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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건ㆍ전쟁ㆍ혁명ㆍ학살

혁명- 1789.07.14~27 : 프랑스 대혁명 ① 삼부회ㆍ나폴레옹 등장

by 당대 제일 2023.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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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 (Révolution françaiseㆍ1789.07.14~07.27ㆍ1830.07월 혁명ㆍ1848.02월 혁명)" "1789년 혁명ㆍ1830.07월 혁명ㆍ1848.02월 혁명"을 함께 일컫는 말이지만, 대개는 "1789년 혁명"만을 가리키며, "자유주의 혁명"이다. 이때 "1789년 혁명"을 다른 두 혁명과 비교하여, "프랑스 대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 프랑스 혁명 (Révolution françaiseㆍ1789.07.14~27ㆍ1830.07ㆍ1848.02)

삼부회→ 국민 의회→ 국민 공회→ 총체정부 (나폴레옹)→ 통령정부

1789년 혁명 초기부터 혁명의 슬로건은 "자유ㆍ평등ㆍ박애"였고, 이러한 혁명 과정에서 발간된 여러 기록물에서는 세부적인 권리와 당면 문제들이 나타나고 있다. 일부에서는 "자유ㆍ평등ㆍ권리"로 표현된 경우도 있고, 1789.08.26일에 발표한 "프랑스 인권선언"에는 혁명 슬로건에 부수되는 당면 문제들이 거론되어 있다. "프랑스 혁명"은 "앙시앵 레짐(모순된 구제도)"를 무너뜨렸지만, 혁명 후 수립된 "프랑스 공화정"이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가 일으킨 쿠데타로 무너진 후, 75년간 "공화정→ 제국→ 군주제"로 국가 체제가 바뀌며, 굴곡진 정치 상황이 지속되었으나, 역사상으로 민주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프랑스 혁명은 크게 보면 유럽과 세계사에서 정치권력이 왕족과 귀족에서 자본가계급으로 옮겨지는 역사 분야에서 전혀 새로운 시기를 열어 놓을 만큼 뚜렷이 구분되는 전환점이었다. "절대 왕정"이 지배하던 프랑스의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하에서, 자본가 계급이 부상하고(18C에 모든 선진국에서 나타난 특징적인 현상), "미국의 독립전쟁"으로 자유의식이 고취된 가운데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던 평민의 불만을 가중시켜, 마침내 흉작이 일어난 1789년에 봉기하게 되었다. "도시민과 농민의 개입"으로 폭력양상을 띤 이 혁명은 2년간에 걸쳐, 전 체제를 전복시켰다. 이 혁명은 혁명의 소문을 들은 피지배 민족의 자유ㆍ독립 쟁취 의식을 고취하여, 여러 민족을 거느린 주변 여러 강대국을 불안하게 하였다.

2. 혁명의 의의ㆍ영향

프랑스 혁명은 일시적인 충격을 넘어, 결코 소멸될 수 없는 확고한 성과를 남겼다. 여러 "혁명문서"가 그것을 선언적으로 제시했다. 1789.08.26일 "인권선언"ㆍ1791년 헌법ㆍ1793년 헌법ㆍ1795년 헌법이 바로 그것이다.

1791년의 헌법이 "입헌군주제"를, 1793년 헌법ㆍ1795년 헌법이 "공화주의"를 선언했는가 하면, "보통선거제"를 규정한 1793년 헌법ㆍ1791년 헌법ㆍ1795년 헌법은 진일보한 민주주의의 가치를 드러냈다. "인권선언"과 세 헌법은 "자유ㆍ평등ㆍ박애"라는 자연권의 보편적 적용을 통해, 새로운 사회 및 세계가 나아가야 할 실질적이고, 위대한 원리를 천명했다.

3. 혁명 정신

1789년 혁명 초기부터 혁명의 슬로건은 "자유ㆍ평등ㆍ박애"였고, 이러한 혁명 과정에서 발간된 여러 기록물에서는 세부적인 권리와 당면 문제들이 나타나고 있다. 일부에서는 "자유ㆍ평등ㆍ권리"로 표현된 경우도 있고, 1789.08.26일에 발표한 "프랑스 인권선언"에는 혁명 슬로건에 부수되는 당면 문제들이 거론되어 있다. 

선언문 제2항에서 "자유와 소유권, 안전 그리고 억압에 대한 저항"이라고 밝혀, 자유와 소유권, 안전(생존권), 저항권을 천명하였다. 널리 확산된 혁명정신의 여파로, 다양한 계층에서 분출된 수많은 요구들이 혼란의 와중에서 수시로 반영되었고, 1793년에 제정한 "프랑스 헌법"에는 "자유ㆍ평등ㆍ안전ㆍ소유권"을 말하였고(특히 제8조는 안전과 인격, 권리 그리고 재산이 거론되었다),

1799.12.15일 "통령 정부 선언문"에서는 "소유권, 평등 그리고 자유라는 거룩한 권리"로서 나타나고 있다. 그밖에 1794년 "방토즈 법령 시행규칙"에 대한 "생 쥐스트"의 기록이나, 1795년 "총재정부 헌법"에서도 혁명의 목표들은 다양하게 나타나있다. "혁명 정신"과 관련하여 "박애"를 올바르게 명시한 기록은 1793년 "파리시 집정관 회의"이며, 다음과 같은 표어를 모든 집에 내걸도록 하자고 결의하였다. < 1793년 파리 집정관 회의 >

"공화국을 위해 흩어지지 말고 단결하라. 자유와 평등, 박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한편,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념 속에는 르네상스 이래, 인본주의의 영향으로 "인간존중ㆍ인간존엄"이라는 "천부인권사상"이 전제되어 있고, 이는 곧 "인도주의ㆍ박애주의"와 연결되어, 이미 혁명정신인 "우애ㆍ박애정신"을 당연히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1875년 "공화국 헌법(제3공화국 헌법)"이 채택되면서, 프랑스 공화국의 공식 이념으로서 "자유와 평등, 박애"가 확고히 자리 잡았다.

4.  진 행

• 1789 : 프랑스ㆍ대혁명  1791 : 입헌 군주제지롱드 당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참전전세 불리 폭동 → 왕정 폐지ㆍ국민 투표로 "제1공화정“

• 1793 : 루이 16세(부르봉 왕조) "단두대"에서 처형ㆍ자코뱅 당의 "로베스 피에르" 실권 → 공포ㆍ독재 정치(15,000명 처형)  1794.07 : 테르미도르의 반동폭동 총재정부(5)

• 1795.10 : 영국의 지원으로 해외 망명 "왕당파"가 "방데미에르 폭동 → 진압(나폴레옹) → 나폴레옹 사령관(이탈리아 평정ㆍ오스트리아 빈 공격ㆍ이탈리아 북부와 벨기에 병합) → 나폴레옹 인기 상승 → "총재 정부"의 "나폴레옹" 견제ㆍ"이집트"로 파병 명령 → "총재 정부"의 무능ㆍ부패ㆍ혼란

• 1799.11 : "나폴레옹"의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 → "통령 정부(3인)" 수립ㆍ제1통령에 취임(10년)  1802.08 : "나폴레옹""종신 통령"의 자리에 오르게 됨 1804.12.02 : "국민 투표" 실시 → 99.8%가 넘는 엄청난 지지를 받아, 프랑스 역사상 "최초의 황제ㆍ나폴레옹 1세"가 됨.

※ 통령 정부

"제1통령ㆍ제2통령ㆍ제3통령"이 공동으로 나라를 운영했으며, 권한은 3명의 "통령"에게 똑같이 분할되었다. 통령의 임기는 10년으로, 제1통령은 "내정ㆍ외교ㆍ군사", 제2통령은 "사법", 제3통령은 "재정"을 담당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제1통령 나폴레옹"의 권한이 가장 막강했고, 상대적으로 제2통령ㆍ제3통령의 권한은 점점 더 위축되었다.

① 신분

 제1신분 (성직자)ㆍ제2신분 (귀족) : 전 인구의 2%면세/ 면역 특권높은 관직ㆍ토지 독점                제3신분 (시민ㆍ농민ㆍ노동자): 전 인구의 98%각종 세금/ 부역 부담ㆍ정치 참여 제한농민 (3신분 중 다수): 세금공납으로 고통 / 상공시민계급이 중심, 구제도의 모순 비판재정의 궁핍 : 계속된 왕실의 사치미국 독립 전쟁 참전으로 재정 부족미국 독립 혁명의 영향사회의식의 성장구제도 타파 주장 확대ㆍ계몽사상

계몽사상

인간의 이성을 바탕으로 무지와 미신을 타파하고 사회를 개혁하려고 한 사상 및 운동이다.  18C 프랑스를 중심으로 시작되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대표적인 사상가로 루소ㆍ몽테스키외ㆍ볼테르 등이 있다.

② 삼부회 소집 (루이 16세가 재정 문제 해결을 위해 삼부회 소집→ 표결 방식을 두고 신분 간 대립)

성직자, 귀족, 평민 세 신분의 대표로 구성된 신분제 의회로, 절대 왕정 시기에는 소집되지 않다가 170년 만에 소집되었다. 신분별로 표결하였기 때문에 항상 2:1로 평민들의 의견이 무시당했으며, 이에 평민 대표들은 머릿수에 따른 표결 방식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평민 대표들은 "삼부회"를 나와, "국민 의회"를 구성하였다.

③ 국민 의회 결성

제3신분 중심으로 "국민 의회" 구성(테니스 코트의 서약)→ 민중의 바스티유 감옥 습격→ 봉건제 폐지 선언,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인권 선언)"발표→ 입헌 군주제와 제한 선거 등을 내용으로 하는 헌법 제정 후, "국민 의회" 해산

④ 입법 의회 구성

새로 제정된 헌법에 따라 입법 의회 구성→ 루이 16세가 헌법을 거부, 국외 탈출 시도프로이센오스트리아 등과 혁명전쟁 시작(혁명의 전파를 우려한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등이 압박을 가하자, 프랑스가 오스트리아에 전쟁을 선포하면서 시작초기에는 프랑스가 패전을 거듭하며 파리가 함락될 위기에 처했으나, 의용군들의 투쟁으로 점차 프랑스에 유리파리 민중이 왕궁을 습격하는 등 혁명이 점차 과격해졌다.

⑤ 국민 공회 수립

혁명의 과격화 → 급진파(자코뱅파)의 장악ㆍ국민 공회 수립공화정 수립 후, 루이 16세 처형공안 위원회 설치

⑥ 로베스피에르 (1758~1794)의 개혁

농민의 봉건적 부담 폐지ㆍ물가 억제ㆍ보통 선거제 도입ㆍ혁명 재판소 설치→ 공포 정치를 통한 반 혁명파 숙청국민 공회 당시 공안 위원회의 지도자로, 자유롭고 평화로우며 도덕적인 공화국 건설을 명분으로 공포 정치를 실시온건파의 탄핵으로 정권을 잃고 처형당하였으며, 이후 총재 정부가 수립

⑦ 총체 정부 수립 : 5명의 총재가 정치 주도ㆍ무능과 부패로 사회 혼란 심화

⑧ 통령 정부 수립 : 나폴레옹의 정권 장악ㆍ독재정치와 개혁 추진

5.  혁명의 불씨가  된 "삼부회" 소집ㆍ나폴레옹 1세 등장 (프랑스 역사상 최초의 황제)

"루이 16세"가 즉위하였을 때, 이미 국가 재정은 위험 수위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런데도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함으로써, 왕실 재정은 거의 파탄 상태에 빠졌다. "루이 16세"는 이를 개선하기 위해, "제3신분(평민)"만 냈던 세금을 "제1신분(성직자)ㆍ제2신분(귀족)"에게도 거두려는 재정 개혁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왕비ㆍ귀족들의 반대로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루이 16세"는 재정문제 해결을 위한 마지막 선택으로, 1614년 이후 1번도 열리지 않은 "삼부회"를 소집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때 소집한 "삼부회"는 "프랑스 혁명"의 불씨가 되고 말았다.

당시 "제1신분ㆍ제2신분" 대표는 각각 300명이고, "제3신분" 대표는 약 600명으로 숫자에서는 2배였다. 그러나 표결 방식이 "각 신분별 투표"였기에 관례대로 투표를 진행한다면 2:1로 "제3신분"이 질 것이 분명하였다. 이에 "제3신분 대표자"들은 "신분별 표결 방식"을 반대하면서, "국민 의회"를 결성했다. 그리고 "프랑스 헌법을 제정할 때까지 해산하지 않겠다."면서, "베르사유 궁전"의 테니스 코트에 모여 시위를 하였다(테니스 코트의 서약).그들의 주장에 "하급 성직자ㆍ일부 귀족"이 합류하면서, 드디어 "국민 의회"를 인정하고 "헌법 제정"에 나섰다.

그러자 "루이 16세"는 군대를 동원해, "의회 활동"을 위협하려 했다. 이를 본 "파리 시민들"은 폭동을 일으켜, 1789.07.14일에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프랑스 대혁명(1789)의 도화선"이었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 소식은 곧 전국으로 퍼졌고, 무거운 세금ㆍ부역으로 고통 받고 있던 농민들은 영주의 저택을 습격하여, 성을 약탈하고, 봉건적 의무가 기록된 문서들을 불태웠다. 

농촌이 대혼란에 빠지자, "국민 의회"에서는 "봉건제 폐지"를 제의했고, 성직자ㆍ귀족들이 그 제의에 찬성하면서, "새 헌법의 기본 원칙"을 만들어, 그 결과를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프랑스 의회"가 결의하여, 1879.08.26일에 발표한 "인권 선언"이다.

그러나 "헌법 제정" 과정에서, "루이 16세"가 다시 "의회"를 제지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그 뒤 1791년, "입헌 군주제"를 채택하는 새 헌법을 제정하고, 각종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후 "프랑스"는 "부유한 상공업자ㆍ부농" 출신에 기반을 둔 "지롱드 당"이 주도권을 장악하여 "입법 의회 시대"를 열었다. 그렇지만 "프로이센ㆍ오스트리아 전쟁"에 참전하여, 전세가 불리하게 되었다. 그러자 파리 시민들은 다시 폭동을 일으켜, "왕의 퇴위ㆍ보통 선거 실시"를 주장하였다. 그 결과, "왕정"이 폐지되고, "국민 투표"로 "공화정(제1 공화정)"이 시작되었다.

당시 프랑스 시민들에게 낡고, "앙시앵 레짐(모순된 구제도)"를 시정하고, 개혁해야 한다는 비판 의식을 심어 준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18C 중엽, 유럽을 지배했던 "계몽주의 사상"이었다. 특히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자유롭다"는 "로크"의 주장은 시민 계층인 "부르주아들"이 사회 개혁을 요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거기에, 바다 건너 "미국"이 "독립 혁명"에 성공하게 되자, 이에 자극을 받아, "봉건적인 요소"와 "전제 정치"를 타파하고, "자유와 평등"이 존중되는 사회 건설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이 수립되었지만, 집권 세력인 "공화파"는 "지롱드 당(부르주아 기반)ㆍ자코뱅 당(소시민층ㆍ소생산자 층 기반)"으로 분열되었다. 새로 정권을 장악하게 된 "자코뱅 당"의 "로베스 피에르"는 "혁명 정부"를 수립하고, 국외로 탈출하려다 실패한 "루이 16세"를 1793년에 "단두대"에서 처형하였다. 뿐만 아니라 15,000명에 이르는 "반혁명 용의자들"을 처형하는 등 공포 정치를 펼쳤다. 이때 "도시 빈민층ㆍ하층 시민인 상퀼로트(반바지(퀼로트)를 입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들이 "프랑스 혁명"에 적극 참여하여, "반대파"를 잡아들이고 숙청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이 시기를 "상퀼로트 시대"라고도 한다.

그 무렵, 주변 국가들은 "루이 16세"가 처형되는 것을 보고, "프랑스 혁명"의 여파가 자기 나라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1793년 "제1차 대불 동맹(영국 수상 피트의 주창으로 영국ㆍ오스트리아ㆍ 프로이센ㆍ네덜란드가 맺은 동맹)"을 맺고, "프랑스"에 선전 포고를 하였다. "프랑스"에서는 "로베스 피에르"의 독재 정치에 떨던 시민들과 숨어 있던 "부르주아지들"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테르미도르의 반동(프랑스 혁명력에서 "열의 달"을 뜻하는 말로 1794.07월을 가리킴)을 일으켰다.

그 결과, "로베스 피에르"를 처형하고, 공포 정치를 마감하면서, "5인의 총재"로 구성된 "총재 정부(혁명 정부)"가 들어섰다. 그 뒤 해외로 망명했던 "왕당파"들이 "영국 정부"의 지원을 얻어, 군대를 이끌고 들어와, "방데미에르 13일의 폭동(프랑스 혁명력의 "포도의 달"13일. 1795.10.05.일)"을 일으켰다. 이때 "왕당파의 반란"을 진압한 핵심 인물이 바로 "나폴레옹"이다. (수도 파리 시가지에서 대포를 쏘는 대담한 전법으로 시원스럽게 진압함으로써, 사단장이 되었다.)

"나폴레옹"은 "총재 정부"로부터 "사령관"으로 기용되어, "이탈리아"를 평정하고, "오스트리아 빈"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나아가 "이탈리아 북부와 벨기에"를 "프랑스" 영토에 병합시켰다. 그 결과 "제1차 대불동맹"이 무너지고 말았다. 군사적인 업적으로 "나폴레옹"의 인기는 "프랑스" 내에서 높아져 갔지만, "이탈리아"에서는 "프랑스제" 성냥을 쓰지 않을 정도로 "프랑스"에 대한 반감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총재 정부"는 "나폴레옹"의 인기가 너무 높아지자, 견제하기 시작하였다.

그를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떨어뜨려 놓기 위해, "이집트"로 파병 명령을 내렸다. 명목은 "영국ㆍ인도"를 잇는 길을 차단함으로써, "영국"의 인도 지배를 방해하고 그 세력을 약화시킨다는 것이었다.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군대"가 전투마다 계속 승리를 하는 동안, "영국"은 "오스트리아ㆍ러시아"를 끌어들여, "제2차 대불 동맹"을 맺고, "프랑스" 국경까지 쳐들어왔다. 그 무렵, "프랑스"는 무능력하고 부패한 "총재 정부" 때문에, 정치적ㆍ경제적 혼란이 더욱 심각해졌다. 

이것을 알게 된 "나폴레옹"은 1799년 몰래 "프랑스"로 들어와, "총재 정부"를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것이 바로 "나폴레옹"을 프랑스 역사에 공식적으로 등장시킨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브뤼메르는 혁명력에서 "안개의 달"로 11월을 가리킴. 1799.11.09일)이다. "나폴레옹"은 "3인의 통령 정부"를 수립한 뒤, 임기 10년의 "제1통령"에 취임하였다. 그러다가 1804.12.02일 "국민 투표"를 실시하여, 99.8%가 넘는 엄청난 지지를 받아, 프랑스 역사상 "최초의 황제, 나폴레옹 1세"가 되었다.

6. 배 경

① 프랑스에 이익되지 않는 6차례 전쟁에 관여

프랑스는 18C에 들어와서,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1701~1714)미국 독립 전쟁(1775~1783)"을 비롯한 6차례의 큰 전쟁에 관여했다. 이런 전쟁은 프랑스에 절대로 이익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루이 14세(1643~1715 재위)의 만년에 국가재정은 위기 양상을 나타내기 시작했는데, 그 후 위기는 더욱 심각해지고 만성화되어 갔다. 또한 "루이 14세"에 의한 "낭트 칙령의 폐지(1685)"와 그에 따른 "위그노"의 국외 추방은 그 후의 프랑스 산업발전을 현저하게 저해하는 결과가 되었다. 프랑스에서 부르주아의 발전은 영국에 비해서 지지부진했으나, 18세기 후반에는 중농주의자의 주장으로 대표되는 곡물 거래의 자유, 인클로저의 자유를 요구하는 세력이 대두되고 있었다. 

공업 부문에 있어서도 면직물 공업이 18세기 초부터 부상하기 시작해서 재래의 모직물ㆍ린네르 공업과 경합하게 되었다. 18세기 후반, "길드"의 규제는 여전히 강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식 "매뉴팩처"가 각지에 출현하고 있었다. 1774년 재무총감 자리에 앉은 중농주의자인 "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는 부르주아의 발전을 저지하던 영주와 국가의 통제를 없애버리려 했다.

1776년에는 "6가지 칙령"이 공포되었는데, 이것은 농민을 노예 수준의 부담에서 해방시키고, 공업에 있어서의 "길드제(11~16C, 중세 상인ㆍ수공업자가 조직한 직업 결사체)"를 폐지하며, 농업과 노동에 대한 자유를 보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이것은 "부르주아적 이해"와 대립하는 봉건적 귀족과 그들에 기생하던 특권 상인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불가피한 과제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부르주아적 발전에 대응하여 노동자의 자본에 대한 투쟁이 조직적으로 일어났다. 견직물 공업의 중심지였던 "리옹"에서는 직조공들의 파업이 18세기 후반에 연이어 일어나기에 이르렀다. 한편 귀족 계급은 성직자와 함께 봉건적 특권을 누리고 있었는데, 18세기에는 여러 그룹으로 갈라져 있었다. 군대에 복무하는 "군인 귀족"과 법무에 종사하는 "법조 귀족"이 대표적인 귀족이었지만, 약간의 귀족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상류귀족은 "궁정(宮廷)"에 빌붙어, 영지 경영에 관심을 갖지 않고 나태한 생활을 보냈으며, 대부분의 사람은 막대한 부채를 짊어지고 있었다. 이와 같이 18세기 후반에는 절대왕권 제도와 절대왕권제의 지지자였던 귀족들 대부분도 재정적 곤란에 처해 있었다. 그들은 농민의 더욱 착취하여, 농촌을 거의 황폐화시켰다. 프랑스에서 부르주아가 발전하려면, 사회적 대변혁이 불가피했었다. 계몽 사상가는 이와 같은 모순된 사회제도를 맹비난하면서 합리적인 사회제도의 출현을 선동했다.

당시 프랑스는 계몽사상가인 "루소"와 백과전서파인 "볼테르" 등 사회계약설이 많은 지식인에게 영향을 주었고, 그것을 국민이 공감하여 당시의 사회 제도(구체제)에 대한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다. "부르봉 왕가" 정부, 특히 국왕 "루이 16세"는 이를 완화하기 위해 점진적인 개혁을 목표로 했지만, 특권 계급과 국민과의 괴리를 채울 수 없었다.

 불평등한 사회 체제

프랑스 혁명은 이런 "구체제(앙시앵 레짐)"의 모순에서 발생하였다. 구체제 하에서는 인구의 2% 정도밖에 안 되는 "제1계급(추기경 등의 로마 가톨릭 고위 성직자)"과 "제2계급(귀족)"은 면세 등의 혜택을 누리면서, 주요 권력과 부와 명예를 독점하였다. 인구의 약 98%를 차지하던 "제3계급(평민)"은 무거운 세금을 부담해야 했다.  3계급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삼부회"가 있었지만, 한동안이나 소집되지 않았기 때문에 "제3계급"은 실질적으로 정치 참여에서 배제된 것이다.

 국가 재정 파탄

"루이 16세"(1774~1792 재위)의 정부는 영국의 신대륙 진출을 견제하려는 "미국 독립전쟁(1775~1983)"을 지원한 과도한 군사비로 인해 재정궁핍에 빠지게 된다. 또한 "프랑스 왕실" 재정 역시 "선대의 향락"으로 인해, 바닥이 드러나게 된다.  1787.02월, 재정총감 "칼론"은 "명사회"를 소집하고, 특권신분에게도 과세하는 "임시지조"를 제안한다. 그러나 귀족ㆍ성직자들은 파리 고등법원과 결탁해, 재정 안에 저항하였고, 그로인해 파산 직전에 이른 재정을 메우려고, "제3신분"에게 부과되는 세금은 점점 과중해졌다.

"루이 16세"에 이르러 재정은 파탄 나고, 흉년이 거듭됐으며, 목걸이 사건이 일어나며,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의회에 미움을 사게 되고, 왕실에 대한 불만은 시민 계급을 중심으로 극에 달하게 된다. "목걸이 사건"은 사기꾼 "라 모트 부인"이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이름으로 돈과 목걸이를 손에 넣은 사기극으로 왕비가 사치를 해 재정의 위기를 가져오게 됐다는 오해를 퍼뜨려, 결국 왕비가 1793. 10.16일 "참수형"에 처해지는 도화선이 된다.

민중의 사회개혁 의지

"제3계급" 중에서도 의사ㆍ변호사ㆍ사업가 등 전문지식을 통해서 부를 축적한 전문직 일명 "부르주아지" 계층은 혈연과 교회의 권위로써 부와 권력을 향유하는 "1ㆍ2신분"을 제치고, 사회의 주도층이 되길 원하고 있었다. 따라서 계몽주의 사상을 강력하게 신봉하고 있었다. 

 프랑스 혁명 당시 육체노동자ㆍ노숙인ㆍ소상인 등의 "프롤레타리아" 계급들도 자신들의 의지에 따라 혁명에 참여했는데, 이들은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장 자크 루소"의 직접민주주의 이념의 영향으로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중시하여야 한다."는 열망에서 귀족 계층들의 불평등한 사회체제에 항거하려는 이념으로 혁명에 가담하였다. 이러한 혁명 정신은 유럽 민주주의 역사에 기여하여, 유럽 대부분 국가들의 헌법에는 부당한 사회체제에 저항할 권리인 "저항권"이 명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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