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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사건 • 전쟁 • 혁명 • 학살

전쟁- 1853~1856 : 크림전쟁 (동방전쟁)ㆍ나이팅게일(1820~1910)

by 당대 제일 2023.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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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 전쟁ㆍ동방 전쟁 (Guerre de Crimée)"은 "크림 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러시아 제국"이 "오스만 제국ㆍ프랑스 제2제국ㆍ대영제국ㆍ사르데냐 왕국"이 결성한 "동맹군"에 패배한 전쟁이다. 전쟁의 원인은 "오스만 제국"이 성지에 거주하는 "소수 기독교도들"의 권리와 연관되어 있었다.

 

1. 크림 전쟁ㆍ동방 전쟁 (Guerre de Crimée)

전쟁은 오늘날 "루마니아"의 일부인 "몰다비아 공국ㆍ왈라키아 공국"이 있던 "다뉴브 강" 유역에서 처음 발발했는데, 이곳은 1853.07월 "러시아군"이 점령했던 지역으로, "오스만 제국"의 종주국이었다.

"프랑스"는 "로마 가톨릭교도들"의 권리를 증진시키고자 했으나, "러시아 제국"은 "동방 정교회 신자들"의 권리를 증진시키고자 했다. 장기적인 원인에는 "오스만 제국의 쇠퇴ㆍ영국/프랑스의 러시아 제국 견제"가 포함되어 있었다. "포탄ㆍ철도ㆍ전보"와 같은 현대 기술을 사용한 최초의 전쟁들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또한 최초로 이 전쟁은 "기사ㆍ전쟁 사진"에 의해 기록되기도 했다. "경 기병대 돌격"의 전설이 설명하듯, 이 전쟁은 "병참ㆍ의료ㆍ전술적 실패와 실수"의 상징이 되었다. "영국" 내에서는 "나이팅게일"에 의해, "의료"에 대한 전문성을 이룩하였다.

• 일 시 : 1853.10.16~1856.03.30          장 소 : 크림 반도캅카스 산맥발칸 반도흑해발트해백해극동          교전국 : 연합군(오스만 제국프랑스 제2제국대영 제국)이탈리아 사르데냐 왕국ㆍ캅카스 이맘국ㆍ체르케시아 /  러시아 제국ㆍ밍그렐리아 후국ㆍ그리스 왕국ㆍ몬테네그로 공국          결 과 : 연합군(영국프랑스오스만 제국) 승리파리 조약 체결(1856.03.30)         

• 지휘관 : 영국 빅토리아 여왕ㆍ프랑스 나폴레옹 3세ㆍ오스만 제국 오마르 파샤  /  러시아 제국 니콜라이 1세ㆍ알렉산드르 2세          병 력 : 연합군- 전체(603,132)프랑스(309,268)오스만 제국(165,000)영국(107,864) / 러시아 제국- 전체(889,000명)          피 해 : 연합군- 사망(223,513) /러시아 제국- 사망(530,125)

교회들이 각자의 다양성을 해결하고, 합의에 도달하는 동안, "니콜라이 1세ㆍ나폴레옹 3세"는 주장을 굽히는 것을 거절했다. "니콜라이 1세"는 "러시아 제국의 동방 종교회" 국민들이 그의 보호에 놓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영국"은 "니콜라이 1세"가 동의했던 절충안을 처리하고, 중재를 시도하려고 했다. "오스만 제국"이 변화를 요구하자, "니콜라이 1세"는 이를 거절하고 전쟁을 준비했다. "영국ㆍ프랑스"의 지지를 약속받은 "오스만 제국"은 1853.10월 "러시아 제국"에 전쟁을 선포했다.

"오스만 제국군"은 "오마르 파샤"의 지휘 하에, "다뉴브 강"을 건너 격렬한 방어전 이후, "실리스트라"에서 진군을 정지했다.  "동부 아나톨리아"에 위치한 "카르스 요새"에 대한 "러시아 제국"의 공격은 포위로 이어졌고, "오스만 제국"의 병력 증원 시도는 "시노프 해전"에서 "러시아 제국 해군"에 의해 부대가 궤멸되어, 실패로 끝났다.

"오스만 제국군"의 붕괴를 우려한 "영국ㆍ프랑스"는 "갈리폴리"에 군대를 파견했다. 이후 양국 군대는 6월에 "바르나"로 이동했고, 적절한 시간에 도착해, "러시아군"이 "실리스트라"를 포기하는 데 기여했다. "콘스탄차"에서 소규모 충돌이 있었지만, "연합군"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허비된 노력에 의해 좌절된 이후, 국민들의 전투 요구에 의해, "연합군"은 "흑해의 크림 반도"에 위치한 "세바스토폴"의 "러시아 해군 기지"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확장된 준비 기간 끝에, 1854.09월 "연합군"은 "크림 반도"에 상륙했고, 연이은 승전 이후, "세바스토폴" 남쪽 입구로 가는 길목에서 전투를 벌였다.

"러시아 제국"은 "발라클라바 전투"를 통해 반격을 시도했고, 이는 격퇴되었지만, "영국" 육군 병력은 이 전투 이후 크게 감소되었다. 2번째 반격은 "오마르 파샤"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군"에 의해 격퇴되었다. "크림 반도"에서의 전투는 포위전으로 바뀌었고, 양측 군대에 끔찍한 전선이 이어지게 되었다. 소규모 전투가 "발트해ㆍ캅카스 산맥ㆍ백해ㆍ북태평양" 일대에서 벌어졌다.

"세바스토폴"은 11개월간의 전투 끝에 함락되었고, "중립국"이 "연합국"의 편을 들기 시작했다. 전쟁이 이어진다면, 서구의 침공이 있을 것이라는 암울하고, 고립된 전망이 이어지자, "러시아 제국"은 1856.03월 평화를 요구했다. 전쟁이 너무 오랫동안 이어져서, 국민들이 전쟁에 반발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영국ㆍ프랑스"는 이를 환영했고, 1856.03.30일 전쟁은 "파리 조약"에 의해 종결되었다.

"러시아 제국"은 "흑해"에서 적대적인 활동이 금지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었던 "왈라키아 공국ㆍ몰다비아 공국"은 더 큰 자치권을 얻었다. 이 지역의 "기독교도인들"은 공식적인 "평등권"을 얻었고, "동방 정교회"는 분쟁 속에서 "기독교도들"에 대한 통제권을 회복했다.

2.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Florence Nightingaleㆍ1820~1910ㆍ향년 90세)

"림전쟁"에서 활약영국의 간호사ㆍ작가ㆍ통계학자ㆍ영국 성공회의 성인(성공회에서는 08.13일을 축일로 지킨다). "크림전쟁(1854~1856)" 당시, 38명의 "영국 성공회 수녀들"의 도움을 받으며, "슈코더르(스쿠타리) 야전 병원"에서 초인간적인 활약을 보였다흔히 "나이팅게일" 하면, 고통 받는 부상병들을 돌본 봉사자를 연상하지만, 이 시기의 "나이팅게일"은 유능한 행정가요, 협상가였다. 그녀는 "관료주의"에 물든 "군"의 관리들을 설득했고, 병원에서 쓰는 물건들을 세심하게 조사했으며, 무질서한 "병원"에 규율을 세웠다. 환자의 사망률은 42%에서 2%로 뚝 떨어졌다는 사실은 "나이팅게일"이 뛰어난 행정가임을 말해준다. 

① 나이팅게일 선서 전문 (Nightingale Pledge)

간호사로서 헌신해야 할 윤리ㆍ간호원칙을 담은 선서문으로, 희생ㆍ봉사ㆍ장인 정신이 담겨져 있다. 초창기 간호윤리강령이 형성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나는 일생을 의롭게 살며, 전문 간호직에 최선을 다할 것을 하느님과 여러분 앞에 선서합니다. 나는 인간의 생명에 해로운 일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간호의 수준을 높이기 위하여 전력을 다하겠으며, 간호하면서 알게 된 개인이나 가족의 사정은 비밀로 하겠습니다. 나는 성심으로 보건의료인과 협조하겠으며, 나의 간호를 받는 사람들의 안녕을 위하여 헌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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