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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건ㆍ전쟁ㆍ혁명ㆍ학살

혁명- 1789.07.14~27 : 프랑스 대혁명 ② 바스티유 감옥 습격

by 당대 제일 2023.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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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티유(Bastilleㆍ파리 소재ㆍ1370~1383년에 성채 증축) 감옥 습격사건"은 "프랑스 혁명"의 시발점이 된 사건으로, 1789.07.14.일에 파리 시민들이 감옥을 습격ㆍ탈취한 사건이다. (습격 당시 감옥에는 7명의 죄 지은 자들만이 있을 뿐이었고, 양심수는 없었다) 당시 "파리" 근교에는 "루이 16세"의 명령으로 국경지대에서 진주한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07.14일, 10,000여 명의 파리 시민들은 감옥을 습격했다. 감옥은 "파리"의 요새로 무기ㆍ탄약을 저장하고 있었고, 수비군은 15문의 대포를 발포하여 시민 약 100여명이 희생되었다. 그러나 무장한 국민군의 증원과 시민들의 끈질긴 공격으로 결국 함락되었고, "혁명정부"는 압제의 상징인 감옥을 철거했고, 공원이 조성되었다.

 

1. 혁명의 전개

삼부회→ 국민 의회→ 국민 공회→ 총체정부 (나폴레옹)→ 통령정부

 삼부회 소집

"루이 16세"는 시민들의 불만을 잠재우려, 재정 개혁을 단행하려 하였다. 재무 장관이었던 "샤를 알렉상드르 드 칼론"은 "명사회"를 소집해, 특권 계층에게도 세금을 부과하는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자신들의 기득권을 침해받을 것을 우려한 로마 가톨릭교회 성직자들과 귀족들은 개혁안을 거부하고, "삼부회"를 소집할 것을 요구하였다.

1789년의 "삼부회"가 열리던 당시의 상황은 심각하였다. 1788년의 흉작과 혹독한 겨울로 인한 고통이 전국토를 휘감았다. 정부는 나약했으며, 멸시받고 있었다. 관리들은 불복종이 표출되는 것을 진압하기를 두려워하거나, 망설이고 있었다. 대의원들에게 주어진 서면 지시사항은 정치적ㆍ사회적ㆍ경제적 관심들을 총망라한 것이었으며, 아주 많은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이러한 소란 가운데, 왕과 그의 신하들은 여전히 수동적인 자세였다. 그들은 "삼부회"가 개별적으로 열려야 할지, 아니면 함께 종합적으로 고민해야 할지 하는 문제도 결정하지 못했다.

1789.05.05일, "루이 16세"는 "베르사유 궁전"의 "살 데 메뉘 플레지르(Salle des Menus Plaisirs)"에서 "삼부회"를 소집하였고, 귀족 188명, 성직자 247명, 평민 500명이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재무총감 "네케르"는 재정의 조건을 전제로 몇 가지 작은 개혁안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표결방식을 둘러싸고 귀족, 성직자 대표와 평민 대표 간에 갈등이 생겼다. 국새상서(國璽尙書)인 "샤를 루이 프랑소와 드 폴 드 바렝탕"은 그들이 신분별로 또는 인원수대로 투표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고 알려왔다.

"제삼부회(Tiers État)"는 회의를 개별적으로 할지 모여서 할지도 결정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실망하였다. 귀족들 중 일부와 하위직 성직자들의 다수는 실질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제삼부회"에 동의하였다고 알려졌다. "합동 회의"를 개최한다면, 다수를 차지하는 "평민 계급"은 개혁, 특권의 폐지와 부동산에 대한 중세적 권리의 폐지를 통과시킬 것이었다.  "분리 회의"를 하는 경우, 귀족의 대부분과 상급 성직자는 개혁을 제한하려고 할 것이었다. 따라서 "삼부회"를 "합동"으로 개최하자는 것이 "제삼부회"의 첫 번째 의제로 부각하였다. 귀족ㆍ성직자 대표는 "신분별 표결 방식"을, 평민 대표는 "머리수 표결 방식"을 지지함으로써, 자신들이 속한 계급에 유리한 방향으로 회의를 이끌려고 한 것이다.

1789.07.14 : 바스티유 감옥 습격

"왕당파"가 "제헌국민의회"의 "무력 탄압"을 기도하여, 지방으로부터 군대를 결집하고 있다는 것이 전해지자, 1789.07.12일부터 군대와의 사이에 충돌을 반복하였다. 07.14일 아침, 파리 민중들은 혁명에 필요한 무기를 탈취하기 위하여,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였다. 민중들은 "도개교(跳開橋)"를 내리고 감옥으로 쇄도하여, 감옥을 점령하였다.

이 습격의 성공은 바야흐로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들이 프랑스 대혁명에 가담한 이유는 기득권층들에 대한 감정적인 불만이나 부르주아의 선동 때문이 아니라, "자연으로 돌아가자"면서 "평등사회"를 추구한 "장 자크 루소"의 영향으로 불평등한 사회체제에 저항하는 사회개혁의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럽에서는 시민혁명의 영향으로 민중이 지배계급에 저항하는 권리인 "저항권"을 헌법으로 존중한다. 덕분에 혁명의 불길은 지방까지 확산되었다. 08.04일에 "제헌국민의회"는 봉건적 특권이 폐지되었음을 선언하고, 1789.08.26일에는 "프랑스 인권 선언"을 채택하였다.

 베르사유 행진

그러나 국왕 "루이 16세"는 "제헌국민의회"의 선언을 인정하지 않았다. 정치적인 혼란과 전년 흉작의 영향으로 파리의 물가가 상승하기 시작하자, 1789.10.05일 파리의 수많은 여성들이 무기를 들고, 빗속에서 파리시청 앞 광장에 모여 "베르사유 궁전"에 난입하여, 국왕과 의회에 음식을 요구하는 "생존권" 투쟁을 하였다. 이들의 압력으로 "루이 16세"는 압력을 받아, "프랑스 인권 선언"을 인정하고, 그녀들에게 이끌려 "파리 튈르리 궁전"에 가족과 함께 이주 당한다.

이후, "루이 16세" 일가는 파리 시민의 감시 속에서 살게 된다. 이 시기의 혁명은 온건한 "미라보","라파예트"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는 "온건파 혁명주의자"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다. 시민군은 자유주의 귀족 "라파예트"를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1790년 그의 제안에 따라 "삼색기(현재 프랑스 국기)"가 혁명의 깃발이 되었다.

 입법 의회

1791.09월에는 "제한 선거"와 "입헌 군주제"를 골자로 한 새로운 헌법(1791년 헌법)이 제정되었다. 이 헌법은 군주제 하에서 평민도 일정 이상의 세금을 납부하면, 선거권을 인정하는 내용이 있었다. 10월이 되어 첫 번째 선거가 실시되고, 새 의회인 "입법의회"가 구성되었다. "입법의회"에는 "입헌군주제"를 지키려는 온건파인 "푀양파"와 국왕 없이 "공화제"를 주장하는 "지롱드파"와 "자코뱅파"가 힘을 가졌다. "지롱드파"는 부유한 상공업자를 비롯한 상층, 중층 시민(부르주아)을 지지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바렌느 사건

혁명 발발로 귀족과 성직자 등 "특권 계급"의 대부분이 국외로 망명하기 시작하였다. 1791년 국왕과 민중의 중개자인 "미라보"가 죽자, 과격한 혁명을 거부한 "루이 16세"는 "마리 앙투아네트"와 친분 관계에 있는 스웨덴 귀족 "페르센"의 도움을 받아, 왕비의 친정인 "오스트리아"로 피신할 계획을 세웠다. 

1791.06.20일, 파리를 탈출한 "루이 16세"일가는 국경 앞의 "바렌느"에서 민중들에게 발각되어, 06. 25일 파리로 되돌아왔다. 이 사건은 프랑스 국민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동시에 "루이 16세"의 "반혁명 의도"가 폭로되었다. 혁명의 파급을 두려워하는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08.27일 "필니츠 선언"을 발표하여, "루이 16세"의 지위를 보장하지 않으면, 전쟁을 하겠다고 위협했기 때문에 "루이 16세"는 국왕에 머물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비교적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던 "국왕 옹호파"는 민중의 지지를 상실하였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저항

프랑스 혁명의 타깃은 "봉건 왕조"를 겨냥하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는 "가톨릭교회"를 겨냥하고 있었다. 시민들은 곳곳에서 "앙시앵 레짐"을 상징하는 가톨릭교회를 습격하고 성상을 파괴했다. 이 때문에 로마 가톨릭교회는 프랑스 혁명에 극렬 저항했다. 가톨릭교회는 교종을 통해 프랑스 혁명을 분쇄시키기 위해, 가톨릭 군주들의 군대 파병을 요청하고, 가톨릭 신자들을 내세워 반혁명 선동을 일삼았다. 프랑스 혁명으로 경제 상황이 악화되자, 가톨릭교회는 시민들을 선동해 반란을 일으켰다. 대표적인 로마 가톨릭교회의 반란이 "방데 반란"이다. "방데 반란"은 수많은 희생자를 낳고 진압되었다.

2. 프랑스 혁명 전쟁

프랑스 혁명의 사상이 전파될까 두려워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지배계급들은 자국의 "혁명 지지파"를 박해하였다. 프랑스는 "필니츠 선언"과 왕당파ㆍ망명 귀족(에미그레: 이민이라는 의미)의 선동 활동은 혁명 정부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라고 받아들였다. "오스트리아ㆍ프로이센" 양국은 1792.02월 "대(對)프랑스동맹"을 체결하였고, "지롱드파" 내각은 혁명을 계속하기 위해 대외 전쟁을 단행한다.

프랑스 혁명정부는 1792.04.20일 오스트리아에, 07.08일에는 프로이센에게 선전포고를 했고, "프랑스 혁명 전쟁"이 발발했다. 그러나 프랑스군 장교들은 보수적인 귀족 계급이기 때문에, 혁명 정부에 대한 협력에는 소극적이었고, 혁명군은 각지에서 전투에서 패배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모국과 동맹국에게 프랑스 왕실을 위협하는 혁명군의 움직임을 서신으로 전했다.

3. 08.10일 사건

"프로이센"군이 국경을 넘어 프랑스 영토로 침입하자, 정부는 조국의 위기를 전국에 호소하고, 이에 따라 프랑스 각지에서 조직된 "의용병"들이 파리에 집결했다. 이때 "마르세이유의 의용병"이 노래한 "라 마르세예즈"는 이후에 "프랑스 국가(國歌)"가 되었다. 파리 시민과 의용병은 프랑스군이 패배한 원인을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적과 내통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08.10일에 "튈르리 궁전"을 공격하여 왕권을 중지시키고, 내부의 적인 국왕 일가를 모두 "떵플 탑"에 유폐했다. 당시 "튈르리 궁전"에는 "스위스 용병대"가 국왕 일가의 신변 경호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루이 16세"가 민중에게 발포를 금지했기에, 대부분이 민중에게 학살되었다. "스위스 용병대" 이외에도 일부 귀족이나 군인이 국왕 일가의 신변을 지키기 위해 분전했는데, 그 중에는 "앙리 드 라 로슈자클랭","프랑스와 드 샤레트","루이 드 레스큐르","장 니콜라 스토프레"등 이후에 "방데 반란"에서 지도적 역할을 한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4. 9월 학살

08.26일에 "롱위"가 "프로이센군"에 의해 공략되고, 파리 침공에 대한 위기감이 한층 높아졌다. 의용병을 모집했지만, 한편으로는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반혁명주의자들이 의용군의 출병 후, 파리에 남은 가족을 학살할 것"이라는 풍문이 떠돌고 있었다. 09.02일 아침, "혁명전쟁"에서 "오스트리아군"이 "베르덩 요새"를 함락시키고, 그 패전 소식이 파리에 충격을 가져왔다. "당통"은 의회 연설을 통해 시민을 선동하였다. 그리하여 "반혁명파"의 사냥이 시작되어, 프랑스 전역의 반혁명 용의자를 체포하고, 특별형사재판소를 설치하였지만, 약식 재판만으로 09.02일부터 "반혁명파 사냥"을 시작하여 며칠 동안 학살이 이뤄졌다.

5. 발미 전투

프랑스군은 09.20일 "발미 전투"를 계기로 반격에 성공하여, 적군을 국경 밖까지 밀어냈다. 이 과정에서 의용병에 참가한 많은 "하층민 계급(상퀼로트, 무산자 계급)"의 정치적 발언권이 급속하게 증가했다. "상퀼로트"는 급진적인 정책을 제시한 "자코뱅파"를 옹호했고, 혁명은 "극좌화"되어 갔다.

"자코뱅파"에는 "로베스피에르ㆍ마라ㆍ당통"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이때의 혁명전쟁의 시작과 함께 발행한 "아시냐 지폐"(교회의 토지 등을 담보로 한 불환지폐)의 증발(액면가의 57%로 급락)은 나중에 1794년 "최고가격령 폐지"와 함께 발생한 급격한 인플레이션의 원인이 되었다. 한편, "흑인 노예"를 이용한 "플랜테이션 농업"으로 전 유럽 수요의 절반 이상을 공급한 설탕이나 커피의 재배로 프랑스에 막대한 이익을 가져오고 있던 "카리브 해"의 식민지 "생 도맹그(Saint-Domingue)"에서는 "인권 선언"에 의해서 "물라토(백인과 흑인의 혼혈)"에게 자유인으로 선거권이 인정되는 지를 둘러싸고 현지의 백인 "크리올"과 "물라토" 사이에 항쟁이 발생하고 있었다.

1791.08.22일에 "부두교"의 고위성직자 "듀티 브쿠만"이 흑인 노예를 이끌고 해방을 요구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생 도맹그"는 영국, 스페인의 개입을 불러 대혼란에 빠졌다. "생 도맹그"가 혼란스런 정세에 빠져있는 동안, 프랑스 입법의회는 1792.04.04일에 유색인 자유인의 평등을 결의하여, "물라토"를 아군으로 끌어들이려고 했지만, 식민지의 대다수를 차지한 흑인 노예의 불만은 수습되지 않았다.

6. 단두대 처형 : 루이 16세 (1793.01.21)마리 앙투아네트 (1793.10.16)공화국 성립

한편 "혁명전쟁"은 민족주의를 자극시켜, 지방에서 "의용군"이 조직되어 파리로 모이게 하였고, 프랑스군은 마침내 09.20일에 "프로이센군"에게 승리를 거두었고, 같은 날 입법의회가 해산되었다. 그리고 재산이나 소득 금액에 상관없이 모든 남자에게 선거권이 주어지는 "보통 선거"가 제도화되고, 선거를 통해 새로운 의회인 "국민공회"가 소집되었다. 1792.09.21일 "국민공회"는 "공화정"을 선포하여, "프랑스 제1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에 따라 1791년 헌법은 불과 1년 만에 폐지됐다. 공화국 정부는 "루이 16세"를 "혁명 재판"에 회부했다. 

국왕"루이 16세"가 전쟁 때, 프랑스 정부와 국민을 배신했다는 증거가 많이 제출되어, 1793.01.14일 "국민 공회"는 찬성 387, 반대 334로 "루이 16세"의 사형을 의결했다. 그러나 찬성 중 26표는 "집행유예를 검토해야 한다"는 조건부였다.  26표를 반대표로 의결하면, "찬성 361 : 반대 360"로 찬반 동수가 되기 때문에, 18일 집행유예에 대한 투표가 진행됐다. "찬성 380 : 반대 310"로 "집행유예 없음"으로 의결되었기 때문에, 사형이 확정됐다. 1793.01.21일, 2만 명의 시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루이 16세"는 파리의 "혁명광장(현재 콩코드 광장)"에서 단두대에 처형되었다. 10월 "마리 앙투아네트"도 뒤로 손이 묶여, 퇴비수레에 태워져 시내를 돈 이후, 처형되었다. 국왕에게 사형 투표한 의원들은 "국왕 살인"으로 이후 보복을 받게 된다. 그들은 이후의 "왕정복고"에서 권좌에 복귀한 "왕당파"로부터 원수로 "백색 테러"의 표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7. 공포 정치 (로베스피에르)

1793.01월 "루이 16세"의 처형은 유럽 각국에 충격을 주었고, 영국ㆍ스페인ㆍ사르데냐 왕국도 반혁명에 서게 됐으며, 또한 프랑스의 "벨기에 합병"은 영국의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다. 그 이유는 "벨기에의 셸데 강" 하구의 점령은 영국과 유럽의 무역에 대한 위협요소이기 때문이었다. 영국을 중심으로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어, 각국의 군대가 프랑스 국경을 넘었다. 혁명 정부는 "30만 명 모병"을 선포하고, 이것에 대한 반발로 "왕당파"가 부추긴 1793.03월 "방데 반란"이 일어나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프랑스 혁명군들 중에서도 탈영자가 늘어만 갔다. 프랑스는 "벨기에"에서 "오스트리아"와 벌인 전투도 패했다.

이러한 위기 외에도 "지롱드파"가 하층민의 식량 위기에 대해 아무런 정책을 취하지 않을 것을 선언하면서 하층민의 분노가 폭발한다. 06.02일, 하층민이 지지하는 "자코뱅파"가 "국민 공회"에서 "지롱드파"를 추방하고, "로베스피에르"가 권력을 장악했다. 07.13일 "자코뱅"의 지도자이자, 저널리스트인 "장 폴 마라"가 "샤를로트 코르데"에게 암살을 당하는 등 테러리즘도 연발하여, 프랑스 정세는 매우 불안정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자코뱅파"는 "독재 정치"를 시작한다. "공안위원회ㆍ보안위원회ㆍ혁명재판소" 등의 기관을 통해 "공포 정치"를 했고, 반대파를 차례로 단두대로 보냈다. 로베스피에르는 당통ㆍ에베르ㆍ라부아지에ㆍ카미유 데뮬랭ㆍ뤼실 두플레시 등 "에베르 파"와 "당통파"를 숙청했고, 농민에 대한 토지의 무상 분배 등 자기가 이상으로 하는 독립 소생산자에 의한 "공화제의 수립"을 목표로 했다. 법에 의한 보호와 신체의 자유, 소유의 권리를 담은 "인권 선언"은 휴지조각에 불과했다.

"자코뱅파"는 08.23일에 "국가총동원"을 선포하고, "징병제"를 실시하여 군비를 정돈하고, 외국의 간섭 전쟁에 반격에 성공했다. 이처럼 프랑스 본토에서는 "공포 정치"가 진행되었지만, 한편 "생 드망"에서는 1793.08.29일 프랑스 본토에서 파견된 "국민공회" 의원 "레제 프리시테 손토나"가 "노예제도의 폐지"를 독단으로 선언하고, 이 선언을 추인했다. "로베스피에르"와 "자코뱅파"는 1794.02.04일, 국민 공회에서 "푸뤼비오즈 16일 법"을 통과, 서구 세계 최초의 식민지를 포함한 전반적인 "노예제 폐지"를 결의했다. 

이렇게 루이지애나ㆍ기아나ㆍ산토 도밍고(현재 아이티)ㆍ마르티니크ㆍ과들루프 등 대륙의 광대한 지역에서 "흑인법"아래 농장 농업에 묶여 있던 흑인노예는 해방되어, 자유인이 되었다. 이것은 영국에 저항하고 있었던 "산토 도밍고"의 흑인 실력자 "투생 루베르튀르"의 프랑스 복귀를 이끌어내는 등 "자코뱅파"를 통해 자유와 평등이 실천되었다고 할 수 있다.

※ 로베스피에르 (Robespierreㆍ1758~1794ㆍ향년 36세)

프랑스 부르봉 왕조ㆍ대 혁명기의 정치인ㆍ혁명가ㆍ철학자ㆍ법률가ㆍ작가"프랑스 혁명"을 주도한 혁명 정치가ㆍ1793 "공안위원회(公安)"를 장악하고, 자코뱅 당(소시민층소생산자 층 기반"공포 정치"를 행하다가, 도리어 1794년 "테르미도르의 쿠데타"로 반대파인 "조제프 푸셰"에게 축출되어, 결국 자신도 1794 "단두대" 희생양이 된다. 사실상 "독재자"로서 "프랑스"를 지배했고, "숙청"을 통한 공포 정치로 많은 반대파를 단두대에 보냈기 때문에, "루소의 피로 물든 손"이라고 칭했다

8. 테르미도르의 쿠데타 (반동)

결과적으로 "로베스피에르"는 국내외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의견을 완고하게 관철시키려 하여 많은 사람들을 "단두대"에서 처형하는 "공포정치"를 실시하였다. 로베스피에르는 혁신 정책은 민중의 지지를 얻었으나, 상공업자들과 토지를 얻은 농민들은 혁명이 더 이상 진행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포정치가 계속되자, 반대파는 1794.07.27일(혁명력 2년) 측근인 "생 쥐스트"와 함께 참석한 로베스피에르는 국민공회에서 의장 조제프 푸셰ㆍ데르브와와 랑베르 탈리앵ㆍ비요 바렌 등에게 탄핵을 당한다. (테르미도르의 반동) 장내에서 "탈리앵" 등이 "폭군을 타도하자!"라는 연설을 하였으며, "로베스피에르 파"의 체포를 요구하여, 오후 3시 로베스피에르ㆍ쿠통ㆍ생 쥐스트 등의 체포 결의가 통과했다. 다음 날인 07.28일, 로베스피에르 등 22명은 자신들이 애용한 "단두대"에서 처형을 당한다.

9. 총재 정부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된 후인 1795년에 "국민공회"는 1795년 헌법을 제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총재정부"를 수립하였다. 이는 5명의 "총재"가 "행정권"을, "원로원과 500인회"에서 "입법권"을 갖는 체제로 운영되었다. 하지만 "총재 정부"는 출범하자마자, 반대파들이 일으킨 반란을 직면하게 되었다.

1795.10.05일 반대파가 일으킨 "방데미에르 13일 반란"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장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반대파의 반란을 진압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이후 "이집트 원정"과 "이탈리아 원정"을 통해 국민들의 지지를 얻었다. 반면, "총재정부"는 당시의 경제, 사회적 불안에 대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며, 민심을 잃었다.

10. 통령 정부 (집정 정부)

마침내 나폴레옹은 1799년 "브뤼메르 18일"에 쿠데타를 일으켜, "총재정부"를 전복시키고, "통령정부"를 수립하여, 제1대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다. "안개달 쿠데타"로 집권한 나폴레옹은 "통령정부(또는 집정정부)"를 수립하여, "독재 권력"을 장악했다. 프랑스 혁명으로 태어난 "프랑스 제1공화국"은 나폴레옹에 의해 시작된 프랑스 최초의 "제정"으로 10여년의 단명으로 막을 내렸다. 또한 나폴레옹이 실각한 후, 혁명으로 붕괴된 "부르봉 왕조"가 부활했다.(부르봉 왕정복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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