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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사건 • 전쟁 • 혁명 • 학살

전쟁- 1775~1783 : 미 독립 전쟁ㆍ미 혁명 전쟁ㆍ영-프 식민지 쟁탈전

by 당대 제일 2023.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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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독립 전쟁 (미국 혁명 전쟁)"은 1775~1783년, "영국 왕국"의 "북아메리카 식민지" 중에서 "동부 해안 13개주"가 "영국의 조세정책" 등에 반발하여 "식민지 독립"을 위해 일으킨 전쟁, 이 전쟁은 "프랑스 혁명"에 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미국"은 1776년에 "13주가 있는 상태에서 건국했다"고 본다.

 

1. 미국 독립 전쟁 (American War of Independence)ㆍ미국 혁명 전쟁

1776년부터 "프랑스"는 정보 교류를 통해, "미국 독립 전쟁"에 관여해 왔다. "토머스 제퍼슨(3대 대통령)"이 "프랑스"에게 동맹을 재촉한 이후, "프랑스군 트레빌 제독"은 독립군에게 보급품ㆍ탄약ㆍ대포를 지원했다. 1777.05.02일 "워싱턴"은 "프랑스 보급품"에 대해, "히이드 장군"에게 편지를 썼다. "드 발리에르"와 같은 대포가 사용되면서, "새러토가 전투"와 같은 교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778년, "새러토가 전투"에서 독립군의 첫 승리가 이루어졌고, "벤자민 프랭클린(피뢰침ㆍ다초점 렌즈)"이 이것을 명분으로 "프랑스의 참전"을 설득하였다. "새러토가 전투"에서 독립군이 승리한 것을 알게 된 "프랑스"는 "벤자민 프랭클린(피뢰침ㆍ다초점 렌즈)"의 협상으로 1778.02.06일 "미국"과 동맹 조약을 맺어, "프랑스-미합중국 동맹"이 결성된다. "프랑스"가 참전하게 되고, 1781년 "요크타운 전투"에서 "프랑스-미합중국" 연합부대가 "영국군"의 주력부대를 격파하게 된다. 결국, 1783년 "파리 조약"에서 "영국"은 "미국의 독립"을 인정하게 된다.

• 일 시 : 1775.04.19~1783.09.03. (8년 5개월)          • 장 소 : 미국 - 북 동부ㆍ플로리다ㆍ중앙아메리카ㆍ카리브 해 / 유럽 - 발레아레스 제도ㆍ지브롤터ㆍ유럽 해안가  /  아시아 - 인도/아시아대륙의 교전국 식민지들  / 인도양ㆍ대서양

• 결 과 : 미국 독립군의 승리ㆍ아메리카 합중국의 탄생파리 조약이로쿼이 연맹의 해산           교전국 : • 승리 : 영국 13개 식민지(~1776- 조지 워싱턴 지휘)ㆍ미국(1776~)ㆍ버몬트 공화국(1777~)ㆍ프랑스 왕국 (1778~)ㆍ스페인 제국(1779~)ㆍ네덜란드 네덜란드 공화국 (1780-)  /  패배 : 영국 왕국(조지 3세 지휘)ㆍ독일 제후국

• 병 력 : 3.1만 명 (농민군 2.0만 명ㆍ워싱턴 군 1.1만 명)  /  6.2만 명 (정규군 4.2만 명ㆍ독일 용병 2만 명)           피 해 : 5.0만 명 (2.5 만 전사1.7만 병사)  /  2.7만 명 (1240명 전사ㆍ1.9만 병사)

2. "북아메리카 대륙"의 주인이 된 "대영 제국"

15C경, "오스만 튀르크 제국(1299년 "오스만 1세"가 "셀주크 제국"을 무너뜨리고 소아시아에 세운 이슬람 왕국)"은 세력이 매우 강해져,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동방 무역로"를 차단했다. "동방"의 "향신료ㆍ금ㆍ은" 등에 대해 직접적으로 교역하지 못하게 된 유럽의 여러 국가는 새로운 "무역로"를 찾아야 하는 시급한 문제에 부딪히게 되었다.

이미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한 "대서양 연안"의 국가들은 국가 운영에 필요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는 데 앞장섰다. 그 무렵 "나침반ㆍ항해도" 등 항해술이 발달하여 먼 바다로의 항해가 가능해지자, 각 나라들은 "신항로 개척"에 더욱 힘쓰게 되었다. 새로운 항로 개척에 가장 먼저 나섰던 나라는 "지중해" 동쪽 "이베리아 반도"에 위치한 "포르투갈ㆍ에스파냐"였다. 이 두 나라 덕분에 "인도"로 가는 항로와 "아메리카"라는 신대륙이 발견되었을 뿐 아니라, "지구가 둥글다"는 것도 증명되었다. 그 뒤 16~18C에 이르는 동안, "포르투갈ㆍ에스파냐"에 이어, "영국ㆍ프랑스ㆍ네덜란드" 등도 신대륙에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해 쟁탈전을 벌였다. 특히 18C에는 유럽에서 "에스파냐 왕위계승 전쟁ㆍ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ㆍ7년 전쟁" 등 여러 전쟁을 통해 세력을 다퉜던 "영국ㆍ프랑스"는 "인도ㆍ북아메리카"에서도 식민지를 차지하기 위한 전쟁에 열을 올렸다.

1607년, "영국"은 "버지니아(대서양 중부 연안에 있는 미국의 주)"에 본격적으로 식민지를 건설했다. 당시 "영국"에서는 강력한 "전제 정치"(왕이 권력을 장악하여, 의회나 법률에 제약을 받지 않고, 통치하는 정치)를 펼치던 "제임스 1세"가 "영국 국교회"를 강요하면서, 다른 교파에 소속된 사람들을 압박하였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아메리카 대륙"으로 떠났다. 또 "인클로저 운동"(미개간지ㆍ공유지 등 공동 이용이 가능한 토지에 담이나 울타리 등의 경계선을 쳐서 남의 이용을 막고 사유지로 하는 일)으로 새로운 농업 자본가인 "젠트리"들이 성장하자, 그들에게 삶의 터전을 빼앗긴 "요먼(자영 농민ㆍ젠트리-노동자의 중간 계층)"들도 새로운 대륙으로 떠났다. 이때 약 75만 명에 달하는 "영국인"이 고국을 버리고, "북아메리카 대륙"으로 옮겨가 "제임스타운"(버지니아에 영국 국왕 제임스 1세의 이름을 따서 만든 최초의 식민지)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였다.

1608년, "프랑스"도 "샹플랭(프랑스 탐험가)이 앞장서, "퀘벡"에 요새를 세우면서 식민지 개척에 나섰다. 1622년, "콜베르"(중상주의 정책을 펼친 루이 14세 시대의 정치가)가 재무장관에 임명되면서 개발에 더욱 힘썼다. "루이 14세" 때는 "라살(프랑스 탐험가)"이 "미시시피 강" 유역에 "뉴올리언스"를 세우고, 그 지방 이름을 "루이지애나(루이 14세의 이름을 따서 지음)"라고 지어, 국왕에게 바쳤다.

서로 적대 관계에 있던 "영국ㆍ프랑스"는 유럽 대륙은 물론이고, "북아메리카"에서도 "윌리엄 왕 전쟁(1689~1697)ㆍ앤 여왕 전쟁(1702~1714)ㆍ조지 왕 전쟁(1744~1748)ㆍ프렌치-인디언 전쟁(1755~1763ㆍ7년 전쟁)" 등 "제2차 백년 전쟁"이라 일컫는 "식민지 쟁탈전"을 벌였다. 특히 매우 치열했던 "프렌치-인디언 전쟁(1755~1763ㆍ7년 전쟁)"에서 "영국"은 유럽에서 "프랑스"와 맞서는 전쟁을 "프로이센"에게 맡기고, "식민지 전쟁"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프랑스"는 원래 차지하고 있던 "퀘벡ㆍ몬트리올" 등 현재의 "캐나다" 전 지역에서 "영국군"에게 패했다. 이에 1763년, 체결된 "파리 조약"에 따라, "프랑스"는 "북아메리카"에서의 모든 지배권을 포기하게 되었다.

3. "영국의 식민지 정책"의 변화가 가져온 독립의 불씨

"북아메리카"의 식민지에서 지배권을 장악한 "영국"은 18C까지" 북아메리카" 동해안에 모두 13개의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식민지에 대해, 거의 간섭하지 않았던 "영국의 건전한 방임 정책" 덕분에 13개 주는 저마다 자유를 누리면서, 독자적으로 발전하였다. 그 당시 유럽에서는 "7년 전쟁"이 끝난 상태였다. 이 전쟁에 참여하여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엄청난 돈만 소비하게 된 "영국"은 전쟁에 들어간 비용을 메워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그래서 그동안 자유롭게 발전하도록 두었던 "식민지"에 눈독을 들였다.  여러 가지 법령을 만들어 식민지를 통제하고, 세금을 늘리는 등 탄압하기 시작한 것이다.

"영국 의회"는 "식민지의 세금 수입"을 늘리기 위해, 1764년에 "설탕세 법"(타국 식민지에서 수입하는 설탕에 대한 과세), 1765년에 "인지세 법"(식민지의 상업 및 법률 서류ㆍ신문ㆍ팸플릿ㆍ카드ㆍ달력ㆍ주사위 등 모든 수입 인쇄물에 인지를 붙여, 직접세를 부과하려는 법), 1767년에는 "타운센트 법"(차ㆍ유리ㆍ납 등에 과세) 등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식민지 주민들이 "대표 없는 곳에 과세 없다"면서, "식민지 대표"가 참여하지 않은 "의회의 결정"에 따르지 않고, "영국 제품 불매 운동"과 함께 거세게 반발하였다. 결국 "영국 의회"는 1770년, "차"에 대한 관세만 남기고, 모든 관세를 폐지하였다.

하지만 "영국의 동인도 회사"(17C에 유럽 각국이 인도ㆍ동남아시아와 무역하기 위하여, 동인도에 세운 무역 독점 회사)가 자금난에 허덕이게 되자, "노스(영국 수상)"은 1773년에 "북아메리카"에서 "동인도 회사"만 "차"를 판매할 수 있도록 법을 만들었다. 이 법이 발표되자, 식민지 주민들은 "보스턴 항"으로 들어오는 "동인도 회사"의 배를 습격하여, "차" 상자를 모두 바다에 던져 버렸다. (보스턴 차 사건)

"보스턴 차 사건"이 일어나자, "영국 의회"는 "보스턴 항구 법(보스턴 항 폐쇄)ㆍ식민지 건설 특허장 폐기ㆍ재판 운영법ㆍ숙영법(영국 군대를 식민지인들의 가택에 민박)"과 같은 4가지의 "참을 수 없는 법"(강제법 또는 불관용법이라고도 함)을 만들어, 식민지를 강력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런 조치는 결국 무력 충돌로 이어졌고, 그 결과 "13개 주"의 식민지 주민들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무기를 들었다.

4. "대륙 회의"를 열어, 독립을 선언ㆍ1775.04월, 최초의 충돌 "렉싱턴 전투"

1774년, "영국 의회"가 "참을 수 없는 법"을 통과시키자, "조지아 주"를 제외한 "식민지 대표 56명"은 "필라델피아"에 모여, "제1차 대륙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그들은 본국 의회의 "식민지에 대한 입법권(법을 제정하는 권한)"을 부정하고, 본국과의 통상을 단절하는 등의 내용을 결의했다. 그리고 본국에 탄원서를 보내고, "영국 제품 불매 운동"을 벌이는 한편, 전쟁에 대비한 군사 훈련에 들어갔다.

1775.04월, "영국 본국 군대ㆍ식민지 민병대"가 처음 충돌한 것은 "보스턴" 근교에서 벌어진 "렉싱턴 전투(미국 독립 전쟁의 시발점)"이였다. 1775년 봄, "식민지인들을 진압하라"는 본국의 명령을 받은 "토머스 게이지 장군(당시 매사추세츠 총독)"은 "애국파"(미 독립전쟁 때, 식민지 정책에 반항했던 민병대)들이 준비해 놓은 무기ㆍ탄약을 파괴하고, "애국파 지도자"들을 체포하기 위해, 군대를 "콩코드(미국 매사추세츠 주, 동부 미들섹스 군의 읍)"으로 보냈다. "영국군"은 "콩코드"로 진격하는 도중, "렉싱턴 그린"에서 70여 명의 현지 민병대와 부딪쳤지만, 쉽게 무너뜨리고 진군했다. 그러나 "영국군"은 "콩코드 전투"에 패하고, "보스턴"으로 돌아가는 도중, 게릴라전을 펼치는 "식민지군"에게 당해, 큰 피해를 입었다.

"식민지군"은 "뉴잉글랜드" 사람들과 힘을 합쳐, "영국군"이 주둔해 있는 "보스턴"을 포위 공격하여 "영국군"을 몰아냈다. 뿐만 아니라 "식민지군"은 "영국군"이 "보스턴" 북쪽 해안에 위치한 높은 언덕인 "벙커힐ㆍ브리즈힐"을 점령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그래서 그곳에 요새를 만들어, "영국군"과 맞서 싸웠다. 이 전투에서 "식민지 민병대"는 "영국군"에게 요새를 점령당한 채, 패했다. 하지만 "영국군" 전력에 큰 손실을 입힘으로써, 자신감을 얻은 "식민지군"은 다시 "영국군"을 공격하였다. 결국 "윌리엄 하우 장군(게이지 장군의 후임)"이 이끄는 "영국군"은 1776.03월에 "보스턴"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1775.06.15일부터 열린 "제2차 대륙 회의"에서 각 주 대표들은 "조지 워싱턴 장군(1차 대륙 회의 때, 버지니아 대표로 참석한 인물ㆍ미국의 초대 대통령)"을 "독립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민병대"를 곧 정식 군대로 편성해, 본격적인 "독립 전쟁" 준비에 나섰다. 그들은 몇 달 뒤, "영국"과의 완전한 분리를 결의하였고, 이듬해 07.04일에 "토머스 제퍼슨(3대 대통령)"이 쓴 "독립 선언서(로크의 계몽사상을 바탕으로, 기본적 인권과 혁명권 등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천명하고, 영국의 폭정을 열거하고 있음)"을 승인하고, "독립"을 선포하였다. 이 "독립 선언"은 곧 "정식 선전 포고"가 되었고, 이제 "독립 전쟁"은 "내란"이 아닌, 두 나라의 전쟁이 된 것이다.

5. 1776년 : "독립군"이 최초로 승리를 거둔 "트렌턴ㆍ프린스턴 전투"

1777년 : "독립 전쟁의 전환점"이 된 "새러토가 전투(뉴욕)". "대륙 회의"가 진행되고 있는 그 시간에도 "영국군ㆍ독립군"은 여러 곳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리처드 몽고메리 장군"이 지휘하는 "독립군"은 "캐나다"를 공격하여 "몬트리올"을 장악하고, "퀘벡"에 진격하여 포위 공격을 하였다. 하지만 1776년 봄, "영국"에서 지원 병력이 도착하자,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식민지"인들이 독립을 선포하자, "영국"은 "리처드 하우 제독"을 파견해, 식민지 대표와 협상하려 하였다. 그러나 독립에 대한 의지로 강하게 저항하던 "독립군"은 "영국의 평화 제의"를 거부한 채, 계속 맞서 싸웠다. "영국 정규군"에 비해, 조직적인 훈련이나 장비 면에서 뒤처져 있던 "독립군 부대"는 계속되는 패배로 불리한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독립군"은 물러서지 않고, "영국군"을 공격하였다. 

1776년 겨울, 크리스마스 전날 밤, "워싱턴(독립군 총사령관)"은 군대를 이끌고, "트렌턴(미국 뉴저지 주의 도시)"에 주둔 중이던 "영국군 수비대"를 공격하여, 1,000여 명에 이르는 포로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바로 "프린스턴(미국 뉴저지 주의 도시)"으로 이동해, "영국군 3개 군단"과 맞서 싸워 무찔렀다. 이 전투가 "독립군"이 최초로 승리를 거둔 "트렌턴ㆍ프린스턴 전투"이다.

한편 "캐나다"에 주둔해 있던 "존 버고인 장군"이 지휘하던 "영국군"은 1777년에 남쪽으로 이동해, 7월에 "타이콘더로가 요새(뉴욕 주 북동부에 위치)"를 함락시키고, "에드워드 요새(뉴욕 주 동부 허드슨 강 상류)"까지 장악했다. 그 뒤 "존 버고인 장군"은 일부 병력만 남겨 두고, 30일분의 식량과 군사들을 이끌고, "허드슨 강"을 건너, "뉴욕의 새러토가"가 부근에 진을 쳤다. 근처 약 6.5km 거리에서는 "호레이쇼 게이츠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이 계속 병력을 모으고 있었기 때문에, 양국 군대는 대치 상태가 되었다.

1777.09.19일, "영국군"은 남쪽으로 이동해, "프리맨스 팜"으로 진격해 먼저 공격했다. 그렇지만 "호레이쇼 게이츠 장군"의 방어선을 뚫는 데는 실패한 채(1차 새러토가 전투(프리맨스 팜 전투)), "올버니(미국 뉴욕 주의 주도)"로 진격했다. 10.07일, "존 버고인 장군"은 1,500명을 이끌고 정찰에 나섰다가, "베미스 고원"에서 "독립군의 베네딕트 아널드 장군" 군대의 반격을 받았다(2차 새러토가 전투(베미스 고지 전투)). 당시 "존 버고인"의 부대는 병력도 줄고 보급품도 떨어져 가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후퇴하려고 했다. 그러나 "호레이쇼 게이츠"의 군대에 포위되어 더 이상 버틸 수가 없게 되었다. 결국 "존 버고인"이 이끄는 "영국군"은 1777.10.17일 "새러토가 협정"을 맺고 항복하였다. "새러토가 전투" 결과, "독립군"의 사기가 크게 오르면서, 전쟁은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6. 다시 "국제전"으로 변한 전쟁

이 무렵, "7년 전쟁" 이후, 유럽 최강국이 된 "영국"에 위협을 느끼고 있던 "프랑스ㆍ에스파냐ㆍ네덜란드"가 "독립군을 돕겠다."고 나섰다. "독립군"은 자금ㆍ장비ㆍ군사력(특히 해군력) 등 여러 면에서 모두 "영국"에 비해 뒤떨어졌기 때문에 유럽 국가들의 지원을 반갑게 받아들였다. 

가장 큰 힘이 된 것은 "프랑스"였다. 이미 "프랑스"는 1776년부터, 몰래 "독립군"에 군수품ㆍ엄청난 양의 화약을 공급해 주고 있었다. 그 뒤 "새러토가 전투"에서 "독립군"이 승리하는 것을 보고, "프랑스"는 1778년, 함대ㆍ육군을 보내 공식적으로 참전하여, "영국"에 선전 포고를 하였다. "러시아ㆍ프로이센ㆍ덴마크" 등은 직접적으로 전쟁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영국"이 식민지의 해상 봉쇄를 강화하자, 무장 중립 동맹을 맺고, 자국의 "사나포선(사략선ㆍ교전 중인 적선을 공격할 수 있는 권한을 정부로부터 인정받은 민간 소유 무장 선박)"을 이용하여 "독립군"에 군수 물자를 운송해 주었다. 이로써 식민지에서 다시 "유럽 열강들의 국제전"이 시작되었다.

7. "요크타운 전투"와 "아메리카 합중국" 탄생

유럽의 원조를 받은 "독립군"은 "프랑스 군"과 손잡고, 1781년 전쟁을 마감하는 결정적인 전투를 벌였다. "콘 윌리스(영국군 사령관)"은 남부지역 전투에서 계속 패해 전력에 손실이 커지자, "버지니아"로 이동해, "요크타운"에 요새를 만들었다. 그러자 "프랑스 라파예트 장군"은 육로를 차단해, "영국 증원군"이 요새로 들어가는 것을 막았다. 또 "그라스 백작"이 지휘하는 24척의 "프랑스 함대"는 "체서피크 만"(미국 동부 대서양 연안 평야에 있는 큰 만ㆍ남부로 버지니아와 경계)을 장악한 채, 대기하고 있었다.

1781년, "독립군의 워싱턴 장군"은 "프랑스 로샹보 백작"이 이끄는 군대와 연합하여, "콘 윌리스"의 요새를 포위 공격하였다. 한편 해상에서는 "토머스 그레이브스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함대"가 "프랑스 해군"에 밀려 "뉴욕"으로 되돌아갔다. 육ㆍ해 양쪽 모두에서 지원이 막혀 버린 "영국군"은 "프랑스 함대ㆍ지상 연합군"의 공격을 견디지 못해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그 뒤 "해전"은 계속되었지만, "지상"에서의 전투는 모두 끝이 나, 사실상 "독립 전쟁"은 마감되었다.

1783년, 전쟁에 참여했던 국가들은 "파리"에서 전쟁을 종결하는 "강화 조약"을 맺었다. 이때 "영국"은 "미국의 완전 독립"을 승인하였으며, 서쪽으로 "미시시피 강", 남쪽은 "동ㆍ서 플로리다", 북쪽은 "오대호"에 이르는 땅을 영토로 인정하였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13개 주"는 1787년 헌법을 제정하고, 1789년 "아메리카 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이라는 새로운 "연방 공화국"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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