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전쟁ㆍ대프랑스 동맹ㆍ"나폴레옹"의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1799.11)"은 "프랑스 제1공화국"과 "영국"이 재정ㆍ군사적으로 주도하는 "연합군"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전쟁이다. "프랑스 혁명(1789)"과 그 여파로 일어난 "프랑스 혁명 전쟁" 당시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이 원인이 되어 발발했다. (나폴레옹의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1799.11))
1. 나폴레옹 전쟁ㆍ대프랑스 동맹ㆍ나폴레옹의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1799.11)
"나폴레옹 전쟁" 이후, "비엔나 회의"가 개최되어, "유럽의 국경"은 새로 그려졌다. 전쟁을 통해, "대영제국"은 "팍스 브리타니카"를 통해, "세계 최강대국"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스페인 제국"에 맞서, "라틴 아메리카 독립 전쟁"이 발발했다.
"민족주의ㆍ자유주의"가 전 세계로 확장되었고, 이는 추후 "독일 통일ㆍ이탈리아 통일ㆍ그리스 독립"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 군사학적인 측면에서도 전쟁을 수행할 당시, 급진적으로 새로운 전술ㆍ전투방식이 도입되게 되었다. 유럽을 지배하려는 "나폴레옹"의 야망이 실패하긴 했지만, 그의 제국은 세계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전 유럽에 "프랑스 대혁명"이 낳은 "자유주의ㆍ민족주의"의 씨앗을 뿌렸다.
"나폴레옹"은 자신이 점령한 지역에 "봉건제"를 폐지하고, "혁명적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그런 점에서 "나폴레옹 제국의 팽창"은 곧 "혁명의 확대"이기도 하였다. 또한 "나폴레옹의 점령"은 그 지역 "국민의 저항"을 야기하였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유럽 민족주의"가 성장하고 발전하였다.
• 장 소 : 유럽ㆍ아프리카ㆍ아시아ㆍ아메리카 • 일 시 : 1793~ 1815년 (22년): "나폴레옹 전쟁"은 크게 5개로 분류되는데, "대프랑스 동맹(3차~ 7차)"까지로 구성되어 있다.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1세ㆍNapoléon Bonaparteㆍ1769~1821ㆍ52세ㆍ168cm)
프랑스 황제ㆍ프랑스 군인ㆍ정치가 (프랑스 대혁명 말기)ㆍ이전의 도시단위의 "용병의 전쟁"을→ "국민 동원 체제(국민 징집)"으로 전환 → 거대한 규모로 유럽 정복 시작→ 상비군 체제 도입
1815.06월 "워털루 전투(벨기에 근처)"에서 패배한 "나폴레옹"은 완전히 몰락하고, 영국령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를 간다. 이후 "나폴레옹"은 삶의 마지막 6년을 "남대서양" 외딴섬인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보냈다. 특히 "세인트헬레나 섬"의 총독인 "허드슨"으로부터 괴롭힘을 많이 당했다. 그는 무례하게도 자부심 강한 "나폴레옹"에게 "보나파르트 장군"이라고 부르며, 썩은 포도주를 따라주는 등 철저하게 조롱했다. "나폴레옹"의 건강상태가 악화되어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치의를 본국으로 귀국시켰다. 그의 상태는 날이 갈수록 나빠져 매일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다가 결국 1821년 세상을 떠났다. 공식적인 사인은 "위암"이라고 알려져 있다. 유해는 1840.05월, "영국"의 동의를 얻어 "프랑스"에 반환되었으며, 현재 "파리 앵발리드"에 안치되어 있다. 한편 "독살되었다"는 설이 있는데, 이는 "나폴레옹 모발"에서 "비소" 성분이 다량으로 검출되었기 때문이다.
2. 1799.11월 :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ㆍ 안개달(Brumaire) 18일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에 나가있는 동안 프랑스는 국제적으로 사면초가에 빠져 있었다. 영국과 오스트리아가 다시 동맹을 맺고, 프랑스의 왕정복고를 명분으로 내세워 프랑스를 위협하였다. 이때의 주변 상황을 면밀히 파악하고 있던 나폴레옹은 다음 원정인 "인도 원정"을 취소했다.
1799.08.01일 "아부키르 만"에서 "호라시오 넬슨"의 영국 함대가 2척을 제외한 모든 프랑스 전함들을 격침시켰고, 이집트 곳곳에서도 "반 프랑스" 봉기가 일어났다. 그로 인해 영국해군이 해당지역의 재해권을 장악하게 되고,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큰 차질을 빚게 된다. 프랑스 지중해 함대 주력이 전멸하고 나폴레옹과 이집트 원정군은 아프리카에 고립되고 만다. 나폴레옹은 이들을 잔혹하게 진압하였고, 나폴레옹과 함께 온 학자들은 이집트의 중요한 유물들을 약탈하고 수집하였다.
1799년 나폴레옹은 "시나이 반도"를 지나 "오스만제국"의 영토인 "팔레스티나" 지역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오스만"군대에 대해서도 승리를 거두기는 했으나 보급 부족과 풍토병으로 나폴레옹은 이집트로 되돌아와야만 했다. 이때 나폴레옹은 유럽에 "제2차 대 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어 프랑스가 위험에 빠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08.24일 일시적인 영국 해군의 철수를 이용하여, 군대를 "클레베르 장군"에게 맡기고, 이집트를 몰래 빠져나와 프랑스로 향했다. 영국의 해상권 장악으로 이집트와 프랑스 간의 연락망은 두절된 상태였고, 본국에서는 나폴레옹의 상황을 전혀 알지 못했다. 나폴레옹은 본국과의 연락이 끊기자, "혁명 정부"의 명령도 받지 않고, 혼자서 몰래 1799.10월에 프랑스로 귀국하였다.
나폴레옹이 파리에 도착한 때는 10월로 프랑스의 전황은 한결 나아진 상태였다. 하지만 재정은 파탄이 났고, "총재정부"는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상실한 상태였다. "500인 회"와 "원로원"은 나폴레옹의 전선 이탈 문제를 두고 격론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서 나폴레옹은 총재정부 지도자들인 "엠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와 동생 "루이 시에예스"ㆍ로제 뒤코스ㆍ조제프 푸셰ㆍ탈레랑 등의 협력으로 1799.11.09일, 즉 "안개달(Brumaire) 18일"에 쿠데타를 감행하여 체제를 전복시키고 "통령정부 체제"를 수립하였다.
중간에 반대하는 의원들이 그를 저지하려 하였으나, 이미 그에게 장악된 군대와 30여명의 "테르미도르파" 의원들의 지지로 그는 "500인 회"를 해산시켜 헌법을 폐기하고, "3명의 통령"들을 두는 새 헌법을 만들어 국민 투표에 부쳤다. 나폴레옹은 개인적인 인기를 등에 업고 프랑스 원로원으로부터 10년 임기의 제1통령으로 임명되어, 불과 30세의 나이에 사실상 프랑스 정권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었다.
3. 대프랑스 동맹
① 1793~1797 : 제1차 대프랑스 동맹→ 프랑스 승리 (프랑스 혁명 전쟁 시작) ② 1798.12~1801 : 제2차 대프랑스 동맹→ 프랑스 승리 (프랑스 혁명 전쟁 종료) ③ 1805.04~1806 : 제3차 대프랑스 동맹→ 프랑스 승리 (나폴레옹 전쟁 시작)→ 에투알 개선문 건립 ④ 1806.10~07.07 : 제4차 대프랑스 동맹→ 프랑스 승리
⑤ 1809.04~09.10 : 제5차 대프랑스 동맹→ 프랑스 승리 (나폴레옹의 절정기) ⑥ 1812~1814 : 제6차 대프랑스 동맹→ 프랑스 패배(파리 함락)→ 나폴레옹, 이탈리아 "엘바 섬" 유배 ⑦ 1815.03~1815.07 : 백일천하 (제7차 대프랑스 동맹)→ 나폴레옹, 영국령 "세인트헬레나 섬" 유배
• 결 과 : 연합국의 승리→ 나폴레옹 1세를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ㆍ프랑스 제1제국ㆍ신성 로마 제국ㆍ덴마크-노르웨이 멸망ㆍ부르봉 왕정복고ㆍ대영제국이 초강대국으로 성장ㆍ프로이센이 강대국 반열에 오름ㆍ오스트리아/러시아 등이 신흥 강대국으로 성장ㆍ민족주의와 자유주의의 전 세계적 확산ㆍ네덜란드 연합왕국 수립ㆍ스페인/포르투갈 제국의 쇠퇴ㆍ빈 체제 성립
• 교전국 : 프랑스 제1공화국ㆍ프랑스 제국ㆍ폴란드 바르샤바 공국 / 대영 제국ㆍ러시아 제국ㆍ프랑스 왕당파ㆍ프로이센 왕국ㆍ신성 로마 제국ㆍ오스트리아 제국ㆍ헝가리 왕국ㆍ스페인ㆍ포르투갈 왕국ㆍ스웨덴ㆍ이란 카자르 왕조ㆍ바이에른 왕국ㆍ오스만 제국
• 병 력 : 프랑스군- 150만 명 / 대영 제국- 75만 명ㆍ러시아 제국- 90만 명ㆍ프로이센- 32만 명
"프랑스 혁명ㆍ나폴레옹 전쟁"으로 유럽의 여러 나라가 1792년부터 "프랑스"에 대항하여 몇번의 군사동맹을 맺었다. "프랑스"에서 일어난 "왕정 전복ㆍ루이 16세의 처형"으로, 유럽 지도자들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고, 그들은 "프랑스 공화국"을 타도하려는 서약을 맺는다. 하지만, 오히려 "프랑스"에 패배하여, "혁명정부"의 세력 확장과 종속국을 만드는 것을 허락하는 꼴이 되었다. 이런 "프랑스"의 군사적 성공은 그들의 뛰어난 사령관인 "나폴레옹"를 영웅으로 만들었다. 1799년, "나폴레옹"은 성공적인 "쿠데타"로 "프랑스의 제1집정 "에 올랐으며, 5년 뒤 "황제"에 즉위하였다.
초기의 "혁명 정권"과의 주변국 마찰만큼이나, "나폴레옹 정권"과도 불편한 관계는 계속되었다. "나폴레옹"에 반대하는 새로운 군사동맹에 형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 군대"는 계속적으로 유럽을 정복해 나갔다. 그러나 1812년 "프랑스의 러시아 정벌" 실패 이후, 전쟁 양상은 바뀌기 시작하였다. 다음해, 제6차 "대프랑스 동맹" 동안, "동맹국 군대"는 "프랑스 군대"를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격파하였다.
1799년, "프랑스 통령 정부"의 첫 통령이었던 "나폴레옹"은 "프랑스 제1공화국"을 다스리는 동안, 안정적인 재정을 확보하고, 강력한 관료체제를 만들었으며, 잘 훈련된 군대를 육성했다. 1805년, "오스트리아 제국ㆍ러시아 제국"은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을 재개했고, 나폴레옹은 이에 맞서 1805.12월,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영국"은 1805.10월 바다의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스페인- 프랑스 연합함대"를 격파해 "나폴레옹의 영국침공 계획"을 무산시켰다.
한편 "프로이센 왕국"은 "프랑스"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우려해, 1806.10월 "프랑스"와 전쟁을 개시했지만,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패배했고, 1807.06월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러시아 제국군"도 패배하였다. 이후 "틸지트 조약"이 체결되었지만, 평화는 오래 가지 못했다. 1809년, 전쟁은 재발했고, "바그람 전투"에서 "연합군"은 패배했다.
"영국"을 경제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해, "대륙봉쇄령"을 발표한 "나폴레옹"은 1808년, "이베리아 반도"를 침공해, "스페인 국왕"으로 "조제프 보나파르트(형)"을 옹립했다. "스페인ㆍ포르투갈"은 "영국"의 지원하에 봉기했고, 1814년까지 "프랑스"와 전쟁을 벌인 후, "이베리아 반도"에서 "프랑스"를 축출했다. 동시에 경제적 타격을 입을 것을 우려한 "러시아 제국"이 "프랑스의 대륙봉쇄령"을 따르지 않음으로써 "나폴레옹"은 1812년 "러시아 원정"을 감행했다. 그러나 "러시아 원정"에서 "프랑스 대 육군"이 궤멸된 이후 철수하면서, 이에 힘입은 "러시아 제국ㆍ오스트리아 제국ㆍ프로이센"은 "프랑스"를 상대로 새로운 전쟁을 개시했다.
1813.10월, "3국"은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나폴레옹"을 결정적으로 패배시킨다. 이후 "영국"을 비롯한 "연합군"은 "프랑스"를 침공해, 1814.03월 말, "파리"를 함락시켰다. "연합국"은 1814.04월, "엘바 섬"에 "나폴레옹"을 유폐시키고, "부르봉 왕정복고"를 단행한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1815.02월, "엘바 섬"을 탈출해, "프랑스"에 대한 통치권을 회복했다.
"연합국"은 이에 맞서, "대프랑스 동맹(제7차)"를 결성하고, 1815.06월 "워털루 전투(벨기에 근처)"에서 패배한 "나폴레옹"은 완전히 몰락하고, 영국령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를 가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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