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쟁 (독일)"은 1618~1648년까지, "독일"을 무대로, "신교ㆍ구교" 간에 벌어진 종교 전쟁으로, 서유럽 최후의 "종교 전쟁"이자, 서양 최초의 "국제 전쟁"으로, "나폴레옹 전쟁ㆍ세계 대전"에 떨어지지 않는 유럽사에서 엄청난 변화를 몰고 온 대사건이다. 총 4번에 걸쳐서, 따로 벌어진 전쟁이 서로 깊이 관련돼 있기 때문에, "30년 전쟁"으로 묶어서 호칭한다.
1. 30년 전쟁 (독일)
"30년 전쟁"이라는 표현을 처음 쓴 이는 17C "사무엘 폰 푸펜도르프(Samuel von Pufendorf)"라고 한다. 유럽의 대부분의 나라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들어가 버린 탓에, 이 전쟁은 본격적인 "세계 외교사의 기점"으로도 기록되고 있다. 유럽에서 "로마 가톨릭교회"를 지지하는 국가들과 "개신교"를 지지하는 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진 "종교 전쟁"으로, 유럽의 전쟁뿐만 아니라, 인류 전쟁사에서 가장 잔혹하고, 사망자가 많은 전쟁이었다.
당시 독일 전역의 최고의 화두였던 "프로테스탄트의 종교 자유 인정"을 둘러싼 "가톨릭 세력ㆍ프로테스탄트 세력"의 갈등으로 인해, 촉발된 전쟁으로, 처음에는 종교를 둘러싼 갈등이었으나, 후기로 갈수록 각 세력 간의 "패권 다툼"이 되어갔다. 그리고 자국에서는 "가톨릭"을 국교로 삼고, "위그노" 등 "개신교도"를 학살ㆍ추방했지만, 이해관계에 따라 "개신교 연합"으로 참여한 "프랑스군"이 활약해, 전쟁이 종결되었다.
"프랑스"는 계속 중립을 지키다가, "리슐리외 추기경"의 주장으로, 막바지에 참전한 것이었다. 사실 프랑스의 경우, 어수선한 국내 정세 때문에 초반에 참전을 못했을 뿐, 막후에서는 열심히 "개신교"를 지원하고 있었다. 이유는 같은 "가톨릭 국가"임에도 "합스부르크 왕가"와 소속 국가인 "오스트리아"가 싫어서, 이들을 타도하고 "프랑스" 자국의 이익을 챙기려고 했던 것이다.
• 일 시 : 1618.05.23~1648.05.15 (30년간ㆍ1517.10.31일 : 95개조 반박문- 마르틴 루터(1483~1546)에 의한 종교 개혁 • 피 해 : 800만 명 (민간인 포함)ㆍ독일 인구의 1/3~ 2/3 사망ㆍ독일 연방 제후국 파괴 • 결 과 :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인한 평화ㆍ"프로테스탄트 (Protestantㆍ개신교(改新敎))"의 종교 인정ㆍ"합스부르크 가(오스트리아 가문)" 패권의 추락ㆍ유럽에서 스페인 제국 쇠퇴ㆍ봉건 제도의 쇠퇴ㆍ프랑스- 스페인 전쟁이 1659년까지 지속ㆍ신성로마제국의 지방 분권화ㆍ가톨릭교회의 영향력/세력 쇠퇴ㆍ네덜란드 공화국/구 스위스 연방의 독립 인정ㆍ스웨덴 제국/영국/프랑스의 성장
① 교전국
보헤미아 (체코) 왕국(~1620)ㆍ팔츠 선제후국 (~1623)ㆍ네덜란드 공화국
사보이아 공국ㆍ트란실바니아 공국(1619~)ㆍ잉글랜드 왕국(1625~30)ㆍ스코틀랜드 왕국(1625~38)ㆍ덴마크-노르웨이(1625~1629)ㆍ스웨덴 제국(1630~) ㆍ프랑스 왕국(1635~)ㆍ오스만 제국(~1634)ㆍ작센 선제후국(~1635)ㆍ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1635)ㆍ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ㆍ러시아 제국 루스 차르국ㆍ포르투갈 왕국
신성 로마 제국ㆍ교황령ㆍ가톨릭 제후연맹ㆍ바이에른 선제후국ㆍ오스트리아 대공국ㆍ오스트리아 제국 헝가리 왕국ㆍ보헤미아(체코) 왕국 (1620~)
로렌 공국ㆍ크로아티아 왕국ㆍ스페인 제국ㆍ시칠리아 왕국ㆍ나폴리 왕국ㆍ덴마크-노르웨이(1643~45)ㆍ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1634)ㆍ제노바 공화국
② 프로테스탄트 (Protestantㆍ개신교(改新敎))
루터교ㆍ성공회ㆍ장로교ㆍ감리교ㆍ침례교ㆍ오순절주의ㆍ성결운동ㆍ구세군ㆍ회중교회ㆍ재 침례파ㆍ퀘이커ㆍ개혁교회ㆍ16C 교회 개혁가들의 "종교개혁"을 통해, 생겨난 기독교의 한 전통으로, 11C 동서 교회의 분열을 통해, "동방교회"에서 "서방교회"가 분리되었고, 이후 16C "서방교회" 내에서 "종교개혁"을 통해, "천주교회ㆍ개신교"가 분리되면서, 기독교의 가장 주된 사상과 종파인 "정교회ㆍ천주교회ㆍ개신교회"가 형성되었다.
③ 합스부르크 가 (오스트리아 가문)
유럽 왕실 가문들 중 가장 영향력 있던 가문 중 하나로, 1438~1740년까지 "신성로마제국"의 제위는 연달아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나왔다. 특히 "오스트리아 왕실"을 거의 600년 동안 지배한 것으로 유명하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프랑스 왕"을 제외한 거의 모든 유럽의 왕실과 연결되어 있었다. "프랑스 왕"도 외가로는 "합스부르크"와 연결되어 있었다.
④ 베스트팔렌 조약 (Peace of Westphalia)
오스나브뤼크와 뮌스터(각각 1648.05.15일과 10.24일)에서 체결되어, 프랑스어로 조문이 쓰인 "평화 조약"을 일컫는다. "웨스트팔리아 평화회의"를 "국제법의 출발점"이라고 말한다. 이 조약의 원인이었던 "30년 전쟁"을 "최초의 국제전쟁"이라고 부른다. "국제법의 아버지"인 "네덜란드 그로티우스"가 사망한 지 3년 후의 시점이다.
• 결 과 : "신성로마제국"에서 일어난 "30년 전쟁(1618~48)ㆍ에스파냐-네덜란드 공화국간의 "80년 전쟁"이 끝났다. • 오스나브뤼크(Osnabrück): 니더작센 주에 있는 독일의 도시ㆍ뮌스터(Münster) :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에 있는 독일의 도시
이 조약에는 "에스파냐ㆍ프랑스ㆍ스웨덴ㆍ네덜란드"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3세(합스부르크 가)"와 각 동맹국 제후들ㆍ신성로마제국 내 자유도시(Freie Reichsstadt)들이 참여했다. 이 조약은 최초의 "근대적인 외교 회의"를 통해 나온 것으로, "국가 주권 개념"에 기반을 둔 새로운 질서를 중부 유럽에 세웠다. 1806년까지, 이 규정은 "신성로마제국 헌법"의 일부였다. "프랑스-에스파냐 전쟁"을 종식한 "피레네 조약(1659)"도 종종 여기에 포함하기도 한다.
외교 사가들은 "근대 외교조약의 효시"를 이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인정하고 있다. "30년 전쟁"이 "로마 가톨릭교회-개신교간의 대립"이라는 종교적 문제를 명분으로 발발했지만, 이후 전개 과정에서는 "종교"보다는 "왕조와 국익"을 앞세워 길어진 유럽 국가들의 정치적인 전쟁이기 때문이다. "로마 가톨릭교회 국가"인 "부르봉 왕가의 프랑스"가 "개신교 국가인 네덜란드"를 지원하다가 후반기에는 직접 "합스부르크 왕조의 오스트리아ㆍ에스파냐" 등과 전쟁을 했다는 사실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이 조약을 통해서,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개신교 국가"들이 "로마 가톨릭교회의 탄압"에서 벗어나 생존의 발판을 마련했으며, 역사에서 처음으로 "프로이센이 왕국"으로 등장하였다. "네덜란드ㆍ스위스"는 독립을 인정받았으며, "프랑스"는 이 전쟁을 통해서 영토를 확장하였다.
이 조약 이후, 서쪽의 "프랑스", 동쪽의 "스웨덴"이 패권국의 지위를 유지한 1648~1700년을 "베스트팔렌 체제(Westphalia System)"라고 한다. "베스트팔렌 체제"는 "스페인 계승 전쟁"으로 "서유럽 패권"이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넘어가고, "대 북방 전쟁"으로 "동유럽 패권"이 "스웨덴"에서 "러시아"로 넘어가면서 종료되었다.
2. 결과ㆍ영향
이 전쟁은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조직을 넘어서, 전 유럽의 정세에 엄청난 영향을 끼쳐, 그 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유럽의 국제정세를 규정하는 것이 되었다. 1648년, 체결된 역사상 최초의 다 국가 간 조약이었던 "베스트팔렌 조약"에 의해서도 전쟁은 최종적으로 결판나지 않아, 그 결과 거의 300개에 달하는 "연방국가의 분립상태"가 확정되었다.
이 전쟁을 거치며, "스페인"의 패권이 상실되고, "프랑스의 패권시대"가 시작되었다. 또한 "오스만 제국"은 "30년 전쟁"에 직접 참전하지 않았으나, 속국 "트란실바니아 후(侯)"의 개입으로 인해, 간접적으로 "30년 전쟁"에 관여하여, "합스부르크 가문"을 압박했다. "신성 로마 제국"은 1806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 1세)"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존속하지만, 그것은 망령과도 같이 단순히 이름만 있고, 실체가 없는 국가로 남아 있게 된다.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왕가"는 "독일 왕"이 아닌 "오스트리아 대공", 후에 "오스트리아 황제"로서 18C, 19C까지 살아남게 되었다. 또한 "프랑스-스페인"의 전투는 "30년 전쟁" 이후에도 계속되어, 1659년 "피레네 조약"에 의해 겨우 종결되었다. 이 조약은 • 루시용ㆍ아르투아 등의 할양 • 루이 14세 - 펠리페 4세의 왕녀 마리아 테레사의 결혼 • 마리아 테레사는 50만 에스쿠도를 지참금으로 갖고 오는 대신, 그 대가로 스페인 왕위계승권은 포기한다. 는 조건이 들어 있었다.
장기간에 걸친 전쟁ㆍ용병에 의한 약탈로 "독일 국토"는 황폐해졌고, 당시 유행하던 "흑사병(페스트)"의 영향도 더해져, 인구는 격감해, 교전국간의 경제에도 엄청난 마이너스 효과를 주게 되었다. 가장 널리 알려진 파급 효과는 "베스트팔렌 조약"의 "개인의 종교의 자유"일 것이다. 사실 17~18C 들어서도 종교를 명목으로 탄압받는 일은 많았다. 주체가 "가톨릭 교단"에서 국가로 넘어가기는 했지만, 다만 "교회령"은 1624년의 상태로 되돌리기로 결정하고, 1555년의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서 부인된 "칼뱅파"도 "루터파"와 같은 자격으로 승인되었다.
3. 30년 전쟁이 종결된 후, 유럽의 세력 균형은 근본적으로 변해 있었다.
"스페인"은 "네덜란드"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서유럽에서의 주도적인 입지도 상실했다. "프랑스"는 유럽 강대국으로 부상했으며, "스웨덴"은 "발트 해의 지배권"을 장악했다. "네덜란드ㆍ스위스"는 완전히 독립국으로 승인 받았으며, "신성 로마 제국"의 소속 영방국가들에는 완전한 주권이 주어졌다. 따라서 정신적으로는 "교황"이 주도하고, 세속적으로는 "황제"가 주도하는 유럽의 "가톨릭 제국"으로서의 "신성 로마 제국"은 사실상 해체되었고, "신성 로마 제국"은 사실상 약 300여개의 영방국가(領邦國家)로 쪼개졌다. 이렇게 쇠퇴한 "합스부르크 가문"을 대신해, "독일" 내에서 "브란덴부르크"가 새로운 세력으로 떠오르게 된다. 이 "브란덴부르크"가 후에 "프로이센"의 모체가 되고, "독일 통일"의 핵심이 된다. 이러한 변화는 "주권국가들의 공동체"라는 근대 유럽의 본질적인 구조 확립으로 여겨진다.
각국의 국경선도 크게 변했는데, "스웨덴"은 "서포메른과 브레멘 대주교령·페르덴 주교령" 등을 획득하고, "프랑스"는 "메스ㆍ투르ㆍ베르됭"의 주교령 3개와 "알자스의 합스부르크"가 영토를 획득했으며, "브란덴부르크"는 "동포메른ㆍ마크데부르크 대주교령ㆍ민덴 주교령" 등의 영유를 인정, "바이에른"은 "남 팔츠의 영유ㆍ선제후 위"를 인정받았다.
전쟁의 주요 무대가 된 "독일 도시ㆍ공국"들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전투에 참가한 많은 군인들은 "용병"이며, 이들 "용병" 가운데 다수는 급료를 제대로 지급받지 못했기 때문에, 보급품 충당을 위해 시골 마을을 약탈했으며, 따라서 이 전쟁에서 하나의 전형을 이루는 이른바 "늑대 전략"이 시작되었다.
쌍방 간의 군대는 모두 진군 중에 약탈을 일삼아, 도시ㆍ마을ㆍ농장들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여기에 예전부터 유럽 사회를 괴롭히던 "전염병(흑사병(페스트))"까지 돌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하였으며, 전쟁ㆍ전염병으로 인해 모든 경제활동이 마비 상태가 되고, 결혼율ㆍ출산율은 급감하고, 난민이 대거 양산되면서, "독일 지역"의 인구 손실은 극에 달했다.
"30년의 전쟁 기간" 동안, 사망한 "독일인"은 무려 800만 명으로, 당시 "신성 로마 제국" 인구의 1/3에 달했으며, 살아남은 2/3도 거의 죽어나갔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독일은 처참하게 파괴된다. 심지어 "독일 전역"이 폐허로 만들어, 현대 독일인들에게 커다란 트라우마를 남긴 "제2차 세계 대전"도 시대상을 따졌을 경우, "30년 전쟁" 만큼의 거대한 피해를 끼치지 못했다. 이로서 100여 년간 "독일"은 자잘한 "소국"으로 나뉘어, 정치 세력으로 떠오르지 못한다. 한편 "프랑스"는 이후 강대국으로서, 유럽의 패권을 호령하게 된다.
군사적으로는 "냉병기"의 중요성을 슬슬 "총포류" 등의 "화약병기"가 따라잡기 시작하며, "테르시오"가 퇴장하고 "선형진의 시대"로 넘어가게 되는 과도기로 볼 수 있다. 주로 "개신교" 진영의 "네덜란드의 마우리츠 판 나사우ㆍ스웨덴의 구스타프 2세 아돌프" 등의 명장들에 의해 이러한 혁신이 이루어졌으며, 결국 전쟁 말기에는 "선형진"이 "테르시오"를 물리치기에 이른다. 과학 기술과 경제력을 갖춘 "화력 덕후"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유럽권의 군사력"이 다른 "지역 문화권"을 압도할 발판이 마련된다.
초기 전쟁은 "신성 로마 제국"과 제국의 종교 정책을 지지하는 "제후국" 및 반대하는 "제후국" 간의 다툼이었으나, 대부분의 강대국이 개입하면서 더 규모가 커지고, 일반적인 전쟁으로 발달하였다. 이 국가들은 수많은 용병을 고용했으며, 전쟁이 지속될수록, 종교적 색채는 옅어지고, 유럽의 정치적 구도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오스트리아 가문)"과 "프랑스"의 대결 구도로 바뀌었다.
17C에 종교적 믿음과 실천은 오늘날 평균적인 유럽인보다 더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 시기에 대부분의 유럽인은 "논란의 편"에 서게 되었고, 종교적 계파는 사람들의 윤리ㆍ충성과 관련이 깊었는데, 이는 그들이 충성하는 제후ㆍ왕의 종교와 밀접한 연관성을 지녔다. 전쟁은 새로 선출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가 그의 영토에서 "반종교개혁을 시행하려고 함으로써 발발했다. 그는 "로마 가톨릭"을 국민들에게 강요했다.
북부의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은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서 보장받은 "종교 선택의 권리"가 위반되자 분노하여, "개신교 제후동맹"을 결성하여 이에 반대했다. "페르디난트 2세"는 이전 황제였던 "루돌프 2세"에 비해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상대적으로 참을성이 없었다. 그의 정책 대부분은 "친 가톨릭 성향"이 강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북ㆍ중앙 유럽"에 공포를 퍼뜨렸고, "오스트리아" 지역에 있던 "개신교 국가 보헤미아 왕국(체코)"이 반란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합스부르크 가문"에 반대해, "프리드리히 5세 폰 팔츠 선제후"를 그들의 황제로 선출했다. "프리드리히 5세"는 왕위를 "제후 동맹"의 승인 없이 받아들였다. "로마 가톨릭"이 대부분이었던 "남부의 제후국"이 이에 반대했다. 이들은 "바이에른 선제후"를 중심으로 황제를 지지하기 위해, "가톨릭 제후연맹"을 결성했다. 1620년, "백산 전투"에서 "황제군"은 반란을 제압했으나, "유럽의 개신교 국가"들은 이를 비난했다.
"보헤미아"에서 "가톨릭군"의 잔학 행위가 이어지자, "작센 선제후국"이 마침내 "개신교 제후동맹"에 지지를 표하며, 이들과 함께 싸웠다. 같은 "합스부르크 가문"이었던 "스페인"이 "신성 로마 제국"을 지지하며 전쟁에 참여하자, 이에 대항해 여러 목적을 가진 "개신교 국가"들이 "신성 로마 제국"에 대항해 전쟁에 참여했다. 당시 "팔츠 선제후"와 인척 관계였던 "잉글랜드 왕국"이 1625년 전쟁에 개입했고, "홀슈타인"에 영지를 보유하고 있던 "덴마크-노르웨이"가 같은 해, 자신의 영지를 지키기 위해 전쟁에 참여했다.
당시 "스페인"에 맞서, 독립 전쟁을 치르고 있던 "네덜란드 공화국"도 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했으며, "신성 로마 제국" 내 개신교 국가였던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령ㆍ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등도 이들과 동맹을 맺고, 전쟁에 본격적으로 참여했다. 이후 "덴마크"의 패배 이후, 이를 대신해 "스웨덴 제국의 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도 1630년부터 전쟁에 개입했다. "스페인ㆍ신성 로마 제국" 사이에서 계속 포위당하고 있던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 왕국"도 "스웨덴 제국ㆍ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고, 1635년부터 "개신교" 편으로 참전했다.
4. "30년 전쟁"은 "독일" 전역을 기근ㆍ질병으로 파괴했다.
특히 "보헤미아 왕국(체코)ㆍ남부 네덜란드"를 비롯한 "독일ㆍ이탈리아"에 위치한 국가들의 인구가 급감했다. "용병ㆍ병사"들 모두 기여금을 받기 위해, 공헌을 위장하거나, 마을을 약탈했으며, 점령당한 영토 거주민들의 생활고는 심해졌다. 참전국 대부분은 파산 위기에 몰렸지만, 유럽 내부에서는 신흥 강대국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네덜란드 공화국"은 독립을 공인받은 이후 급격히 성장했다. "잉글랜드 왕국ㆍ프랑스ㆍ스웨덴 제국"도 전쟁 이후 상당한 영토를 보유하게 되었고, "신성 로마 제국"을 대신해 새로운 유럽의 강대국이 되었다. 이후 17C 후반, "신성 로마 제국"의 권위는 추락하게 되었다.
5. 마르틴 루터 (Martin Luther)ㆍ장 칼뱅 (Jean Calvin)
① 마르틴 루터 (Martin Lutherㆍ1483~1546ㆍ63세ㆍ독일)
종교 개혁자ㆍ성직자ㆍ신학자ㆍ사제(司祭,1507)ㆍ신학박사(1512)ㆍ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 10곳을 감독(1515)
② 장 칼뱅 (Jean Calvinㆍ1509~1564ㆍ55세ㆍ프랑스)ㆍ존 칼빈ㆍ요한 칼빈
종교개혁가ㆍ종교개혁의 2세대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ㆍ종교개혁자ㆍ개혁교회 신학자ㆍ기독교 사상 중 하나인 "칼뱅주의(개혁주의)"의 개창자로, "마르틴 루터ㆍ츠빙글리"가 시작한 종교 개혁을 완성, 저서 "기독교 강요(1536)"는 기독교 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역사ㆍ문학 등 여러 분야에 큰 영향을 주었다.
6. 전쟁 전, 상황
이미 그 전 세기에 있었던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으로 "독일"은 1530년대에 1차례 큰 내전이 치러졌고, 당시 "황제 카를 5세"는 막강한 군사력으로 지속적인 "제후 반란"을 진압해내긴 했지만 그만큼 국고의 소모가 심하여, 결국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주선했다. 그 결과, 일단 "루터파에 대한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었으나, 이 조약은 기본적으로 "영주 개인의 신앙을 기반으로 영지의 신앙을 결정"짓는 난점이 있었다. 그래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가 약발이 먹혔는지, 16C가 끝날 때까지는 그런대로 큰 갈등 없이 "가톨릭ㆍ개신교"가 공존할 수 있었다.
그러다 17C에 들어서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가장 중요했던 변화는 "칼뱅파"의 득세였다. "아우크스부르크의 화의"는 어쨌든 "가톨릭ㆍ루터교" 간의 협약이었기 때문에, 그때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칼뱅파"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칼뱅파"도 신앙의 자유를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라는 문제가 생겼는데, "영주"가 "칼뱅파"라면 문제없이 넘어가겠지만, "가톨릭"이라면 그대로 "이단"으로 확정하는 상황이었다.
"루터파"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곱게 보지는 않았다. 오죽하면 "루터파" 측에선 "칼뱅파의 용이 그 무시무시한 무함마드 교를 잉태했다"는 중상모략까지 할 정도였다. "칼뱅파"의 교세가 확장될수록, 혼란은 더욱 커져서, "칼뱅파 신하"가 어린 "루터파 영주"를 "칼뱅파"로 몰래 개종시키는 등의 일도 생겨나게 되었다. 이러다 보니 같은 "개신교"라도, "루터파"와 "칼뱅파"의 감정의 골은 깊어져 갔다.
이는 일단 새로 세력을 막 불리려는 두 "개신교 종파" 간의 밥그릇 싸움이란 측면도 있었지만, 원론적으로 "루터교"는 "가톨릭교회"의 교리만 거부하지, "종교"에 따라 오는 정치-사회적 조직ㆍ구조는 기존의 중앙 집권화를 이룬 "절대주의적 모델을 중심"으로 성장한 반면, "칼뱅파"는 도시민들이나 정치적으로 이 시절 진행 중이었던 "권력의 중앙 집중화"에 반발하는 "지역 봉건 영주들"을 중심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당장 "루터교"의 안방이라 할 수 있는 "작센ㆍ브란덴부르크ㆍ덴마크ㆍ스웨덴" 같은 곳들은 죄다 나라의 수도를 중심으로 군주들이 조직화된 관료 집단을 기반으로, 강력한 중앙 권력을 휘두른 반면, "칼뱅교"가 퍼져나간 "네덜란드ㆍ남프랑스ㆍ스코틀랜드ㆍ헝가리ㆍ라인 강변의 자유도시" 등의 지방들은 이런 상업 문화가 발달한 도시들이었거나, "런던ㆍ파리ㆍ빈" 등 군왕들이 거주하는 수도의 권력 팽창에 맞서 "지방 영주의 자치권"을 둘러싼 갈등이 펼쳐졌던 지역들이다.
"가톨릭" 쪽 상황도 그리 좋은 편만은 아니라서, "에스파냐 합스부르크" 측은 "개신교" 쪽에 강경한 입장인 "예수회"가 강성했던 반면, "프랑스ㆍ이탈리아" 지역에서는 보다 온건한 입장이었던 "카푸친 작은형제회"가 영향력이 있었다. 앙숙인 "스페인"에서 "예수회"가 대세라서, "프랑스"에서는 "카푸친 작은형제회"를 밀어준 것도 있지만, 어찌되었던 "프랑스"가 "가톨릭"임에도 불구하고, "개신교"를 지원했던 배경에는 저런 이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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