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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사건 • 전쟁 • 혁명 • 학살

사건- 1950 : 미국 록히드 (Lockheed) 군용ㆍ항공기 계약사건

by 당대 제일 2022. 1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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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히드 사건 (Lockheed bribery scandals)"은 미국의 "록히드 사"에서 1950년대 후반~1970년대까지 "군용기"를 팔기 위해서, 여러 나라에 뇌물을 뿌린 일련의 사건으로, "서독ㆍ이탈리아ㆍ네덜란드ㆍ일본"의 정치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사건의 영향으로 "L-1011 트라이스타"의 실패로 위기에 빠졌던 "록히드"가 파산 일보 직전까지 갔다.

 

1. 록히드 사건 (Lockheed bribery scandals) 배경ㆍ사건 이후

1971년, 미국 정부는 "록히드"에게 보석을 선고하였고, 회사에서 받은 은행 대출 1억 9500만 달러의 지급을 보증하였고, "연방 긴급대출 자문위원회"에서는 이 과정을 조사하기로 하였고, "록히드"가 정부에 해외 지불을 숨기고 있는지 조사하였다. 1975년 후반과 1976년 초반, "프랭크 처치(미국 상원의원)"에 의해서, 시작된 조사에 따르면, "록히드 이사회"는 "군용기 계약"을 위해서, "록히드"에 우호적인 국가에 뇌물을 지불하였다고 한다. 1976년 "세기의 계약"이라고 불리는 "록히드 F-104 스타 파이터"를 포함한 항공기 판매를 위해서, "록히드"가 2,200만 달러의 뇌물을 제공하였다고 하였다.

"록히드 다니엘 휴턴(이사회 의장)ㆍ칼 코치안 회장"은 1976.02.13.일 사임하였다. 이 사건은 1977.12.19일, "지미 카터 대통령"이 서명한 "해외 뇌물법(Foreign Corrupt Practices Act)"을 만든 계기가 되었다. 이 법에 따르면, 미국인과 미국 내 사업체는 외국 정부에 뇌물을 줄 수 없다. "록히드 스컹크 웍스의 벤 리치"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록히드의 고위층은 10년 이상 네덜란드(특히 베른하르트 공(율리아나 여왕의 남편)ㆍ일본과 독일 정치인ㆍ이탈리아 정치인과 장군ㆍ홍콩과 사우디아라비아 등지의 고위층에게 우리 비행기를 사도록 뇌물을 주었음을 인정하였다.  (록히드 스컹크 웍스의 첫 팀 지도자 클라렌스 "켈리" 존슨을 가리키며) 특히 켈리는 이러한 관계에 염증을 느껴, 록히드 고위층이 불명예 퇴직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사직하려고 하였다."

2. 서 독

"에르네스트 하우저(전직 록히드 로비스트)"는 "프란츠 요세프 스트라우스(서독 국방부 장관)" 및 소속 정당에서 서독의 F-104G "스타 파이터(900대) 구매에 대한 대가로, 1961년 최소 1,000만 달러를 받았다고 밝혔다. 그와 정당은 혐의를 부인하였고, "스트라우스"는 로비스트를 고소하였다. 진술에 대한 확증이 없어, 고소가 취하되었다.

1976.09월, "독일 연방하원 선거" 결선 투표에서, 국방부 내에 "록히드 문서"가 어디에 남아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논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익명의 출처에서 거짓일 가능성이 일부 있는 문서가 미디어로 유출되었다. 이들 문서에 의하면, "국방 위원회" 소속 "만프레드 뵈르너(독일 하원 의원)"가 "록히드"가 비용을 부담하는 "록히드 미국 공장견학을 초대받았다"고 알려졌다. 조사 과정에서 "스타 파이터" 구매에 관한 문서가 1962년 손실되었음이 알려졌다.

1978.01~ 1979.05월까지, 하원 질의에서 문서의 행방이 다시 논의되었다. 미국 측의 "록히드" 문서 조사에 의하면, "뵈르너"의 견학은 독일에서 지원을 받았으며, "록히드 S-3"의 시험 비행과 관련이 있다고 하였다. "뵈르너"는 여행비용의 일부만 지불하였으며, 미국에서 귀국하는 항공편은 "록히드"의 지원을 받았다. (뵈르너는 비서를 동행하였고 비서 여행 경비의 일부는 록히드가 지원하였다.  또한 뵈르너는 독일에서 지불한 항공권을 "분실"하였고, 록히드는 또 다른 항공권을 "지원"하였다)

3. 이탈리아

"이탈리아 공군"의 "C-130 허큘리스 수송기" 구매와 관련하여, "기독민주당" 측 정치인에 뇌물을 지불한 사건에서 시작한다. 뇌물 제공의 가능성은 "정치 잡지 L'Espresso"에서 처음 제기되었으며, "전직 내각의원 루이지 구이ㆍ마리오 타나시ㆍ전직 총리 마리아노 루모르ㆍ대통령 조반니 레오네가 연루되었다고 하였다. 그 결과, "조반니 레오네 대통령"은 1978.06.15.일 사임하였다.

4. 일 본

"마루베니 상사"를 비롯한, "일본 정치계ㆍ산업계ㆍ야쿠자 고위층"과 연계되어 있다. 뇌물을 받은 사람에는 "사토 에이사쿠(재정부 장관)ㆍ겐다 미노루"가 포함되어 있었다. 1957년, "일본 자위대"는 노후한 "F-86 세이버"를 "그루먼 F-11 슈퍼타이거"로 교체하려고 하였으나, "자유민주당" 관료들에게 로비한 결과, "F-104"를 도입하였다.

이후 "록히드"는 "극우파 고다마 요시오"를 고용하여, "전 일본공수"를 비롯한 일반 항공사들이 "DC-10" 대신, "록히드 트라이 스타"를 구매하도록 영향을 주려고 하였다. 1974년, "다치바나 다카시가 분게이슌슈(일본 문예춘추)"에 쓴 특종 기사로 뇌물을 주고받은 사실이 폭로됐다. 당시 뇌물을 받은 자들은 정치인 및 고위 관리들이었으며, "다나카 가쿠에이(현직 수상)"도 뇌물 수수 혐의로 구속되었다.

"록히드"는 1976.02.06일에 사건 내용을 미국에 보고하였다. "록히드"는 "전 일본공수"와의 계약을 위해서, 24억 엔을 지불하였다. 이 중 5억 엔이 "총리"에게 돌아갔으며, 1억 6000만 엔이 "전 일본공수" 관리들에게 돌아갔고, 17억 엔이 "고다마"에게 돌아갔다. 1972.10.30일, "전 일본공수"는 대당 500만 달러의 가격으로 "트라이스타 L-1011" 21대를 구매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1976.07.27일, "다나카 가쿠에이(현직 수상)"은 구속되었으며, 2억 엔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1983.10.12일, "도쿄 대법원"에서는 외환 관리법에 의하여 유죄를 선고받았으나, 뇌물로 유죄를 선고받지는 않았다. 4년 징역형이 구현되었으나, 1993년 죽을 때까지 참정권을 가질 수 있었다.

이 사건은 일본 국민들에게 1955년 이후, 38년간 집권한 "일본 우파" 정당인 "자유민주당 정권"에 대한 불신을 심어주었고, 초등학교 졸업의 짧은 학력을 극복하고 수상이 되었다는 "다나카 가쿠에이 신화"에 대한 환상을 깨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후 세가는 이 사건을 "아임 쏘리"라는 게임으로 패러디했다.

5. 네덜란드

"록히드"는 "네덜란드 공군"이 "미라주 5" 대신 "록히드 F-104"를 구입할 수 있도록, "베른하르트 공 (율리아나 여왕의 남편)에게 1,100만 달러를 뇌물로 지불하였다. 그는 세계 300여개 회사의 이사회에서 근무하였으며, 네덜란드의 경제를 이끌어가는 인물로 칭송받았다. 당시 "요프 덴 아윌(네덜란드 총리)"는 사건을 조사하고 있었고, "베른하르트 공"은 답변을 거부하면서 "나는 이런 것 위에 있다"고 하였다. 그 결과, "베른하르트 공"이 구속되었을 때, "율리아나 여왕"은 퇴진 위기에 몰렸다. "베른하르트 공"은 이후 석방되었으나, 여러 공직에서 물러나야 했고, "제복 착용권"을 박탈당했다. "베른하르트 공"은 항상 혐의를 거부하였으나, 사후 2004.12.01일 "뇌물을 받았음"을 인정하는 자료가 공개되었다. 이에 따르면 "내 무덤에 록히드라는 말을 새기라"고 하였다.

6. 사우디아라비아

1970~ 1975년까지, "록히드"는 "사우디아라비아" 측 무기 거래상에게 1억 6백만 달러의 수수료를 지불하였다. 수수료는 2.5%에서 시작하여 15%까지 늘어났다. "록히드" 국제마케팅 부서의 당시 부부장에 의하면, 그는 "록히드"의 마케팅을 전적으로 위임받았고, "록히드"의 시장 진입ㆍ전략ㆍ컨설팅ㆍ시장 분석을 모두 맡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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