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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건ㆍ전쟁ㆍ혁명ㆍ학살

전쟁- 2003~2011 : 이라크 전쟁 (2차)ㆍ사담 후세인 축출

by 당대 제일 2023. 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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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이라크 전쟁 (The lraq War2차 걸프 전쟁ㆍ이라크 자유작전)"은 2003.03월, "UN 안보리 결의 제1441호"를 근거로,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감행했고, 순식간에 "후세인 정권"을 붕괴시킨 사건을 말한다. "미국"의 승리 이후, "미군"이 "이라크"에서 철수하자마자 "이라크"는 내란에 휩싸였다. "사담 후세인 (1937~2006ㆍ69세)"은 고향 근처로 도망했으나, 그해 12월에 체포되었다. 2003.05월, "미군"이 "바그다드"를 점령한 직후, "부시"는 "캘리포니아"에서 발진한 항공모함에 극적으로 등장했다. 그는 "임무완수"라고 쓰인 커다란 플래카드 앞에서 "미국이 이라크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선언했다.

 

1. 2차 이라크 전쟁 (The lraq War)

 일 시 : 2003.03.20~2011.12.15          장 소 : 이라크          피 해 : 이라크 (사망 34,000~ 37,000)ㆍ미군 (사망 4,000)ㆍ다국적 연합군 (사망 25,000)          교 전 : 이라크 / 미국 외

• 결 과 : 미군의 이라크 침공/ 점령/ 철수→ 미군이 이라크에서 철수하자마자 이라크는 내란에 휩싸임미국 정부에 매달 거의 60$에 가까운 비용을 부담시킴사담 후세인 처형바트당 정부 멸망시아파 이라크 정부 수립이란의 헤게모니가 이라크에 형성알카에다 이라크 지부와 이라크 내란의 시작시리아 내전으로의 파급

2. 1991년 "걸프 전쟁" 패배 이후, 이라크 상황

1990.08.02일, "후세인 정권"은 "쿠웨이트"를 침공ㆍ병합을 선언한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반발을 받아, 1991.02.28일 "걸프 전쟁"으로 "미국"을 위시한 "다국적군"에 패퇴했다. 패전 직후, 혼란을 틈타 국내의 "반체제 시아파"가 정권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으나, "시아파"가 기대한 "미국"의 지원은 없었고, "후세인 정권"은 진압에 성공한다.

"후세인 정권"은 반역자에 대해 혹독한 보복을 가하였다이후 새로운 강권 정치에 의해, 반대 세력을 누르는 것으로 "후세인 정권"은 오히려 안정화했다. 국내에서는 비밀경찰에 의한 반대파에게의 탄압ㆍ고문ㆍ부당 체포 등이 반복되었다. "걸프 전쟁" 종결 이후, "미국"을 주도로 하는 국제사회로부터 "경제 제재"가 부과되어, "이라크"는 경제적으로 궁핍하게 몰렸다.

1995.10.15일, "이라크 최초의 국민투표"로 실시된 "대통령(7년 임기) 선거"에서 단일후보로 출마하여, 99.96%의 지지율로 당선되어 재선에 성공하였고, 2002.10.15일, "대통령 선거"에 단독 입후보하여, 100% 지지율로 다시 당선되었다. 그러나 선거를 감시하기 위해, "이라크" 현지에 파견된 3,000여명의 "외국 참관단"은 후세인의 단독 입후보ㆍ관영방송의 파상적인 후세인 지지 선동 등을 거론하면서 공정성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1977년 이후, 잇단 전쟁ㆍ흉년으로 세금 수입도 줄고, 국가 재정은 악화ㆍ탕진되었다. 또한 "UN 결의"에 의해 "쿠웨이트"가 독립하면서 세수도 줄었고, 이는 고스란히 손해로 돌아갔다. "걸프 전쟁" 직후부터 민심이 이반되기 시작하였고, "후세인 퇴진 운동"이 벌어졌으나, 이를 모두 무력으로 진압하였으나, 2000년 이후 "퇴진운동 무력진압"을 "미국ㆍ서방" 등에서 문제 삼기 시작한다. 2000년부터 "후세인"은 서방 세계와의 "화해 제스처"를 취했지만, 2001년 "9ㆍ11 테러"로 그의 시도는 실패하고 만다.

3. 미국의 "이라크 후세인 정권"에 대한 강경자세

2001.09.11일, "미국"에서 "동시 다발 테러사건"이 발생하였다. 이후, "미국"은 "알카에다와 민정기를 지원하고 있다"고 하여, "이라크 후세인 정권"에 강경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사실 "후세인"이 석유 거래 화폐를 유로로 전환했기 때문이며, "후세인"이 석유 거래 화폐를 바꾼 것은 "후세인"이 정권 중반에 "친미"에서 "반미" 노선으로 갈아탔기 때문이다)

① 원래 "이라크"는 "친미 국가"로, "미국의 아랍 진출"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걸프전" 당시 "미국"은 "주 이라크 대사관"과 약속한 "아랍 세계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아라비아"에 군사적 개입을 했다.  이때 "미국"은 "후세인"이 앞으로도 충실한 "미국의 개"로 지내길 바라며, "이라크의 정예 부대"를 격파하지 않았으나, 이후로 "후세인"은 확실한 "반미 색채"를 드러냈다.

② 강경한 대응의 이유는 "미국의 경제" 때문이다.

"미국"은 수십 년 째, "쌍둥이 적자"가 지속되고 있지만, 명실상부한 경제 대국이다.  이는 석유를 사려면, "기축 통화"인 "달러"를 사야 해서 지속적으로 돈이 굴러 들어오기 때문인데, "이라크"는 "아랍"에서 꽤나 영향력이 있고, "이라크"에서 거래 화폐가 바뀌면 "아랍" 전체의 거래 화폐가 바뀔 것을 우려한 "미국"이 억지로 우긴 것이다.

③ 2002.01월, "미, 조지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를 "이란ㆍ북한과" 함께 "악의 축 국가"라고 비판했다.

④ 2002~2003.03월까지, "이라크"는 "UN 감시검증 사찰위원회"의 무기 사찰을 받았다.

그러면서, "미국"에 의한 무력 공격의 위기에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후세인 정권"은 강경한 자세를 바꾸지 않고, "2001년 9ㆍ11 테러"에 대해서도, 연설에서 "후세인"은 "미국이 스스로 부른 것이다"라고 하여, 테러를 비판하는 대신, "과거의 미의 중동 정책에 원인이 있다"고 비판했다.

4. 미국의 "이라크" 침공→  미국의 승리→ 이라크 내란 발생

"UN 안보리 결의 제1441호"에 의해 "이라크"를 사찰했으나, "전면적인 협력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미국"이, "군사 제재를 위해서는 새로운 결의가 필요하다"는 "프랑스ㆍ독일"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2003.03월, "UN 안보리 결의 제1441호"를 근거로,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감행했다. "미국"의 승리 이후, "미군"이 "이라크"에서 철수하자마자 "이라크"는 내란에 휩싸였다.

2006년, 결국 "사담 후세인"의 두 아들인 "우다이 후세인(1남ㆍ1964~2003)ㆍ쿠사이 후세인(2남ㆍ1966~2003)"이 "열화우라늄 탄"에 맞아 숨을 거두고, 이후 "후세인"은 "미군"의 체포로 인하여 종전되었다. "미군"은 "후세인 독재 세력"의 지지 기반을 와해시킴으로써, 그동안 유지되던 "이라크" 내 치안이 와해되었으며, 이로 인해 보복살해 등 "종파 분쟁"이 발생하고, "치안 부재"로 인한 무장 세력의 형성과 이들의 저항으로 "미군" 수천 명이 전사하는 결과를 낳았다.

뒤늦게 부족한 "지상군"을 증원하고, "이라크 경찰ㆍ군"을 재건하여, "미군" 전사자 수가 크게 줄고 안정을 되찾아 갔으나, "미군"은 철수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7년이 지난 2010.08.20일. 모든 전투 병력을 철수시키기 시작, 2011.12.15일 "미국"에서 공식으로 "종전"을 선언하였으며, 같은 해 12.18일 "미군"은 "이라크"에서 완전히 철수하였다. 이후 "미국"에 의해 수립된 "임시 행정처"가 2007년 이후, "과도정부"를 구성하여 "이라크"를 다스리고 있다.

5. 사담 후세인 (1937~2006ㆍ69세) 몰락ㆍ처형

2003.03월, "이라크 전쟁"을 개시 이후, 은신처에 3년 이상 옮겨 다니며 은신하였으나, 마침내 "영화 레드 던"에서 이름을 따온 "미군의 레드 던 작전"으로 인해 "다우르"에서 체포되어 전범 재판을 받았다. 2006.11.05일, "1심 재판"에서 "시아파 무슬림 학살"에 대한 유죄가 인정되어, "사형(교수형)"을 선고받았다. 후세인은 "나는 사형당하는 것이 절대 두렵지 않다. 이란과 손잡으면 안 되며,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후 항소했으나, "이라크 최고 항소법원"은 "사형"을 확정하여, 2006.12.30일 수도 "바그다드"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처형으로 인해, 저항세력 계파 중 하나인 "후세인 지지파"들의 반발이 더 심해질 것이라는 비판도 있었다. 시신은 고향인 "티그리티" 근처에 매장되었고, 일부 "수니파"들은 "후세인"을 추앙하며, 2010년부터 현재까지 "과도정부"에 대항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을 굴복시킨 "부시 행정부"의 관심은 다시 "이라크"에 집중되었다. 2002.01월, "미국 조지 부시 대통령"은 "상하양원의회 합동연설"에서 "이라크ㆍ이란ㆍ북한"을 싸잡아 "악의 축(axis of evil)"이라고 비판했다. 이들 국가는 모두 "반미 정권"으로, 그중 "이라크"는 아버지 "부시 정권"이 "걸프전"을 통해 타도하고자 했으나, 결과적으로 "후세인"을 제거하지 못했던 나라였다. 비록 "조지 부시"가 당시 분명히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전 세계의 많은 사람은 "미국"이 조만간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을 붕괴시키고자 한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6. 미  "부시 정권"의 이라크 침공, 공식적 이유

① "이라크"가 "미국"에 적대적인 "탈레반" 같은 테러 집단을 지원하고 있다는 것        ② "이라크"가 핵무기ㆍ생화학적 무기를 포함한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거나 은닉하고 있다는 것         이러한 주장보다는 "미국" 여론에서 더 본질적인 주장은 "후세인 정권"이 인권침해에 책임이 있다는 비난        째를 제외한다면, 어느 주장도 정확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이라크"가 이미 "대량살상무기를 대부분 폐기했다"는 증거들이 있었기 때문에, "대량살상무기 문제"는 기껏해야 부차적인 이유였을 따름이다. 또한 "후세인"은 내키지는 않았으나, "부시 정부"가 요구한 "사찰 조건" 상당 부분 수용했다. 이러한 정황으로 볼 때, "부시 정권"이 "후세인 정권"을 전복하고자 하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것은 "후세인 축출"이 "중동 지역"에서 새로운 정치적 판을 짜려는 계획 일부라는 것이다. "소련"이 몰락하고, "미국"의 유일한 강대국 체제가 성립된 새로운 질서 하에서 "부통령 딕 체니"를 비롯한 국방ㆍ외교의 고위관리들은 "미국의 새로운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PNAC)"라는 보수적 싱크탱크를 출범시켰다. 그것은 이미 "9ㆍ11" 이전부터 "후세인 축출"에 대한 계획이 존재했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전쟁에 대한 사전 준비로, "후세인의 잠재적 위협ㆍ대량살상무기의 사용"에 대한 여론 조작이 빗발쳤다. 이러한 여론의 환기를 통해, "이라크 정부"와 "9ㆍ11"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아무런 증거가 없음에도 "부시"는 미국인들이 이 둘을 연결지어 생각하게 하였다. 집권당이었던 "후세인의 바스당"은 "세속적 민족주의"를 표방하고 있었으며, "빈 라덴"이 이끄는 "이슬람 근본주의"에 매우 큰 반감이 있었다.

7. 2003.03월, "미국"은 "이라크"를 침공

2003.03월, "미군"은 "이라크"를 침공했고, 순식간에 "후세인 정권"을 붕괴시켰다. "후세인"은 고향 근처로 도망했으나, 그해 12월에 체포되었다. 2003.05월, "미군"이 "바그다드"를 점령한 직후, "부시"는 "캘리포니아"에서 발진한 항공모함에 극적으로 등장했다. 그는 "임무완수"라고 쓰인 커다란 플래카드 앞에서 "미국이 이라크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선언했다.

그 후 여러 달 동안 "이라크"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부시"의 주장이 성급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미군"의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중폭격을 중심으로 전개했기 때문에, 전쟁 동안에는 최소한 인명 피해로 끝났으나, 전후의 혼란으로 그 피해가 늘어났다. 통계에 의하면, 미군의 사망자 4,000여 명 중 3,600명이 "임무완수" 이후에 죽었다.

그 후, "미국" 내에서의 전쟁 지지 여론은 차츰 감소하기 시작했다. 최초에 "부시"가 주장했던 "대량살상 무기"의 증거를 찾는데, 점령국들이 실패한 것은 "전쟁의 신빙성"에 타격을 가했다. 그리고 "미군"이 감옥에서 "이라크" 포로에게 가한 고문ㆍ모욕에 대한 보고서가 "부시의 외교정책"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는 배경이 되었다. "미군"의 해외 전쟁 개입은 "미국 재정"에 심각한 타격으로 다가왔다. "이라크 전쟁"은 수많은 사상자를 발생시켰을 뿐 아니라, "미국 정부"에 매달 거의 60억 $에 가까운 비용을 안겨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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