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프 전쟁 (페르시아 만 분쟁ㆍThe Gulf Warㆍ쿠웨이트 전쟁ㆍ제1차 걸프 전쟁ㆍ제1차 이라크 전쟁(2003년 이라크 전쟁이 제2차 이라크 전쟁)"은 1990.08.02일, "후세인 정권 (사담 후세인 (1937~2006ㆍ69세)"이 "쿠웨이트"를 침공ㆍ병합을 선언하면서 시작되었다. 1988년 종결된 "이란ㆍ이라크 전쟁"은 "이라크"를 "중동의 군사 대국"으로 끌어올렸다. "후세인"의 관심은 풍부한 석유 자원을 가진 국가이자, "근대 이라크" 성립 이후부터 "이라크의 민족주의자"들이 "이라크의 영토"라고 주장한 이웃 나라 "쿠웨이트"로 향하게 된다.
1. 걸프 전쟁 (페르시아 만 분쟁ㆍThe Gulf War)
"사우디아라비아"의 전쟁 비용은 연합군의 군사비용인 600억 $ 중 360억 $를 차지하였다.(60%)
① 90.08.02~91.01.17 : 사막보호 작전 :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를 방어하고, "다국적 연합군"을 편성
②91.01.17~91.02.28 : 사막의 폭풍 작전 : "다국적 연합군"의 전투 기간
• 일 시 : 1990.08.02~1991.02.28 • 장 소 : 이라크ㆍ이스라엘ㆍ쿠웨이트ㆍ사우디아라비아 • 결 과 : 다국적 연합군의 승리ㆍ쿠웨이트의 왕정복고ㆍ페르시아 만 오염ㆍ이라크 군이 쿠웨이트에서 철수ㆍ이라크에 대한 제재ㆍ이라크 비행금지구역 설치ㆍ이라크 및 쿠웨이트 산업시설 파괴 • 피 해 : 이라크 (사망 20,000~ 35,000) / 다국적 연합군 (사망 500) • 교 전 : 이라크 / 다국적 연합군 (34개국 - 미국ㆍ사우디아라비아ㆍ영국ㆍ프랑스ㆍ쿠웨이트)
2.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1988년 종결된 "이란-이라크 전쟁"은 "이라크"를 "중동의 군사 대국"으로 끌어올렸다. "후세인"의 관심은 풍부한 석유 자원을 가진 국가이자, "근대 이라크" 성립 이후부터 "이라크의 민족주의자"들이 "이라크의 영토"라고 주장한 이웃 나라 "쿠웨이트"로 향하게 되었다. 1990.08.02일, "후세인 정권"은 "쿠웨이트"를 침공ㆍ병합을 선언한다.
"미국" 주도의 "다국적 연합군(34개국)" 병력에 의해 수행된 전쟁으로,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ㆍ 병합에 반대하면서 일어났다. 1990.08월, "이라크"가 시작한 "쿠웨이트 점령"은 국제적 비난을 불러 일으켰으며, "UN 안보리"에 의해 즉각적인 "이라크 제재"를 유발했다. "미국 조지 부시 대통령"은 "미군"을 "사우디아라비아"에 배치하고, 다른 국가들에게 자국 병력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또한 "소련 고르바초프"와 "헬싱키 정상회담"을 거쳐, "걸프 해역"에 병력 증파를 선언하였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이후 약 5개월 사이, "미국 베이커 국무장관ㆍ소련 세바르드나제 외무장관"이 전 세계 국가에 "이라크"에 대한 무기 공급을 중단할 것을 촉구하는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이를 필두로 "UN 안보리"에서는 "대 이라크 경제제재" 조치를 결의했다. 동시에 "UN 안보리"에서는 "이라크 군"이 1991.01.15일까지 "쿠웨이트"에서 철수하지 않을 경우, 무력사용을 승인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런 상황에서 "이라크 사담 후세인"은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 "전쟁이 발발하면, 우리는 이스라엘부터 쳐부수고 말겠다."
이후 약 2주간에 걸친, "미국ㆍUNㆍ이라크" 간의 "걸프 사태" 해결 노력마저 허사가 되자, "걸프 해역"에는 일촉즉발의 위기감이 감돌았다. 사실상 공격 준비가 완료된 "다국적군"에 공격 명령이 떨어지는 일만 남았다. 마침내 1991.01.16일 오후, "미국 조지 부시 대통령"은 "사막의 폭풍작전"이라는 표제가 붙은 서류에 "미 대통령" 이름으로 사인했다.
다음날 새벽 2시부터, 4시간 동안 "이라크 바그다드"에 무려 18,000 TON에 달하는 폭탄이 퍼부어졌다. "이라크 군"의 반격은 실로 미미했다. 간헐적으로 "대공포"가 발사될 뿐이었다. 이후 2차례에 걸쳐, "다국적군"의 공습이 추가되었다. "바그다드"의 주요 군사시설들이 사라졌다.
01.18일부터 감행된 "후세인"의 반격 작전에도 불구하고, 01.24일 "다국적군"의 상륙부대는 "걸프 해역"에 집결, 마침내 지상전에 돌입하였다. 5일 후인 01.29일에는 개전 이래 최대의 지상전인 "바스라ㆍ카르쿠크" 전투가 벌어졌다. "다국적군"은 공중ㆍ지상의 입체 작전을 펼쳤고, 전쟁은 점차 하늘에서 지상으로 옮겨져 지하까지 파고들었다. 이런 와중에 "미 부시 대통령"은 "연례 연두교서"에서 "걸프" 전후 세계질서 재편을 강조하였고, "후세인"은 "미 동맹국"과의 단교를 선언했다. 그리고 곧바로 이라크의 50여 개 "유정 방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3일 후인 02.13일에 "소련 특사 프리마코프"가 "바그다드"를 방문하였다. 이틀 후인 02.15일에 "이라크 혁명평의회"는 "쿠웨이트"에서의 "조건부 철군 용의"를 표명했다. 그러나 "미 부시 대통령"을 비롯한 "다국적군 참가국"들은 "이라크"의 이같은 발표를 즉각 거부했다. 뿐만 아니라, "미 부시 대통령"은 "소련ㆍ이라크 간 회담"을 거쳐 제시된 "소련의 평화중재안"도 거부했다. 그러자 02.22일 "후세인"은 "바그다드" 라디오방송을 통해, "계속 항전"을 선언했다. 얼마 후 "미 부시 대통령"은 02.24일 오전 2시까지 "이라크"가 무조건 철수하지 않을 경우, 전면적인 "지상공격을 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내렸다.
다음날 개시된 "다국적군"의 전면적인 지상공격은 결국 "이라크"로 하여금 "쿠웨이트에서의 즉각 철수"를 시행케 하였다. 마침내 02.27일, "쿠웨이트"가 해방됨과 더불어, "미 부시 대통령"이 "군사행동 중지"를 선언함으로써 사실상 "걸프전"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이렇게 끝난 "걸프전"을 통해, 전 세계는 "현대과학 문명"이 만들어낸 "최첨단 과학무기"의 위력에 새삼 놀라게 되었고, "미국"이 갖고 있는 거대한 힘을 다시 한 번 인식하게 되었다.
'서양사 > 사건 • 전쟁 • 혁명 • 학살'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혁명- 1688 : 명예혁명ㆍ권리장전ㆍ대헌장ㆍ권리청원ㆍ청교도혁명 (0) | 2023.01.04 |
---|---|
전쟁- 2003~2011 : 이라크 전쟁 (2차)ㆍ사담 후세인 축출 (0) | 2023.01.03 |
전쟁- 1980~1988 : 이란ㆍ이라크 전쟁 (Iran-Iraq War)ㆍ호메이니 (2) | 2023.01.03 |
전쟁- 1936~1939 : 스페인 내전ㆍ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영화) (2) | 2023.01.02 |
전쟁- 1861~1865 : 미국 남북 전쟁ㆍ링컨 (1809~1865) (2) | 2023.01.0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