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전쟁 (百年戰爭ㆍHundred Years War)"은 중세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전쟁 중 하나로, 서유럽에서 가장 넓은 땅의 왕위를 두고, 두 왕조가 5대 116년에 걸쳐 싸운 장대한 전쟁이다. "영국 왕국의 플랜태저넷 가"와 "프랑스 왕국의 발루아 가" 사이에 "프랑스 왕위계승 문제"를 놓고 일어난 일련의 분쟁들을 말하는 것으로, "플랜태저넷 가와ㆍ발루아 가" 양측 모두 여러 동맹자들을 전쟁에 끌어들였다. "기사의 최고 전성기"이자, 동시에 "기사계급의 쇠퇴"가 시작된 시기이다. "영국ㆍ프랑스" 양국 모두 전쟁으로 인해, 강고한 국민정체성이 싹트게 되었다.
1. 백년전쟁 (百年戰爭ㆍHundred Years War)
• 일 시 : 1337~1453년까지 (5대 116년 동안) • 장 소 : 프랑스ㆍ영국ㆍ스페인 등 서유럽 일대 • 교전국 : 프랑스 왕국 측- 발루아 가ㆍ카스티야 왕국ㆍ스코틀랜드 왕국ㆍ제노바 공화국ㆍ마요르카 왕국ㆍ보헤미아 왕국ㆍ아라곤 왕국 / 영국 왕국 측- 플랜태저넷 가ㆍ신성로마제국ㆍ포르투갈 왕국ㆍ룩셈부르크ㆍ부르고뉴 공국ㆍ브르타뉴 공국ㆍ나바르 왕국ㆍ플랑드르 백국ㆍ에노 백작령ㆍ아키텐
• 결 과 : 전체적으로 "프랑스" 승리ㆍ"발루아 가"의 "프랑스 왕위" 유지ㆍ"영국"의 국내 불안정화→ "장미 전쟁"으로 이어짐ㆍ"영국"의 "프랑스 왕위" 요구가 사실상 폐기됨→ "프랑스"의 중앙집권 가속화ㆍ"기사도"의 쇠퇴ㆍ"봉건제"의 쇠퇴ㆍ"영국"와 "프랑스"의 국민정체성 형성
1066년, "노르만인"의 "잉글랜드" 정복 이래로, "잉글랜드 국왕"은 "프랑스 땅"에 보유한 영지에 대하여, "프랑스 국왕"의 명목상 제후였다. "프랑스"의 역대 국왕들은 수백 년에 걸쳐, "잉글랜드 국왕"의 영지를 빼앗아 왔으며, "백년전쟁" 당시 즈음에는 "잉글랜드 국왕"이 실효 지배하던 땅은 "가스코뉴" 정도밖에 없었다.
"프랑스" 입장에서 이 땅을 흡수하여, "잉글랜드" 세력을 유럽 대륙에서 완전히 축출하려 시도하는 것은 곧 "잉글랜드"의 국력을 시험해 보는 것이었고, "잉글랜드"가 "프랑스"의 동맹국 "스코틀랜드"와 전쟁 중일 때면, 언제나 그 시도를 실행으로 옮기려 했다.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어머니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의 딸 "이사벨라"로,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카페 본가"의 마지막 왕인 "샤를 4세"와 숙질 관계였다.
1316년, "프랑스"에 "살리카 법"이 도입되면서, 여성의 왕위 계승이 금지되었다. 1328년, "샤를 4세"가 죽자, 여성으로서 "프랑스" 왕위를 요구할 수 없게 된 "이사벨라"는 대신 자기 아들 "에드워드"의 왕위 계승을 주장했다. "프랑스" 측에서는 "이사벨라"가 자신에게 애초에 주어지지 않은 "왕위 계승권"을 그 아들에게 양도할 수 없다는 근거로 그 주장을 무시했다. 이후 9년간(1328~1337), "잉글랜드 왕가"는 "카페 가"의 방계인 "발루아 가"가 "프랑스" 왕위를 계승하는 것을 용인했다.
그러나 "발루아 가"의 초대 왕 "필리프 6세"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와 "스코틀랜드의 데이비드 2세" 사이의 전쟁에 개입하면서, "에드워드 3세"는 다시 "프랑스 왕위"를 요구하게 되었고, "잉글랜드ㆍ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후 "잉글랜드"는 "크레시ㆍ푸아티에ㆍ아쟁쿠르" 등지에서 연전연승하며, 전쟁에서 이기는 듯 했다. 그러나 "프랑스 국왕"이 동원할 수 있는 국력 자체가 "잉글랜드"를 능가했기에, "잉글랜드"는 "프랑스"를 완전히 정복할 수 없었다. 1429년부터 "프랑스"는 반격을 시작해, "오를레앙ㆍ파타이ㆍ포흐미늬ㆍ카스티용"에서 결정적 승리들을 거두면서, 전쟁은 "프랑스"의 우세로 끝났고, "잉글랜드 왕가"는 유럽 대륙의 영지 대부분을 영구히 상실했다.
2. 시기의 구분
역사학자들은 "백년전쟁"을 중간 중간의 휴전들에 따라, 3단계로 구분한다. ① 제1기 (에드워드 전쟁): 1337~1360년 ② 제2기 (캐롤라인 전쟁): 1369~1389년 ③ 제3기 (랭커스터 전쟁): 1415~1453년 : "오를레앙ㆍ잔 다르크"로 요약될 수 있다.
"백년전쟁"과 동시기에 진행된 주변 지역의 전쟁으로는, "브르타뉴 왕위 계승 전쟁(1341~1364)ㆍ카스티야 내전(1366~1369)ㆍ아라곤의 두 페드로의 전쟁(1356~1375)ㆍ포르투갈의 위기(1383~1385)"가 있다. 후대의 역사학자들은 "백년전쟁"이라는 용어를 14C말~ 15C 초에 일어난 이 모든 전쟁들을 포괄하는 시대 명으로 사용하며, 이에 따르면 "백년전쟁"은 유럽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군사 분쟁"이 된다.
3. 의의ㆍ영향
"백년전쟁"은 여러 가지 요소에 역사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백년전쟁" 말기가 되면, "상비군"이 "봉건군"을 대신하게 되었고, 그와 동시에 전쟁에서의 귀족들의 역할도 대중 중심 군대의 인력ㆍ무기력으로 대체되었다. 전쟁의 시작은 어디까지나 "왕가들 사이의 분쟁"이었지만, 전쟁을 거치면서, "프랑스ㆍ잉글랜드"의 평민들에게 "국민의식"이라는 것이 싹트게 되었다. 또한 "중기병" 중심의 "봉건군"이 대체되면서, 새로운 무기ㆍ전술들이 도입되었고, 특히 "포병"이 중요해졌다.
"백년전쟁"은 "서로마 제국"이 망한 이후, 서유럽 세계에 "상비군 개념"의 부활을 촉발시켰다. 한편 전쟁 당사국인 양국의 사정을 보자면, 우선 "프랑스"에서는 "내전ㆍ역병ㆍ기근ㆍ산적 떼에 가까운 자유중대 용병들의 준동" 등으로 인해, 인구가 급격히 감소했다. "잉글랜드"에서는 막대한 비용을 들인 것에 비해, 전쟁의 성과가 시원치 않고, 오히려 대륙 영지들을 영구히 상실하게 되자, 귀족들이 불만을 가지게 되어, "장미전쟁(1455~1487)이라는 "내전"이 벌어졌다.
① 봉건 제도의 몰락ㆍ중앙집권화의 시작
"프랑스"는 장기간에 걸친, "백년전쟁ㆍ내란"에 의해서, "봉건 귀족 세력"이 극도로 약화된 반면, "국왕"의 권력이 크게 신장되었다. "샤를 7세"는 "자크 쿠르"를 등용하여 왕실의 재정을 정비하고, "국왕의 상비군"을 강화하며, "귀족세력"을 누르고, "중앙 집권제"를 추진해 나갔다.
"잉글랜드"에서는 전쟁이 끝난 뒤, 이제는 "왕위계승문제"를 둘러싸고, 30년간에 걸친 "랭카스터 가문ㆍ요크 가문"간에 "장미 전쟁(1455~1485)이 일어났으니, 이것은 "프랑스"에서 돌아온 귀족들의 생존 경쟁이었는데, 그러나 30년에 걸친 전쟁은 양 가문 및 그들에게 합류한 귀족들 자신이 함께, 쓰러지는 결과를 초래하여, 그만큼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정략결혼을 통해, "장미전쟁"을 수습한 "헨리 7세"에 의한 "중앙 집권화"의 기초를 제공하였다.
이와 같이 "백년전쟁"은 "잉글랜드ㆍ프랑스" 두 나라에서 공히 "왕정"이 강화되고, "중앙집권 체제"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잉글랜드ㆍ프랑스" 모두 "봉건기사 세력"이 무너지고(이 부분은 화약무기의 등장도 일조를 하였다), "농노 해방의 진전ㆍ부르주아 계급의 대두ㆍ왕권의 확대" 등을 초래한 것이다. 특히 "프랑스"는 "서양 봉건제도"가 시작된 발원지이자, 가장 완성된 형태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전쟁 이후, 두 나라의 "중앙집권화"의 양상은 각기 사뭇 달랐다. "잉글랜드"는 1215년 "마그나 카르타" 이후, 존재한 "의회제도" 덕분에 "귀족 영주ㆍ국왕"의 대립 구도에서 "의회ㆍ국왕"의 대립구도 "입헌군주국"으로 발전한 반면, "프랑스"는 전쟁 와중에 강력해진 "상비군" 덕분에 "국왕"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프랑스" 상황의 상징은 "삼부회"다. "삼부회"도 "잉글랜드 의회"처럼, 전쟁 비용 징수에 대해, 범 계층의 동의를 통해, 징수할 의도로 설립되었으나, "상비군 체제ㆍ왕권"이 강화되면서, 이름만 있고 더 이상 개최되지 않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삼부회"가 열린 것은 17C였고, "루이 14세" 이후 1번도 개최되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열린 것은 1789년이었고, "프랑스 대혁명"으로 이어진다.
② 프랑스인ㆍ잉글랜드인의 형성
"잉글랜드"는 "프랑스" 내의 영토를 상실함으로써, 그 이후 유럽 대륙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문제들에 휩쓸리지 않게 되어, 독자적인 "국민국가"를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쟁의 공포를 피하여, 기술이민들이 "플랑드르"로부터 "영국"으로 이주함으로써, "플랑드르"를 능가하는 "모직물 공업"이 발전하게 되어, 경제적 발전의 기초가 다듬어졌다. "프랑스" 역시 "잔 다르크"로 상징되는 "프랑스 인"이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사실상 그 이전에는 "잉글랜드인"이나 "프랑스인"이라는 국민 의식 같은 것은 큰 의미가 없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프랑스인"이라는 국민감정은 이때 "잉글랜드인"에 대한 증오의식에서 자리를 잡아갔다. 이후에 두 나라가 손을 잡게 되는 것은 1854년 "크림 전쟁"이 사실상 처음이었으며, "독일 제국"이 성립된 이후, 두 나라는 동맹국 사이가 되었으나, 민족 감정은 남아 있었다.
"백년전쟁" 종전 이후, "잉글랜드ㆍ프랑스ㆍ플랑드르" 지방간의 이러한 관계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까지도 "독일이 벨기에를 침공했다"는 이유로 "잉글랜드"가 선전포고를 하기 이르렀고, "벨기에"가 "네덜란드어 사용권ㆍ프랑스어 사용권"으로 나뉘게 되었다
4. 발생 원인
"잉글랜드"는 "노르만 왕조"의 성립 이후, "프랑스"의 일부 영토를 소유하였는데, 이 때문에 양국 사이에는 분쟁이 계속되었다. 13C 말에 이르러서는 "잉글랜드 국왕"의 "프랑스" 내 영토가 "프랑스 국왕"보다 더 많은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중세 봉건제도" 하에서, "잉글랜드 국왕"은 "잉글랜드 왕국"의 군주이면서, 동시에 "프랑스 국왕의 신하"라는 이중 지위를 갖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중세 봉건 제도"의 특징상, 결혼을 하게 되면, 여자가 남자에게 자신의 "봉토"를 "결혼 지참금"으로 넘겼기 때문이었다.
"노르만 왕조" 성립 이후, "잉글랜드 국왕"은 역시 애초 "프랑스 국왕"의 봉신이었던 "노르망디 공국의 영주"였고, "노르만 왕조"의 뒤를 이은 "플랜태저넷 왕가(1154~1399)"역시, 본래 "프랑스의 앙주 백"이었다. "플랜태저넷 왕조"는 "잉글랜드 국왕"으로서 "노르망디"도 당연히 계승하게 되었고, 이렇게 되자 "프랑스" 내에서 "잉글랜드 왕"의 입김은 "프랑스 국왕" 보다 셌지만, 법률상으로는 "잉글랜드 국왕"은 "프랑스 국왕"의 신하였다. 이 무렵 "프랑스 카페 왕조"의 영향력은 현재 "파리 시"를 중심으로 한 "일-드-프랑스 지역"에 국한되어 있었다. "잉글랜드 국왕"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불만이 없을 수가 없었다.
1328년, "프랑스 카페 왕조의 샤를 4세"가 남자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그의 4촌 형제인 "발루아 왕가의 필리프 6세(재위: 1328~1350)"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여자가 직접 왕위 계승이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만일 그녀의 아들에게 계승시킬 수 있다면,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2세"의 왕비 "이사벨라(마지막 카페 왕조의 국왕이었던 샤를 4세의 누이)"의 아들인 "에드워드 3세(재위: 1327~1377)"가 왕위 계승자가 된다는 주장도 성립되었다. 이것을 핑계로 삼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왕위를 자신이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양국 간에 심각한 대립을 빚게 되었다. 이 참에 "잉글랜드ㆍ프랑스"를 하나의 거대한 왕국으로 통합할 욕심을 갖게 된 것이다.
"필리프 6세"의 입장에서도, 자신의 신하 중에 자신을 능가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다른 나라의 국왕이기도 했다. "잉글랜드 국왕"이 "프랑스 국왕의 신하로서 가지고 있는 봉토를 몰수하여, 프랑스 국왕의 위신을 높여야 할 필요성과 욕심"을 가지고 있었다. "잉글랜드 국왕"의 왕위계승권 주장도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영토 문제ㆍ왕위계승권 문제"로 인한 두 왕가의 갈등은 대화로 풀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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