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ㆍ이라크 전쟁 (Iran-Iraq War)"은 1980~1988년까지 일어난 전쟁이다. 교전은 "이란 (시아파가 80% 이상ㆍ지도자 : 호메이니 (1902~1989ㆍ87세)"과 "이라크 (시아파ㆍ수니파로 2등분ㆍ지도자 : 사담 후세인 (1937~2006ㆍ69세)→ 미국 지원"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이라크"는 "사우디아라비아ㆍ그 밖의 중도적인 아랍 국가들"로부터 공공연한 재정적 지원을 받았고, "미국ㆍ소련"에서도 암암리에 후원을 받은 반면, "이란"을 도운 동맹국은 "시리아ㆍ 리비아" 뿐이었다.
1. 이란ㆍ이라크 전쟁 (Iran-Iraq War)
- 일 시 : 1980.09.22~1988.08.20
- 장 소 : 이라크 동부ㆍ이란 서부
- 결 과 : 전쟁 이전으로 되돌림. UN 결의 619에 기초한 UN 이란ㆍ이라크 전쟁 감시 위원회의 감찰 하에 이루어짐.
- 피 해 : 100만여 명의 사상자
- 병 력 : 이 란 : 보병(30만)ㆍ민병대(40~70만)ㆍ탱크(900)ㆍ장갑차(1,000)ㆍ대포(1,000)ㆍ전투기(447)ㆍ헬리콥터(750) / 이라크 : 보병(1980년- 20만ㆍ1988년- 80만)ㆍ탱크(5,000)ㆍ장갑차(4,000)ㆍ대포(7,330)ㆍ전투기(500)ㆍ헬리콥터(100)

2. 이라크의 침공
1980.09월, "이라크" 군대가 양국의 접경지대에 있는 "이란 서부지역"을 침공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주목표는 "샤트알아랍 강 획득ㆍ이란 혁명정권 타도"였다. "이라크"는 선전포고 없이 "이란"을 공격했지만, 전쟁을 진척하지 못하고 "이란"에게 격퇴된다. "UN 안보리"의 휴전 명령에도 불구하고 "이라크"는 1988.08월까지 100만여 명의 사상자를 내며 전쟁을 계속한다. 2003년 마지막 포로가 교환되었다. 1988년, 종결한 "이란-이라크 전쟁"은 "이라크"를 "중동의 군사대국"으로 끌어올렸다.
"사담 후세인"의 관심은 풍부한 석유 자원을 가진 국가이자, "근대 이라크" 성립 이후부터 "이라크 민족주의자"들이 "이라크 영토"라고 주장한 이웃 나라 "쿠웨이트"로 향하게 되었다. 1990.08.02일, "사담 후세인 정권"은 "쿠웨이트"를 침공ㆍ병합을 선언한다. 그러나 "미국"을 시작으로 하는 국제사회의 반발을 받아, 1991년 "걸프 전쟁"으로 "미국"을 위시한 다국적군에 패퇴했다. 패전 직후의 혼란을 틈타, 국내의 반체제 "시아파"가 정권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으나, "시아파"가 기대한 "미국"의 지원은 없었고, "사담 후세인 정권"은 진압에 성공한다.
양국은 국민 대다수가 "이슬람교도"이나, "이란"은 그 중 80% 이상이 "시아파"고, "이라크"는 "시아파ㆍ수니파"로 2등분되어있으나, 전통적으로 "수니파"가 상대적으로 다수인 "시아파"를 지배함으로써 양국은 과거부터 갈등을 겪고 있었고, "이란 혁명 성공"으로 "강경 급진 시아파"가 집권함으로써 양국 관계가 격화되기 시작했다. 또한 양국은 제각기 "이슬람 정통 계승ㆍ페르시아 상속자임"을 자처하며, "호르무즈 해협 3개 도서(島嶼)ㆍ샤트알아랍 수로"의 영유권을 주장, 역사적 분쟁을 겪어오고 있었다.
3. 전쟁의 원인
전쟁의 원인은 "이라크ㆍ이란" 사이에 산적해 있는 영토ㆍ정치 분쟁이었다. "이라크"는 "이란" 국경지역에 위치한 풍부한 석유 산출지역인 "후제스탄"을 장악하려고 했다. "이라크 사담 후세인"은 "샤트알아랍 강" 양안에 대한 이라크의 영토권을 재 주장했는데, "샤트알아랍 강"은 역사적으로 양국의 자연적 국경선이었던 "티그리스 강ㆍ유프라테스 강"의 합류 지점에 있었다. 또한 "후세인"은 "이란"의 새로운 "이슬람 혁명정부"가 "이라크" 다수파인 "시아파교도"들 사이에서 반란을 선동하려는 데 대해 우려하고 있었다. 그는 "이란"에 선제공격을 가하기로 결정했으며, 이 선제공격은 표면화되고 있던 "이란 신정부"의 혼란과 "이란 정규군"의 사기 저하를 이용하려는 것이었다.
1980.09월, "이란"을 급습한 "이라크 군"은 넓은 국경선을 따라 신중히 "후제스탄"으로 진격해갔다. "이라크 군"은 "호람샤르 시" 점령에는 성공했지만, 중요한 정유 도시인 "아바단"을 탈취하는 데는 실패했다. 1980.12월, "이란" 영내의 약 80~120km 지점에서 예기치 않은 "이란"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친 "이라크"의 공격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혁명의용군(혁명수비대)"으로 정규군을 보강한 "이란"의 반격은 1981년부터 "이라크 군"을 후퇴시키기 시작했다.
"이란 군"이 처음으로 "카룬 강" 너머로 "이라크 군"을 몰아낸 이후, 1982년에는 "호람샤르"를 탈환했다. 그해 말, "이라크"는 "이란"의 모든 점령지역으로부터 자발적으로 군대를 철수, "이란"과 평화협상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라크 사담 후세인"에 대해 개인적으로 큰 원한을 품고 있는 "호메이니"의 "이란"은 타협에 불응하고 "후세인"을 타도하기 위해 전쟁을 계속했다.
"이라크"는 강화된 방위시설로 자국의 영토를 방어했고, 전쟁은 "이라크" 국경을 넘나들며 참호전을 벌이는 교착상태에 빠졌다. "이란"은 빈번이 보병 공격을 감행했지만, 부분적으로 훈련받지 않은 신병들로 구성된 군대의 공격은 "이라크"의 우세한 화력ㆍ공군력에 의해 격퇴되어,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양국은 도시ㆍ군사ㆍ석유시설에 대해 산발적인 공습ㆍ미사일 공격을 가해, 상대국의 도시ㆍ군사ㆍ 석유시설을 파괴했으며, "페르시아 만"에 정박해 있는 상대국의 유조선들을 포격했다.
"이란"이 "쿠웨이트"와 그 밖의 "페르시아 만" 연안국들의 유조선을 공격하자, 이에 자극을 받은 "미국ㆍ서유럽"의 여러 나라는 유조선을 보호하기 위해, "페르시아 만"에 전함을 배치하기에 이르렀다. 공습ㆍ송유관의 차단으로 인해, 양국의 수입ㆍ외화 소득이 감소하자, 양국은 대대적인 경제개발계획을 거의 중단했다.
1980년대 중반, "이라크"는 계속해서 평화를 호소했지만, "이라크"가 "이란"에 대해 치명적인 "화학무기를 사용했다"는 보도들이 나오면서, "이라크"의 국제적 평판은 손상되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군사적 교착상태는 지속되었지만, 1988년 "이란"의 경제가 악화되고, "이라크"가 전투지역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되자, "이란"은 거부해오던 "국제연합(UN)의 휴전중재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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