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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사건 • 전쟁 • 혁명 • 학살

전쟁- BC 1194~1184 : 트로이 전쟁 ① 아킬레우스 (Achilleus)

by 당대 제일 2022.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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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 전쟁 (Trojan war)"은 고대 그리스의 영웅 "서사시"에 나오는 그리스 군과 "트로이 군(터키)" 사이의 10년 전쟁 (BC 1194(?)~1184)이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 묘사되는 전쟁으로, "미케네 문명시대"에 해당하는 BC 13C 경에 소아시아의 도시국가 "트로이(트로이 역사는 BC 3,500년 경부터~)"와 "고대 그리스"의 국가들이 벌인 전쟁이다.

 

1. 영웅 (7명)ㆍ일리아스

바다의 여신 "테티스"와 "펠레우스"의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한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남긴 황금 사과를 두고 "헤라아프로디테 (로마신화의 비너스)아테나"가 서로 다투다가, "트로이 왕자 파리스"가 심판을 내려 "아프로디테"가 주인이 되었다. 그 대가로 "파리스"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게 해 주겠다고 약속한 "아프로디테"는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의 사랑을 얻게 해 주었다. 아내를 빼앗긴 "메넬라오스"는 형 "아가멤논"과 함께 "트로이 원정길"에 나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리스군의 "아킬레우스ㆍ오디세우스", 트로이군의 "헥토르ㆍ아이네아스" 등 숱한 영웅들과 신들이 얽혀 10년 동안이나 계속된 이 전쟁은 "오디세우스"의 계책으로 그리스군의 승리로 끝났다. 그리스군은 거대한 목마를 남기고 철수하는 "위장 전술"을 폈는데, 여기에 속아 넘어간 트로이군은 목마를 성 안으로 들여 놓고, 승리의 기쁨에 취하였다. 새벽이 되어, 목마 안에 숨어 있던 "오디세우스" 등이 빠져 나와 성문을 열어 주었고, 그리스군이 쳐들어와 트로이성은 함락되었다.

7명의 영웅

 아킬레우스(트로이 전쟁 최고 영웅ㆍ그리스 최고 영웅)ㆍ헬레나(최고의 미녀ㆍ금발)              헥토르(프리아모스 왕의 장남명장아킬레우스에 의해 사망)아이네이아스(헥토르 사촌로마시조)               파리스 왕자(트로이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 제공자)메넬라오스(스파르타 왕헬레네의 남편)              

아가멤논(총사령관)디오메데스(아킬레우스 사후에 실질적으로 그리스 연합군을 지휘)               오디세우스(연합군 꾀주머니)네스토르(연합군 장군 중 가장 연로하고, 가장 지혜로운 자)

일리아스

"일리아스"의 도입부는 "아킬레우스"의 분노로 시작된다.  "일리아스"이야기는 "헥토르"가 죽는 대목에서 끝이 나기 때문에, 영웅의 행적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는 "오디세이아"나 그 이후의 작품을 보아야 한다.

"호메로스"의 작품에는 "아킬레우스"가 불사신이라는 이야기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만일 "아킬레우스"가 불사신이었다면, "헤파이스토스"의 갑옷 따위는 아무 필요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킬레우스"는 약점인 발뒤꿈치 말고는 "불사신"의 몸이었으므로 방패나 갑옷 따위는 필요 없었다.  "아킬레우스"의 무구는 신의 은총을 받은 신의 영웅임을 알려주는 영예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전쟁 방식

"고대 그리스"라고 해도 기간이 매우 길어서, 시대에 따라 전투 방식이나 무기 따위도 크게 다르다.  그리스라고 하면, 값비싼 갑옷으로 온몸을 감싼 장갑 "보병(호플리테스)"이나 장창을 든 "알렉산드로스"의 "마케도니아 밀집 군단"이 떠오르겠지만, 이는 "페르시아 전쟁" 이후의 비교적 나중 시대에 사용된 전법이다.  "호메로스"가 묘사한 "일리아드"는 기원전 13세기경 그리스의 지배가 "크레타 섬"을 본거지로 하는 "미노아 문명"에서 그리스 본토의 "미케네 문명"으로 옮아갈 무렵의 사건이다. 

이 즈음의 무기나 갑옷은 청동제로서, 이를 소유할 수 있었던 것은 부유한 귀족들로 제한되었다.  당시의 전투는 갑옷을 입은 귀족들이 각각 1대1 승부를 벌이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보병은 짧은 투창과 검을 들었으며, 여기에 궁병ㆍ기병ㆍ전차가 더해진 복합군이 중심을 이루며, 그들의 전술은 그리스적이라기보다는 고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의 전법에 가까웠다.

 전쟁의 역사적 실존여부

한편 고대에는 이 전쟁의 역사적 사실성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았으나, 19세기의 비판적 역사 연구에서는 허구적인 신화로 취급하는 풍조가 강하였으나, 그러나 "하인리히 슐리만"이 1870년부터 "트로이 유적지"를 발굴함으로써, 두 나라 사이에 충돌이 있었다는 역사적인 근거를 얻게 되었다. 트로이아 성의 유적은 도시가 매몰되면 그 위에 또 도시가 들어서는 식으로 이 유적지 밑에 또 다른 도시의 유적이 있어서 발굴 및 복원이 매우 힘들다고 한다.

트로이 (터키)의 목마

그리스 신화에서 비롯된 "트로이의 목마"는 외부에서 들어온 요인에 의하여 내부가 무너지는 것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이게 되었다.  이 전쟁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는 고대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수많은 "영웅 서사시"가 만들어졌으나, 그 중에서 뛰어난 문학성을 인정받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오디세이아"만이 후세에 전해졌으며, 이 전쟁과 관련된 이야기를 소재로 하여 수많은 예술 작품이 탄생하였다.  트로이 주변에서 발굴된 동전과 도자기를 근거로 트로이 목마 모형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1998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터키에 있는 고대 도시 "트로이아의 유적지"에는 거대한 목마가 서 있다.  관광객들은 사다리를 통해 목마의 뱃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2. 아킬레우스 (Achilleus) : 트로이 전쟁의 최고 영웅 : 역시 "아킬레우스"다.

아킬레우스는 "테살리아" 지방의 "퓌티아"의 왕 "펠레우스"와 바다의 요정 "테티스"의 아들이다. 그는 격정적인 성격이었으나, 정이 많고 발이 빨라 준족(駿足)의 대표자로도 알려져 있다. "트로이 전쟁"에서 가장 고결한 영웅으로 알려졌으며, "파리스"의 화살에 급소를 맞고 죽었다.

그의 무구는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가 만든 것으로, 검ㆍ창ㆍ갑옷ㆍ방패 등은 가공할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킬레우스"의 무구는 신의 은총을 받은 신의 영웅임을 알려주는 영예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전장에서는 이 무구를 둘러싸고 처절한 싸움이 벌어지고, 아이아스는 이 무구를 차지하지 못한 수치심을 씻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이다.

 생 애

"제우스"와 "포세이돈" 등 무수한 남신들이 아름다운 바다의 요정 "테티스"에게 구혼했지만, 그녀가 낳은 아들은 아버지보다 뛰어나 "올림푸스"를 차지할 것이라는 예언을 받고 포기했다. "제우스"는 대신 "테티스"를 인간인 "펠레우스"와 결혼하게 했다. "펠레우스"와 "테티스"의 결혼식에 모든 이들이 초대되었지만, 불화의 여신 "에리스"만이 제외되었다. 이에 앙심을 품은 "에리스"가 신들 사이로 "황금사과"를 던지면서 "트로이 전쟁"의 불씨가 생겼다.

"테티스"는 갓난아기였던 "아킬레우스"를 저승의 "스틱스 강"에 담가 상처를 입지 않는 무적의 몸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녀가 잡고 있었던 발목 부분은 강물에 닿지 않았기 때문에, 발목 뒤 힘줄은 "아킬레우스"가 상처를 입을 수 있는 약점으로 남았다. 이 전설에서 치명적인 약점을 뜻하는 "아킬레스 건(아킬레스는 아킬레우스의 라틴어 발음)"이라는 단어가 유래했다. 

소년 시절에 "아킬레우스"는 "켄타우로스 족"의 현자 "케이론"에게서 학문과 무술을 익혔다. "아킬레우스"는 강인한 전사였으며, 달리기가 빠르기로도 유명했다. "테티스"는 아킬레우스가 젊은 나이에 "트로이 전쟁"에 참전해 죽거나, 명예로운 업적을 남기지 않는 대신 오래 살 것이라는 신탁을 받았다. "아킬레우스"를 절대로 "트로이"에 보내지 말아야겠다고 마음먹은 그녀는 그를 여장시켜, "스키로스"의 "리코메데스 왕"의 궁정으로 보냈다. "아킬레우스"는 "필라라"라는 가명을 쓰면서, "리코메데스 왕"의 딸들과 섞여 베를 짜고 악기를 배우며 시간을 보냈다. 그는 곧 "리코메데스"의 장녀 "데이다메이아"와 사랑에 빠졌고, "데이다메이아"는 아들 "네오프톨레모스"를 낳았다.

그리스의 예언자 "칼카스"는 "아킬레우스"가 없는 그리스 군은 트로이 전쟁을 승리할 수 없다는 신탁을 받았다. "아킬레우스"를 찾아 "스키로스"로 온 "오디세우스"는 "아킬레우스"가 여장을 하고 숨어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꾀를 냈다. 그는 왕녀들에게 장신구를 선물하면서 사이에 무기를 섞어 놓았다. 여자들이 보석을 보고 즐거워하는 동안, "아킬레우스"는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서 있었다. 갑자기 적의 침공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들리자, "아킬레우스"는 장신구 사이에 있던 무기를 얼른 집어 들었다. 정체가 드러나자 자신의 용기를 증명하고 싶었던 "아킬레우스"는 순순히 "오디세우스"를 따라 그리스 군에 가담했다.

대장장이의 신 : 헤파이스토스

그리스 신화에서 대장장이의 신은 "헤파이스토스"다. 그의 이름은 로마 신화에서는 "불카누스"라 불리는데, 이 두 신은 본래 다른 신격이었다가 나중에 결합되었다고 한다. 그는 하늘의 주신 "제우스"와 "헤라"의 아들로, 태양신 "아폴론"의 배다른 형제다. 불꽃의 화신 "헤파이스토스"는 태어나자마자 불꽃을 휘날리고 빛을 뿜어냈는데, 그 불타오르는 듯한 형상에 혐오감을 느낀 어머니 "헤라"는 그를 "올림포스"에서 추방해버렸다. 미술 작품에서 그는 주로 수염이 나고, 체구가 작은 중년의 사내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는 에게 해 북부의 "트로이"와 가까운 "렘노스 섬"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 섬"의 "에토나 화산"에 정착하여, 자신의 불꽃을 이용하여 무기와 방어구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외눈박이 거인 "키클로프스(사이클로프스)"를 사정없이 부리고, "에토나 산" 분화구에서 불꽃을 뿜어 올려서 작업에 열중했다. 그 작품은 검ㆍ창ㆍ갑옷ㆍ방패 뿐 아니라, 아폴론이 타는 전차ㆍ황금 장화 그리고 보석에까지 미쳤다.

그의 아내는 "아프로디테", 즉 로마 신화의 "비너스"다. 그는 아름다운 무기와 갑옷을 만들면서도 언제나 자기 작품이 아내의 아름다움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아름다운 아내에 대한 그의 사랑이 자기가 만드는 무기에 실용성뿐만 아니라, 아름다움까지 갖추게 하는 동기가 되었던 것이다. "헤파이스토스"가 이렇게 만들어낸 명품들은 여러 신에게 널리 애용되었고, 지상의 영웅들에게도 전해졌다. 그 가운데 하나가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킬레우스"의 무구다.

 아킬레우스의 불멸의 무구 (武具ㆍThe Arms of Achires)

"아킬레우스"의 무구란 검ㆍ창ㆍ방패ㆍ갑옷(흉갑ㆍ투구ㆍ팔 받이)이다. "아킬레우스"는 약점인 "발뒤꿈치" 말고는 불사신의 몸이었으므로, 방패나 갑옷 따위는 필요 없었다. 이들 무구는 아킬레우스가 신의 은총을 받은 신의 영웅임을 알려주는 영예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전장에서는 이 무구를 둘러싸고 처절한 싸움이 벌어지고, "아이아스"는 이 무구를 차지하지 못한 수치심을 씻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이다. 

③ 검

"호메로스"가 묘사한 "일리아드"는 기원전 13세기경 그리스의 지배가 "크레타 섬"을 본거지로 하는 "미노아 문명"에서 그리스 본토의 "미케네 문명"으로 옮아갈 무렵의 사건이다. 이 즈음의 무기나 갑옷은 청동제로서, 이를 소유할 수 있었던 것은 부유한 귀족들로 제한되었다. 당시의 전투는 갑옷을 입은 귀족들이 각각 1대1 승부를 벌이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검은 청동제였는데, 한 손에 방패를 들고 싸워야 하는데다가 청동은 강도가 떨어지므로, "편수검"으로 만들어졌다.

④ 갑옷

갑옷은 흉갑ㆍ팔받이ㆍ투구로 이루어지며, 모두 청동으로 만들어졌다. 이것들은 전장에서 마치 태양처럼 빛을 반사했다고 한다. "아킬레우스"가 몸에 걸친 "무구(武具)"는 어머니가 공신(工神) "헤파이스토스"를 시켜 특별히 만든 것으로 유명한 "아이기스"이다. "아킬레우스"는 그리스의 연합군 총사령관 "아가멤논"과 서로 모욕을 퍼부으며 크게 다투고는 전장에 나가지 않았다.

"아킬레우스"의 친구 "파트로클로스"는 그의 갑옷을 빌려 입고, 전장으로 나갔다. 그리고 "트로이" 측을 돕는 "아폴론"의 간계에 빠져 부상을 당한 뒤, "헥토르"에게 죽음의 일격을 당한다. 이때 그가 입고 있던 "아킬레우스"의 갑옷도 "헥토르"에게 빼앗기고 만다. 당시 전장의 1대1 승부에서는 이긴 측이 상대편 "무구"를 빼앗는 관습이 있었다. 친구의 죽음을 알게 된 "아킬레우스"는 출전할 뜻을 굳히고, 그의 어머니는 "헤파이스토스"에게 새로운 무구를 만들어달라고 간청한다.

그리하여 대장장이의 신인 "헤파이스토스"가 급하게 만들어낸 무구를 들고, 그리스 최고의 영웅은 마침내 전장으로 나선다. 한편 이야기에는 "아킬레우스"의 무구가 2벌 등장하는데, 왜 "아이아스"와 "오디세우스"가 다투어야 했는지 그 까닭은 분명히 설명되지 않는다.

⑤ 창

이 창에는 다른 무구에 없는 특수한 마력이 깃들여 있었다. 여러 영웅들의 손을 전전한 아킬레우스의 무구 가운데 이 창만은 끝까지 그와 함께 전장에 있었다. 먼저 그 창은 매우 크고 무거웠다. "아킬레우스"의 무구를 빌려 출전한 "파트로클로스"도 이 창만은 들고 가지 못했을 정도였다. 게다가 그 창끝에 다치면 예사 치료법으로는 낫질 않았다. 그 상처는 "아킬레우스"의 창끝을 갈아내어, 그 가루를 상처에 뿌려야만 고칠 수 있었다.

아킬레우스는 이 강력한 창으로 수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트로이의 영웅 "헥토르"를 비롯하여, 아마존의 여전사 "펜테실레아", 코로나이의 왕이며 외눈박이 거인인 "키클로프스"등 창에 희생된 영웅을 일일이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다.

⑥ 방패

초기의 방패는 쇠가죽 10장을 겹쳐 대고, 바깥쪽에 "청동판"을 대고, 테두리와 중앙을 고정시킨 것이었다. "헤파이스토스"가 새로 만든 것은 쇠가죽 5장 사이에 2장의 "청동판"과 3장의 "주석판", 그리고 1장의 "황금판"을 샌드위치처럼 겹쳐서 "청동 틀"로 고정하고 "은 손잡이"를 댄 것이었다. 그 거대한 둥근 방패의 표면에는 헤파이스토스가 그린 다양한 그림이 아름답게 새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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