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 다르크 (Jeanne d'Arcㆍ1412~1431ㆍ19세)"는 "성녀 요안나 아르크ㆍ오를레앙의 성처녀"라고도 불린다. "세례명으로 쓸 때는 "요안나"라고 명한다. 흔히 깃발을 들고 백마 위에 올라탄 여기사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1. 경 과
① 배경ㆍ시작
"잉글랜드"를 견제할 세력이 필요했던 "프랑스 필리프 6세"는 "잉글랜드"에 쫓겨, 산악지대로 들어갔던 "스코틀랜드 왕국"에 주목했다. 당시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를 정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중이었다. 또, "필리프 6세"는 "잉글랜드 에드워드 3세"의 신종서약에 트집을 잡고, "잉글랜드 국왕"의 봉토였던 "아키텐 령"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1337년에는 "아키텐 령"의 몰수를 선언하였다. 또 "노르망디 해안"에는 함대를 보내, "잉글랜드"를 위협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1336년, "에드워드 3세"는 "필리프 6세"에게 공식적인 도전장을 띄우고,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도전장은 제목부터 "발루아 가문의 필리프, 자칭 프랑스 왕"이라는 도발적인 것이었다. 전쟁 준비는 자체 군사력을 준비하는 것, 말고도 "외교전"도 치열하게 펼쳤다. "국가 간 외교"라기보다는, "왕가 간 외교"였는데, "신성 로마제국 황제ㆍ네덜란드 제후"와 절충을 거듭하여, "황제대관"의 지위와 공수동맹의 약속을 성립시켰다.
그의 외교의 핵심은 "플랑드르 지방"이었다. 원래 "플랑드르"는 "프랑스 왕"의 종주권 아래에 있었지만, "중세"를 통하여 유럽 최대의 "모직물 공업지대"로서 번창하여, 원료인 "양모"의 최대 공급국인 "잉글랜드"가 이 지방을 경제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전쟁 중, "플랑드르"는 "잉글랜드" 편에 섰다.
"잉글랜드"는 "플랑드르" 지방 도시들에 대해 새로운 종주권을 주장했으며, 그들과 동맹을 맺었다. "에드워드 7세"가 구축한 이른바 "북방의 환상동맹"에 대해, "필리프 6세"는 "제네바ㆍ카스티야"의 지원을 받았다. "아키텐 령"에 속한 "가스코뉴" 역시 유럽 최대의 포도주 생산지였으므로, "프랑스 왕"들은 항상 이 두 지방의 탈환을 바라고 있었다. 따라서 전쟁은 이 두 지방의 쟁탈을 목표로 하게 되었다. "왕위 계승 문제"는 늘 그렇듯이 명분에 불과했다. 이것의 "백년전쟁"의 첫 시작이었다.
② 제1기 (에드워드 전쟁): 1337~1360년
1340.06월, "잉글랜드-플랑드르" 연합함대가 "라인 강" 하구에 있는 "브뤼주(현, 브뤼허) 슬뢰이스항"에 대한 "프랑스 함대"의 봉쇄를 저지하기 위해, 공격을 시작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전투에서 "잉글랜드 군"이 승리하였고, 이후 "도버 해협"의 제해권은 "잉글랜드"가 차지하게 되었다. 116년이라는 기간 동안, "프랑스"만 전쟁터가 된 것도 이 때문이다.
1345년, "에드워드 3세"는 그의 맏아들인 "흑태자 에드워드"와 함께, "노르망디"에 상륙하였다. 1346년, 유명한 "크레시 전투"가 있었다. 이 전투에서 "잉글랜드 군"은 농민들ㆍ사냥꾼들로 구성된 "보병 장궁대"를 내세워, 전력이 훨씬 우세한 "프랑스 기사군"을 격파하였다. "보병 장궁대의 기사군 격퇴"는 "화약 무기"의 등장 이전에, "중장기병"의 몰락을 예고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 기사군"은 익숙한 전법으로 일제히 돌격을 시도하였으나, 진흙탕을 거치면서 기병의 특유한 충격력을 상실한 상태에서, "장궁대"의 공격을 받은 것이다.
이때 "잉글랜드 군"이 동원한 "장궁"은 그 이전에 "석궁"에 비해서, 훨씬 사거리 및 위력 뿐 만이 아니라, 연사력이 더 뛰어난 것이었다. 이 "장궁"은 본래 "웨일스 지방"의 사냥꾼들이 사용하던 것이었으나, "영국 왕실"은 그 위력을 알아보고 전쟁에 동원한 것이다.
반면 "프랑스"는 "석궁 병들"을 배치했으나, 많은 전투에서 "석궁 병들"은 "영국 장궁병"에게 패배하였다. "잉글랜드 군"은 "크레시 전투"에 승리한 여세를 몰아, "칼레 시"로 진격하여 이 성을 완전히 포위하였다. "칼레" 시민들은 완강하게 계속 저항하였으나, 1347년 마침내 "잉글랜드 군"에게 항복하였다(칼레 포위전). "칼레 지구"가 "잉글랜드 령"으로 확정되면서, "에드워드"의 전략은 "앙주-플랜태저넷 왕가"의 옛 대륙 영토 전 지역의 회복을 겨냥한 것이었다. 그 뒤 양국에 "페스트"가 유행한 데다, 재정사정도 악화되어, 한때 전쟁이 중단되기도 하였으나, 1355년, "흑태자"는 다시 "남 프랑스"를 침입하였다.
1350년, "프랑스"에서는 "필리프 6세"가 죽고, 뒤를 이어 "장 2세"가 즉위하였으나, 1356년 "흑태자"는 "장 2세"가 인솔한 "프랑스 군"을 "푸아티에 전투"에서 격파하고, "장 2세"를 포로로 잡았다. 이처럼 전쟁 초기에 거둔 "영국군"의 일방적 승리는, 독립적 자영 농민을 주력으로 한 "보병의 장궁대 전법"이 "프랑스 봉건기사군의 전법"에 비해, 우수하였기 때문이었다. 1359년, 다시 공격을 시작한 "에드워드"에게 "프랑스"는 화의를 청하였다. 1360년, "샤르트르" 근교 "브레티니"에서 "프랑스 왕가"의 대표단과 협의하고, 뒤에 "칼레"에서 "푸아티에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던 "프랑스왕 장 2세(재위: 1350~1364)"의 서명을 얻어 발효한 휴전 조약이 "브레티니-칼레 조약"이다.
"브레티니-칼레 조약"은 "푸아티에"를 비롯하여, 옛 "앙주왕령"의 "잉글랜드 왕실"로 귀속을 규정한 다음, 제12조에서 "프랑스 왕"은 그 여러 영토에 대한 종주권을 행사하지 않을 것, "잉글랜드 왕"은 특히 "프랑스 왕관과 왕국의 이름 및 권리에 대한 청구권"을 포기할 것을 규정하였다. 이것은 애초부터 "잉글랜드 왕"은 "프랑스 왕관" 보다는 영토를 더 중요시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프랑스"는 프랑스대로 전쟁의 참화ㆍ"잉글랜드군"의 약탈로 농민의 피폐가 격심하여, 1358년 농민 반란인 "자크리의 난"이 일어났다. 이 반란은 즉시 진압되었지만, "프랑스 왕가"를 매우 심한 궁지에 빠뜨렸다. "브레티니-칼레 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던 뒷 배경이기도 하다. 아무튼 "프랑스"는 "장 2세"의 석방보상금으로 "300만 크라운"을 지불하고, "아키텐 지방" 전부와 "칼레 시" 등의 영토를 "잉글랜드"에게 할양하였다. 이 당시에는 적군이라 하더라도, 귀족들은 몸값을 받고 석방하는 게, 보통이었다. 현대에서는 전혀 상상할 수 없지만, 그 당시에는 보편화된 방식이었고, 지위와 명성이 높을수록 몸값은 비싸게 매겨졌다. 이렇게 해서, "백년전쟁의 1기"는 막을 내린다.
③ 제2기 (캐롤라인 전쟁): 1369~1389년
1364년, "프랑스"에서는 "장 2세"가 죽고, "샤를 5세"가 즉위하였다. 그는 "내정 정비ㆍ재정(財政) 재건"에 착수하였으며, "아키텐의 귀족들"을 선동하여, "잉글랜드"의 지배에 반항하게 하였으므로, 양국 사이가 다시 악화되어, 마침내 전쟁이 재개되었다. 1369년, "흑태자"의 동생인 "고트의 존"이 이끄는 "잉글랜드 군"이 "프랑스"로 침입하였으나, "프랑스 군"의 분전으로 패배하고, "잉글랜드 해군" 역시 "카스티야 해군"과 동맹을 맺은 "프랑스 해군"에게 잇달아 패전하였다. 따라서 "브레티니-칼레 조약"에서 "잉글랜드"에 할양한 영토의 대부분을 탈환하고, 1375년 "부르지"에서 휴전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처럼 2기 초기에는 "프랑스"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었다.
그 뒤 1377년, "잉글랜드"에서는 "에드워드 3세"가 죽고, "리처드 2세"가 왕위에 올랐다. "프랑스"에서도 1380년, "샤를 5세"가 죽고, 그의 아들 "샤를 6세"가 그 뒤를 이었다. 그러나 두 "왕"이 모두 미성년(未成年)이었고, 특히 "잉글랜드"에서는 1381년 "와트 타일러의 난"이 일어 난데다가, 더욱이 "리처드 왕"의 지배에 대한 귀족의 반항까지 겹쳤기 때문에,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은 오랫동안 중단되었다. 덕분에 "앙주"는 "발루아" 가계의 "앙주 공령"이 되어, "브레티니-칼레 조약" 체결을 주도했던 "프랑스 왕"의 대리인인 "샤를(뒤에 샤를 5세)"에 이어, 다시 1364년 이후에는 "샤를 5세"의 동생 "루이"의 소유령이 되었다. "브르타뉴에"는 "친 프랑스 공가"의 가계가 확립되었다.
1380년, "샤를 5세"가 사망한 후, "샤를 6세(재위: 1380~1422) 시대"에 "프랑스"는 왕족 제후에 의한 "왕정 후견 시대"로 들어서게 되었다. 1404년, "국왕 고문회의"의 대표 "부르고뉴공 필리프"의 사후, 그 아들 "장"과 왕의 동생 "오를레앙공 루이"의 불화가 표면화하여, 이른바 "부르고뉴 파ㆍ아르마냐크 파" 대립의 국면을 맞이하였으나, "샤를 5세"가 확립한 왕정 방식은 그 기본구조를 무너뜨리는 일이 없이 유지되었다.
국제관계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부르고뉴 공가"의 입장이었다. "플랑드르"를 가령으로 한 "공가"는 "잉글랜드"에 대하여, 화친정책을 취하였다. "잉글랜드 왕가" 측에서는 "플랜태저넷 왕조" 최후의 왕 "리처드 2세(재위: 1377~1399)"가 "프랑스"에 대한 화친 방향을 모색하였다. "프랑스 왕"의 딸 "이사벨"을 아내로 맞은 것도 그 일환이며, 이를 주선한 사람이 바로 "부르고뉴 공 필리프"였다. 결국 "프랑스"에 대한 융화정책이, "반대 당파"의 결성을 촉진하여, 1399년 "리처드 2세"는 폐위되었다.
"리처드 2세"가 폐위된 후, "랭커스터 가의 헨리 4세"가 왕위에 올라, "프랑스"에 대한 전쟁을 재개하였다. "프랑스"에서는 종종 정신착란을 일으키는 "샤를 6세"를 대신하여, 국정의 실권을 장악하려고 한 귀족들이 "부르고뉴 파ㆍ아르마냐크 파"로 나뉘어, 내란 상태에 빠졌다. "부르고뉴 파"는 "왕실"을 둘러싼 "아르마냐크 파"를 견제하기 위해, "잉글랜드"에 접근하게 된다. 전쟁 후반기, "잔 다르크"를 "잉글랜드"에 팔아넘긴 것도 "부르고뉴 파"였다.
④ 제3기 (랭커스터 전쟁): 1415~1453년 : 오를레앙ㆍ잔 다르크
"백년전쟁"의 마지막 시기로 분류되는 3기는 1415년에 시작되었다. 이 시기는 "오를레앙ㆍ잔 다르크"로 요약될 수 있다. 1413년, "잉글랜드 국왕 헨리 4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헨리 5세"는 "프랑스"의 내분을 이용하여 "부르고뉴 파"와 결탁하고, 1415년 맹렬한 기세로 "노르망디"를 진공, "아쟁쿠르 전투"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프랑스 군"을 대패시켜, "북 프랑스"의 여러 도시를 탈취하였다.
이를 배경으로 "헨리 5세"는 1420년 "트루아 조약"을 맺고, 스스로 "샤를 6세"의 딸 "카트린"과 결혼함으로써, 자신의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승인시켰다. 그러나 "샤를 6세"의 아들인 "왕세자 샤를(샤를 7세)"과 이를 지지하는 "아르마냐크 파"는, 이와 같은 "잉글랜드" 측의 강요를 인정하지 않은 채, "중남부 프랑스"에 거점을 두고, 전쟁을 계속하였다.
1422년, "잉글랜드 헨리 5세ㆍ프랑스 샤를 6세"가 잇달아 죽자, 어린 나이의 "헨리 6세"가 "잉글랜드ㆍ프랑스" 두 나라의 "국왕"을 자칭하고 나섰고, "프랑스"에서는 왕세자가 "샤를 7세로서 프랑스의 왕위에 올랐음"을 선언하였다. 이에 "잉글랜드"는 1428년 "샤를 7세"의 거점인 "오를레앙"을 포위하였다.
"샤를 7세"는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아직 그는 정식 "국왕"도 아니었다. "랭스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거쳐야 했으나, "잉글랜드 군" 때문에 그러지 못한 것이다. "오를레앙"은 1년여를 버티고 있었지만, 희망은 별로 없어 보였다. "샤를 7세"는 "오를레앙"을 구원할 힘도 갖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프랑스"는 전황의 불리함 때문에, 병력 동원도 쉽지 않았다. 용병이 주였던 이 당시에, "프랑스"의 불리한 전황은 "용병"을 모으기 어렵게 하는 조건이었다.
이와 같이 불리한 전황을 승전으로 전환하게 한 것은 "잔 다르크의 출현"이었다.
그녀는 적은 수의 "프랑스 병사"로 "오를레앙의 잉글랜드 군"을 격파하였으며, 그 뒤 항상 선두에 서서 "잉글랜드 군"을 격파하였다. 그러나 1430년, "잔 다르크"는 "부르고뉴 파"에게 체포되어, "잉글랜드" 측으로 인도된 끝에, 1431년 "루앙"에서 "마녀 재판"을 받고, "마녀"로 판결되어 화형에 처해졌다.
"로마 교황청"은 "잔 다르크"에 대한 새로운 조사 위원회를 설치해서 재조사한 결과, 1456.07월 "잔 다르크"에게 화형 판결을 내린 재판을 폐기하고, 무효화하는 선언을 발표함으로써, 그녀의 명예 역시 회복되었다. 그리고 잔 다르크는 1909.04.18일에야 비로소 시복되었고, 1920.05.16일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그리하여 "잔 다르크"는 이단자이자, 마녀라는 혐의를 벗고, "가톨릭교회의 성인"이 되었다.
1429년, "샤를 7세"는 정식으로 "대관식"을 거행하고, 적법한 "프랑스 국왕"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따라서 "샤를 6세"가 "영국"과 맺은 "트루아 조약"은 효력을 상실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 전황은 이미 "프랑스" 쪽으로 기울어졌으며, 수십 년간 항쟁을 계속한 "부르고뉴 파ㆍ아르마냐크 파"도 "아라스"에서 화의를 맺음으로써, "프랑스 내란"은 끝을 맺었다. 또 "잉글랜드ㆍ프랑스" 사이에 산발적인 전투가 계속되었으나, 1444년 "투르"에서 휴전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잉글랜드"는 "프랑스" 내에 "멘ㆍ보르도ㆍ칼레ㆍ노르망디" 등의 영토를 계속 보유하고 있었다.
2. 잔 다르크 (Jeanne d'Arcㆍ1412~1431ㆍ향년 19세)
"성녀 요안나 아르크ㆍ오를레앙의 성처녀"라고도 불린다. "세례명으로 쓸 때는 "요안나"라고 명한다.
• 출 생 : 중세 프랑스 • 사 망 : 잉글랜드령 프랑스 루앙 • 종 교 : 로마 가톨릭교회 • 시 성 : 1920.05.16일ㆍ교황 베네딕토 15세 • 프랑스의 국민적 영웅ㆍ로마 가톨릭교회 성인
흔히 깃발을 들고 백마 위에 올라탄 여기사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서구문화"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로, "프랑스"에서 애국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 때, "프로파간다"에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한 소재로 자주 쓰였으며, 군인들은 잔 다르크의 탄생지인 "동레미 라퓌셀(라퓌셀은 처녀라는 뜻으로, 잔 다르크를 기려, 원 지명 동레미에 추가되었다)"를 순례하기도 했다. "투르의 성 마르티노ㆍ성왕 루이ㆍ리지외의 성녀 데레사" 등과 더불어, "프랑스 수호성인"으로 추대되었다.
"프랑스" 북동부 지방 "동레미"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난, "잔 다르크"는 "프랑스를 구하라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 "백년 전쟁"에 참전하여, "프랑스군"을 승리로 이끌었다. 왕세자였던 "샤를 7세"가 "프랑스 국왕"으로서 "대관식"을 치를 수 있게 도와주었다. 하지만 나중에 "부르고뉴 군"에게 사로잡혀, 현상금과 맞바꾸어, "영국" 측에 넘어가게 되었다. 이때 "샤를 7세"는 "잔 다르크"를 구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는데, "샤를 7세"가 "영국"이 요구하는 몸값만 지불했어도, 그녀는 무사히 풀려났을 것이다.
"영국"은 그녀를 재판장에 세워, 반역ㆍ이단의 혐의를 씌운 후에, 말뚝에 묶어 "화형"에 처하였다. 1431.05.30일, "형장"으로 정해진 "루앙의 광장"에는 몇 만 명의 군중으로 가득 찼다. "마녀ㆍ이교도ㆍ우상숭배자" 등의 말이 쓰여 있는 "종이 모자"를 쓰고, 화형대에 오른 "잔 다르크"는 불길이 몸을 휩싸게 되었어도, 끝내 "자신의 행동이 신의 계시에 의한 것이었다."고 주장했고, 결국 19살의 꽃다운 나이로 일생을 마쳤다. 25년 후, "교황 갈리스토 3세"로부터 권한을 위임 받은 "종교 재판소"는 "잔 다르크"에 대한 심사를 재개하여, 그녀에게 내린 혐의는 모두 무혐의이며, 따라서 "무죄"라고 최종 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그녀를 "순교자"로 선언하였고, 1920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1429.07.17일, 장엄한 "샤를 7세"의 "프랑스 국왕"으로서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샤를"의 등 뒤에서 "성모 마리아의 성기"를 받들고 서 있던, "잔 다르크"의 손은 기쁨에 넘쳐 떨리고 있었다. "잔 다르크"는 다시 다음 계획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파리"를 공격하여, "프랑스 수도"를 "영국군"으로부터 되찾는 일이었다. "오를레앙에서 패배한 영국군의 사기는 형편이 없습니다. 때를 놓치지 말고 이 기회에 파리를 탈환해야 합니다."
그러나 "샤를 7세"는 "대관식"을 마치자, 이제 걱정이 없다고 안심한 탓인지, "잔 다르크"의 권유를 따르려 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중요한 1년이라는 시간이 하는 일 없이 지나갔다. 그동안 "영국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부르고뉴 가"와 다시 결탁하여, "콩피에뉴"를 공격했다. 그녀는 위기에 처한 "콩피에뉴"로 달려갔다. "잔 다르크"는 선두에 서서, 병사들을 격려하며 잘 싸웠다. 그러나 달아나는 적을 쫓아 진격해 가는 중,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부르고뉴 군"의 본대 깊숙이 들어가고 말았다. "잔 다르크"는 결사적으로 빠져나오려다 말에서 떨어져 붙잡히고 말았다. "부르고뉴 군"은 "영국군"에게 "잔 다르크"를 팔아 넘겼고, "영국군"은 "잔 다르크"를 마녀로 몰아 재판에 회부하였다. 7번의 재판 끝에 잔 다르크를 화형에 처한다는 판결이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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