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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사건 • 전쟁 • 혁명 • 학살

전쟁- BC 264~146 : 포에니 전쟁 ① 로마ㆍ카르타고ㆍ120년간

by 당대 제일 2022. 1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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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에니 전쟁 (Poeniㆍ포이니)"은 BC 264~146년 사이, "로마ㆍ카르타고"가 벌인 3차례의 전쟁을 말한다. "포에니 (Poeni포이니)"라는 말은 "라틴어(Poenicus)"에서 나왔는데, 이는 "페니키아 인"의라는 뜻으로 "카르타고" "페니키아"에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에, "로마인"들이 그렇게 부른 것이다.

 

1. 포에니 전쟁 (Poeniㆍ포이니)

"포에니 전쟁"의 주요 원인은 당시 "지중해" 패권을 잡은 "카르타고"와 새로 떠오르는 "로마"의 이해관계가 충돌했기 때문이었다. "로마인"들은 원래 "시켈리아(시칠리아, 당시 이 섬은 여러 문화가 뒤섞인 곳이었다)"를 통해, 영토를 확장하는 데 관심이 있었는데, 이 섬 일부 지역을 "카르타고"가 지배하고 있었다. "제1차 포에니 전쟁"이 일어날 당시, "카르타고"는 광범위한 "제해권"을 갖춘 "서부 지중해의 패권국"이었으며, "로마"는 "이탈리아"에서 급속도로 떠오르는 "신흥 강대국"이었으나, "카르타고" 수준의 "해군력"이 없었다.

 제1차 : 포에니 전쟁BC 264~ BC 241 (23년간)  로마 승리               제2차 : 한니발 전쟁BC 218~ BC 202 (16년간)→ 로마 승리               3 : BC 149~ BC 146 (3년간)  로마 승리카르타고 멸망

"제3차 포에니 전쟁"이 끝날 당시, 두 나라는 병력 수십만 명을 잃으며, "로마"는 결국 3번의 전쟁에서 모두 승리하여, "카르타고"를 정복하고 수도를 파괴하여, "서부 지중해"의 최강자가 되었다. "포에니 전쟁"과 동시에 일어난 "마케도니아 전쟁"이 끝나고, "동부 지중해"의 "로마-시리아 전쟁"에서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3세"가 패배하면서, "로마 제국"은 "지중해 전역"에서 패권국이 되었다.

2. 제1차 포에니 전쟁 (BC 264~241ㆍ23년간)

• 장 소 : 시칠리아ㆍ지중해 일대ㆍ사르데냐         • 결 과 : 로마 승리 → 지중해 소유권이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넘어간 기점          교 전 : 로마 공화정카르타고

"1차 포에니 전쟁"의 원인은 "시칠리아"였다. "시칠리아"는 "카르타고"의 가장 중요한 무역 거점이었다. "시칠리아" 동부 쪽은 "시라큐스"와 같은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독점하고 있었고, "메시나"는 "시라큐스" 출신의 용병들인 "마메르 인"들이 점유하고 있었다. "시라큐스"의 독재자인 "히에론 2세"가 "메시나"를 공격하자, "마메르 인"들이 "카르타고"에 도움을 요청하고 이에 "카르타고"가 "시라큐스"의 공격을 막고, "메사나"를 점령했다. "카르타고"가 "메사나"를 점령하자, "마메르 인"들은 "로마"에 도움을 요청하고, "로마군"은 "시칠리아"에 도착 후, "메시나"를 탈환 했다.(B.C 264)

전쟁에서 "로마"는 육군이 강하지만, "카르타고"는 해군이 강했다. 그래서 전쟁 초반은 교착상태가 되었다. "카르타고"는 "밀레 전투"에서 패배하였으나, "드레파나 전투"에서 재기하고, "로마 해군"을 격파했다.(B.C 249) "로마"는 7년 동안 해군을 재건하고, "아에가테스 제도 전투"에서 설욕한다.(B.C 241) 이에 "카르타고"는 "로마"의 "시칠리아 지배권"을 인정하고,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합의했다. "1차 포에니 전쟁" 이후, 6년간 "로마"는 팽창을 거듭하여, "지중해 대부분"을 장악하였다.  B.C 3세기 중반 무렵, "로마"의 세력은 팽창하였다. 내부의 반란ㆍ분란을 잠재우고, "이탈리아 반도"를 "로마"의 이름으로 결속시켰다. "라티움 동맹"이나 "삼니움 족"과 같은 적을 모두 무찔렀으며, "에페이로스"의 "퓌로스"의 침략도 격퇴하였다.  "로마"는 스스로의 군사력과 정치체계에 도취되어 있었다. 

반면, 과거 "페니키아"의 도시였던 "카르타고"는 당시 "북아프리카 연안ㆍ이베리아 반도 일부"를 거느리는 거대한 제국이 되어 있었다. "카르타고"는 "시칠리아 해협"을 비롯한, "이탈리아 반도" 주변의 해상을 장악하며, 대부분의 "지중해 교역로 ㆍ경제권"을 관할하고 있었다. "한니발의 전쟁"을 포함하는 "로마 공화정ㆍ카르타고" 간의 3번의 전쟁은 "로마 제국"의 등장을 지연시켰다. "로마의 승리"는 "고대 지중해"의 소유권이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넘어간 기점이 된다. 

3. 제2차 포에니 전쟁 (한니발 전쟁BC 218~ 20216년간)

• 장 소 : 이탈리아ㆍ시칠리아ㆍ히스파니아ㆍ아프리카ㆍ갈리아ㆍ그리스          결 과 : 로마 승리 지중해의 "제해권이권""로마"에게 상실          교 전 : 로마 공화정아이톨리아 동맹페르가몬 / 카르타고ㆍ시라쿠사ㆍ마케도니아 왕국          지 휘 : 한니발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제2차 포에니 전쟁"은 "한니발 전쟁"으로도 불린다.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이 "알프스 산맥"을 겨울에 넘어, "이탈리아"로 진군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B.C 218년, "한니발"이 "히스파니아"의 "사군툼"을 공격함으로 전쟁은 시작되었다. "한니발"은 많은 군사를 이끌고, "갈리아 남부"를 돌아 "알프스"를 넘었고, 이 과정에서 상당한 병력과 전투 코끼리를 잃기도 했지만, "북부 이탈리아"로 진입해서, B.C 216년의 "칸나이 전투"를 비롯한 여러 차례의 전투에서 "로마군"을 무찔렀다. 그러나 "로마군"은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지연 전술로 만회할 시간을 벌었고, "한니발"은 "이탈리아 전역"을 손에 넣지 못했다.

"이탈리아" 외에 "히스파니아ㆍ시칠리아ㆍ그리스"에서도 "로마군"과 "카르타고군"은 격돌했다. 끝내는 "로마군"이 모두 승리하고, 전장은 "아프리카"로 넘어가, B.C 202년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 근처에서 벌어진 "자마 전투"에서 "카르타고"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게 결정적으로 패하여, 전쟁이 끝났다. 이 전쟁으로 "카르타고"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막대한 "배상금"을 "로마"에 물어주었으며, "지중해 서부"의 "제해권ㆍ이권"을 "로마"에 빼앗기고 말았다.

4. 제3차 포에니 전쟁 (BC 149~1463년간)

• 장 소 : 카르타고 (튀니지)          결 과 : 로마 승리 카르타고 멸망          교 전 : 로마 공화정카르타고

이 전쟁은 "카르타"고의 멸망과 완전한 파괴로 끝났다. "제2차 포에니 전쟁" 이후, 점차 부ㆍ해운력을 키운 "카르타고"는 "히스파니아"와 "그리스의 反 로마세력"의 부활에 힘입어, "제3차 포에니 전쟁"이 일어난다. "로마"가 "마케도니아 전쟁"에 돌입하고, 새로 획득한 "히스파니아"의 안정에 힘쓰는 동안, "카르타고"는 "군사력이 없는 단일 도시국가"로, 자신들의 내부 문제에도 "로마"의 개입에 의존하는 상태였다. 

"누미디아"에서 일어난 반란에 "로마"가 개입하였는데, "로마"는 "親 누미디아 정책"으로 일관하여, "카르타고"의 반감을 샀다. B.C 151년부터 시작된 "누미디아"의 침입은 2년 가까이 계속되었고 그로 인하여 "카르타고"의 경제적 손실 타격은 매우 컸기에, 이에 "누미디아"와의 국경분쟁에 대항하기 위해, 약 60,000여 명의 "용병"을 조직했고, "누미디아"가 침공하자 역공하여, "누미디아" 영토로 진입한다.

이에 "로마"는 기다렸다는 듯이 즉각 "조약 위반"으로 간주함과 동시에, 강력하게 항의하는 한편, 조사단을 파견했으며, 급기야 B.C 149년 "로마"는 "카르타고"가 도저히 이행할 수 없는 조건으로 "카르타고"를 압박해왔다. "카르타고"는 "온건정책"을 선택했고, "누미디아"를 공격한 장수를 처형했으며, "로마"에 사죄하기위해 사절단을 보냈으나, "로마"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아프리카"에서 "강화"를 강행한다. "강화"에 파견한 장수는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로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에 대항해 "로마"를 승리로 이끈 장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양손자이기도 했다.

그는 협상하러 온 "카르타고 대표단"에게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1번째 조건을 걸었다. 카르타고의 모든 무기를 로마에게 넘길 것.  이 조건은 "카르타고 군"이 정말로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면, 무기를 모두 "로마"에 넘기라는 것이었다. 전쟁을 원하지 않았던 "카르타고"는 결국 그 조건을 받아들여, 무기를 모두 "로마"에게 넘겨주었는데 그 수만 10만 개가 넘었다고 한다.

그런데 2번째 조건에서 "카르타고"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최후통첩을 보낸다. 수도 카르타고를 파괴하고, 주민은 해안에서 15km 떨어진 곳으로 모두 이주할 것.  "스키피오 아이밀라누스"는 애초부터 "카르타고"를 멸망시킬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를 넘어선 내용에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카르타고"는 "로마"에 결전을 준비했다. 이미 모든 무기를 넘겨, 대항할 무기가 없던 "카르타고"는 주변에서 "농성전"에 대비해 식량을 모았고 나무ㆍ나뭇가지를 무기로 사용하는 한편, 일부 성안의 성벽을 헐어서 투척용 돌로 활용했으며, "로마군"에 타격을 줄 수 있는 물건이란 물건을 모두 집결시켰다. 심지어 여자들까지도 머리카락을 잘라, 석궁의 밧줄로 사용했다. 또한 전쟁의 화평을 주장하는 사람을 모두 사형에 처하면서, 이 두 나라는 피할 수 없는 전쟁을 치르게 된다.

성안의 "카르타고군ㆍ시민"은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이끄는 40,000명의 정예병에 오로지 "돌ㆍ나뭇가지ㆍ맨손"으로 맞섰고, 죽인 "로마군"의 무기를 빼앗아 대항하는 등 "카르타고"의 운명을 건 마지막 싸움이라 생각하며, 필사적으로 저항한다. "제3차 포에니 전쟁"은 단기간에 끝이 날 것이라 생각한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으며, B.C 146년에 함락되기까지 무려 3년 동안이나 이어졌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카르타고" 함락 이후, 도시를 무자비하고 철저히 파괴한 다음, 가래로 갈고, 소금을 뿌려, 불모지로 만들었다.

전쟁 전, "카르타고 시"의 인구는 25만 명이었으나, 함락 후에는 5만 명도 채 되지 않았고, 살아남은 자들은 모두 힘없는 노인이나, 어린 부녀자들이었다. "로마군"은 이들을 "아프리카"의 외진 곳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본래 "로마군"들은 이주민들을 노예로 팔려고 했으나, "스키피오"가 반대했다. 그것은 3년 동안 칼과 창 한 자루도 없이, 맨손으로 자신의 조국을 위해 목숨 바쳐 싸운 "카르타고인"들에 대한 "존경의 표시"라고 한다. 이 도시는 약 150년 후에, "아우구스투스"가 그의 병사들의 은퇴 후, 거주할 도시로 재건하게 되지만 예전의 영광을 되찾지 못했다. "고대 카르타고"의 해상 왕국은 이로써 완전히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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