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원정"은 1812년, "프랑스 황제"였던 "나폴레옹"이 "러시아 제국"을 침공하여 일어난 전쟁을 말한다. "나폴레옹"의 몰락의 주요인이 된 것이 바로 이 "러시아 원정"이었다. "러시아"에서는 "조국 전쟁"이라 부르며, "나폴레옹" 스스로는 "제2차 폴란드 전쟁"이라고 명명했다. "나폴레옹"은 패한 이유는 "혹독한 한파" 때문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1. 러시아 원정
실제로 "나폴레옹"은 자신의 "러시아 원정의 패인"이 "러시아의 혹독한 추위 때문이었다."고, "공고문(12.03일 발표)"에서 주장하고 있다. "추위가 갑자기 심해져서, 11.14~15일 사이의 밤에는 영하 16도 이상 떨어졌다. 길이 얼음판이 되어 기병ㆍ포병ㆍ보급품을 나르는 말들이 밤마다 무더기로 넘어져 죽었다. 수백이 아니라 수천이 죽어나갔다."
• 일 시 : 1812.06.24~1813.01.05 (6개월) • 장 소 : 러시아 제국 (모스크바ㆍ네만 강ㆍ빌뉴스ㆍ폴라즈크ㆍ라트비아ㆍ스몰렌스크ㆍ보로디노ㆍ비아즈마ㆍ크라스니ㆍ베레지나 강) • 결 과 : "나폴레옹 군"의 전멸에 가까운 대패 • 교전국 : 프랑스ㆍ러시아 제국 • 지휘관 : 프랑스 (나폴레옹 1세)ㆍ러시아 제국 (알렉산드르 1세) • 병 력 : 프랑스 원정군- 61만 명 • 피 해 : 프랑스 원정군- 전사(40만 명)ㆍ포로(10만 명)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는 "대륙 봉쇄령"으로 "영국"에 대한 농산물 수출의 길이 막혀,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감수하고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된 "알렉산드르 1세"는 1810.12.31일에 공식적으로 "대륙 봉쇄 체제"에서의 탈퇴를 선언하였다. 이로써 "영국ㆍ러시아" 사이의 통상이 재개되고, "나폴레옹"은 "알렉산드르 1세"를 직접 응징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처럼 대륙 봉쇄를 둘러싸고, 관계가 급속도로 냉각되자, 양국은 1811년부터 전쟁 준비에 돌입했다.
"3주 분량의 보급 물자"만을 가지고 시작된 원정은 저항 없이 후퇴하는 적을 쫓아, "러시아" 깊숙이 들어가는 상황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나폴레옹 대군"은 후퇴하면서 물자를 현지 조달할 수 없도록 파괴하고, 도주하는 "러시아군"의 작전에 말려, 굶주림에 허덕여야 했다. "러시아 군"은 다시 질서 정연하게 후퇴하였고, "모스크바"에 입성한 "나폴레옹"은 굶주린 자신의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텅 빈 시가지" 만을 정복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황한 "나폴레옹"은 5주 동안, "모스크바"에 머무르며, "알렉산드르 1세"와 협상을 시도하였으나, "러시아의 차르"는 어떠한 제의도 거부하였다. "러시아"에서 겨울을 맞게 되자,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나폴레옹"은 후퇴를 명령하였다. 불행하게도 그 해에는 겨울이 일찍 찾아와, 후퇴하는 위대한 정복자의 군대를 사정없이 괴롭혔다. 원정의 결과는 참혹하였다. 61만 명의 "원정군" 중, 40만 명이 죽고, 10만 명이 포로가 되었다.
※ "로버트 윌슨"이 묘사한, 공포에 사로잡혀 퇴각하는 "프랑스 군"의 모습은 잘 알려져 있다.
: 벌거벗은 채 죽은 자와 죽어 가는 자의 무리, 더러는 죽기 전에 식량으로 쓰려고 잘라낸 말들의 토막 난 시체, 굶주림에 울부짖다가 식인자의 무리를 이루기도 하는 자들, 화염과 연무에 뒤덮인 대기, 숲속에서 끝없이 복수의 외침을 토해내는 농민들에게서 벗어나려고, 벌거벗은 채 도망치며 기도하는 수백 명의 비참한 모습들, 대포와 화약 마차, 온갖 종류의 비축품의 잔해. 이런 광경은 역사상 그 어느 때도 목격하지 못했을 것이다.
2. 보로디노 전투ㆍ모스크바 입성ㆍ후퇴 명령
1807년 체결된 "틸지트 조약"에 의해, "러시아 제국"은 "나폴레옹의 동맹국"이 되었고, 1806년 "베를린"에서 "나폴레옹"이 선포한 "대륙 봉쇄"에 참가했다. 1808년 가을, "동맹 경신" 외에는 별로 양국의 우호 관계 증진에 이바지하는 바 없이 끝난, "에어푸르트 회담" 이후, "나폴레옹"은 "알렉산드르 1세의 여동생"과의 혼인을 제안했으나, 혼담이 별 진전이 없자, 대신 1810.04월 "오스트리아의 황녀 마리 루이즈"와 결혼했다.
1811년, 유럽 대륙을 장악하고 있던 "나폴레옹"은 "에스파냐 지역"을 제외하고는 4년간 전쟁이 없는 평온한 시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대륙 체제는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했고, 유럽의 점령 지역, 특히 "독일"에서 많은 사람이 해방 전쟁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들에게 "나폴레옹의 군대"는 너무나 막강한 존재였다. "유럽"에서 "나폴레옹의 권력"에 도전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국가는 "러시아" 밖에 없었다. "알렉산드르 1세"는 "프랑스"와의 동맹에 만족하는 듯 보였다. 1809년, "핀란드"를 합병함으로써, 어느 정도 팽창 욕구를 채운 "알렉산드르 1세"는 "투르크"와 "다뉴브 강"에서 전쟁을 하고 있었다.
1810년, "마리 루이즈(오스트리아 황녀)"와 정략 결혼하였고,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의 왕가의 공주와 결혼하여, 유럽 왕족의 일원이 되었으나, "나폴레옹"은 "러시아"에 어떠한 도움도 주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폴레옹"의 미움을 산 "슈타인"이 "러시아"로 도피하게 된다. "슈타인"은 유럽에서 "반 나폴레옹 세력"이 증가하고 있음을 귀띔하며, "알렉산드르 1세"가 "유럽의 운명을 바꿀 유일한 인물"이라고 찬사를 퍼부었다. (슈타인 : 라인란트 태생ㆍ프로이센의 정치가ㆍ프로이센 총리(1807~08)와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1812~15 재위)의 개인고문을 지냈다ㆍ나폴레옹 전쟁 당시 프로이센의 광범위한 개혁을 추진했고, 나폴레옹에 맞선 마지막 유럽 동맹결성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북해ㆍ발틱 해"에 면해 있는 지방에선 "대륙 봉쇄"를 피해, "영국"과의 밀수가 성행했는데, "나폴레옹"은 여기에 강경하게 대응해, 1810.07월에는 "홀란트 왕국"을, 12월에는 "북해"에 인접해 있는 "독일" 북서부에서 "발틱 해"의 항구 도시 "뤼베크"까지를 "프랑스 제국"에 병합하였다. "알렉산드르 1세"는 매제가 공작으로 있던 "올덴부르크 공국" 역시 "나폴레옹"이 자신과의 상의 없이 병합하자, 안 그래도 자국 경제에 큰 타격을 입히고 있던 "대륙 봉쇄"에서 사실상 탈퇴해, "자주적 조건"으로 "영국"과의 무역을 재개했다.
이처럼 대륙 봉쇄를 둘러싸고, 관계가 급속도로 냉각되자, 양국은 1811년부터 전쟁 준비에 돌입했다. 외교적인 해결은 "대륙 봉쇄의 준수"를 고집하는 "나폴레옹"의 태도로 인해 결실을 맺기 힘들었는데 원래 "대륙 봉쇄" 자체가 전 유럽 대륙을 망라하고, 철저하게 지켜지지 않으면, 확실한 효과를 볼 수 없는 정책이었기에 "영국"과의 교역량이 적잖은 "러시아"에게 예외를 인정하는 것은 목적에 반하는 일이었다.
이즈음 "러시아"는 "대륙 봉쇄령"으로 "영국"에 대한 농산물 수출의 길이 막혀,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감수하고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된 "알렉산드르 1세"는 1810.12.31일에 공식적으로 "대륙 봉쇄 체제"에서의 탈퇴를 선언하였다. 이로써 "영국ㆍ러시아" 사이의 통상이 재개되고, "나폴레옹"은 "알렉산드르 1세"를 직접 응징하기로 결정하였다. "나폴레옹 군대"는 61여만 명의 연합군으로 구성되었다. 1/3은 "프랑스 인"이었고, 또 1/3은 "라인 동맹ㆍ프로이센ㆍ오스트리아"에서 온 "독일인"들이었으며, 나머지 1/3은 "폴란드 인"을 중심으로 구성된 기타 민족이었다.
1812.06월, "나폴레옹"은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로 진군해 들어갔다. "3주 분량의 보급 물자"만을 가지고 시작된 원정은 저항 없이 후퇴하는 적을 쫓아, "러시아" 깊숙이 들어가는 상황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나폴레옹 대군"은 후퇴하면서 물자를 현지 조달할 수 없도록 파괴하고, 도주하는 "러시아군"의 작전에 말려, 굶주림에 허덕여야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폴레옹 군"은 "모스크바" 근방의 "보로디노"에서 최초로 "러시아 군"과 전투를 벌일 수 있었다.
결과는 "러시아 군"의 피해가 5만 명, "프랑스 군"의 피해가 3만 명으로 "나폴레옹"의 승리였다. "러시아 군"은 다시 질서 정연하게 후퇴하였고, "모스크바"에 입성한 "나폴레옹"은 굶주린 자신의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텅 빈 시가지" 만을 정복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모스크바"에 대한 방화가 시작되었지만, "나폴레옹"이 상상하였던, 항복 문서를 든 "알렉산드르 1세"는 어디에도 없었다.
당황한 "나폴레옹"은 5주 동안, "모스크바"에 머무르며, "알렉산드르 1세"와 협상을 시도하였으나, "러시아의 차르"는 어떠한 제의도 거부하였다. "러시아"에서 겨울을 맞게 되자,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나폴레옹"은 후퇴를 명령하였다. 기나긴 후퇴의 행렬이 시작되었다. 불행하게도 그 해에는 겨울이 일찍 찾아와, 후퇴하는 위대한 정복자의 군대를 사정없이 괴롭혔다. 여기에 "모스크바 방화"로 적개심에 가득 찬 "러시아 인"들이 도처에서, 무기력한 "프랑스 군"을 습격하여 엄청난 인명 손실을 가져왔다.
원정의 결과는 참혹하였다. 61만 명의 "원정군" 중, 40만 명이 죽고, 10만 명이 포로가 되었다. 역사상 최대를 자랑하던 "대군"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실패"의 소식에, 지금까지 숨죽이고 지내던 "독일 영방 국가들"이 "반 나폴레옹"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에 군대를 동원하였던 "프로이센ㆍ오스트리아"가 "러시아"와 동맹을 맺고 "프랑스"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하였다. 유럽 전역의 "프랑스 점령 지역"에서 "프랑스"에 저항하는 모든 세력이 들고 일어났다.
"이탈리아"에서는 "반 프랑스 폭동"이 발생하였으며, "에스파냐"에서는 "웰링턴(1769~1852)"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로 진격하였다.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6월 말 "웰링턴 후작"이 지휘하는 7만여 명의 "영국ㆍ스페인ㆍ포르투갈 연합군"이 1808년 "나폴레옹"에 의해 "스페인 왕"이 되었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의 군대에 승리하고, "프랑스"의 전력이 거의 대부분 "독일"로 돌려지는 것에 힘입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추격, "툴루즈"까지 육박했다. 이렇게 해서 "러시아 원정"이 참담한 결과로 끝난 지, 반년 만에 "유럽 대륙"에서의 "나폴레옹"의 패권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흔들리게 되었다.
3. 패인의 원인은 "추위"였을까? "보급 문제"였을까?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실패의 속사정은 바로 "나폴레옹의 보급 실패"에 의한 패배였지, "추위"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을 계획할 당시, "영국"을 고립시키기 위해, "대륙봉쇄령"이 내려져 있었고, 유럽의 어떤 나라도 "영국"과 무역을 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 무렵, "유럽"은 악천후로 농사는 흉작이었고, 지루한 전쟁으로 인해, 최악의 "실업률"을 보이고 있었다. "유럽"의 중심이었던 "프랑스"는 상황이 더 악화되었는데, 기업은 하루가 멀다 하고 도산했고, 장기간의 징병ㆍ전쟁으로 국민들의 불만은 극대화되어 있었다. 때문에 "나폴레옹"은 이런 극심한 국내 상황을 "러시아의 원정"으로 만회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나폴레옹"의 주장과는 달리, "러시아 원정" 때의 날씨는 평년보다 더 따뜻했다고 한다.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서 참패한 것은 추위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실수 때문이었다. 날씨의 자료에 따르면, "나폴레옹 원정대"가 후퇴하기 시작했던 10월, "키예프"의 평균 기온은 영상 10도 이상이었고, "바르샤바"도 역시 10도가 넘었다. "레바르"의 경우도, 6도가 조금 넘어, 11월 말에도 강이 전혀 얼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째서 "실패한 이유가 추위 때문이었다."는 그의 주장은 그대로 받아들여진 것일까? 그것은 바로 "시간차 추위" 때문이었다. 그 당시, 추위가 심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나폴레옹 군"이 "러시아"에서 퇴각하면서, 물자 손실이 많았던 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계확이 잘못되었기 때문이지, 추위 탓이 아니었다.
그리고 진짜 큰 추위는 1812.12월에 닥쳐왔다. "러시아 원정"의 대참패가 있고, 한참 지난 후의 일이다. 그러나 뒤늦게 귀향한 병사들은 "매서운 추위 이야기"를 해서, 사람들이 "나폴레옹의 변병"을 사실처럼 믿게 되었다. 그러니까 귀향한 "프랑스 군"의 증언들이 "나폴레옹의 공고문"의 신빙성을 뒷받침해 주었던 것이다.
4. 포로 고문 : 카자크 기병대ㆍ러시아 농민들
① 유격대원들에게 잡힌 자들은, 운이 좋으면 말뚝에 찔리거나, 끓는 물에 산 채로 던져져, 고통스럽지만 빠르게 죽을 수 있었다. 이보다 운이 나쁜 자들에게는 한층 더 섬뜩한 종말이 기다리고 있었다. 농민들에게 붙잡히면 "처참한 운명이 기다린다."는 정보가 "프랑스 병사들" 사이에 퍼져,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병사들은 포로가 되면, 자살을 기도했고, 상대적으로 인정 있는 "러시아군 장교들"은 포로를 즉결 처형해, 농민들의 광적인 응대를 피하게 해주었다.
② 유격대원들은 "프랑스군 포로"를 잔혹하게 고문한 다음, 산 채로 불태우거나, 일종의 "농민 바쿠스 축제"를 벌여 죽였다. "사형 형틀"처럼 베어낸 나무에 포로를 묶는데, 그냥 묶는 게 아니고, 발가벗겨서 날개를 활짝 펼친 독수리처럼 팔다리를 벌려 묶였다. 그런 다음, 농민 남녀가 합창을 하며 뛰어다니면서, 포로의 머리를 "괭이"로 찍고, "곤봉"으로 내리쳤다.
③ 농민들은 2가지 방법을 특히 각별하게 즐겨 썼다. 하나는 희생자를 발가벗겨, 젖은 부대로 몸통을 감싼 뒤, 둘러 묶고는, 망치ㆍ몽둥이ㆍ돌로 복부를 가격해, "내장 기관"이 터져 나오게 하되,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희생자의 손ㆍ발을 묶어, "도르래"로 끌어올린 후 떨어뜨려, "척추"를 부러뜨리는 것이었는데, 몸에 척추가 없는 헐렁한 "부대"처럼 변할 때까지, 이 과정을 반복했다.
④ 농민들은 "카자크 기병대"에게 많은 돈을 주고, 포로들을 넘겨받아, 끔찍한 고문을 가했다. 두 눈을 뽑아내고, 망치로 손톱을 두들겨, 몸속으로 집어넣었으며, 팔ㆍ다리를 잘라 유혈이 낭자한 토르소(팔ㆍ목ㆍ다리가 없는 인체를 묘사한 예술조각)를 만들었고, 목구멍 속으로 말뚝을 박아 넣었다.
⑤ 상당히 많은 부상자들이 붙들려서 이런 섬뜩한 운명을 맞이한 것은 무신경한 "프랑스 마차꾼들"의 잘못에 그 원인이 있었다. 마차가 바퀴자국을 따라가며 덜컹거릴 때, 부상자들은 당연히 극심한 고통으로 비명을 질렀다. 이에 격양된 "마차꾼"은 속도를 높이고자, 채찍을 휘둘렀고, "부상자"들은 튀어서 마차에서 떨어졌다. 운이 좋은 자들은 뒤따르는 "마차"에 치였고, 운이 나쁜 자들은 "늑대의 먹이"가 되거나, "유격대" 에게 잡혀, 끔찍한 방식으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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