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로폰네소스 전쟁 (Peloponnesian War)"은 BC 431~404 (27년간)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각각 자기 편 동맹시(同盟市)들을 거느리고 싸운 전쟁으로, 그리스에서 "아테네 주도"의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 주도"의 "펠로폰네소스 동맹 "사이에 일어난 전쟁이다.
1. 펠로폰네소스 전쟁 (Peloponnesian War)
"스파르타"의 승리로 끝났으나, "고대 그리스" 쇠망의 원인이 되었다. "아테네"는 "민주정치"를, "스파르타"는 "과두정치(寡頭政治)"를 각각 대표한 폴리스였다. 따라서 이 전쟁은 두 정치체제의 싸움이기도 하였고, 각 폴리스 내부에서도 두 정치체제의 싸움이 계속되었다. 아테네 출신 장군이며, 훗날 역사 연구에 유용한 기록을 많이 남긴 역사가로 유명한 "투키디데스 (Thukydides)"는 이 시기를 "아테네의 세력이 커지면서 이를 시기하고 막으려는 스파르타의 경계심이 커진 시기"라고 했다.
10년 동안 전쟁을 벌이다가 BC 421년에 휴전하고, 이 휴전은 8년 동안 지속되었다가, "아테네"가 "시실리"에 원정군을 파견했을 때, "스파르타"가 간섭하면서 깨지고 말았다. BC 405년에 무적함대인 아테네 해군이 "아이고스포타미 해전"에서 지면서, "델로스 동맹"의 도시국가들도 "아테네"에게서 등을 돌리고, "아테네"에서도 혼란이 일어나 BC 404년에 "아테네"가 항복하였다.
전쟁이 일어난 직접적인 원인은 "코린토스ㆍ케르키라"의 싸움에 "아테네"가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무역업을 해서 잘살게 된 "코린토스"는 "아테네"의 힘이 커지는 것이 두려웠다. 이때 "코린토스ㆍ케르키라" 간에 분쟁이 일어나자, "아테네"는 "케르키라" 편에 섰다. 그러자 "아테네"의 팽창에 불만을 품고 있던 많은 도시국가들이 "아테네"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BC 431년 "코린토스"가 앞장서서 여러 도시국가들과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결성한 다음, "스파르타"를 끌어들여 전쟁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27년에 걸쳐 전쟁이 지속되는 동안, 당시 주변국 중에서는 가장 강한 "육군"을 간판으로 내세운 "스파르타"와 무적함대 "해군"을 내세운 "아테네"는 10년 동안 전쟁을 벌이다가 BC 421년에 휴전했다. 이 휴전은 8년 동안 지속되었으나, "아테네"가 "시실리"에 원정군을 파견했을 때, "스파르타"가 간섭하면서 깨지고 말았다. "시실리 원정"에서 진 "아테네"가 전의를 다질 틈도 주지 않고,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데켈레아"를 공격해 점령해버렸다. 두 나라는 다시 전쟁에 휩싸였다.
BC 405년, 무적함대인 아테네 해군이 "아이고스포타미 해전"에서 지면서, "델로스 동맹"의 도시국가들도 "아테네"에게서 등을 돌렸다. 상황이 불리해지자, "아테네"에서도 혼란이 일어나 BC 404년에 "스파르타"에 항복하면서 "아테네"는 멸망하고 말았다. 그 뒤로 "아테네"는 정치에서는 힘을 잃고 문화의 중심지로서만 명맥을 이어갔다.
2. 원 인
"델로스 동맹"을 지배하는 "아테네"가 횡포를 부려, 제시(諸市)의 자치를 범하고 위협하였으며, 또한 "스파르타"가 "아테네"의 번영을 시기하고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직접적인 원인은 "케르키라(코르푸섬)"와 "코린토스"의 싸움에 아테네가 끼어든 데 있었다. 상업무역으로 번영을 누리고 있던 "코린토스"는 "아테네"의 해상진출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케르키라"와 "코린토스"의 싸움에 "아테네"가 "케르키라"의 편을 들어(BC433) 양자의 관계는 험악해졌다. 이 밖에도 "메가라" 등 "아테네"에 불만을 품고 있는 도시들이 있었다. "코린토스ㆍ메가라" 등은 "펠로폰네소스 동맹회의"를 열고 "아테네"와의 전쟁을 결의, "스파르타"를 부추겨 개전(開戰)하게 하였다.
3. 경 과
전쟁은 3기(期)로 나눌 수 있다. ① 제1기 (BC 431~421): 10년 전쟁 또는 "아르키다모스 전쟁"이라고도 한다. ② 제2기 (BC 421~413): 휴전기간 ③ 제3기 (BC 413~404): "데켈레아 전쟁ㆍ이오니아 전쟁"이라고도 한다.
제1기 전쟁을 "아르키다모스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스파르타 왕 아르키다모스"가 육군을 거느리고 자주 "아테네 원정"을 하였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아테네"가 이길 공산이 매우 컸었다. 그것은 해군에 대한 경험지식이 풍부한데다가 "스파르타" 진영은 해군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아티케"를 선제공격하면서부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테네"는 뜻밖의 태풍ㆍ해일 등의 자연재해를 만나 전쟁을 개시하기도 전에 군사적으로 큰 피해를 입어 해군력이 "스파르타" 해군과 엇비슷한 수준에 이른다.
"스파르타"는 "아티케"의 침략을 되풀이하였고, "아테네"는 자신의 세력권에 불안의 징조를 억누르기 위하여 자국의 해군력을 이용하여 "펠로폰네소스 반도" 해안을 습격하였다. 그리스의 "장군 페리클레스"는 농성전술(籠城戰術)을 택하여, 최강의 육군을 자랑하는 "스파르타"와 정면으로 싸우지 않음으로써 불필요한 소모를 피하면서, 해군으로 "펠로폰네소스 해군"을 습격하여 "스파르타 군"에 타격을 줌으로써 승리를 획득하려고 하였다.
이 전술은 성공하는 듯하였으나, 개전 후 얼마 되지 않아 "아테네"에 "페스트"가 유행하여 많은 인명이 죽었으며, "페리클레스"도 이때 병사하였다. 화평의 기운은 자주 보였으나, "아테네"의 지도자가 호전파(好戰派)인 "클레온"인 점도 있어서 전쟁은 계속되었으며, "클레온"의 전사(戰死)로 BC 421년에야 겨우 "니키아스 조약"이 체결되어 전쟁은 일단 끝났다.
제2기의 휴전기간 중에는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직접적인 전쟁은 없었으나, 서로가 세력범위의 유지확대를 꾀한 이른바 "냉전(冷戰)의 기간"이었다. 이것이 다시 "뜨거운 전쟁"으로 변한 것은 "아테네"가 "시칠리아 원정"을 시도하였을 때, "스파르타"가 이를 간섭한 때문이었다. 기원전 415년 "아테네"는 "시켈리아(시칠리아)"의 "시라쿠사이"를 공격하기 위해 거대한 "시칠리아 원정대"를 파견하였으나, 기원전 413년 공격군은 대패하여 군대 전체가 궤멸되었다.
"아테네"는 "시칠리아 원정"에서 무참히 패하여 그 후 군의 재정비를 꾀하였으나,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데켈레아"를 점령, 요새를 구축하여 "아테네"를 괴롭혔다. 이때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의 도움을 받아 아테네에 종속된 "에게 해"와 "이오니아"의 나라에서 일어난 반란을 지원하여 "아테네"의 패권을 잠식하였으며, 결국 "아테네의 제해권"을 빼앗았다. BC 405년 "아테네 해군"은 "아이고스포타미 해전"에서 "아테네"함대가 궤멸되면서 사실상 전쟁은 끝났으며, 또한 "델로스 동맹" 도시들은 점차 "아테네"로부터 떨어져 나가, "아테네"는 식량난으로 시달렸다. 또한 "과두파(寡頭派)"에 의한 정변이 일어나는 등, 아테네는 갈수록 불리하게 되어, "아이고스포타미 해전" 이듬해인 BC 404년 마침내 "스파르타"에 항복하고 말았다. "아테네"는 함대를 "스파르타"에 인도하고 장성(長城)을 헐었으며, "델로스 동맹"을 해산하고, "과두정부"를 만들었다.
4. 결 과
패권을 잃은 "아테네"는 기울고, 그 후로는 그리스의 정치적ㆍ경제적 중심이 아니라 문화적 중심이 되었다. 한편 "스파르타"는 패권을 장악하였으나, 그것이 그리스 쇠망의 원인이 되었다. 그리스 역사가 "투키디데스(Thukydides)"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이미 잘 지적하였듯, 이 전쟁은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의 정치, 역사 그리고 문화에 끼친 영향은 매우 주목할 만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 전쟁은 고대 그리스 세계의 정세를 뒤바꾸었다. 국제 관계 면에서 전쟁 전 "그리스"에서 가장 강대한 도시 국가였던 "아테네"는 종속국에 가까운 상태로 전락하였으며, 반면 "스파르타"는 그리스의 주도국이 되었다. 전쟁에 따른 경제적 영향은 그리스 전역에 미쳐, "펠로폰네소스"에서는 빈곤이 만연하였고, "아테네"는 완전히 유린당하여 전쟁 전의 영화를 되찾지 못하였다. 또 이 전쟁으로 그리스 사회에는 앞서 말한 영향보다 포착하기 어려운 변화가 생겼는데, "민주주의" 국가인 "아테네"와 "과두정"국가인 "스파르타"의 전쟁으로 서로의 나라에 자국에 우호적인 정치 세력이 등장하면서 그리스 세계에서 내전이 잦아지는 원인이 되었다.
또, 그리스의 전쟁은 원래 제한되고 정형적인 형태였으나, 나라 사이의 전면전으로 변화하였으며, 대규모 잔학 행위도 등장하였다. 전쟁은 종교적ㆍ문화적 금기를 훼손했으며, 농촌과 도시를 파괴하였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황금시대"를 극적으로 종식시킨 일대 사건이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 주도의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승리하면서, 그리스의 주도권은 "아테네"에서 "스파르타"로 넘어갔는데, 이후 "아테네의 민주정"은 "중우정"으로 변질되었고, 오랜 전쟁으로 그리스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스파르타"가 "테바이"에 패하면서, 기원전 400년부터 기원전 340년까지 그리스의 주도권이 "테바이"로 넘어갔고, "테바이"가 "마케도니아 왕국"에 패하면서, 기원전 340년부터 기원전 300년까지는 "마케도니아 왕국"이 그리스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2세"가 그리스의 주도권을 장악한 이후, 그리스는 유럽 역사의 주 무대에서 과거와 같은 영광을 다시 누리지 못하고 퇴장하였다. "로마 제국"(다만 중세시기 로마는 공용어가 그리스어로 바뀌었고, 라틴계보다는 그리스계가 우세했기에 그리스의 역사로 보기도 한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차례로 받다가, 19세기에 들어서야 독립할 수 있었다. 단지 그들의 신화와 철학만이 남아 후세에 영향을 끼쳤다.
5. 테바이 (보이오티아의 도시국가)
"미케네 문명" 시대에 "테바이"는 침략자 "도리아인"의 관심을 끌어, "테바이 시"를 계속 공격했다는 전설 이야기에는 실제로 일어난 "테바이 정복" 사실이 반영되어 있다. "테바이"는 "보이오티아"의 가운데에 있고, 군사 방위가 잘 되어 이 지방 사람들 가운데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예부터 이곳 사람들은 변경 마을들의 혈족에 대해 완전한 패권을 세우기 위해 노력하였다.
"테바이"는 "보이오티아"의 도시국가(폴리스)로, "보이오티아"와 "아티케"지방을 가르는 "키타이론 산맥"의 북쪽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보이오티아 평원"의 남쪽 끄트머리를 이룬 곳이다. 이 도시는 그리스 신화에서 중요한 배경으로, 카드모스ㆍ오이디푸스ㆍ디오뉘소스 등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테바이"는 "보이오티아"에서 가장 큰 도시였으며, "보이오티아 연맹"의 맹주였다. "아테나이"의 주요 적수였으며, 기원전 480년 "크세르크세스"의 침공 당시 "페르시아" 편에 섰다. 기원전 371년 "에파미논다스"가 지휘한 "테바이"는 "레욱트라 전투"에서 승리하여, 당시 "스파르타"의 패권을 몰락시켰다. "테바이 신성대(정예 군사부대)"는 기원전 338년에 "카이로네아 전투"에서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패배하였다.
6. 스파르타 (Sparta) :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동부
스파르타의 혹독한 교육은 태어날 때부터 시작되고, "아고게 (agoge)"라고 부른다. 아이가 태어나면, 5명의 검사관들이 "레세"에서 꼼꼼한 검사를 거친다. 남자아이는 골격에 이상이 있거나 기형, 혹은 지나치게 작게 태어나면, 절벽에서 떨어뜨려 죽였다. 여성의 경우는 강인한 전사를 낳는 근원이었으므로, 귀중하게 생각되었다. 생식기 부위가 이상이 없는지, 하체부분이 빈약하지 않은지를 보았다. 여성 또한 16세 이후, "2차 성징" 징후가 나타나지 않으면, 절벽에 떨어뜨려 죽였다.
BC 9C, 엄격한 과두정치를 성립한 "스파르타"는 "종신 공동 통치자(2명)"를 유지했다. BC 5C부터 전쟁ㆍ외교에 전념하여 "그리스"에서 가장 강력한 상설 군대를 만들었다. BC 480년, "페르시아"를 막아냈고, BC 404년 "펠로폰네소스 전쟁" 후 "그리스"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가 되었다. BC 371, "에파미논다스"에 패한 후 쇠퇴를 거듭했다. 1204년 이후, "프랑크족"이 "스파르타" 남서쪽에 새로운 성채 도시 "미스트라"를 세워 약 2C 동안 번영을 누렸다. 1460년부터 "투르크"의 지배를 받았다. 오늘날 시가지는 1834년 "고대 스파르타"가 있던 자리에 세워졌는데, 현지에서는 고대 유적지와 구별하기 위해 "네아스파르티(새 스파르타)"라고 부른다.
오늘날의 도시 주변에 고대 유적이 산재해 있는 모습은 BC 6~2C에 "스파르타" 도시국가를 다스린 군사 "과두정부" 지배자들의 엄격함을 보여준다. BC 9C에 엄격한 "과두정치"의 성립과 함께 세워졌다는 "스파르타"는 수세기동안 2명의 왕을 "종신 공동 통치자"로 유지했다. 이 왕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중재 역할을 맡았다. 평화로울 때에는 30명으로 이루어진 "게루시아(원로원)"에 권력이 집중해 있었다.
BC 8~5C에 "스파르타"는 "메세니아"를 정복하고, 그 주민들을 농노와 다름없는 지위로 떨어뜨렸다. BC 5C부터 "스파르타"의 지배계급은 전쟁ㆍ외교에 전념했고, 예술ㆍ철학은 일부러 무시했으며, "그리스"에서 가장 강력한 상설 군대를 만들었다. "스파르타인들"은 일치단결해 "군국주의적인 과두정치"의 지배에 헌신했고, 이 때문에 고대 그리스의 정치적 통일에 대해서는 어떤 기대도 가질 수 없었다. 그러나 "스파르타"는 BC 480년 "테르모필레"에서 "페르시아군"을 영웅적으로 막아냈고, 그 후에도 "페르시아 전쟁"을 이끌어 "그리스" 승리에 크게 이바지했다. 그러나 "살라미스 해전(BC 480)"으로 "아테네 해군"의 막강함이 드러나자, "그리스"의 두 강대국 사이에 결코 화해할 수 없는 싸움이 벌어졌다.
이 싸움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난 BC 404년에 "아테네"의 패배로 끝났고, "스파르타"는 그리스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로 등장했다. "코린트 전쟁(BC 395~387)"에서 "스파르타"는 "아테네 동맹군"에게 육지에서는 2차례 승리했지만, "크니두스 해전"에서는 "아테네ㆍ페르시아"의 연합 함대에 참패를 당했다. "스파르타"는 "아게실라오스 2세(BC 399~360 재위)" 시대에 소아시아에서 일어난 "페르시아 내전"에 개입한 데 이어, "테베"의 요새인 "카드메이아"를 점령했다(BC 382). 그러나 이것은 "스파르타"의 힘에 부치는 일이었고, 결국 "레욱트라"에서 "테베의 에파미논다스"에게 패배했다(BC 371). "에파미논다스"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메세니아"를 해방시켰으며, "스파르타"는 그후 1C 동안 쇠퇴를 거듭했다. "스파르타"에서 계속되는 동요에 자극받은 "로마"는 "아카이아 전쟁(BC 146)"을 일으켜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점령했다.
396년, "서고트족"이 이미 초라해져 있던 "스파르타 시"를 파괴했다. "비잔틴 제국"은 이 자리에 다시 주민을 이주시키고, 고대 시인 "호메로스"의 작품에 나오는 "스파르타" 건설자의 이름을 따서, "라케다이몬"이라고 이름 지었다. 1204년 이후, "프랑크족"은 "스파르타" 남서쪽에 있는 "타이예토스 산맥"의 한 줄기에 새로운 성채 도시 "미스트라"를 세웠다. 1259년부터, "미스트라"는 "모레아 주(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주도가 되어 약 2C 동안 번영을 누렸다. 1460년부터, "그리스 독립전쟁(1821~29)"까지 이 지역은 "베네치아"가 잠시 지배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줄곧 "투르크"의 지배를 받았다.
오늘날의 시가지는 1834년, "고대 스파르타"가 있던 자리에 세워졌는데, 현지에서는 고대 유적지와 구별하기 위해 "네아스파르티(새 스파르타)"라고 부른다. 고대 유적은 1906~1910, 1924~1929년에 발굴되었다. "에우로테아 평야"의 작은 상공업 중심지인 "네아스파르티"에서는 감귤류ㆍ올리브유를 거래한다. 이 도시는 고대와 마찬가지로 "이티온(기티온)"이라는 작은 항구의 도움을 받고 있다. "네아스파르티"에서 남동쪽으로 45km 떨어져 있는 "이티온"까지는 포장도로로 이어져 있다.
7. 그리스의 역사
① BC 3650~1100 : 청동기 시대 → BC 3650~1170 : 미노스 문명 → BC 3300~2000 : 키클라데스 문명 → BC 1600~1100 : 미케네 문명 → BC 1100~146 : 그리스
② BC 750~500 : 폴리스의 성립ㆍ성장ㆍ식민지 건설 → BC 510~338 : 아테나 민주주의 → BC 499~450 : 그리스ㆍ페르시아 전쟁 (트로이 목마) → BC 448~430 : 아테나의 패권 → BC 431~404 : 펠로폰네소스 전쟁 → BC 404~371 : 스파르타의 패권 → BC 371 : 레욱트라 전투 → BC 371~ 362/ 338 : 테바이의 패권 → BC 338 : 카이로네이아 전투 → BC 338~323 : 마케도니아의 패권
③ BC 323~146 : 헬레니즘 시대 → BC 146~330 : 로마 제국
④ BC 330~AD 1832 : 중세 → BC 330~AD 1453 : 비잔티움 제국 → AD 1204~1797 : 프랑크인의 지배 → 1453~1821 : 오스만 제국
⑤1821~1832 : 그리스 독립 전쟁 → 1832~1924ㆍ1935~41ㆍ1944~74 : 그리스 왕국 → 1924~1935 : 그리스 제2공화국 → 1936~1941 : 8월 4일 체제 → 1941~1945 : 추축국 점령기 → 1946~1949 : 그리스 내전 → 1967~1974 : 그리스 군사 정권 → 1974~ 현재 : 그리스 제3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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