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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사건 • 전쟁 • 혁명 • 학살

전쟁- BC 264~146 : 포에니 전쟁 ② 한니발 (Hannibal)

by 당대 제일 2022. 1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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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니발 (HannibalㆍBC 247~ 183(181)ㆍ64(66)세)"은 고대 "카르타고(튀니지)"의 군사 지도자로, 대개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사령관들 중 하나로 평가된다.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해서 "소아시아(터키 영토에 해당하는 반도로 아나톨리아소아시아(Asia Minor)로 불림)"로 도망쳤다가수년 후공을 세우고 싶어 하는 "로마인 백인대장"이 자신을 찾는 것을 알자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던 ""을 마셔자살을 하였다.

 

1. 한니발 바르카 (Hannibal BarcaㆍBC 247~ 183(181)ㆍ향년 64(66)세)

"한니발"은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 사령관"이었던 "하밀카르 바르카"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형제로는 "마고 바르카ㆍ하스드루발 바르카"가 있었다. 또 공정한 "하스드루발"과는 처남매부지간이었다. "시밀케(한니발 아내)ㆍ아들ㆍ에스파냐에서 총독으로 근무하던 동생 "하스드루발"과 또 다른 동생 "마고"는 "로마"와의 전쟁 중에 죽었다.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 따르면, 이러한 일화가 있다. "스키피오"가 한니발에게 "가장 위대한 장군이 누구냐"고 묻자, 한니발은 "알렉산드로스ㆍ피로스"를 말하고 그들을 이어 3번째는 것이 자신이라고 대답했다. "당신은 자신에게 지지 않았냐"는 "스키피오"의 물음에 한니발은 "자신이 스키피오를 이겼다면, 앞서 말한 두 대왕마저 뛰어넘어 제일이 되었을 것"이라 답했다. 이 이야기의 또 다른 판본에서는 "알렉산드로스" 대신 "스키피오"가 들어가는데, 전체적인 줄거리는 같다. "군사사학자 시어도어 에이랄트 닷지"는 한니발의 적이었던 "로마"마저, 한니발을 무찌르기 위해, 한니발의 전술ㆍ전략을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한니발을 "전략의 아버지(father of strategy)"라고 불렀고, 이 별명은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전략의 아버지"라는 찬사로 한니발은 불멸의 명성을 얻었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같은 반열에 드는 위대한 전략가로 여겨지게 된다.

•  출 생 : 카르타고        •  사 망 : 리빗사        •  사 인 : 자살 (독살)        •  : 시밀케 (한니발은 순혈주의를 고수하던 카르타고의 귀족임에도 불구하고, "이베리아인"인 시밀케와 결혼한다)        •  별 칭 : 전략의 아버지        •  계 급 : 카르타고 군의 총사령관        •  참 전 : 2차 포에니 전쟁- 사군툼 공성전티키누스 전투트레비아 전투트라시메네 호 전투 칸나에 전투실라루스 전투헤르도니아 전투자마 전투

한니발은 "로마공화정ㆍ카르타고 제국ㆍ마케돈ㆍ시라쿠사ㆍ셀레우코스 제국"등의 "헬레니즘 국가"들 모두 얼키고 설킨 "지중해 패권투쟁"의 긴장이 최고조에 달한 시대를 살다가 갔다. 한니발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이베리아 반도"에서 "피레네 산맥"과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 본토인 "이탈리아 반도"까지 쳐들어간 것이 있다.

"이탈리아"에서의 처음 몇 년 동안 한니발은 "3차례의 전투(트레비아 전투ㆍ트라시메누스 호수 전투ㆍ 칸나에 전투)"에서 극적인 승리를 이루었다. 그리고 "아군ㆍ적군"의 강약을 정확히 살피면서, "로마의 동맹 시"들을 하나하나 격파해 나갔고, 15년 동안 "이탈리아 반도" 대부분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로마"가 "북 아프리카"를 역 침공하자, 한니발은 "카르타고" 본토 방어를 위해 귀환할 수밖에 없었고, "자마 전투"에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게 결정적 패배를 당하게 된다.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전략을 연구함으로써, "로마" 최악의 적수였던 한니발을 무찌르고, "이베리아 반도"에 웅거하던 한니발의 동생 "하스드루발"까지 토벌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카르타고"의 패배로 끝난 이후, 한니발은 "판관"으로서 "로마에 대한 전쟁배상금"을 비롯한 여러 정치적재정적 문제에 대한 개혁을 주도했다. 그러나 한니발의 개혁은 "카르타고"의 귀족들의 심기를 거슬렀고, 한니발은 "자발적 망명"이라는 형태로 도망치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셀레우코스 제국"으로 가서, "로마"와의 전쟁을 준비하던 "안티오쿠스 3세"의 "군사고문관"이 되었다. "안티오쿠스"가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로마"에게 패배하자, 한니발은 다시 도망자 신세가 되었고, "아르메니아"까지 도망쳤으나, 한니발의 도피생활은 "비티니아"에서 끝났고, 한니발은 "비티니아 해군"을 이끌어, "페르가몬 해군"에게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 뒤 한니발은 "로마"에게 팔아 넘겨지게 되었고,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어진 한니발은 "음독자살"했다. 한니발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사 전략가"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알렉산드로스 3세 메가스ㆍ율리우스 카이사르ㆍ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ㆍ피로스"와 함께 고대 최고의 장군들 중 하나로 사료된다.

한니발의 군대가 "피레네 산맥ㆍ알프스 산맥"을 넘은 사건에 대해, "플루타르코스(역사저술가)"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 눈병을 치료하지 못해, 한쪽 눈을 잃었음에도 낙심하지 않고, 작전에 몰두한 한니발의 열정과 자신들을 방해하는 원주민 포로들 중, 용맹한 전사는 고향에 돌려보내는 관용으로 복종시킨 지도력이 기적을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과학자 이종호"는 한니발에게 과학지식이 있었다고 본다. 고대 군인들은 갈증과 피로를 해소하기 위해, "식초"를 갖고 다녔는데, 한니발은 산성인 "식초"를 이용해서 행군을 방해하는 바위를 갈라지게 하여, 제거했다는 것이다.

2. 제2차 포에니 전쟁 (한니발 전쟁): "피레네ㆍ알프스"를 "코끼리 부대"로 넘은 이유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일어난 B.C 218년 여름, 고작 28살에 불과한 젊은 장군인 한니발은 10만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에스파냐"를 출발, "피레네"와 "알프스 산맥"을 넘었다. 그러나 그때 군사는 보병 2만, 기병 6천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당시 "로마 공화정"에서는 "한니발 군대"가 해안가를 따라 행군할 것이라 예상하여, "마르세유 지역"에 집결하고 있었다. "마르세유"에서 "로마군"과 싸우는 것은 한니발에게 불리하였는데, 그 이유는 "마르세유 일대"는 "로마화"가 충실히 되어, "로마군"은 충분한 보급을 받을 수 있었고, 또한 그 지역의 "갈리아 족"은 "로마군"에게 우호적이었으므로, 한니발이 우군으로 삼을 만한 세력이 많지 않았다.

한니발은 "북이탈리아"에서 싸우고 싶어했는데, "북이탈리아"의 "갈리아 족"은 "로마군의 식민화"에 거세게 저항하고 있는 중이였으므로, 한니발의 강력한 동맹 세력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장단점을 면밀히 검토해 보고, "로마군"의 허를 찌르기 위해 한니발은 겨울에 "알프스 산맥"을 넘는다. 훗날 "알프스 산맥"을 넘는 것은 그의 동생인 "하스드루발"과 먼 훗날의 "나폴레옹"에 의해 재현되나, 후대의 두 사람이 "여름"에 산맥을 넘은 것에 비해, 한니발은 "겨울"에 넘었다. 또한 "하스드루발ㆍ나폴레옹"에겐 한니발이라는 선례가 있었으나, 한니발 이전엔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은 장수는 없었기 때문에, 모험의 정도에서 한니발이 훨씬 어려운 것이었다.

3. 생 애

"카르타고"의 장군이었던 "하밀카르 바르카"의 아들로 태어났다. ("바르카"는 "페니키아 어"로 "천둥"을 뜻한다.) 여러 명의 누이와 2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형제의 이름은 "하스드루발ㆍ마고"였으며, 매형으로는 "카르타고"의 집정관을 지낸 "보밀카르", 공정한 "하스드루발"과 "누미디아"의 왕자인 "나라바스"가 있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의하면, 9살에 "로마를 쳐부술 것"을 "카르타고의 신 타니트"에게 맹세했다고 한다.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가 "로마"에게 패배하자, "하밀카르 바르카"는 가족과 자신의 나라인 "카르타고"의 미래를 위해, "카르타고"에서 "이베리아 반도"로 이주한다. 청년 시절에는 아버지와 매형의 뒤를 이어, 식민지였던 "에스파냐"에서 총독으로 근무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광산을 개발한 "카르타고"는 전쟁으로 인한 상처를 극복하여, "로마"를 두렵게 하였는데, 실제로 당시 "로마"에서는 "카르타고"의 실력을 두려워한 강경노선의 정치인이 "(로마 공화정이 카르타고와의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반드시 카르타고를 몰락시켜야 합니다."라고 연설할 정도였다.

타키누스 전투

"알프스"를 넘어 "북이탈리아"에 진입한 한니발은 그를 추격해 온 "집정관 스키피오"를 "티키누스 전투"에서 이긴다. 그리고 다른 집정관인 "샘프로니우스"의 군대를 "트레비아 강가"에서 대파한다. 이로써 한니발은 "이탈리아 북"부에서 "로마 세력"을 완전히 몰아낸다.

 늪지대 통과

B.C 217년, 한니발은 "이탈리아 중부"로 싸움터를 옮기기로 결정한다. 남하하는 두 가도를 새로 선출된 집정관인 "게미니우스"와 "플라미니우스"가 봉쇄하고 있었는데, 한니발은 그들의 허를 찌르기 위해, 가운데에 있는 늪지대를 통과한다. 이 늪지대는 수 백 km에 걸쳐 무릎까지 차는 물이 고여 있었고, 따라서 막사를 지어 병사들이 숙영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그래서 한니발은 이 늪지대를 3일 밤낮 쉬지 않고 행군을 하였고, 이런 혹사로 인해 많은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고, 또한 행군 도중 한니발 역시 눈병에 걸려, 한쪽 눈을 잃는다.

 트라시메누스 전투

상기의 혹독한 행군으로 "이탈리아 중부"에 진입한 한니발은 서둘러 추격해온 "집정관 플라미니우스"를 도발하여, 매복하고 있었던 "트라시메노 호숫가"로 유인하는데 성공, "트라시메누스 호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 27,000여 명의 "로마 군인"과 "집정관 플라미니우스"를 학살한다. "플라미니우스"가 사망한 이후, 독재관으로 선출된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지구전법"을 통해, 한니발의 회전을 피하고, 그의 보급을 차단하는데 주력한다. 이 전략으로 인해 "이탈리아 중부"에서의 싸움은 교착상태에 빠졌고, 이에 따라 한니발은 "이탈리아 남부"로 이동한다.

 칸나이 전투

다음 해에, 새로 선출된 "바로ㆍ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조속히 전쟁을 마무리 짓기를 원했던 "로마 시민"들의 희망에 따라, 87,000여 명의 대군을 조직한 뒤, 한니발이 머물고 있던 "칸나이"로 향한다. 한니발은 "바로ㆍ아이밀리우스"가 지휘하는 87,000여 명의 대군에 겨우 50,000여 명으로 맞붙게 되었는데, 이 "칸나이 전투"에서 중앙에 "약한 군"을 배치하고, 나머지 "왼쪽ㆍ오른쪽"에 강한 군대를 배치하는 "초승달 전법"으로 "카르타고 군"은 겨우 6,000명을 잃으면서, "로마군"을 7만 명이나 죽이고, 1만 명을 포로로 잡는 대승을 거두어, "로마"를 궁지로 몰아넣는다.

이 전쟁의 여파로 인해, "이탈리아 중부"의 대도시인 "카푸아"가 "로마"를 배신하고 한니발에게 붙는다. 그러자 "로마"에게 이탈하려는 움직임이 많은 도시에서 일어났고, "남부 이탈리아의 타렌툼ㆍ시칠리아의 시라쿠사"와 같은 도시는 한니발의 도움을 받아, 성공적으로 주둔하고 있던 "로마군"을 쫓아내고, 한니발 편에 서게 된다. 그 결과 "로마"는 "중부 이탈리아 일부ㆍ남부 이탈리아 대부분ㆍ북부 이탈리아 전부"를 잃었으며, 또한 "시칠리아 섬"에 마저 적을 두게 된다.

 한니발의 몰락 : 카르타고의 군사적 패배

그러나 "로마 공화정"은 여전히 "카르타고"와의 전쟁의 의지가 강했고, 전쟁에 쓸 수 있는 인적 자원도 풍부한 상태였으며, 또한 한니발 이외의 다른 "카르타고 장군"들은 궤멸적인 패배를 거듭하여, 한니발이 쓸 수 있는 인적 자원을 고갈시켰다. 한니발이 "칸나이"에서 대승을 거둔 이후, "스페인"에서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스키피오 형제"들에게 "사라고사"에서 대패를 한다.

"사르디냐 섬"의 반란을 돕기 위해 침공한 20,000여 명의 "카르타고 군"은 주둔중인 "로마군"에 의해 전멸 당한다. 그리고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 한니발이 직접 이끄는 병력에 거의 맞먹는 병력을 이끌고 있던 "한노"는 한니발과 합류하기 위해 북상하던 중, "베네벤툼"에서 노예로 구성된 "그라쿠스 군"을 만나, 궤멸 당한다. "칸나이 전투" 이후, 이들 다른 "카르타고 장군"들이 당한 패배는 이미 "칸나이"에서 전사한 "로마군"의 수를 능가하였으며, 이러한 패배는 한니발이 승기를 굳힐 기회를 날려버리고 만다. 

 집정관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전략

"로마" 집정관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지구전은 보급을 방해하는 한편, 한니발이 지휘하지 않는 군대엔 적극적으로 공격을 퍼붓는 방법이었는데, 이는 곧 효과를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한니발 이외의 다른 "카르타고 장군"들 중엔, "로마 장군"들과 맞먹는 지휘관이 없었다. 한니발은 "칸나이 전투" 이후에도 "이탈리아 중부"에서 연승을 거듭하여, "로마"의 6개 군단을 불과 며칠 사이에 쓸어버리는 등의 활약을 하였으나, 한니발이 이렇게 싸우는 동안, "로마군"은 "이탈리아 중부"의 대도시인 "카푸아"를 겹겹이 포위한다.

한니발은 이 "카푸아"의 포위를 풀기 위해, 주력부대로 한쪽 포위망을 급습하나, "로마군"은 이 공격을 물리친다. 이 포위를 풀고자, 한니발은 생애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로마"를 직접 공격해 보지만, "로마군"은 "카푸아"의 포위를 풀지 않았고, "로마"의 성벽은 상당히 견고하였다. 결국 한니발은 "카푸아"를 잃고 얼마 안 있어, "시칠리아"의 "시라쿠사 도시"도 "로마군"에 의해 함락된다. 그 뒤 "이탈리아 남부"의 가장 강력한 도시인 "타렌툼"마저, "친 로마"성향의 시 지도자들이 반란을 일으켜 "로마 편"에 선다.

또한 "스페인"에서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부임하여, 한니발의 동생인 "하스드루발 바르카ㆍ마고 바르카"를 완전히 격파하고, "카르타고" 세력을 그 지역에서 내몰았다.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이탈리아"에 있는 한니발과 합류하기 위해, 남아있던 자신의 병력을 모두 데리고 "알프스"를 넘어, "북 이탈리아"에 진입하나, 한니발에 앞서 미리 대기하고 있었던 "로마군"에 의해 궤멸당하고, "하스드루발"도 목숨을 잃는다. "하스드루발"은 남은 "정예 카르타고 군"을 모아, B.C 207년, 한니발의 "알프스 행군 길"을 이용해 "북부 이탈리아"에 도착했고, "반도"를 내려가 한니발과 합류해 로마를 공격할 예정이었다. 우연히 이 정보를 입수한 "로마군 사령관 클라우디우스 네로"는 자신의 구역인 "남부 이탈리아"를 이탈하여 북쪽으로 이동하여, "메타우루스 강둑"에서 "카르타고 군"을 물리쳤고, 이 "메타우루스 전투"에서 "하스드루발"은 전사했다.

B.C 206년, 지금의 "세비야" 근처에서 벌어진 "일리파 전투"에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카르타고 군"을 괴멸시키고 "히스파니아"에서 "카르타고" 세력을 완전히 물리쳤다. 이후 "스키피오"는 "아프리카"에서 "누미디아"의 "마시니사"와 손잡고, "카르타고" 본토 침략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였고, 이 무렵 한니발의 막내 동생 "마고네"는 "제노바"에 상륙하여, 한니발을 도우려 했지만, "로마군"에게 저지당했다. 한니발은 교착된 전선을 지키며, "남부 이탈리아"에 틀어박혀 있었고, 부상당한 "마고네"는 "북이탈리아"에 칩거했다. 점점 전황이 한니발에게 불리하게 되자, 많은 도시들이 한니발에게 협력을 하지 않았고, 따라서 한니발은 "이탈리아의 장화" 발부리 끝인 "칼라브리아"로 쫓겨 갔다.

"스키피오"의 전략

B.C 204년, 겨우 31세에 불과한 젊은 총사령관 "스키피오"가 "북 아프리카"를 침략하자, 결국 B.C 203년 "북 아프리카"의 본국으로 돌아왔다. 본국에 돌아왔지만, 어느새 한니발의 전략을 더욱 우수하게 습득한 "로마"의 젊은 장군 "스키피오"와 "자마"에서 싸워 완패했다. 이 전투로 인해, "제2차 포에니 전쟁"은 종언을 맞으며, "카르타고"는 "로마"에게 "지중해 세계의 자치권"을 넘겨주게 된다.

"스키피오"는 "북아프리카"에서 "카르타고"를 위협했고, "로마ㆍ카르타고" 사이에는 강화교섭이 이어졌다. B.C 203년, 한니발과 동생 "마고네"는 "본국 정부"에 의해, "카르타고"로 송환되었는데, "마고네"는 항해 중, 죽었다. 양국의 강화가 거의 이루어질 무렵, 강화는 결렬되었고, B.C 202년 양쪽은 나라의 운명을 건 결전을 준비하게 되었다.

 "카르타고" 근교의 "자마 전투"

"자마"에서 벌어진 회전에서 한니발이 지휘하는 "카르타고 군"과 "스키피오"가 지휘하는 "로마 군ㆍ마시니사의 누미디아 기병대" 연합군이 맞붙었다. "카르타고 군"은 보병 46,000명, 기병이 4,000명, 전투 코끼리가 80마리였고, "로마군"은 "라일리우스"가 좌익, "마시니사의 누미디아 기병"이 우익을 맡은 기병대 6,000명을 포함하여 약 40,000명의 병력이었다. 전투의 결과는 "스키피오"의 승리였다. 한니발은 장기인 "기병"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패했다. 결국, "카르타고"는 항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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