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전쟁 (7Years' War)"은 18C의 거의 모든 시기를 통해, 세계에서 적대하게 되는 "프랑스ㆍ영국" 사이의 전쟁은 "백년 전쟁"에 비유하여, "제2차 백년전쟁"이라고도 한다. 1756~1763년,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에서 "프로이센"에게 패배해, "독일" 동부의 비옥한 "슐레지엔(철ㆍ석탄의 땅)"을 빼앗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가 그곳을 되찾기 위해, "프로이센"과 벌인 전쟁이다.
1. 7년 전쟁 (7 Years' War)
"제1차 세계 대전"으로부터 160년 전에 일어난 이 "7년 전쟁"은 아마도 진정한 의미에서 "최초의 세계 대전"이었으며, 전 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유럽의 정치 지도를 재편했을 뿐만 아니라, 19C "팍스 브리타니카", "독일"에서 "프로이센"의 지위 상승, "미국 독립 혁명과 프랑스 혁명"의 원인이 되었다. 이 전쟁에는 유럽의 거의 모든 열강이 참여하게 되어, 유럽뿐 아니라, 그들의 식민지가 있던 "아메리카ㆍ인도"에까지 퍼진 "세계대전"으로 번진 대규모 전쟁이었다.
• 일 시 : 1756~1763 • 장 소 : 유럽ㆍ북아메리카ㆍ인도ㆍ아프리카ㆍ필리핀 • 결 과 : 파리 조약 (프랑스- 스페인- 영국 사이의 조약)ㆍ후베르투스부르크 조약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작센 사이의 조약)ㆍ영국 왕국의 북아메리카/ 인도 식민지 획득ㆍ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영유권 확정ㆍ간접적인 미국 독립 전쟁ㆍ프랑스 혁명에 영향
• 교전국 승리 : 프로이센ㆍ영국 왕국ㆍ아일랜드 왕국ㆍ영국령 북아메리카ㆍ하노버 선제후국ㆍ이로쿼이 연맹 ㆍ포르투갈 왕국(1762~)ㆍ브라운슈바이크 공국ㆍ헤센 대공국ㆍ샤움부르크리페 공국 / 패배 : 신성 로마 제국ㆍ합스부르크 군주국ㆍ프랑스 왕국ㆍ러시아 제국(1762~)ㆍ작센 왕국ㆍ헝가리 왕국ㆍ바이에른 선제후국ㆍ스웨덴(1757~1762)ㆍ스페인(1762~)ㆍ나폴리 왕국ㆍ무굴 제국(~1757)ㆍ아베나키
"인도의 무굴 제국"이 "프랑스"의 지지를 받으며, "영국"에 의한 "벵골 지방"의 침공을 저지하려고 했다. 주로 "오스트리아-프랑스-작센-스웨덴-러시아"가 동맹을 맺어, "프로이센-영국-하노버"의 연합에 맞섰다. 유럽에서는 영국의 지원을 받은 "프로이센"이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어, "슐레지엔의 영유권"을 확보했으며, 식민지 전쟁에서는 "영국"이 주요 승리를 거두어, "북아메리카의 뉴 프랑스"(현재의 퀘벡 주와 온타리오 주)를 차지하여, "북아메리카"에서 "프랑스 세력"을 몰아냈고, "인도"에서도 "프랑스" 세력을 몰아내어, "대영제국"의 기초를 닦았다.
이 전쟁을 최초의 "세계 대전"으로 선정하게 되면, 그 이전의 "80년 전쟁ㆍ30년 전쟁ㆍ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ㆍ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ㆍ나폴레옹 전쟁"에서도 유사한 비판이 이루어질 수 있다. 유럽에서 벌어진 전쟁은 "포메라니아 전쟁"으로도 불리며, "영국ㆍ프랑스"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벌어진 "프렌치-인디언 전쟁"이라 불렸다. • 미국 : 프랑스-인디언 전쟁 • 스웨덴-프로이센 : 포메라니아 전쟁(1757~1762) • 프랑스계 캐나다 : 정복 전쟁 • 인도 대륙 : 제3차 카나틱 전쟁(1757~1763) • 프로이센-오스트리아 : 제3차 슐레지엔 전쟁(1756~1763)
2.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1740.12~1748.10)은 모든 유럽 강대국이 얽힌 전쟁
지역 : 유럽ㆍ북아메리카ㆍ인도
여자의 왕위 계승을 금지하는 "살리카 법"에 따라,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가 "합스부르크 왕가를 계승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구실을 내세우며, 각국이 개입함으로써 시작되었다. 1740.10.20일,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장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의 사망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아버지 "카를 6세"의 자리를 계승받아, "헝가리ㆍ보헤미아의 왕이자, 오스트리아의 대공ㆍ파르마의 공작"이 되고자 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자신이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토를 계승하고, 자신의 남편인 "로트링겐 공작 프란츠 1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될 수 있도록 계획을 세웠다.
"합스부르크 왕가"를 여성이 계승할 경우, 사단이 날 것임은 충분히 예측가능한 일이었다. 이에 "카를 6세"는 "독일"의 여러 국가로부터 "1713년 국사조칙"을 준수해주길 요청하였고, 설득에 성공하였다. 문제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가 1573년의 "브리크 조약"에 의해, "브란덴부르크의 호엔촐레른 가문"이 "브리크 공국"을 상속받으므로, "슐레지엔의 계승권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발생하였다. "프랑스"와 연합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이를 핑계로 "국사조칙"을 파기하고, 1740.11.16일 "슐레지엔"을 침공했다. "오스트리아"를 지원하던 "영국ㆍ오스트리아" 군대는 1743.06월 "바이에른의 데팅겐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섬멸했다.
당시 "마리아 테레지아"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나약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고, "바이에른의 카를 알베르트(신성 로마 황제 카를 7세ㆍ마리아 테레지아의 잠재적 경쟁자)"는 남성인 자신이 "신성 로마 제국"의 선제후로서, 직접적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선거에 출마할 수 있다며,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자신의 "황위계승권"을 주장하였다. 1745.01월,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을 주장하던 "신성 로마 황제 카를 7세"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는 "바이에른"을 반환하는 대가로 "왕위계승권"을 포기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다시 전쟁에 돌입했다. "제2차 슐레지엔 전쟁"은 "프로이센"이 1745.12월 "드레스덴 조약"으로 "슐레지엔"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받고 일단락되었다.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이 계속 이어졌다. 1748.10월, 체결된 "엑스라샤펠 조약"은 "오스트리아"의 영토 대부분에 대한 "마리아 테레지아"의 상속권과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소유권"을 다시 확증했다.
3. 개 요
"영국ㆍ프랑스" 간의 분쟁은 1754~1756년에 "영국"이 "프랑스"의 "북아메리카 식민지"를 공격하고, "프랑스" 상선 수백 척을 나포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한편,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던 "프로이센"은 "독일ㆍ오스트리아" 내외의 주도권을 놓고 다투고 있었다. 1756년, "외교 혁명"이 이루어졌다. 전쟁이 임박한 것을 예감한 "프로이센"은 예방 전쟁 차원에서 "작센"을 침공하여 유린했다. 이런 행위에 전 유럽이 어수선해졌다.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잃은 "슐레지엔"을 탈환하려고 했기 때문에, "프로이센"은 "영국"과 "영보 동맹"을 체결했다.
"제국"의 제후국 대부분은 마지못해 하면서도 "제국 의회"의 의결에 따라, "오스트리아" 측에 참전했다. 그러나 "영보 동맹" 측에도 제국의 일부 제후국이 참여를 했다. "스웨덴"은 이전에 "프로이센"에 빼앗긴 "포메라니아"의 탈환을 노리고, "반 프로이센 동맹"에 참전했다. "스페인"은 "제3차 가족 협약"에 따라 "프랑스 측"에 참전했지만, 양국이 1762년에 일으킨 "포르투갈 침공"은 대패로 끝났다. "러시아 제국"은 처음에는 "프로이센"의 "폴란드"에 대한 야심을 견제할 목적으로 "오스트리아" 측에 참전했지만, 1762년에 "표트르 3세"가 황제로 즉위하자, "프로이센" 편을 들었다.
이전의 전쟁과는 달리, "유럽 중소국 대부분"은 한 편의 참전국과의 분쟁을 이어가고 있었지만, "7년 전쟁"에 휘말리는 것은 피하고자 했다. "프레데리크 5세"가 다스리던 "덴마크-노르웨이"가 그 예로, "표트르 3세"가 즉위했을 때는 하마터면 "프랑스 측"에 참전할 뻔 했지만, 양국 간의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표트르 3세"가 폐위되었다. 오랫동안 "영국"의 동맹국이었던 "네덜란드"는 "영국ㆍ프로이센"과 유럽 열강 사이의 싸움에 휘말려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여 "중립"을 견지했다. 그리하여 "친수라 전투"를 통해, 한때 "영국"이 "인도"를 지배하에 두는 것을 막으려했다. "나폴리 왕국ㆍ시칠리아 왕국ㆍ사르데냐 왕국"은 심정적으로 "부르봉 왕가"를 지지했지만, "영국"이 두려워, "동맹 가입"을 거부했다. "러시아"는 전쟁으로 인한 증세가 있었던 데다, 1759년에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황후"가 "겨울 궁전" 증축을 위해, 염세ㆍ주세를 징수하여, 백성을 괴롭혔다. "스웨덴"과 마찬가지로 "러시아"는 "프로이센"과 단독으로 강화했다.
"영국"은 "북아메리카의 누벨 프랑스의 대다수ㆍ스페인령 플로리다ㆍ서인도 제도의 일부 섬ㆍ서아프리카 해안의 세네갈 식민지ㆍ인도에서 프랑스 교역 지역에 대한 우월"을 획득했다. "아메리카 원주민"은 협약에 참여하지 못했고, 그 불만으로 "폰티악 전쟁"을 일으키지만, "7년 전쟁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는 데는 실패했다. 유럽에서 "프로이센"은 계속 고전했지만, 운 좋게도 "프리드리히 대왕"은 "슐레지엔의 영유권"을 확고히 했고, "프로이센"은 이제 유럽 열강의 일각을 차지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는 본래의 목적이었던 "슐레지엔의 수복"을 달성하지 못했지만, 그 군사력을 각국에 과시할 수 있었다. "포르투갈ㆍ스페인ㆍ스웨덴"은 참전했지만, 소득은 없었고, 대국의 지위조차 회복하지 못했다.
"스페인"은 "플로리다"를 잃었지만, "프랑스령 루이지애나"를 획득했고, 그 이외의 식민지인 "쿠바ㆍ필리핀"은 임시적으로 "영국"에 점령되었지만, "평화 조약"을 통해 반환받게 된다. "프랑스"는 많은 식민지를 잃어버리게 되었고, 거액의 채무를 떠안아, 결과적으로 원래 취약했던 재정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후, "프랑스ㆍ스페인"은 1778년,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하여 "영국"에 보복하며, 그 패권을 한꺼번에 잡으려 했다.
4. 결과ㆍ영향
"7년 전쟁"은 유럽의 오래된 체제였던 "아우크스부르크 동맹 체제(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반부르봉 왕가의 틀)"의 종식을 가져왔다. 전후, "샌드위치 경"의 집권기에 "영국"은 이 체계의 재확립을 시도했다. "오스트리아ㆍ네덜란드ㆍ스웨덴ㆍ덴마크-노르웨이ㆍ오스만 제국ㆍ러시아" 등 열강 동맹들과 싸워 놀라운 성공을 거둔 이후, 유럽 국가들은 "영국"을 "프랑스" 보다 강한 위협으로 간주하여, 동맹참여를 거부하였다. 또한 "프로이센"도 1762년에 "영국"이 단독으로 강화를 시도한 것을 배신으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미국 독립 전쟁"이 국제적 전쟁으로 확대된 1778~1783년까지, "영국"은 유럽 국가들의 "대 동맹"과 전투에 직면하였고, "영국"의 주요 동맹국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프랑스ㆍ영국" 사이의 전투는 1763년 "파리 조약"으로 종결되었다. 조약에서 복잡한 영토 교환을 정리하고, 그 중 가장 영향이 큰 것은 "프랑스"가 "루이지애나"를 "스페인"에게 주고, "누벨 프랑스"의 영토 중 "생피에르 미클롱"을 제외하고, 모두 "영국"에 할양한 것이었다. "프랑스"는 "누벨 프랑스"를 선택하거나, 또는 "카리브 해"의 "과들루프"나 "마르티니크"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서, 결국 "설탕"을 생산하는 후자를 선택하였다. "누벨 프랑스"는 비생산적이고, 유지비용만 높은 식민지로 치부했다. "프랑스"는 또한 "미노르카 섬"도 "영국"에게 반환했다.
"스페인"은 "플로리다"를 "영국"에 내줬지만, "프랑스"로부터 "오를레앙 섬(현, 뉴올리언스)"과 "미시시피 강" 서쪽의 모든 "프랑스 영토"를 얻었다. "영국"은 "카리브 해"의 섬들로부터 이미 충분한 "설탕"을 공급받았고, "누벨 프랑스ㆍ플로리다"의 획득으로 그들은 "미시시피 강" 동쪽에 있는 모든 "북아메리카 지역"을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인도"에서는 "영국"이 "북 사르카르"를 유지했지만, "프랑스"의 교역 지역은 모두 반환했다. 그러나 조약에서 "프랑스" 교역 지역의 요새를 모두 파괴하고, 재건을 금지하도록 규정했으며, 주둔군도 최소한의 인원만 유지하도록 하여, 군사 기지로는 쓸 수 없게 했다. 또한 "프랑스"와 동맹을 맺은 "벵골 태수"는 폐위되었고, 전쟁의 결과로 "하이데라바드국"도 "영국"으로 전향했기 때문에 "프랑스"는 "인도"의 세력을 거의 상실했고, "영국"이 "인도"에서 주도권을 잡고, "인도" 대륙 전체를 지배하에 두는 결과를 가져왔다. "프랑스 해군"도 전쟁으로 거의 무력화되다시피 했다. "스페인"과 함께 대규모 재건을 거쳐, 다음 전쟁에서 간신히 "영국의 제해권"에 도전할 수 있게 되었다.
"영국의 뷰트 백작"이 주도한 "화약"은 "윌리엄 피트"가 내세웠던 것보다 훨씬 관대했다. 그는 "프랑스"와 오랫동안 평화를 유지하길 원했고, 만약 너무 많은 것을 삼킨다면 유럽 전체가 질투심으로 뭉쳐, "영국"을 적대할 것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슈와절 공작"은 영구적인 평화를 가져갈 생각이 없었고, 결과적으로 "미국 독립 전쟁"동안, "프랑스"가 "영국"에 선전포고했을 때, "영국"에게 도움을 주는 유럽의 동맹국은 없었다. "프랑스"의 패배는 주요한 군제 개혁을 가져왔고, "포병"에 중점을 둔 개혁이 이루어졌다. 이후 "프랑스 혁명 전쟁ㆍ나폴레옹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프랑스 대포"의 기원은 1763년에 시작된 "군사 개혁"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작센" 간의 "후베르투스부르크 조약"은 1762.12.31일에 "드레스덴- 라이프치히"의 사이에 있는 "사냥 오두막"에서 협상이 시작되어, 1763.02.15일에 정식으로 체결되었다. "러시아의 표트르 3세"가 "작센"의 확보를 지원할 경우, "동프로이센"을 이양하기로 한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2세"는 결국 "러시아"를 협상에서 제외할 것을 고집했다. (실제로 러시아는 이미 교전국이 아니었다.) 또한 동시에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가 배상금을 포기하기 전까지 "프로이센군"을 "작센"에서 철수하는 것을 거부했다.
"오스트리아"는 1760년에 점령한 "글라츠(현, 폴란드령 클라츠코)"를 계속 보유하기를 원했지만, "프리드리히 2세"는 거부했다. 결국 조약은 1748년을 기준으로 원상회복하는 것으로 정해졌고, "슐레지엔ㆍ글라츠"는 "프로이센"에, "작센"은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에게 반환되었다. "프리드리히 2세"가 "오스트리아"에게 한 양보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선거 때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에게 투표한다."는 동의뿐이었다. "작센"은 전쟁으로 약화되고, 파산했다. 영토를 상실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작센"은 "프로이센ㆍ오스트리아"의 전장이 되었고, 수도인 "드레스덴"을 포함하여, 많은 중소 도시들이 포격ㆍ약탈로 큰 피해를 입었다.
"오스트리아"는 "슐레지엔 탈환"에도 실패했고, 별다른 영토도 획득하지 못했다. 그러나 "프로이센"의 "작센 침략"은 막아냈다. 게다가 "오스트리아 군대"의 전공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의 그것보다 훨씬 상회하여, "마리아 테레지아"의 행정과 군제 개혁의 성공을 증명했다. 따라서 "오스트리아"는 체면을 크게 회복했고, 나아가 제국의 유럽에서의 발언권도 회복했다. 또한 "프리드리히 2세"가 "요제프 2세"에게 투표할 것을 약속함으로써, "합스부르크가"의 "신성 로마 제국"의 우위를 인정받는 결과가 되었다.
"프로이센"의 유럽 열강으로 생존은 "프리드리히 2세"와 "프러시아 군대"의 위신이 크게 끌어올렸고, 장기적으로는 "독일"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을 감소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는 제국 자체에서의 새로운 정세에서 멀어졌던 것이다. "프로이센"의 부상 이외에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는 비효율적이기는 하지만, 이후 "아우구스트 3세"로 "폴란드 왕"을 겸할 수 있었으며, "작센ㆍ폴란드" 모두에서 군대를 편성할 수 있었다. "바이에른"은 세력을 키워가며, "오스트리아"의 영향을 받지 않고, 군대 배치에 대한 더 많은 독자적인 통제권을 주장함에 따라 독립도 분명해지면서, "바이에른"은 자신의 의지로 전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제는 적국이 된 "하노버"가 "조지 3세" 치하에서 개인적으로 연합했기 때문에, "하노버"는 미래의 분쟁에 대항할 상당한 힘을 모았고, 심지어는 "영국"까지 끌어들였다. 이 힘의 원동력은 "독일 제국"의 미래와 이후의 갈등에 중요했다. 이 전쟁은 또한 "마리아 테레지아"의 개혁이 "프로이센"과 경쟁하기에 여전히 불충분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게다가 "프로이센"과 달리 "오스트리아"는 전쟁이 끝났을 때, 대부분 재정은 파탄에 가까운 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마리아 테레지아"는 전쟁이 끝난 후, 20년 동안 행정 개혁에 전념해야 했다.
"프로이센"은 전쟁을 통해 더 이상 도전받지 않는 "열강 세력"으로 등장했다. 행운(옐리자베타의 사후, 러시아의 전향)과 "영국"의 재정적 지원에 대한 부채는 이내 망각된 반면, 그의 열정과 군사적 천재성에 대한 기억은 아주 인상 깊게 남아 있었기 때문에, "프리드리히 대왕"의 개인적인 명성은 크게 높아졌다. "프로이센"이 위대한 전성기를 맞이하는 중요한 순간으로 묘사되긴 했지만, 전쟁은 "프로이센"을 약화시켰다. "프리드리히 2세"의 철저한 토지 개혁과 이주 장려로, 이런 문제들이 이내 해결되지 했지만, "프로이센"의 영토와 주민은 황폐화되었다. "프로이센"은 전쟁에서 많은 병력과 특히 유능한 장교가 큰 손실을 입었고, 그 여파로 전쟁이 끝난 후 "프리드리히 2세"는 "프로이센 군대"를 전쟁 전과 같은 정도까지 재건하지 못했다.
1779년, "바이에른 왕위 계승 전쟁"에서 "프리드리히 2세"가 친정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군"은 형편없는 전투를 벌였다. 1792~1795년까지의 "프랑스 혁명 전쟁"에서도 "프랑스 혁명군"에 대해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1806년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전멸당하는 결과를 냈다. 결국 1806년 이후가 되어서야, "예나"에서 입은 재난을 복구하기 위해, "프로이센 정부"가 개혁을 단행하게 되었으며, 그것은 19C 말 "프로이센"의 화려한 승리를 가져오게 된다. 어쨌든, 이러한 것들은 모두 이후의 이야기이며, 1763년 직후의 시점에서는 여러 나라들이 "프로이센"에 장교를 보내 그 군사력의 비밀을 배우려고 했다.
"7년 전쟁" 후, "프로이센"은 유럽에서 가장 많이 본받게 된 나라였다. "프로이센"은 전쟁 승리를 통해, 보이지 않는 커다란 성과를 얻었다. "폴란드"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을 완전히 배제시켰던 것이다. 1772년, "제1차 폴란드 분할"은 "러시아ㆍ프로이센"의 거래였다. "오스트리아"는 마지못해 관여를 했지만, "프랑스"는 아예 무시되었다. 비록 전쟁은 무승부로 끝났지만, (많은 이들이 "러시아 군"이 "프로이센" 영토에서 "프로이센 군"에 승리할 것으로 예상하지 못했던 것도 있고) "러시아 제국 군대"가 "프로이센 군"에 대해 선전한 것은 유럽 정치계의 한 변인으로써, "러시아"의 평판을 끌어올렸다.
"데이비드 스톤(미국의 역사학자)"는 "러시아 병력"이 서로 "눈 깜짝하지 않고", 1차례 일제 사격을 주고받으며, "프러시아 군"에 대항해 정면으로 맞설 수 있는 능력을 입증했으며, "러시아 장군"의 기량이 들쑥날쑥함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군"은 전쟁에서 단 1차례도 결정적으로 패배하지 않았음을 주시했다.
"러시아 군"은 전장에서 "을 몇 차례 격파했지만, "러시아 군"은 병참 지원이 정비 부족했기 때문에 전과를 확보할 수 없었다. 따라서 "프러시아(프로이센 군)"이 살아남은 이유는 전투적 우위로 인한 것이라기보다는 "러시아 군"의 보급선이 약했던 것이 주된 이유였다. 어쨌든, "러시아 군"이 장군의 평범한 수완에도 불구하고, 적지에서 유럽 최정예 군에 승리한 것은 유럽에서 "러시아"의 지위를 향상시켰다. 전쟁의 오래된 유산 중 하나는 "러시아 군"에 병참이라는 약점을 각성하고, "러시아 군"의 병참 개혁을 가져왔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보급 체계는 "러시아 군"이 1787~1792년까지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이는 동안, "발칸 반도"로 진격할 수 있게 했으며, "알렉산드르 수보로프 원수"가 1798~1799년까지 "이탈리아ㆍ스위스"에서 효율적으로 작전을 수행하게 했으며, 1813~1814년까지는 "독일ㆍ프랑스"를 넘어 "파리"를 점령하게 했다. 이것은 "7년 전쟁"에서 "러시아 군"이 경험한 보급 문제에 직접 대응해서 만들어졌던 것이다.
"영국" 정부도 재정난에 허덕였고, 게다가 새롭게 지배하에 둔 "프랑스계 캐나다인"과 "프랑스"를 지원한 "인디언"을 진압해야하는 과제에 직면해 있었다. 1763년, "오대호 지역ㆍ북서부(현, 미국 중서부)"에서 "인디언"이 반란을 일으켜, "폰티악 전쟁"이 발발했다. "폰티악 전쟁"은 "영국"이 일시적으로나마, "오대호 지역ㆍ북서부"의 지배권을 잃었을 정도로 대규모 전쟁이었다. "오타와 족"을 이끄는 "폰티악 추장"이 "프랑스 세력"이 잠식되어 가는 것에 불만을 품고 "영국"의 통치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연맹 지도자로서의 그의 역할은 "영국"에 의해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인디언"은 "프랑스"와 오랜 "모피 교역"을 통해 친분을 다져왔었지만, "프랑스"가 패전하고 "미국"의 식민지를 "영국"에 할양해야 했기 때문에, "영국계 미국인 모피 상인"과 교역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인디언"들은 "영국계 상인"에 모피를 판매하면서 속임수를 쓰자, 분노했다. 게다가 무역만이 목적이었던 "프랑스"와 달리, "인디언"들은 "영국"의 통치로 백인 이주민이 유입되어 "인디언"들을 쫓아낼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1763년 중반, "영국 디트로이트 요새(현,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ㆍ나이아가라 요새(현, 뉴욕 주 영스타운)ㆍ피트 요새(현, 펜실베이니아 피츠버그)"만 지켜졌고, 나머지 요새는 모두 "인디언"에 의해 점령당했다. "부시런 전투"에서의 승리만이 "영국 오대호 지역"에서 완패를 막았었다. 1763년, "조지 3세의 선언"은 백인 식민지 개척민이 "애팔래치아 산맥"의 서쪽으로 이주를 금지한 것으로, 그 목적은 "인디언"과의 관계를 안정시키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디언의 땅"을 탐내고 있었던 13개 식민지 사람들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프랑스계 캐나다인"과의 관계의 안정화를 목적으로 제정한 "퀘벡 법"도 "미국" 식민지 이주민들의 분노를 부채질했다. 이 법은 "가톨릭 신앙ㆍ프랑스어"를 보호하는 것으로, "미국" 식민지 사람들을 화나게 했지만, "퀘벡" 사람들은 "미국 독립 전쟁" 시기에 반란을 일으키지 않고, "영국 본토"를 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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