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전쟁 (薔薇戰爭ㆍWars of the Roses)"은 1455~1485년에 있었던 잉글랜드 왕권을 둘러싼, "랭커스터 가(붉은 장미 家)ㆍ요크 가(흰 장미 家)"가 대립해 벌어진 영국의 내란이다. "장미 전쟁"의 이름은 "랭커스터 가"가 "붉은 장미"를, "요크 가"가 "흰 장미"를 "가문의 문장(紋章)"으로 삼은 것에서 유래하였다. 내란의 본질은 "귀족전쟁"이라는 점에 있다.
1. 장미전쟁 (薔薇戰爭ㆍWars of the Roses)
"요크 공(公) 리처드"는 "헨리 4세(랭커스터 가)"가 "플랜태저넷 왕가"의 "리처드 2세"로부터 왕위를 찬탈한 것이므로, "요크 공 리처드"가 "랭커스터 왕조" 이상으로 "왕위계승권"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헨리 6세" 때, 궐기하였다. 여기에 귀족간의 싸움이 결부되어, 내란이 발생하게 된다. (장미전쟁 당시 : 랭커스터 가(적색)ㆍ요크 가(청색)

2. 전쟁의 진행
1455년, "세인트 올번 전투"를 시작되어, 1460년 "요크 공(公) 리처드"가 "웨이크필드"에서 전사하여 장남 "에드워드"가 그 뒤를 이었다. 1461년, "에드워드"는 "랭커스터 가"를 "타우턴 전투"에서 격파하고, "헨리 6세"를 국외로 추방했다. 싸움 직전에 "에드워드"는 즉위하여 "에드워드 4세"라 칭하고, "랭커스터 가"를 반역죄로 몰아 영지를 몰수하고, "헨리 6세"를 체포하여 투옥하였다.
그 후 "에드워드 4세" 옹립에 큰 공이 있었던 "요크 파의 워릭 백작"이 반란을 일으켜, 1470년 "에드워드 4세"를 국외로 추방하고, "헨리 6세"를 구출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4세"는 세력을 회복ㆍ귀국하여, 1471년 "바넛 전투"에서 "워릭 백작"에게 승리하였으며, 그 결과 "헨리 6세"는 다시 붙잡혀 살해되고, "랭커스터 왕조"는 멸망하였다.
"에드워드 4세"는 중앙집권화를 추진하고, 될 수 있는 한 의회를 열지 않고, 중상주의적(重商主義的) 정책을 채용하여, 절대왕정의 경향을 나타냈으나, 1483년 사망하였다. 12세가 된 장남이 "에드워드 5세"로서 즉위하였으나 왕통이 확립되지 못하고, "에드워드 4세"의 아우 "글로스터 공 리처드"가 "에드워드 5세"를 투옥하고 ,"리처드 3세"라 칭한 후, 왕을 살해하였다. 이 무렵, 대륙에 망명해 있던 "랭커스터 계"의 "리치먼드 백작 헨리튜더"는 1485년 "웨일스"에 상륙하여 "보즈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를 패퇴시켜, 30년에 걸친 "장미전쟁"은 끝이 난다. "헨리튜더"는 즉위하여, "헨리 7세"라 칭하고, "튜더 왕조"를 열었다.

3. 관련 인물
① 헨리6세 (재위 1422~1461ㆍ랭커스터 家)
"장미전쟁"의 시작과 관련된 인물ㆍ태어난 지 얼마 안 돼 왕위에 올라, 30세 경에 정신이상을 일으키자, 유력한 "요크 가의 리처드"의 섭정이 시작된다. "장미전쟁" 과정에서 자주 정신착란을 일으켜 탑에 유폐되었다가, "요크 가"에게 살해되었다.
② 에드워드 4세 (재위 1461~1483ㆍ요크 家)
"요크 가의 리처드"의 아들ㆍ전쟁 중에 아버지 "리처드"는 전사하고, 왕을 둘러싼 "랭커스터 가"를 격파하고, 왕위에 오른다.
③ 리처드 3세 (재위 1483~1485ㆍ요크 家)
"에드워드 4세"의 동생ㆍ형인 "에드워드 4세"가 사망했을 때, 어린 조카들을 대신한 섭정. 그런데, 스스로 왕관을 쓰기를 원해서, 조카들을 탑에 가둔 뒤, 죽여 버린다.
④ 헨리7세 (재위 1485~1509ㆍ랭커스터 家)
"장미전쟁"을 종식시킨 장본인ㆍ어머니 계통으로 왕실에 연결된 "랭커스터 가"의 유일한 왕위 요구자로,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리처드 3세"를 격파하고, "헨리7세"로 즉위한다. "리처드 3세"가 조카들을 탑에 가둬 죽였을 때, 살아남은 왕녀(에드워드 4세의 딸)인 "엘리자베스"와 결혼한다. 그렇게 "요크 가"의 왕녀와 혼인함으로써 화합을 이끌어 낸다.
4. 배경 : 에드워드 3세 (Edward IIIㆍ1312~1377ㆍ재위 1327~1377)
"에드워드 3세"는 중세 시대의 가장 성공적인 왕으로 평가받고 있는 "잉글랜드 국왕"으로, "에드워드 2세"의 장자였다. 외숙 "프랑스 왕 샤를 4세"의 사망으로 프랑스의 왕위 요구자 "에두아르(Édouard)"로서 "백년전쟁"을 일으켰다. "백년 전쟁" 때, 활약했던 "에드워드 3세"는 "플랜태저넷 왕가"의 계승자였다.
"에드워드 3세"에게는 "에드워드"라는 동명의 아들이 있었다. 이 왕자는 "백년 전쟁" 당시 크게 활약하여 "흑태자(Black Prince)"라는 명성을 얻고 있었지만, 1375년, "에드워드 3세"보다 먼저 병사하고 만다. "에드워드 3세"도 1376년에 사망하고, "왕위 계승권"은 "흑태자"의 아들(에드워드 3세의 손자)인 "리처드 2세"에게로 넘어간다. 이 때 "리처드 2세"는 10살의 어린 소년에 불과해서 세력이 약했고, 유력 귀족인 "헨리 볼링브로크"가 세력을 키워나가다가 "리처드 2세"를 쫓아내고 왕위에 오르니, "랭커스터 가"의 시조인 "헨리 4세"이다. "헨리 4세"는 "흑태자(Black Prince)"의 동생이자, 3째(성인이 된 자식 중)아들인 "곤트의 존"의 아들이었으니, 이쪽도 어쨌든 "에드워드 3세"의 상속권은 소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더 유력한 "왕위 계승권자"도 존재하고 있었다. 바로 "에드워드 3세"의 2째(실제로는 3남이나 살아남은 자식들 중 2째) 아들인 "클라렌스 공작"의 딸이 "모티머 집안"과 결혼하여 낳은 아들, 즉 "에드먼드"가 "리처드 2세"의 상속자였기 때문이다. "에드먼드 모티머"의 왕위 계승권은 "헨리 4세"의 반란으로 상실되었지만, 여전히 "적법한 왕"인 "에드워드 3세"의 계승자 서열을 따져봤을 때, "에드먼드"가 가장 높은 순위를 점하고 있는 정통성 문제는 남아 있었다. 그리고 "에드먼드 모티머"의 여조카 "앤"이 "케임브리지 백작"과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 "요크 공작 리처드"였다. 뿐만 아니라, "케임브리지 백작"의 부친은 "에드워드 3세"의 4째 아들이었던 "랭글리의 에드먼드(에드먼드 모티머와는 동명이인)"였으니, "요크 공작 리처드"는 충분히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는 위치였다.
이러한 정통성을 갖고 있는 "요크 가"는 서서히 세력을 키워갔으며, "랭커스터 가"는 "헨리 6세"의 정치력 부재와 광기 때문에, 이를 제대로 견제할 수 없었다. 이 때 "랭커스터 가"의 방계인 "뷰퍼트 가"와 "요크 공작 리처드" 사이에서 터진 분란이 전쟁으로 표출된 것이 1455년 "세인트 올번 전투"이다. 처음에는 "랭커스터 가ㆍ요크 가" 모두 "헨리 6세"를 국왕으로 인정했으나, "요크 공작 리처드"가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전사한 후, "에드워드(리처드의 아들)"이 세력을 재집결시켜 "런던"을 점령하고 국왕으로 선포됨으로써, 본격적으로 왕권을 두고 다투게 된다.
5. "헨리 7세"가 절대 권력을 누릴 수 있게 된 이유
"중세"에는 왕에게 지휘권이 집중된 형태가 아니라, 각지의 영주들이 각자 군사력을 소유하고 있으며, 이들이 군사를 지휘하여 전쟁에 참가하는 형식이 많았다. 따라서 전투에 나서는 것은 영주들이며, 영주들이 각지의 전투를 치르며 죽거나 세력을 잃는 것이 나타났다. 자식이 없이 사망한 영주의 토지ㆍ군사력은 국왕에게로 돌아갔으며(명목상으로는 이 땅은 국왕에게 받은 토지였으므로, 소유권자가 없으면, 원 소유주에게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전쟁 중에 국왕들도 용병을 고용하는 식으로 "영주"가 아닌 "국가 소유의 군대"를 늘려나가게 된다.
또한 전쟁 중에는 영지가 황폐화되거나, 도적들이 영지를 쓸고 가는 상황도 많았다. 영지가 황폐화된 영주의 세력은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백년전쟁" 와중에 "잉글랜드ㆍ프랑스"라는 양국의 분리가 고착화되고, 상대에게 대항하기 위하여, 왕을 구심점으로 뭉치게 되었으니, 왕의 세력은 한층 증대되었다.
"잉글랜드" 역시 "장미전쟁"을 거치며, 유력 귀족들이 전사하거나 숙청당했다. 특히 유력 가문이던 "랭커스터 가ㆍ요크 가"의 귀족들은 30년간의 전쟁을 거치며 수없이 제거되었기에(양측의 전세는 수차례 역전되었고, 그 때마다 적잖은 숙청이 뒤따랐다), "헨리 7세"가 "튜더 왕가"를 개창했을 때는 절대 권력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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