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이 전쟁 (Trojan war)"은 바다의 여신 "테티스"와 "펠레우스"의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한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남긴 황금 사과를 두고 "헤라ㆍ아프로디테 (로마신화의 비너스)ㆍ아테나"가 서로 다투다가, "트로이 왕자 파리스"가 심판을 내려 "아프로디테"가 주인이 되었다. 그 대가로 "파리스"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게 해 주겠다고 약속한 "아프로디테"는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의 사랑을 얻게 해 주었다. 아내를 빼앗긴 "메넬라오스"는 형 "아가멤논"과 함께 "트로이 원정길"에 나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1. 트로이 전쟁 (Trojan war)의 시작
① 트로이 왕자 "파리스"의 심판
"아테나"는 지혜의 여신이지만, 바로 이 지혜의 여신이 한번 아주 지혜롭지 못한 짓을 한 적이 있다. "헤라","아프로디테"와 아름다움을 겨루어 "황금 사과"를 차지하려 했던 것이다. 인간인 "펠레우스"와 바다의 여신 중 하나인 "테티스"의 결혼식에 신들은 모두 이 혼인 잔치에 초대받았다. 그러나 불화의 여신 "에리스" 만은 초대를 받지 못했다.
여신 "에리스"는 따돌림을 당한 데 앙심을 품고, 혼인 잔치 좌중에다 "황금 사과 한 알"을 던졌다. 그 사과에는 "가장 아름다운 여신께"라는 글씨가 씌어져 있었다. 그러자 "헤라","아프로디테","아테나"는 서로 그 사과가 자기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같이 미묘한 문제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던 "제우스"는 이 세 여신들을 "이데 산"으로 데려갔다. "이데 산"에는 잘생긴 양치기 "파리스"가 양을 먹이고 있었다.
"제우스"는 이 "파리스"에게 가장 아름다운 여신을 고르게 했고, 여신들이 곧 "파리스" 앞에 나타났다. 양치기 "파리스"에게 "헤라"는 권력과 부를, "아테나"은 전장에서의 명예와 명성을, "아프로디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아내로 삼게 해 주겠다"면서, 각기 자기에게 유리한 심판을 부탁했다. "파리스"는 "아프로디테"의 제안이 가장 마음에 들었던지, 이 여신에게 "황금 사과"를 바쳤다. 이로써 그는 "헤라" 여신과 "아테나" 여신의 적이 되었다.
② "파리스ㆍ헬레네"의 만남
"파리스"는 "아프로디테"의 보호 아래 "그리스" 땅으로 건너가, "스파르타 왕 메넬라오스"로부터 따뜻한 영접을 받았다. 그런데 "메넬라오스 왕"의 왕비 "헬레네"는 "아프로디테" 여신이 "파리스"에게 아내 삼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던 바로 그 "인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원래 결혼 전의 "헬레네"에게는 구혼자가 많았다. 그런데 이들은 "헬레네"가 어느 한 사람을 선택하기 전에, 구혼자의 한 사람이었던 "오디세우스"의 제안에 따라, 누가 뽑히든 모두 힘을 합하여 이 여성을 모든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필요하다면 "헬레네"의 원수 갚음에도 공동 전선을 펼 것을 약속한 바 있었다.
결국 "헬레네"는 "메넬라오스 왕"을 배우자로 선택하여 행복한 나날을 살고 있었는데, "파리스"는 그런 두 사람을 찾아와 손님으로 유숙했던 것이다. "파리스"는 "아프로디테"의 도움으로 "헬레네"를 꾀어 낸 뒤, 함께 궁궐에서 빠져 나와, "트로이"로 갔다. 이 때문에 "트로이 전쟁"이,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가 쓴 고대의 가장 위대한 시의 소재가 된 "트로이아 전쟁"이 터진 것이다. "메넬라오스 왕"은 친구들인 그리스의 "왕후장상(王侯將相)"들에게 파발을 보내어, 그 때 함께 모여 서약했으니, 부디 자기에게 힘을 빌려 주어 아내를 되찾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왕후장상들은 "메넬라오스"의 이러한 구원 요청에 응하여 속속 도착했다.
그러나 "오디세우스"는 그즈음 "페넬로페"와의 결혼 생활에 단단히 재미를 붙이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일에는 끼어들지 않으려 했다. "오디세우스"가 이렇게 꽁무니를 빼자, "팔라메데스"가 "오디세우스"를 설득할 사자로 파견되었다. "팔라메데스"가 "오디세우스"의 나라 "이타케"에 도착해서 보니, "오디세우스"는 미치광이 시늉을 했다. 당나귀와 말을 한 쟁기에 매어 밭을 갈고, 씨앗 대신 소금을 뿌리고 있었다. "팔라메데스"는 "오디세우스"를 떠보려고, "오디세우스"의 어린 아들 "텔레마코스"를 쟁기 앞에 안아다 놓아 보았는데, "오디세우스"는 쟁기로 밭을 갈면서도 교묘하게 "텔레마코스"만은 피해 가게 했다. 이로써 "오디세우스"의 미친 사람 행세는 들통 나 버린 셈이었다.
"오디세우스"는 더 이상 서약을 이행하지 않으려고 꽁무니를 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일단 그 일에 말려들자 "오디세우스"는 자기처럼 자진해서 나서지 않는 왕후장상, 그 중에서도 특히 "아킬레우스"를 끌어넣으려고 동분서주했다. "아킬레우스" 없이는 "트로이"를 함락시킬 수 없다는 예언을 듣고 그를 찾아간다.
2. "아킬레우스"의 참전
바다의 여신 "테티스"와 "펠레우스 왕"의 아들인 영웅 "아킬레우스"가 이 일에 끼어들지 않으려고 한 데엔 이유가 있었다. "아킬레우스"는 저 불화의 사과가 던져졌던 결혼식의 신부 "테티스"의 아들이었다. "테티스" 자신은 죽음과 아무 상관이 없는 불사의 여신, 바다의 요정이었다. "테티스"는 일찍이 신탁을 통하여 아들이 원정에 참가하면, "트로이 성"을 목전에 두고 죽을 운명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들의 출전을 만류한 것이다. "테티스"는 아들 "아킬레우스"를 스키로스의 왕 "뤼코메데스"의 궁전에 보내어, 처녀로 변장하게 한 뒤, 공주들 사이에 숨어 살게 했다.
그러나 "오디세우스"는 아킬레우스가 그 궁전에 있다는 걸 미리 알고 방물장수로 변장, 잠입해서 공주들 앞에다 여자 아이들이 좋아할 물건들을 펼쳐 놓았다. "오디세우스"가 전을 벌인 물건 중에는 무기도 섞여 있었다. 왕의 딸들은 다른 물건을 만졌지만, "아킬레우스"만은 사내라서 무기를 만짐으로써 정체가 드러났다. "오디세우스"는 큰 힘 안 들이고 "아킬레우스"를 설득하고는 그 어머니 "테티스"의 충고는 잊게 한 뒤 다른 이들과 함께 출전하도록 했다.
3. 그리스와 트로이의 무장들 : 아킬레우스ㆍ아이아스ㆍ오디세우스ㆍ헥토르
"프리아모스"는 "트로이아의 왕"이었다. 그리고 "이데 산" 양치기로서, "스파르타"에서 "헬레네"를 꾀어 "트로이"로 데리고 온 "파리스"는 바로 이 "프리아모스 왕"의 아들이었다. "파리스"가 양치기 노릇을 하며 불우한 환경 속에서 양육된 것은, 어린 시절부터 아이가 장차 자라면 나라를 위태롭게 할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예언은 사실로 드러나고 있는 것 같았다. "트로이"를 공격하려는 그리스 군의 군비는 일찍이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막강했다.
"뮈케나이 왕 아가멤논"이 총사령관으로 뽑혔는데, 그는 "헬레네"의 남편 "메넬라오스 왕"의 형이었다. "아킬레우스"는 전군을 통틀어 가장 뛰어난 무장이었고, "아킬레우스"에 버금가는 장수는 "아이아스"였다. "아이아스"는 덩치가 우람하고, 견줄 데 없이 용감했다. 모자라는 점이 있다면, 다른 장수들에 비해 성질이 불같이 급하고 지적인 능력이 조금 빠지는 편이었다. 거기에다 "디오메데스"가 있었다. "디오메데스"는 영웅으로서의 자질로 보아, "아킬레우스" 이외의 어떤 장수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또 "오디세우스"가 있었으니, 그는 슬기로운 장수로 유명했다. "네스토르"도 있었는데, 그리스 장수들 가운데서도 최연장 장수였다. 따라서 모든 장수들이 이 "네스토르"를 존경했고, "네스토르"의 조언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트로이" 쪽도 결코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프리아모스 왕"으로 말하자면 나이가 좀 들긴 했으나, 예로부터 현명한 군주로 유명했다. 국내의 정치에 힘을 쏟고, 이웃 나라들과의 동맹으로 나라의 기틀을 탄탄하게 다져 놓은 바 있기 때문이었다. 그의 왕위를 버텨 주는 기둥이자 바탕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은 바로 그의 아들인 "헥토르"였다.
고대 작가들의 기록에 따르면, "헥토르"는 인간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인간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자기 나라가 멸망할 것임을 예감하고 있으면서도 끝까지 용감하게 싸웠다. 그러나 나라를 그 지경으로 만든 아우의 부정한 행위(남의 아내 헬레네를 데려온 것)은 결코 정당화하려 하지 않았다. "안드로마케"는 "헥토르"의 아내였다. 아들의 아버지로서의 "헥토르"의 인격, "안드로마케"의 아내로서의 인격은 장군으로서의 자질에 뒤지지 않을 만큼 빼어났다. 또한 트로이 쪽의 장수로는, "헥토르" 이외에도 "아이네이아스ㆍ데이포보스ㆍ글라우코스ㆍ사르페돈"이 있었다.
4. "아르테미스 여신"의 분노
2년간에 걸친 준비가 끝나자, 그리스 함대와 군대는 "보이오티아"의 "아우리스 항"에 집결했다. 바로 이 지방에서 연합군 총사령관 "아가멤논"이 사냥 나갔다가, "아르테미스"에게 봉헌된 거룩한 숲에서, 사슴의 수호 여신 "아르테미스"의 수사슴 한 마리를 죽이는 죄를 저지른다. "아르테미스" 여신은 그 벌로 전염병을 보내어 군대의 수를 줄이고, 바람을 멎게 하여 군함의 출항을 방해했다. 바람을 다시 불게 하여 함대를 출항시키려면, "아가멤논"은 자신의 딸을 "아르테미스" 신전에 산 제물로 바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예언자 "칼카스"는 점을 쳤다. 점괘에 따르면, 처녀 신 "아르테미스"의 분을 푸는 유일한 방법은 그 제단에다 처녀를 산 제물로 바치는 길뿐이었다. 점괘에 따르면, 산 제물은 죄를 지은 자의 딸이어야 하지 다른 처녀는 아무리 많아도 쓸 데 없었다. "아가멤논"은 그러기가 죽어도 싫어서 오래 뜸을 들였다. 하지만 그리스 연합군의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그래서 그도 마침내 그러자고 했다. 그는 사람을 보내어, 딸 "이피게네이아"를 데려오게 했다. 아버지 "아가멤논"이 내세운 구실은 "아킬레우스"와 짝을 지어주겠다는 것이었다. "이피게네이아"는 아버지가 보낸 사람을 따라왔다.
"이피게네이아"가 산 제물로 바쳐지려는 순간, "아르테미스" 여신은 문득 가여웠던지 처녀를 거두고 그 자리에다 대신 암사슴 한 마리를 놓았다. 그리고는 "이피게네이아"를 구름에 싸서 "타우리스"로 데려갔다. "타우리스"에서 "아르테미스"는 "이피게네이아"를 자기 신전의 여사제로 만들었다. "아르테미스"의 신전 바로 곁에는 "이피게네이아의 사당(祠堂)"이라고 불리는 작은 건물이 있다. "이피게네이아"는 이 사당에서 "아르테미스" 여신을 섬기다 세상을 떠난 실제 인물이다. "아르테미스"의 분노가 가라앉자, 순풍이 불어 함대가 출항할 수 있었다.
함대는 오래지 않아 그리스 연합군을 "트로이" 해안에다 내려놓았다. "트로이" 군은 그리스 군대의 상륙을 저지하려고 공격을 하는데, 이 최초의 공격에서 "프로테실라오스"는 "헥토르" 손에 전사했고, "프로테실라오스"는 "라오다메이아"라는 아내를 본국에 남겨 두고 왔는데, 그 아내의 남편 사랑이 예사롭지 않았다. "라오다메이아"는 남편이 전사했다는 비보를 받자, 신들에게 3시간만이라도 좋으니 남편과 작별 인사를 하게 해달라고 간원했으며, 신들은 그 간원을 들어주었다.
"헤르메스"가 저승으로 내려가, "프로테실라오스"를 다시 이승으로 데리고 온 것이었다. 작별 인사가 끝나고 남편이 다시 죽자, "라오다메이아"도 남편을 따라 죽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요정들이 그의 무덤 주위에 "느릅나무"를 심자, 이 나무는 순식간에 자라서 "트로이 성"을 내려다보고는 말라 버렸는데, 그와 동시에 또 그 뿌리에서 새 가지가 돋아났다고 한다.
5. 10년간에 걸친 "트로이"의 공략
전쟁은 금방 결판이 나지 않았다. "트로이 성" 벽의 방비가 굳건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폴론"이나 "아프로디테" 등의 신들도 "트로이"의 영웅들에게 힘을 보태고 있었다. "그리스" 군대는 먼저 주변 나라들을 제압하여, "트로이"를 고립시키는 "포위 작전"으로 나왔다. 그 결과, 전쟁은 장기화되어 10년이 지나도록 끝이 날 줄을 몰랐다.
"아킬레우스"는 처음에는 싸움에 참가했으나 전쟁이 생각보다 길어지자, 결국 "트로이"를 공격하지 않고 "트로이"의 제후국인 여러 나라들을 쳐서, 많은 전리품을 얻는다. 그 과정에서 예쁜 여자 둘을 얻었는데, "아킬레우스"는 "아폴론"신전의 사제인 "크류세스"의 딸인 "크리세이스"를 그리스 군의 총사령관인 "아가멤논"에게 주었고, "아가멤논"은 자신의 애인으로 삼았다. "아킬레우스"는 "리르네소스"의 왕 "에티온"을 죽이고, 미녀 "브리세이스"는 자신이 갖는다.
하지만 "크리세이스"의 아버지가 "아가멤논"에게 자신의 딸을 줄 것을 요구한다. 그는 아폴론 신전의 사제였는데, 자신이 자신의 딸과 사제 일을 돌봐야 일이 잘 풀린다며, 많은 몸값을 "아가멤논"에게 지불하려고 하였으나, "아가멤논"은 전리품은 돌려줄 수 없다는 이유로 무참히 내쫓는다. 결국 "아폴론" 신의 저주를 받아, 그리스 군영에 또다시 무서운 전염병이 나돌았다. 할 수 없이 "아가멤논"은 "크리세이스"를 다시 돌려주며, 소 100마리를 "아폴론"에게 바친다.
"아가멤논"은 대신 "아킬레우스"의 애인인 미녀 "브리세이스"를 자신의 여자로 바치라고 한다. "아킬레우스"는 "브리세이스"를 "아가멤논"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격분한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을 죽이려고 했지만, "아테나" 여신의 만류로 단념하고, 결국 전투 참전을 중단하여, 대신 군사를 이끌고 물러가 두 번 다시 전쟁터에 나타나지 않았다. "아킬레우스"가 없는 그리스군은 트로이군에게 계속 패배하였다. 이를 보다 못한 친구 "파트로클로스"가 "아킬레우스"의 "무구(武具)"를 갖추고 출진하였는데, 적장 "헥토르"의 손에 죽자, 이에 격분한 "아킬레우스"는 다시 전쟁터에 나서게 되었다.
6. "아킬레우스ㆍ헥토르"의 싸움
"아킬레우스"가 몸에 걸친 "무구(武具)"는 어머니가 공신(工神) "헤파이스토스"를 시켜 특별히 만든 것으로 유명한 "아이기스"이다. "트로이"전쟁이 벌어지던 당시는 양쪽 군대의 지휘관으로 선두에 서는 영웅들이 먼저 1대1로 대결했으며, 이 승패가 전투의 향방에 큰 영향을 미치는 시대였다. "트로이" 측을 대표하는 영웅은 "헥토르"이고, "그리스" 측의 최고 영웅은 "아킬레우스"였다. 둘 다 쟁쟁한 전사 가문의 출신이었다. "헥토르"는 전쟁의 불씨를 던진 "파리스"의 형으로, 늘 선봉에 서서 그리스의 영웅들과 싸웠다. 그를 감당할 수 있는 자는 "아킬레우스"와 기량은 조금 떨어지지만 힘에서는 그에 필적하는 "아이아스" 뿐이었다. 하지만 "아킬레우스"는 그리스의 연합군 총사령관 "아가멤논"과 서로 모욕을 퍼부으며 크게 다투고는 전장에 나가지 않았다.
"아킬레우스"의 친구 "파트로클로스"는 그의 갑옷을 빌려 입고, 전장으로 나갔다. 그리고 "트로이" 측을 돕는 "아폴론"의 간계에 빠져 부상을 당한 뒤, "헥토르"에게 죽음의 일격을 당한다. 이때 그가 입고 있던 "아킬레우스"의 갑옷도 "헥토르"에게 빼앗기고 만다. 당시 전장의 1대1 승부에서는 이긴 측이 상대편 "무구"를 빼앗는 관습이 있었다. "파트로클로스"는 동료의 "무구"를 빼앗으러 온 적과 싸우다가 자신도 패하고 만 것이다.
그 뒤 "파트로클로스"의 사체를 둘러싸고, 트로이 측에서 "헥토르"와 "아이네아스", 그리스 측에서 "아이아스"와 "메넬라오스"가 나서서 싸우지만 결판이 나지 않았다. 친구의 죽음을 알게 된 "아킬레우스"는 출전할 뜻을 굳히고, 그의 어머니는 "헤파이스토스"에게 새로운 무구를 만들어달라고 간청한다. 그리하여 대장장이의 신인 "헤파이스토스"가 급하게 만들어낸 무구를 들고, 그리스 최고의 영웅은 마침내 전장으로 나선다.
그의 용맹한 활약은 "트로이" 측을 압도한다. "아이네아스"는 잘 싸웠지만, "포세이돈"에게 설득되어 전장을 이탈하고 말았다. "헥토르"와 "아킬레우스"의 첫 대결은 "아폴론"이 열세에 빠진 "헥토르"를 전장에서 구출해준 탓에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끝났다. 하지만 "헥토르"는 자기 운명은 "아킬레우스"와 싸우다가 죽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파트로클로스"에게 빼앗은 "아킬레우스"의 무구로 무장하고, "아킬레우스"에게 목숨을 걸고 도전했다. 그들이 격렬하게 맞붙자, 무기와 방어구에서 불꽃이 튀었다.
"아킬레우스"는 자기 갑옷을 입고 있는 "헥토르"를 상대로 그의 약점이 어디인지를 생각했다. 그리고 목과 어깨를 연결하는 부분에서 작은 틈새를 발견했다. 그는 그곳에 거대한 창을 찔렀다. 창끝이 목덜미를 찔려 "헥토르"는 숨을 거두고, "아킬레우스"는 친구의 복수를 갚고 빼앗긴 무구를 되찾았다. 하지만 "아킬레우스"도 그리스로 살아서 돌아가지는 못했다. 그는 적장 "헥토르"를 죽여 친구의 원수를 갚고, 그의 시체를 전차에 매어 끌고 돌아왔는데, "헥토르"의 부왕(父王) "프리아모스"가 몸소 진중으로 찾아와 몸을 굽히면서, 자식의 유해를 돌려달라고 애원하자 "헥토르"의 시체를 인도하였다. "헥토르"를 죽였고, 트로이의 왕자 "뤼카온", 장수 "아스테로파이오스", 병사 "알카토오스", 아마존의 "펜테실레이아 여왕", 에티오피아의 왕 "멤논"과 동료" 테르시테스" 등을 죽였다.
7. "트로이의 동맹국"의 참전
"헥토르"가 죽은 뒤에도 "트로이"는 바로 함락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새로운 동맹자들의 군사 원조를 받으며, 항쟁을 더 계속했던 것이다. 그 동맹국 왕의 한 사람이 에티오피아 "왕 멤논"이었다. 또 한 사람의 동맹국 왕은 아마존 족 "여왕 펜테실레이아"였다. 그리스의 유명한 영웅들은 거의 예외 없이 "아마존"과의 전투를 경험한다.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옮겨 오면서 남성이 권력의 주도권을 잡은 시대를 상징하는 것인가?
"헤라클레스ㆍ테세우스ㆍ벨레로폰"은 아마존 족과 전투를 경험한 대표적인 영웅들이다. "아마존 족"은, 활 쏘는 데 걸리적 거린다며 왼쪽 젖을 자른다는 전설이 있지만, 사실은 아니었던 것 같다. "펜테실레이아"는 여자로만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왔다. "아마존 여군"의 감투 정신과 그들이 지르는 함성의 무서운 파급 효과에 대해서는 여러 권의 책이 다투어 쓰고 있는 바와 같다. "펜테실레이아"는 그리스 군 장수를 여럿 죽였으나, 여왕 자신은 "아킬레우스" 손에 죽었다. "아킬레우스"는 자기 손으로 사로잡은 적장 "펜테실레이아"를 내려다보며, 그 아름다움과 젊음, 용기에 감동하고는 자기 승리를 뼈아프게 한탄했다.
8. "아킬레우스"의 죽음
"아킬레우스"는 적장 "헥토르"를 전사시키고 그 무덤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던 "트로이"의 공주 "폴뤽세나"의 예쁜 모습을 보고 청혼했는데, 이 시기는 "헥토르"의 장례를 위한 10일간의 휴전 기간 중이었다. ("트로이"의 공주 "폴뤽세나"는 그리스군의 승리 이후에, 아킬레우스의 망령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산 제물로 그의 무덤에 바쳐졌다.) "아킬레우스"는 "폴뤽세나"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겨, 만일 "폴뤽세나"를 아내로 삼게 해주면, 그리스 군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트로이"에 평화가 오게 해보겠노라고 말했다.
"트로이 성"에서 사납게 폭력을 휘둘러 적의 영웅들을 학살했는데, 이것이 "트로이" 측의 신 "아폴론"의 노여움을 샀던 것이다. "아폴론"은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에게 자기 활(아폴론의 활)을 내주고, "아킬레우스"의 유일한 약점인 뒤꿈치를 쏘게 했는데, "아폴론"의 화살은 아무도 피할 수 없었다. "아폴론"의 신상 뒤에 숨어 있었던 "파리스"의 독화살에 발뒤꿈치를 맞아서 죽고 말았다. 화살은 "아폴론"의 인도를 받아, "아킬레우스"의 발뒤꿈치를 꿰뚫었다. 급소를 맞은 "아킬레우스"는 그대로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뒤꿈치는 아킬레우스의 치명적인 약점이었고, 지금도 다른 사람의 약점을 "아킬레스건"이라고 한다. "아킬레우스"의 어머니인 바다의 여신 "테티스"가 "아킬레우스"를 낳자마자 그를 "불사신(不死身)"으로 만들려고, 아기의 몸을 저승을 흐르는 "스튁스 강물"에다 담구었는데, 이때 "테티스"는 "아킬레우스"의 발을 잡아 거꾸로 담그는 바람에, 이 뒤꿈치만은 "스튁스 강물"이 닿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킬레스 힘줄"이라는 이름도 여기서 유래하였는데, 이 전설은 비교적 새로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킬레우스"의 시체는 "아이아스"가 수습해 왔다.
9. 아킬레우스 "무구(武具)"의 처리ㆍ"아이아스"의 자살
"아킬레우스"가 죽은 뒤, 전쟁은 곧 막을 내렸다. 그리스 측은 승리에 가장 공헌한 영웅에게 전장에서 죽은 "아킬레우스"의 무구를 주기로 했다. 어머니 "테티스"는 아들의 갑옷을 그리스 장수에게 주되, 살아남은 용사 중 그 갑옷이 가장 어울리는 것으로 판정받는 장수에게 주기로 했다. 그 후보로 나선 것이 "아킬레우스" 사후에 가장 강력한 영웅이 된 "아이아스"와, 수많은 난국을 지략으로 헤쳐 온 "오디세우스" 두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누가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차지할 것인지를 놓고 투표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근소한 차로 "오디세우스"가 차지하게 되었는데, 이 경쟁은 애초에 "아이아스"에게 불리했다. 변론에 능한 "오디세우스"가 많은 영웅을 자기편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한편 무구를 차지한 "오디세우스"는 그것을 "아킬레우스"의 아들 "네오프톨레모스"에게 양보했다. 그는 아버지를 꼭 빼어 닮아서 그 갑옷이 몸에 잘 맞았다.
"아이아스"는 이에 격정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을 하고 말았다. 그의 피가 대지에 스며들자 거기에서 한 송이 꽃이 피었다. "히아신스"라고 불리는 꽃이었는데, 그 꽃잎에는 "아이아스"라는 이름의 첫 번째 글자와 두 번째 글자인 "AI"가 무늬지어 있는데, "AI"는 그리스 어로 "아, 슬프다"는 뜻이다.
"아킬레우스"의 무구는 신의 은총을 받은 신의 영웅임을 알려주는 영예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전장에서는 이 무구를 둘러싸고 처절한 싸움이 벌어지고, 아이아스는 이 무구를 차지하지 못한 수치심을 씻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이다. 한편 이야기에는 "아킬레우스"의 무구가 2벌 등장하는데, 왜 "아이아스"와 "오디세우스"가 다투어야 했는지 그 까닭은 분명히 설명되지 않는다.
10. 신탁 (神託)에 의지
"아킬레우스"가 죽고 나서야, 장수들은 중요한 "신탁(神託)"을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것은 "트로이 성"을 깨뜨리자면, "헤라클레스의 화살"이 있어야 한다는 신탁이었다. 그 화살은 "필록테테스"가 가지고 있었다. "필록테테스"는 최후까지 "헤라클레스"와 함께 있다가 그를 화장하는 장작더미에 불을 붙여준 사람이었다. "필록테테스"는 그리스 군에 참가하여 "트로이 원정"에 따라왔으나, 도중에서 그만 자기 화살에 발을 다치고 말았다. 그런데 그 상처에서 냄새가 몹시 났기 때문에 이를 견디지 못한 동료들이 그를 "렘노스 섬"에다 데려다 놓았기에 "필록테테스"는 "렘노스 섬"에 있었으며, 곧 "디오메데스"가 "렘노스 섬"으로 파견되었다. 그를 설득하여 다시 그리스 군에 합류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필록테테스"는 흔쾌하게 승낙하였고, "마카온"이 "필록테테스"의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이 운명의 독화살에 맨 먼저 희생된 사람은 바로 "파리스"였다. "파리스"는 화살을 맞고 고통스러워하면서 오래 잊고 있던 한 여성을 생각했는데, 바로 요정 "오이노네"였다. "오이노네"는 운명의 미녀 "헬레네" 때문에 버림을 받은, "파리스"가 젊은 시절에 맞은 아내였다. "오이노네"는 자기가 받았던 부당한 대접을 잊지 않고 있다가, 그의 상처를 돌보아 주기를 거절했다. "파리스"는 "트로이 성"으로 들어와서 죽었다. "오이노네"는 "파리스"를 돌려보내 놓고는 바로 후회하고 약초를 가지고 뒤쫓아 왔다. 그러나 이미 때늦은 다음이었다. "오이노네"는 "파리스"의 죽음을 슬퍼하다가 목을 매고 죽었다.
11. 오디세우스의 계략 : 팔라디온(아테네 여신상) 도둑질ㆍ"목마(木馬)" 제작
"트로이"에는 "팔라디온"이라고 불리는, "아테나 여신"의 유명한 상(像)이 있었다. "트로이" 백성들은 그 상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어서, 그 상이 있는 한 "트로이 성"은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것으로 믿고 있었다. "오디세우스"와 "디오메데스"는 변장하고 성 안으로 숨어들어, 이 상을 그리스 진영으로 가져와 버렸다. 그런데도 "트로이"는 계속해서 버티었다. 그리스 군도 무력으로는 성을 떨어뜨릴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절망하고 말았다.
결국 "오디세우스"가 한 가지 꾀를 내었고, 그리스 군은 그의 제안대로 하기로 했다. 그리스 군은 일단 포위를 푸는 척했다. 그들은 위장 전술의 일환으로 선단의 일부를 철수시켜, 가까운 섬에다 숨겨 놓기까지 했다. 이어서 그리스 군은 거대한 "목마(木馬)"를 만들었다. 그들은 그 "목마"가 "아테나 여신"의 노여움을 가라앉히기 위한 제물이라고 선전했다. 그러나 그 목마 안에는 무장한 장수들이 여럿 들어가 숨어 있었다.
남아 있던 그리스 군도 각기 함선으로 돌아가, "트로이"로부터 완전히 철수하는 척했다. 그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돛을 올리고 항구를 떠나기까지 했다. "트로이" 군은 선단이 항구를 떠나는 것을 보고는 적군이 포위를 풀고 완전 철수하는 것으로 믿었다. "트로이" 백성들은 성문을 열고 나와 오래 미루어 두었던 자유를 한껏 즐기며, 진영이 있던 곳을 구경하러 다녔다. 그 "목마"가 "트로이" 백성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것은 물론이다. 사람들은 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걸 만들었을까 하고 수군거렸다. 전리품이니 성 안으로 끌고 들어가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고, 위험한 짓이라고 말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모두가 주저하고 있었을 때, "포세이돈 신전"에서 신관(神官)을 지내는 "라오콘"이라는 사람이 부르짖었다.
"시민 여러분, 대체 이 무슨 해괴한 짓들입니까? 마땅히 경계할 일입니다. 그리스 인들은 선물을 준대도 겁이 납니다." "라오콘"은 이렇게 부르짖으며 목마의 옆구리를 향해, 들고 있던 창을 던졌고, 창은 목마 옆구리에 명중했다. 창이 명중하자 목마에서는 빈속이 울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신음 소리와도 흡사했다. 그로부터 별다른 일이 없었더라면, "트로이" 시민들은 "라오콘"의 충고를 받아들여 문제의 목마를 때려 부수고, 그 속에 숨은 그리스 인들을 남김없이 죽였으리라.
그러나 바로 그 때 저쪽에서 사람들이 달려왔다. 그리스인 포로인 듯한 사람이 그들에게 끌려왔는데, 그 사내는 겁에 질려 사색이 되어 있었다. 사내가 "트로이" 군 장수들 앞에 끌려나오자, 장수들은 그를 달래며 묻는 말에만 정직하게 대답하면 살려 주겠노라고 말했다. 사내는, 자기는 "시논"이라는 그리스 인인데, "오디세우스"의 미움을 사서 출항하는 그리스 함대에 타지 못하고 낙오되었다고 말했다. 사내는 "목마"에 대해서, 원래 그 목마는 아테나 여신의 분노를 삭이기 위해서 만든 제물인데 그렇게 크게 만든 것은, 만일에 목마가 "트로이" 군의 수중에 들어가면 "트로이"군이 승리하게 될 것이라는 "칼카스"의 예언에 따라, 목마가 성 안으로 끌려들어갈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설명했다.
"시논"의 증언은 "트로이" 인들 귀에 솔깃하게 들렸다. "트로이" 인들은 어떻게 하든지, 그 목마를 성 안으로 끌어들여 자기네들에게는 썩 기분이 좋은 예언을 성취시켜 보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거기에다 또 한 가지 불가사의한 사건까지 겹치면서, "트로이" 인들의 마음속에 조금 남아 있던 의혹을 말끔히 씻어 주었다.
불가사의한 사건이란, 다름이 아니라 큰 뱀 두 마리가 나타나 해상을 누비다가 육지로 올라온 것이었다. "트로이" 인들은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이리저리 도망쳐 다녔다. 뱀은 "라오콘"과 그의 두 아들이 서 있는 곳을 덮쳐, 먼저 그의 아들을 습격하여 몸을 감고는 얼굴에다 독기를 뿜었다. 아버지 "라오콘"은 아이들을 구하려고 하다가 자신도 잡혀서 뱀에게 감기게 되었다.
삼부자(三父子)는 뱀의 또아리에서 빠져 나오려고 몸부림쳤지만, 뱀은 삼부자를 잔뜩 감고는 온몸에 힘을 주었다. 삼부자는 곧 숨이 막혀 죽고 말았다. (큰 뱀에 감겨 있는 "라오콘" 삼부자를 그린 작품 "라오콘"은 현존하는 군상 조각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의 하나로 손꼽히는데, 이 유명한 대리석상은 로마의 바티칸 궁전에 있다.) "트로이" 인들은 이 사건을 목격하고, 신성한 목마에 대한 "라오콘"의 무례를 벌하려고 신들이 뱀을 보낸 것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그들은 정식으로 의식을 베풀고, 그 목마를 성 안으로 끌어들일 준비를 했다. "트로이 목마"는 너무 커서 성문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었기에 "트로이" 인들이 성벽을 허물고 목마를 성 안으로 끌어들였고, 의식은 노래와 승리의 환호로 베풀어졌으며, 그날은 축제로 저물었다.
12. "트로이 성"안으로 들어간 "목마(木馬)"
그리스 군 병력은 야음을 이용해서, 이미 성에서 가까운 곳까지 와 있었다. 밤이 되자, 첩자 "시논"의 신호로 목마에서 빠져 나온 그리스 장수들은 그리스 군을 입성시키려고 성문을 활짝 열었으며, 성 안은 곧 불바다가 되었다. 축제의 피로에 지쳐 잠들어 있던 "트로이" 백성들은 차례로 참살 당했고, "트로이 성은 그리스 군 수중으로 떨어졌다.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는 그 때까지 살아남아 제 나라가 멸망하는 꼴을 기어이 두 눈으로 보게 된다. 그는 그리스 군이 "트로이"를 점령한 그 운명의 밤 난리 통에 참살을 당했다.
왕 자신은 갑주를 두르고 다른 용사들과 함께 싸우고자 했으나, 연로한 아내 "헤카베"의 권유에 못 이겨 아내와 딸들을 데리고, "제우스 신전"의 제단으로 피신해서 구원의 손길을 기다렸다. 그러나 바로 그 때, 막내아들 "폴뤼테스"가 "아킬레우스"의 아들 "퓌로스" 손에 부상을 당하고 쫓겨 와서는 아버지의 발치에서 숨을 두었다. 이를 본 "프리아모스 왕"은 분을 참지 못하고, 떨리는 손으로 창을 집어던졌다. 그러나 창은 빗나갔고, 왕은 "퓌로스" 손에 참살을 당했다.
왕비 "헤카베"와 딸 "카산드라"는 붙잡혀 그리스로 끌려갔다. "카산드라"는 "아폴론"의 사랑을 받은 바 있었고, "아폴론"은 한때 사랑했던 "카산드라"에게 예언하는 권능을 부여했다. 그러나 나중에 "카산드라"에게 화가 난 "아폴론"은 "카산드라"의 예언력은 그대로 두되, 설득력을 빼앗아 버려, 아무도 그 예언을 믿지 않게 만들어 버렸다. "카산드라"는 적국인 그리스의 연합군 총사령관 "아가멤논"의 첩 노릇까지 해야 했던 불운한 공주였다.
13. "트로이" 전쟁 이후
이 전쟁은 결국 "트로이"의 멸망으로 끝나지만, 승리한 "그리스" 측도 마냥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트로이"를 멸망시킨 뒤, 승리에 취해 난폭하게 행동하다가, 여러 신들의 노여움을 사서 선단이 태풍에 괴멸되고 말았다. 이 전쟁에서 살아남아 본국으로 돌아간 "그리스" 영웅은, 다른 서사시에서 그 모험이 노래되는 "오디세우스"나, 귀가하자마자 아내에게 죽음을 당하는 그리스의 연합군 총사령관 "아가멤논" 등 몇몇에 지나지 않았다. 한편 패배한 트로이의 영웅 "아이네아스"는 이탈리아로 달아났고, 훗날 그의 자손들이 로마를 건설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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