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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사건 • 전쟁 • 혁명 • 학살

전쟁- 1524~1525 : 독일 농민전쟁 ② 마르틴 루터ㆍ장 칼뱅

by 당대 제일 2022.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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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개조 반박문"은 1517.10.31일, "면죄부 문제"에 관한 논쟁을 위해, "마르틴 루터 (Martin Lutherㆍ1483~1546ㆍ63세ㆍ독일)"가 "비텐베르크 (Wittenberg독일 동부 작센안할트 주에 있는 도시)"의 성곽 교회인 "슐로스키르헤 문(門)"에 라틴어로 써서 붙인 글이다.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신학교수이던 그는 "95개 논제"를 내세우며, 본격적으로 종교 개혁을 주도하였다. 그가 "95개 논제"를 문에 써 붙인 "성벽 교회", 그가 강론한 "시립 교회", 그가 살았던 "수도원" 등이 남아 있으며, "비텐베르크 대학교""할레 대학교"와 합병하여, 현재 "할레"에 있는 "할레 비텐베르크 마르틴 루터 대학교"로 남아 있다이들 "종교개혁" 관련 유적지들은 그의 고향 "아이슬레벤 (Eisleben독일 중동부 작센안할트 주에 있는 도시하르츠 산맥 기슭, 할레 서쪽 약 30km 지점에 위치)"의 유적지와 함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1. 마르틴 루터 (Martin Luther)ㆍ장 칼뱅 (Jean Calvin)

마르틴 루터 (Martin Lutherㆍ1483~1546ㆍ63세ㆍ독일)

종교 개혁자ㆍ성직자ㆍ신학자ㆍ사제(司祭,1507)ㆍ신학박사(1512)ㆍ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 10곳을 감독(1515)

장 칼뱅 (Jean Calvinㆍ1509~1564ㆍ55세ㆍ프랑스)ㆍ존 칼빈ㆍ요한 칼빈

종교개혁가종교개혁의 2세대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ㆍ종교개혁자ㆍ개혁교회 신학자ㆍ기독교 사상 중 하나인 "칼뱅주의(개혁주의)"의 개창자로, "마르틴 루터츠빙글리"가 시작한 종교 개혁을 완성, 저서 "기독교 강요(1536)"는 기독교 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역사문학 등 여러 분야에 큰 영향을 주었다. (왼쪽부터, 마르틴 루터ㆍ장 칼뱅)

2. 95개조 반박문 : 95개 조항ㆍ95개 논제 (論題)ㆍ95개조 의견서

1517.10.31일, "면죄부 문제"에 관한 논쟁을 위해,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의 성곽 교회인 "슐로스키르헤 문(門)"에 라틴어로 써서 붙인 글. 이 조항들은 "면죄부 문제"에 관한 "교황의 대권(大權)"을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교황의 정책"을 비판하는 암시가 들어 있었다. "루터"는 자신이 제기한 문제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을 알고, "95개조 반박문"에 대한 설명을 실은 장문의 "라틴어 문서"를 1518년 가을에 출판했다.

"95개조 반박문"은 "독일어"로 번역ㆍ인쇄되어, "면죄부 사건"에 관한 단순한 항의에 그치지 않고 서방 교회 역사상 가장 큰 위기를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마르틴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한 직접적인 원인은 "로마"에 있는 "성베드로 대성당"을 개축하는 데 필요한 재정을 대기 위해, "면죄부"를 발행한 일이었다. "면죄부"란 "죄의 대가로 받을 형벌을 돈으로 면제받는 것"으로, "트리엔트 공의회(1545~63)"에서 교리로서 규정되었다.

16~17C 유럽의 대표적인 종교인 "가톨릭"이 부패할 대로 부패했을 때다. 그래서 "가톨릭교회"의 쇄신을 요구하면서, 개혁 운동이 일어났는데, 대표적인 "종교 개혁자"로는 "루터ㆍ칼뱅"이 있다. 처음 종교 개혁을 이끈 인물은 "루터"다. 물론 "루터" 이전에도 종교 개혁자가 있었지만, 본격적인 개혁 운동을 일으킨 인물이 바로 "루터"이기 때문에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힌다. "루터"는 "독일 에르푸르트"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사" 출신으로 "비텐베르크 대학 교수"로 지내던 중, 1517.10.31일 속죄의 효력에 관한 "95개의 조문"을 발표한 것이 "종교 개혁"의 시작이 되었다. 이 조문에는 당시 "면죄부 판매"에 대한 비판을 비롯해 "교황권"에 대한 것을 중요한 논점으로 삼았다.

이런 "루터의 복음주의"는 "독일"에서 강력한 지지를 받았고, 이에 "로마 가톨릭"에서는 "루터가 주장을 철회하지 않으면, 수도사직을 파문한다."는 내용의 교서를 발표하게 된다. 하지만 "루터"는 이 교서를 대중들 앞에서 불 속에 던져 버렸다. 그리고 "루터"는 "신약 성서"를 자신이 해석한 "루터역 성서"를 발표하고, "복음주의" 선교를 하는 등, "로마"로부터 "이단"이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루터파의 개신교"가 서서히 자리를 잡게 되었다. "스위스 제네바"에서는 "칼뱅"에 의한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결국 최종적으로 "칼뱅의 종교개혁"이 승리한다. "프랑스"의 신학자 "칼뱅"은 "복음주의"에 대한 탄압을 피하여, "스위스"로 망명해, "루터" 이후의 종교 개혁을 이끈 인물이다. 그는 "그리스도교 강요"를 출판하고, "제네바의 종교개혁 운동"을 통해, "프로테스탄티즘 확대"에 큰 역할을 했다.

3. 마르틴 루터 (Martin Lutherㆍ1483~1546ㆍ63세ㆍ독일)

"면죄부 판매"에 "95개조 논제"를 발표하여 "교황"에 맞섰으며, 이는 "종교개혁"의 발단이 되었다.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여, 독일어 통일에 공헌하였으며, 새로운 교회 형성에 힘써 "루터파 교회"를 성립하였다. 1521.01.03, "교황"으로부터 파문 당한다. 독일의 성직자 "마르틴 루터"는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청천벽력과도 같은 파문 처분을 받는다.

당시 성직자에게 "파문"은 성직이 박탈됨과 동시에 교회에는 출석도 할 수 없고, 그 안에서 장례식도 치를 수 없게 되는 것으로 참으로 치명적인 벌이었다. 자신의 "95개조 반박문"에 반하여, 면죄부 판매 "설교사 테첼"이 작성한 "106개조 반박문"을 들고 대항하였다. 이 사건은 훗날 "중세"를 마감하고, "근대"를 여는 계기가 된다.

"루터"의 성직 박탈이 오늘날 전 세계에 가장 널리 퍼진 "개신교(프로테스탄트)의 탄생"을 가져오리라는 것은 당시로서는 쉽게 짐작할 수 없는 일이었다.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의 철옹성 같은 권위를 무너뜨리고, 수많은 "개신교 종파"의 효시가 되었으며, "가톨릭교회"에까지 개혁의 바람을 일으킨 "루터"의 혁명적인 정신은 르네상스 이상으로 "근대"를 여는 중요한 열쇠였다. 신대륙의 발견과 산업 발달로 육체가 근대화되었다면, 르네상스로 정신이 새 옷을 입었고, "프로테스탄트 탄생"으로 영혼이 비로소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루터"는 "신학"의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신의 인간에 대한 철저한 은혜와 사랑에 두고, 인간은 이에 신앙으로써 응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간은 하느님께 반항한 죄인이지만, 그리스도 덕분에 죄를 용서받아 "자유로운 군주"이자, "섬기는 종"이 되는 것이며, 모든 직업은 신의 소명(召命)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4. 루터의 "코페르니쿠스 (1473~154370세ㆍ지동설 주창)"에 대한 생각

지동설(地動說 : 태양중심설)의 제창자ㆍ폴란드 천문학자"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체계는 전통적인 교회의 입장과 다른 것이었지만, 적어도 당대에는 탄압받지 않았다오히려 "교황청"의 일부 인사들은 그의 이론을 옹호하기까지 했지만, 물론 비판이 없지는 않았다. 예컨대 그와 동시대인인 "종교개혁가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하늘이나 하늘의 덮개, 해와 달이 아니라 지구가 회전한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발버둥치는 오만불손한 주장이 나왔다. 그 바보는 천문학 전체가 뒷걸음치는 걸 바라고 있다."

5. 루터 "반유대주의"

"루터"는 1543년에 발표한 "유대인들과 그들의 거짓말(Die Juden und ihre Lügen)"이라는 글에서 "유대인의 회당을 불 지르고, 그들을 죽이고, 매장하고, 회당을 무너뜨리고, 탈무드를 빼앗으라."고 주장하며, 갑자기 "유대인 탄압"을 선동한다. "루터"의 이런 주장은 19C 초, "반유대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독일"에서 "기독교 사회노동당" 대표인 "아돌프 슈퇴커(Adolf Stoecker)"에 의해 널리 퍼져 나갔고, "나치"에게 파급되었다. 또한 "루터"는 "지옥에 갈 것"이라고 협박까지 해 가면서, "유대인"들에 대해 인도주의를 제공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6. 루터, 전직 수녀 (16세 연하)와 결혼하다.

1525.06.13일 "루터"는 결혼식을 올리는데, 결혼도 종교적 신념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뿐만 아니라 후세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신부는 16년 연하의 전직 로마 가톨릭 교회 수녀인 "카타리나 폰 보라(1499~1552향년 53세)"였다. "루터"가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동료들은 모두 반대했다. 그들은 온 세상과 사탄이 웃을 것이며, 그동안 이루어놓은 일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다고 걱정했다.

특히, "농민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의 혼인 선언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루터"의 강한 신념은 이런 염려에 전혀 굴하지 않았다. "루터"는 "종교개혁"과 함께 복음이 전파되자, "사탄이 마지막 공격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처음에 동정적인 태도를 보였던 "농민전쟁"에 대해서도 나중에는 "복음을 독재 체제로 왜곡시키려는 사탄의 공격"이라고 보고 영주들에게 강경 진압을 요구했다.

이렇게 "종말이 왔다"고 생각했을 때, "루터"는 결혼을 결심한 것이다. 종말에 하느님이 오면, 인간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 "루터"는 결혼을 해 자식을 낳는 것이 "사탄에게 대적하는 방법"이라고 믿었다. "루터"의 이와 같은 생각이 "개신교 성직자들의 결혼을 당연시하는 결과를 낳았음"은 물론이다.

7. 생 애

"프로테스탄트 개척자"라 할 수 있는 "루터"는 1483년 "독일 작센 주의 아이슬레벤"에서 아버지 "한스 루터(Hans Luther)"와 어머니 "마르가레테 린데만(Margarethe Lindemann)"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만스펠트"로 이주하여 광부로 일하다가 광산업을 경영하면서, 득세한 시민계급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아들을 법률가로 만드는 것이 꿈이었다. "루터"는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에르푸르트 대학"에 입학해 교양 과정을 마치고 법률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루터"의 일생을 좌우할 중요한 사건이 이 시기에 터졌다.

1505.07.02일, "루터"가 집에 왔다가 "에르푸르트"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슈토테르하임" 근처에서 무시무시한 벼락이 그 바로 옆에 떨어진 순간, "루터"는 하늘의 무섭고도 은혜로운 힘을 느꼈다. 그는 땅에 엎드리면서 광부들의 수호성인을 불렀다. "성 안나여, 저에게 힘을 주소서. 저는 수도사가 되겠습니다." "루터"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같은 달 17일, "에르푸르트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들어갔다. 이후 1507년 "사제(司祭)"가 되었고, 1511년 "비텐베르크 대학교"로 옮겼으며, 1512년에는 "신학박사"가 되었고, 1513년부터 "성서학" 강의를 시작했다. 1515년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 10곳을 감독하면서, 새로 발견한 복음의 씨앗을 전파할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자신의 깨우침이 얼마나 급진적인지 알지 못한 채, 계속 성경 연구에 전념했는데, "면죄부 논쟁"을 계기로 그것이 공공연히 드러나게 되었다. 그는 이때, "하느님은 인간에게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에게 접근하고 은혜를 베풀어 구원하는 신"임을 발견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의 구원을 어떤 개인의 손에 일임하지 않았음"을 확신하고, "인간의 행위가 아닌 그리스도의 진리를 믿는 것만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돈으로 죄를 면할 수 있다니..

1517.10.31일, "루터"의 인생을 걷잡을 수 없는 혁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은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루터"가 "비텐베르크 대학교" 부속 교회당 정문에 "95개조의 논제"라는 제목으로, 돈을 받고 죄를 면해주는 "면죄부(免罪符)판매" 등 교회의 부당한 처사를 비판하는 문서를 전격 게시한 것이다.  당시 "면죄부 판매"는 교회의 중요한 수입원이었는데, 교회의 일에 대한 비판은 그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다. "루터"의 항거는 당연히 폭풍 같은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으며, 즉각 "기득권 세력"의 반발이 거세게 몰아치기 시작했다.

애당초 학자들 간의 토론을 위해 내걸었던 "95개 논제"는 대량으로 인쇄되어,삽시간에 독일 전역은 물론 전 유럽을 강타했다. "95개 논제" 발표 후, 약 5개월이 지난 1518.04월, "로마 가톨릭 교회"는 "루터"를 견제하기 위해 그에게 "하이델베르크"에서 열리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모임"에서 그의 주장을 소개하도록 요구했다. 그 결과, "루터"의 주장은 오히려 "수도원" 담을 훌쩍 넘어 온 세상에 전해졌으며, "면죄부 판매 논쟁"은 한층 더 고조되었고, 수많은 "루터의 추종자"가 생겼다.

1519.07월, 성직자 "요한 에크"와 "라이프치히"에서 벌인 논쟁은 "루터"가 교황의 눈 밖에 나는 데 일조했을 뿐만 아니라, 파문의 직접적인 단초가 되었다. 이 논쟁에서 "루터"는 "구원받기 위,해 교황을 인정해야 할 필요는 없다"며, "에크"가 주장하는 "로마 교회에 대한 순종(Romana obedienia)보다, 자신의 입장이 더 기독교적이고, 참된 의미에서 보편적인 교리"라고 주장했다. "에크"는 "라이프치히 논쟁"에 대한 보고서를 통해, "루터"의 불온한 주장을 "교황"에게 고발했다. 격분한 "교황"은 1520.06.24일 발표된 교서에서, "앞으로 60일 이내에 루터가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으면, 그와 그의 동료 모두 파문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그러나 "루터"는 12.10일 학생들과 함께, "교황의 교서"뿐만 아니라 "로마 교회법전"을 불태우는 화형식을 거행했고, 결국 "루터"는 1521.01.03일 "교황"으로부터 영원한 추방을 선고받았다. 이미 예견된 것이었지만, 파문은 "루터"의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루터"의 마음은 "교황의 권위에 도전하려는 것이었다기보다는 면죄부의 오용으로부터 로마 교황을 보호하는 일이 그 권위를 세워주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달려온 "루터"는 자신의 신념을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1521년, "신성로마제국 의회"는 "루터"에게 주장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으나 그는 이를 거부하고, 제국에서 추방당했다. 그로부터 9개월 동안 그는 "선 제후(選帝侯) 프리드리히"의 보호 아래,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숨어 지내면서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했는데, 이로써 그는 성서의 대중화뿐만 아니라, "독일어 통일"에까지 지대한 공헌을 했다.

"루터"가 "바르트부르크"에 머무는 사이, "비텐베르크"에서는 "카를슈타트(본명- Andreas Bondenstein)"가 이끄는 과격분자들이 급격한 혁신 운동으로 이른바 "비텐베르크 소요"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들은 "미사 폐지ㆍ평신도에 대한 성배(聖杯) 부여ㆍ성상(聖像)파괴" 등을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들이 개혁 운동의 논리적 귀결인 것은 분명했지만, 원래 보수적이었던 "루터"는 이를 급속히 실행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이 소요는 "루터"가 "바르트부르크"에서 돌아온 뒤 진정되었지만, 그 여파는 1522년 "기사(騎士)의 난"과 "농민전쟁(1524~1525)"으로 발전했다. 이 무렵부터 "루터"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 싸우면서, 한편으로는 "재세례파(再洗禮派)"와 싸우는 양면작전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유럽의 정치 정세는 매우 복잡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로서 "독일ㆍ스페인"을 지배하고 있던 "카를 5세"는 "로마 교황"과 손잡고, 근대국가로 급속히 부상한 "프랑스"와 싸워야 하는 한편, 동쪽으로는 "튀르크"의 침입을 경계해야 하는 어려운 입장이었다. "카를 5세"는 독일 제후들의 지지가 필요했기 때문에, 그들이 신봉하는 "루터의 개혁 운동"도 일방적으로 억누를 수 없었다. 그 결과, "독일"에서는 교황을 지지하는 세력과 "종교개혁"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1530년, "카를 5세"는 "아우크스부르크 의회"에서 독일 양 진영의 화해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531년, "슈말칼덴 동맹"을 결성한 "프로테스탄트" 측 제후들과 황제ㆍ교황을 지지하는 세력 간의 장기간 내전이 시작되었다. 그 사이 "루터파 교회"는 독일 각지에서 꾸준히 성장했다.

1530년대에 이르러, "루터"는 누구보다도 막대한 영향력을 지닌 대중적 인물이 되었다. 그는 엄청나게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세상을 뜨기 전, 마지막 몇 년 사이에 평생 쓴 편지의 1/3을 쓸 정도로 많은 편지를 써야 했으며, 생애 마지막 날까지, 분쟁을 중재하느라 분주했다. 온 생애가 혁명 그 자체였던 "루터"는 1546년 자신이 태어난 "아이슬레벤"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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