은 "로베스피에르"의 추궁을 두려워하여, 선제공격을 계획하고 있었다. 한편, 공포 정치의 중심이었던 "공안위원회"도 "로베스피에르 파(로베스피에르ㆍ생 쥐스트ㆍ쿠통)"과 전란 수습으로 세력을 확장한 "온건파(라자르 카르노 등)"로 분열되었다.

1794.07.26일, "로베스피에르"가 공회에 나타나, "반 혁명파를 숙청하겠다."고 말하자, "비요 바렌ㆍ 장 랑베르 탈리앵" 등의 의원들은 "반 혁명파가 누구냐? 이름을 밝혀라!"라고 저항했다. 07.27일, "반 로베스피에르 파(대부분 지롱드 파)"는 행동을 개시하여, "로베스피에르"를 체포해 처형하기로 했다. "로베스피에르"와 정치적 동료였던 이들 조차도 그를 배신했고, 이 배신자들마저 "반 로베스피에르 파"에 의해 숙청된다. 그날 밤, "프랑수아 루이 부르동ㆍ폴 바라스"가 시청에서 농성 중이던 "로베스피에르 파"를 습격해, "로베스피에르"의 오른팔 "루이 앙투안 드 생쥐스트"의 친구 "필립 르바"는 자살했고, 동생 "오귀스탱 로베스피에르"는 창문에서 뛰어내려 도망치려 했으며, "로베스피에르"의 동료 "조르주 쿠통"은 떠밀려 계단에서 곤두박질 쳤고, "로베스피에르"도 턱에 총을 맞았다.

"공포정치"로 국가를 안정시키고자 했으나, 오히려 국가를 혼란에 빠트린 "로베스피에르"는 07.28일 "푸키에 탱빌"에게 고발당해, 자신이 혁명 정신과 국가 안보를 운운하며 많은 사람을 죽였던 도구인 "단두대"에 올라가, "생쥐스트ㆍ쿠통ㆍ오귀스탱" 및 18명의 동료들과 함께 처형당했다. "로베스피에르"의 죽음으로, 혁명 주도권은 "부르주아 계층ㆍ지롱드파의 온건파"들이 쥐게 되었고, "총재 정부ㆍ통령 정부ㆍ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등장까지 "테르미도르의 반동"을 기점으로 새로운 국면이 나타났다.

7. 자코뱅파 (Jacobinsㆍ자유와 평등의 벗 자코뱅 결사단ㆍ1789~1794.11)

강경 혁명세력인 "자코뱅파" :  로베스피에르ㆍ마라ㆍ당통 중심

• 로베스피에르 (1758~1794ㆍ36세): 강경파ㆍ법률가ㆍ조제프 푸셰에게 축출되어 결국 단두대의 희생양           • 장폴 마라 (1743~1793ㆍ50세): 강경파ㆍ저널리스트ㆍ내과 의사ㆍ철학자ㆍ샤를로트 코르데에게 암살            당통 (1759~179435): 온건파변호사뇌물을 받고 반혁명 세력을 도와 준 혐의로 단두대 처형

"로베스피에르ㆍ마라ㆍ당통"을 중심으로 한 강경 혁명 세력인 "자코뱅파"는 위기 극복의 하나로 "혁명재판소의 강화ㆍ통제경제 시행"과 함께 1793년 가을부터 다음 해에 걸쳐, "왕당파ㆍ지롱드파" 명사 등 10,000명 정도를 단두대로 처형하였다. 특히 혁명파의 핵심 인물인 "로베스피에르ㆍ마라ㆍ당통" 중에 민중과 더 밀접하게 접촉하던 "마라"의 암살을 계기로 다시 대내외적으로 위기의식이 고조되면서 공포정치는 더욱 확대되었다.

"마라"는 의학도였으나, 절대왕정을 비판하는 저술을 하다가,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인민의 벗"이라는 신문을 창간하여 혁명을 인민의 입장에서 감시하면서 민중의 정치 참여를 고취했다. 1792년 민중봉기 시기에는 "파리코뮌"을 지도하면서 "지롱드파"에 대항했다. 일체의 특권 계급을 일소하고 농민과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민중 중심의 정치체제 수립을 주장했다. 그는 "로베스피에르"와 함께 공포정치를 주도했는데, 신문을 통해 반혁명 분자에 대한 무자비한 처형을 옹호했고, 그가 지목하는 사람들은 형장에서 목이 잘려나갔다. 하지만 1793년, "자코뱅파"의 공포정치에 반발하는 "지롱드파" 여성 "샤를로트 코르데"에게 암살당해, 프랑스 전체가 들썩이게 된다.

"장폴 마라"의 죽음 : 지롱드파 "샤를로트 코르데 (1768~179325세 여성)"가 암살

"코르데"는 고향 마을에서 자행된 살육 현장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마라"를 없애는 것이 학살을 끝내고, 프랑스를 살리는 길이라 확신하고 파리로 향한다. 파리에 도착하자, 가게에서 15cm 가량의 날이 선 요리용 칼을 사고, 호텔방에서 "프랑스인의 피로 살찌는 야만스러운 짐승을 죽여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 연설문을 작성했다. 드레스 안에 세례 증명서와 연설문을 넣어 현장에서 죽게 되더라도, 자신의 신분과 취지가 알려지도록 했다. 당시 "마라"는 심한 피부병 때문에 "유황"을 넣은 욕조 안에 들어가, 옆에 나무 상자를 두고 집필을 하거나 업무를 보는 시간이 많았다.

"코르데"는 "마라"의 집을 찾아가 중대한 정보가 있다면서 면회를 요청했다. 욕조에 있던 "마라"는 "코르데"가 들여보내 달라고 식구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소리를 듣고 방으로 들어오게 했다. 그녀는 시위를 벌인 "지롱드" 당원들의 이름을 댔고, "마라가" 받아 적는 순간 품에서 칼을 꺼내 가슴 깊이 꽂았다가 빼내고는 바닥에 던져버렸다. 칼은 폐를 관통했고 "마라"는 즉사했다. 

그녀는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재판에서 "마라"를 죽여 무엇을 얻으려 했느냐는 질문에 "평화, 그것뿐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은 25세 가냘픈 시골 처녀에게 살해당한 마라의 최후를 그렸다. "다비드"의 의도대로 이 그림은 "혁명의 피에타"라고 불릴 정도로 프랑스혁명 상징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얼마 후 "로베스피에르의 실각ㆍ다비드의 체포"와 함께 그림은 "국민의회 회의장"에서 제거되었다. 그림과 함께 혁명의 상징으로 보관 중이던 "마라의 심장"도 화장되어, "몽마르트르의 하수도"에 그 재가 뿌려졌다고 한다.

"당통"의 죽음 : "로베스피에르"에 의해 처형

"마라"와 함께, "프랑스혁명"을 상징하는 죽음이 "당통의 죽음"이다. "마라"가 강경파라는 이유로 죽음을 맞이했다면, "당통"은 혁명파 내에서 온건하다는 이유로 혁명 동지였던 "로베스피에르"에 의해 처형된다. "자코뱅당"의 우익을 형성하여, 좌파와 대립한 그는 혁명적 독재와 공포정치의 완화를 요구하고 경제 통제에도 반대했다. "로베스피에르"가 공포정치를 통한 혁명의 지속을 요구했다면, "당통"은 질서 회복을 통한 국민 궁핍의 해결을 요구했다. 물론 "당통"의 호화롭고 향락에 빠진 생활도 대중적 분노의 대상이 되기는 했지만, 본질적으로는 혁명의 진행 방향에 대한 대립이 만들어낸 죽음이다.

"샤를로트 코르데 (1768~179325세 여성)"의 영웅화

"프랑스 대혁명" 당시는 물론이고, 이후에도 "자코뱅파"의 혁명노선에 부정적 시각이던 사람들은 "코르데"를 영웅화하는 작업을 한다. "마라"를 "인간이 아니라 프랑스인을 모조리 잡아먹으려 하는 야수 같은 사내"로 규정한 "코르데"의 판단과 행동을 정의로운 그 무엇으로 규정한다. 

그녀가 어려서부터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고, 파리에서 탈출한 "지롱드파" 의원이 참여하는 "살롱"에 출입하면서 애국지사로서의 풍모를 키웠음을 강조한다. 19C 프랑스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정치가인 "라마르틴"은 "코르데"를 "암살의 천사"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남자와의 아무런 공모 없이 혁명의 그릇된 지도자를 살해한 "코르데"는 또 다른 혁명, "여성해방혁명의 선구자"로도 볼 수 있다고 규정한다.

현장에서 체포되어, 혁명 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그날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기까지 그녀가 보여준 의연한 모습을 부각한다. 처형 당일, 사형집행인이 팔을 뒤로 묶으려 하자, 그녀는 "마라를 죽인 후, 매우 난폭하게 묶여 손에 상처가 생겼어요. 그렇게 되지 않게 장갑을 껴도 될까요?"라고 물었는데, 집행인이 "괜찮아, 난 전혀 아프지 않게 묶을 수 있어."라고 대답하자, 미소를 지으며 얌전히 포승줄을 받았다고 한다.

처형장으로 향하는 호송 차량에 함께 탄 사형집행인은 회고록에 "그녀를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더욱 강하게 매료되었다. 분명 그녀는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어떻게 저렇게 사랑스럽게 의연할 수 있는지 믿을 수 없었다."라고 적었다.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자, 사형집행인 중 1명이 그녀의 목을 들고 뺨을 때렸는데, 구경꾼이 이 행위에 분개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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