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양사/사건 • 전쟁 • 혁명 • 학살

사건- 79년 : 폼페이 (로마) 최후의 날ㆍ베수비오 산 분화

by 당대 제일 2022. 12. 26.
반응형

 

"폼페이 (Pompeii)"는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 인근의 "나폴리 기슭"에 있던 고대 도시로, 로마 귀족들의 휴양지로, 농업ㆍ상업의 중심지였다. 79.08.24일 오후 1시, "베수비오 산" 분화로 인근의 "헤르쿨라네움" 등과 함께, 화산재ㆍ분석에 묻혀 파괴되었다. 운 좋게 도망친 사람도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늦은 사람들은 지상을 뒤덮은 고온 가스ㆍ열구름에 질식하거나 뜨거운 열에 타 죽었다. 이 폭발로 당시 "폼페이" 인구의 약 10%인 약 2,000명이 도시와 운명을 함께 했다고 한다.

 

1. 폼페이 (Pompeii) : 79년, "베수비오 산" 분화별칭 : 타락한 도시의 신의 벌

빼어난 자연환경으로, "제정 로마시대"에는 "로마의 상류층"이 화려한 별장을 짓고 피서지로 삼았다. 당시 "폼페이"는 BC 89년,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간 이후, 철저하게 로마화가 진행된 도시였으며, 로마의 상류계급이 별장을 건설했던 휴양지이기도 했다. 화산이 폭발하기 전인 63.02월에 "대지진"이 일어났지만 도시는 착실하게 재건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16년 뒤인 79.08.24일 도시 전체는 화산재 밑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화산은 멀리 40km 떨어진 곳에서도 보일 정도로 거대한 연기를 내뿜었다. 엄청난 양의 화산재와 화산분출물을 뿜어내면서, 붉은 용암 덩어리가 흘러내리며, 곳곳에서 불길이 일었다. "폼페이"는 "베수비오 화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정면으로 맞는 위치에 있었다. 바람을 타고 날아온 화산재가 더 치명적이었다. 18시간에 걸쳐 100억 Ton에 가까운 화산재가 쏟아져 내렸다.

"폼페이 유적"이 중요한 이유는 "제정 로마"의 하루를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사물이 한순간에 파묻혀 버렸다는 데 있다. 당시의 "스타비안 목욕탕(Stabian baths)"은 최고의 설비를 자랑했다. 가령 몇 년 전 발굴된 "은 식기 바구니"에는 "은으로 만든 컵ㆍ쟁반 20여 점"이 고스란히 들어 있어 그 시대 사람들이 어떤 도구로 어떤 음식을 만들어 먹었는지 알 수 있는 자료가 된다.

2. 베수비오 화산 폭발

BC 60년, "폼페이우스"가 지중해의 해적을 소탕하고, "로마 세계"의 영웅이 되었다. 14년, "로마 제국"의 "아우구스투스"가 사망하고, 양자인 "티베리우스"가 로마의 통치자가 되었다. 80년, "로마"에 원형극장인 "폴라비우스 콜로세움"이 완공되었다.

79.08.04일 오후 1시.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 만 연안의 고대 도시 "폼페이"에 굉음이 울려 펴졌다.

사람들은 평소와 같은 지진으로 생각하고, 굳이 대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새끼 돼지를 잡아 양념한 후 오븐에 넣으려던 여인도, 밀가루 반죽을 밀어 빵을 빚던 제빵사도, 해변에 누워 더위를 식히던 귀족도 모두 그랬다. 하지만 이는 오산이었다.  굉음의 진원지는 "나폴리"에서 동쪽으로 12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베수비오 화산"이었다. 1,000년이 넘게 침묵하던 화산이 분화한 것이다.

당시 "폼페이"는 "사르누스 강" 하구에 있는 항구 도시로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춘 곳이었다. 겨울은 짧고, 봄과 여름이 긴 쾌적한 기후였고, 기름진 토양과 수량이 풍부한 강물 덕분에 농사도 수월했다. 또 외지로 이어지는 바닷길이 열려 있어 교역이 활발했다. 덕분에 이곳을 탐내는 민족이 많았다. "폼페이"는 "그리스"의 식민 도시로 출발하여, 잠시 "삼니움 족"의 영지였다가, BC 89년 "로마"의 침략에 굴복한 후 "로마"로 귀속되었다.

잿빛 화산재는 공포 그 자체였다. 2,000명의 주민들이 그대로 화산재에 묻혀 "화석"으로 남았다. 당시 비처럼 쏟아져 내린 화산재의 두께는 5~7m 였다고 전한다. "한 도시를 가장 완벽하게 보존하는 방법은 화산재로 뒤덮는 것"이라는 자조 섞인 표현이 가능할 정도로 엄청난 양이었다. 

"폼페이"의 영화를 막은 "베수비오 화산"은 평소에는 그리 위협적이지 않았다. 높이도 1,300m로 험준한 산은 아니었다. 도시가 형성된 이후로 한 번도 분화한 일이 없어 사람들은 화산의 공포를 알 수 없었다. 일설에 의하면, 대 분화 이전에는 라틴어에 "화산"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이 산이 한 번에 엄청난 지각변동을 일으킨 것은 아니다. 16년 전인 63년에 지진이 일어나, 산기슭의 지형이 바뀐 일이 있었다. 사람들의 일상에는 큰 변화가 없었지만 그 지진으로 인해 잠자고 있던 화산이 용틀임을 시작했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당시 "로마 황제 티투스"는 "폼페이 참극"에 대해 보고를 받고 곧바로 구제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피해가 너무나 커서, 화산 분출물에 의해 도시는 완전히 파묻혀버리고 말았다. "로마 황제 티투스"까지 나서서 "폼페이의 몰락"을 막아보려 했지만, "폼페이"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피해상황이 하도 엄청나서, "로마"는 "폼페이"의 발굴ㆍ재건에 손도 못 댔고, 일확천금을 노리는 도굴꾼만 득실대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발굴된 "폼페이"는 전체의 4/5 정도로 추정된다. 이곳에서 나온 많은 출토품들은 현재 "나폴리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처음 사람들의 눈길을 끈 것은 "인간 화석"이었다. 순식간에 굳어 버린 사람들의 얼굴에는 2,000년이 지난 후에도 공포가 생생하게 묻어 있었다. X선 투시 결과 화석 안의 장기는 모두 없어진 상태였다.

3. 유품ㆍ복원

화산재에 파묻힌 "도시의 수로"는 거의 완벽한 형태로 복원되었다. 도심에서 40km나 떨어진 수원에서 끌어온 물길은 지하에 묻힌 납 파이프를 통해 수조에 저장되었다가 시내로 공급되었다. 거리에는 쓰레기를 버리는 도랑까지 있었다. 학자들은 제정 로마의 문화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로 "폼페이"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주거 형태도 무척 다양했다. 로마 귀족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호화로운 대저택에는 거대한 정원이 딸려 있었다. 서민들이 살았던 2~ 3층 아파트는 물론이고, 시내 빵집ㆍ채소 가게ㆍ대장간이 딸린 집도 발굴됐다. 집 안에는 자연 채광시설을 갖춘 목욕탕ㆍ안락한 구조의 홀ㆍ정원ㆍ벤치가 있었다. 호화로운 로마의 방식으로 추정된다.

또 1가지 특징은 "폼페이 인"들은 계층에 관계없이 집 안 벽면과 바닥에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다. 소재는 "그리스 신화"가 주로 애용되었으며, 정물화도 적지 않았다. 덕분에 "폼페이"는 "프레스코 벽화"의 보고로 일컬어진다. 최근 이 지역에 비가 많이 내려 관광객에게 가장 인기 있는 "검투사의 집"이 무너져 내렸는데, 이곳에는 전쟁의 역사가 기록된 "프레스코 화"가 그려져 있었다. 이 밖에도 검투사들이 경기를 하던 "원형경기장"은 물론이고 연극이나, 음악 공연이 열리는 극장도 2곳 발굴되었다. 사치스러운 "공중목욕탕"은 3곳이 밤낮으로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4. 발 굴

비극의 현장 "폼페이"는 오랫동안 잊힌 땅으로만 존재했다. 대분화의 기록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누구도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역사에 퇴장했던 "폼페이"가 다시 역사에 등장한 것은 1594년이었다. "폼페이" 위를 가로지르는 "운하"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건물ㆍ회화 작품들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이런 우연한 계기로 "폼페이"의 소재가 밝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는 본격적인 발굴하기가 힘든 상황이었다. 

18C 중반이 되어서야, "에스파냐 국왕 카를로스 3세"의 후원 아래 대대적인 발굴이 시작되었다. "광장ㆍ목욕탕ㆍ원형극장ㆍ약국" 등의 유적이 발견되었다. "에스파냐"는 물론이고, 뒤를 이어 이 일대를 점령한 "프랑스"도 마찬가지였다. 1748년, 당시 "이탈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프랑스 부르봉 왕조"가 독점 사업으로 "폼페이"에 대한 발굴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의 발굴은 약탈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아름다운 출토품만이 중요하게 취급될 뿐, 나머지 유물들은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채 사장되고 말았다. 또 모자이크나 벽화 같은 미술품들도 충분한 조사도 없이 모조리 "프랑스 왕궁"으로 실려가버렸다.

1861년, "이탈리아"가 통일을 이룬 다음에야, "폼페이"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국왕 빅토르 에마뉴엘 2세"는 고고학자 "주세페 피오렐리"를 발굴대장으로 임명하고, 조직적인 발굴을 지시했다. 이렇게 해서 유적에 대한 구획 정리와 함께 본격적인 수리와 보존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발굴단은 유적들이 층층이 쌓여 있는 빈 공간에 석고를 부어넣어, 당시 죽은 사람들의 모습을 재현하는 과학적인 방법을 동원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발굴된 "폼페이"는 전체의 4/5 정도로 추정된다. 이곳에서 나온 많은 출토품들은 현재 "나폴리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