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남부ㆍ북부는 노예해방을 둘러싼 갈등이 지속됐는데, 미국 남부 11개 주에서 노예의 존속과 연방 분리를 통한 독립을 주장하며, "남북전쟁 (American Civil War)"을 일으켰다. 1861.04월, "노예제"를 지지하던 "남부 주"들이 모여, "남부 연합"을 형성하며, "미합중국"으로부터의 분리를 선언한 뒤, "아메리카 남부 연합군(남군)"이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찰스턴 항"의 "섬터 요새"를 포격하는 것으로 시작되어, 1865년까지 4년 동안 벌어진 전쟁이다. 결국 1865년, "남부 연합군"이 패하고, "북부"가 승리하며, 미국 전역에서 "노예제"가 폐지되었고, 노예에게도 "시민권"이 주어졌다.
1. 미국 남북 전쟁 (American Civil War)
1861~1865년까지 미국에서 일어난 내전으로, 노예해방 전쟁. 1865.04.14일, "링컨 대통령 (제16대 대통령ㆍ1861~1865)"이 "노예해방 반대론자"인 "부드"에 의해 암살당하였다. • 남북전쟁의 과정 : 남부와 북부의 대립→ 링컨의 대통령 당선→ 남부의 연방 탈퇴 및 독립선언→ 남북전쟁 발발→ 북부의 승리→ 노예해방
• 일 시 : 1861.04.12~1865.04.09 • 장 소 : 미국 북동부ㆍ미국 남부ㆍ미국 서부ㆍ대서양 • 결 과 : 북부 연방 승리 • 교 전 : 아메리카 합중국 (북부 연방 Union): 애브러햄 링컨 / 아메리카 연합국 (남부 맹방 Confederate): 제퍼슨 데이비스 남군 대통령 (1861~1865) • 병 력 : 210만 명 ㆍ 106.4만 명 • 피 해 : 36만 명(11만 전사)ㆍ25.8만 명(9.4만 전사)
① 링컨 (Abraham Lincolnㆍ1809~1865ㆍ56세) : 제16대 대통령 (공화당)
남북전쟁에서 승리해 연방(聯邦)을 보존하고 노예를 해방시킨 미국의 대통령 (임기 : 1861.03~1865.04) • 별 칭 : Honest Abe (정직한 에이브)ㆍThe Great Emancipator (위대한 해방자)ㆍThe Railsplitter (장작 패는 사람)
링컨은 미국의 여러 영웅들 가운데, 미국인에게나 다른 외국인에게 독특한 매력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매력은 그가 누추한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극적인 죽음을 맞은 남다른 인생경력을 가지고 있고 매우 인간적이고 따뜻한 인격의 소유자이며, 연방의 구원자, "노예 해방자"로서의 역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는 데 있다. 특히 링컨은 "민주주의를 대변한 웅변가"로서 끊임없는 존경을 받아왔다. 그는 연방이 그 자체로도 구할 가치가 있을 뿐 아니라, 전 세계 국민들에게 중요한 자치(自治)이념을 실현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구할 가치가 있다는 견해를 폄으로써, 전 세계 사람들로부터 호응을 받았다.
2. 남북 전쟁 발발 이전의 주요 분쟁들
① 1821년 : 미주리 협정
미연방으로 새로 편입되는 미주리를 노예 주로 인정하는 대신, 메인 주를 매사추세츠 주에서 분리하여 자유 주로 편입시키기로 결정한 법안. 이후의 주 편입 때는 북위 36˚30'이남은 노예 주, 그 이북은 자유 주 지역으로 할 것도 함께 결정하였다.
② 1854.05.30일 : 캔자스 - 네브래스카 법
캔자스와 네브래스카 2곳의 정부 조직을 주민 주권의 원칙에 따르도록 결정한 것으로, 남북 전쟁 직전 노예제 확장 문제에 관한 국가 정책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온 법. 특히 준주에 노예제 허용 여부를 결정하는 데 의회의 법령 보다 주민 주권 원칙이 우선함을 보여 주는 법령이다.
③ 1854~1859 : 피의 캔자스
미국의 노예제 지지론자와 폐지론자가 주민 주권론이라는 원칙을 놓고 새로운 준주인 캔자스를 장악하기 위해, 벌인 소규모의 내란.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이 통과된 후 북부의 자유 토지 지지자들은 무장한 이민 단체를 결성해 캔자스로 이주했고, 노예제 지지자들도 주 경계를 넘어 몰려왔다. 노예제 폐지론자인 한 거주민의 살인 사건을 계기로 터진 이 분쟁은, 1861년 캔자스가 자유 주로 연방에 가입하면서 끝이 났다.
④ 1857.03.06일 : 드레드 스콧 판결
모든 준주에서 노예 제도를 합법화함으로써 지역 간의 분쟁과 내란의 길로 치닫게 한 연방 대법원의 판결ㆍ노예였던 드레드 스콧은, 미주리 주에 오기 전에 자유 주와 자유 준주에 살았음을 내세워 자신이 자유 신분임을 밝혀 달라는 소송을 미주리 주 법원에 제기했다. 하지만 대부분 남부 출신이었던 연방 대법원 판사들이 흑인은 미국 시민으로서 권리를 행사할 자격이 없으므로, 연방법원에 제소할 권리도 없다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미주리 협정은 준주 지역에서 노예 제도를 폐지할 권한이 없기 때문에 위헌이라고 선언하였다.
3. 진행 과정
① "대서양~ 태평양"에 이르는 국가로 성장한 "미국"
"7년 전쟁" 이후, "영국"은 전쟁 때문에 생긴 재정적 손실을 메우기 위해, "아메리카 식민지"에 대한 기존 정책을 바꾸었다. 이에 따라 "식민지"를 통제하고, 세금을 늘리는 등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식민지 대표들은 1776년,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고, 전쟁을 치렀다.
그 결과, "파리 조약(1783년)"을 통해 독립을 인정받고, 1789년에는 "영국"의 식민지였던 "13개 주"로 구성된 "미국(아메리카 합중국ㆍUnited States of America)"이라는 새로운 연방 공화국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미국"은 처음부터 "연방파(중앙 정부의 권한을 강화하려는 중앙 집권주의)ㆍ반연방파(주의 독립적인 권한을 유지하려는 지방분권주의)"의 대립으로 매우 불안정하게 시작했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 때, 중립적인 입장을 지키면서, 무역을 통해 큰 이익을 챙겼다. 그 과정에서 "영국"의 방해로 "미국"의 선박들이 나포(사람ㆍ배ㆍ비행기 등을 사로잡음)되는 일이 벌어지자, 다시 "영미 전쟁(1812~1814)"을 벌였다. 이 전쟁 후, "미국"은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발전하기 시작했다. "미국"이 경제 발전에 박차를 가한 것은 "서부로의 영토 확장"이었는데, 맨 먼저 1803년 "루이지애나"를 사들인 이후, 1819년 "플로리다"를 차지했다. 1845년에는 "텍사스"를 병합했으며, 1846년 "멕시코"와의 전쟁을 통해, "캘리포니아ㆍ뉴멕시코"를 할양 받았다. 이로 인해 1840년대에 이미 "대서양에서 태평양 연안"까지 이르는 대륙 국가로 발전하였다.
② 남ㆍ북의 계속된 분쟁 : 미주리 협정ㆍ드레드 스콧 사건
"미국"은 크게 "남부ㆍ북부" 지방으로 2분화되어 발전하면서 경제적ㆍ정치적 이해관계로 인해 대립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북부 주"들은 유럽에서 온 이주민들을 중심으로, 풍부한 지하자원을 이용한 공업ㆍ상업이 발전하였다. 이에 비해 넓은 평야가 대부분인 "남부 주"는 "노예 노동"을 기반으로 하는 면화ㆍ사탕수수를 재배하는 "대농장"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독립할 당시부터, "연방파(북부)ㆍ반연방파(남부)"로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해 오던 이들은 새로 편성된 "서부의 주"들이 "자유 주(노예 제도를 인정하지 않은 주)를 택하느냐ㆍ노예 주(노예 제도를 합법적으로 인정한 주)를 택하느냐"를 둘러싸고, 매우 날카롭게 대립하였다.
양측 모두 한 치의 양보도 할 수가 없었던 것은 이 문제가 바로 "정치적인 세력 확장"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 의회"는 인구수에 비례하여, "하원 의원의 수"가 결정되는데, 남부 지역의 400만이 넘는 노예들이 비록 선거권은 없지만, "인구수"에 포함되는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만약 선거법상 유리한 "남부 측"이 "하원의석"을 더 많이 차지할 경우, "북부"는 세력을 확장할 수 없기 때문에, 양측 모두 "노예제 폐지"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부ㆍ북부"의 이런 숨겨진 갈등은 1817년, "미주리"가 새로운 "미연방주"로 편입하는 과정에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은 "자유 주ㆍ노예 주"가 각각 11개였는데, "미주리 주"가 "노예제"를 채택할 경우, 그동안 유지되어 온 "남북"의 세력 균형이 깨어질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측은 서로 타협하여, "미주리 협정"을 결정하였다. 이로써 "노예제 확대"를 둘러싼 남북의 대립은 해결된 듯 보였다. 그러나 30여 년이 지난 뒤,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이 통과되면서, "준주(주의 자격을 얻지 못한 미국의 행정 구역)"의 "노예제 채택"의 여부를 "주민 주권론"에 맡겼다. 이로써 사실상 "미주리 협정"이 깨지게 되자, "남ㆍ북"은 다시 "노예제 채택 문제"로 맞서게 되었다.
"노예제 확장"으로 인한 지역 갈등을 줄이기 위해, 제정된 이 법안의 통과로 양측 지지자들은 서로를 공격하였다. "캔자스"에서는 유혈 사태가 벌어져, "피의 캔자스"라 불리는 참극까지 일어나게 되었다. 이후 1857년 내려진 "드레드 스콧 판결"로 인해, "노예제 폐지"를 지지하는 "공화당"이 세력을 굳히게 되자, 남북 간의 분쟁은 더욱 심각해졌다. 그 결과, "남부"의 몇몇 주들이 연방에서 탈퇴하겠다고 나섰다. 이 위협은 "남북 전쟁"을 일으킨 결정타가 되었다. 이 무렵 1852년, "스토우 부인"이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Uncle Tom's Cabin)"을 출간하여, 흑인 노예의 참상을 알리는 데 한몫을 거들면서, "북부지역" 사람들은 "노예제 폐지"에 더욱 열을 올리게 되었다.
③ 링컨의 16대 대통령 당선ㆍ아메리카 남부 연합 대결
1861.07월 : 최초의 전투 "제1차 불런 전투(불런 강 전투)"→ 남부군 승리
"남북 전쟁"이 일어나는 데, 불을 붙인 것은 바로 1860년에 치러진 "제16대 대통령 선거"였다. 이 선거에서 "노예제"를 반대하는 "공화당 후보 에이브러햄 링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앨라배마"를 비롯한 "남부의 7개 주"는 "대통령 취임"에 반대하고 나섰다. 그들은 대통령 취임 전인 1861.02월에 "미연방 탈퇴"를 선언하고, "아메리카 남부 연합"을 조직한 후 "제퍼슨 데이비스"를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또 "남부 연합"은 1861.04.12일,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찰스턴 항"에 있는 "섬터 요새"를 먼저 공격했다. 이때 갑작스런 공격을 받은 "북부 군"이 항복의 의사를 밝히려고 "예포"를 발사했는데, 이 포탄에 "남부군" 병사가 전사하는 바람에,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링컨"은 지원병을 모집하고, "남부군"과의 전투를 준비했다. 이 무렵, "로버트 리 대령"이 "북부 군"을 떠나 "남부 군"에 합류하였고, "노예 주" 가운데 "아칸소"를 비롯한 "4개 주"가 "남부 연합"에 가담함으로써, "남부 군"은 더 큰 지지 세력을 얻게 되었다. "섬터 요새"의 전투 이후, "북부 군"은 "리치먼드(남부 연합 수도ㆍ미국 버지니아 주에 있는 도시)"를 향해 진군하였다. 1861.07.21일, "불런 강(버지니아 주 북동부 머내서스에 위치)"에서 "남부 군"과 만나, 최초 교전을 벌이게 되었다. 이때 "북부군"은 "철벽 장군"이라 불리는 "토머스 잭슨 장군ㆍ보러가드 장군"이 이끄는 "남부군"에게 패배하여, "워싱턴"으로 후퇴했다(제1차 불런 전투).
수적으로 우세했음에도 "불런 전투"에 패배한 "북부군"은 신병을 더 소집해서 훈련을 강화한 뒤, 1862.02월 다시 진격을 시작했다. "그랜트 장군"이 이끄는 "포토맥 군"은 "미시시피 강변"에 있는 "헨리 요새ㆍ도넬슨 요새"를 공략하여 점령하고, "켄터키 주ㆍ테네시 주"까지 통제하게 되었다. 4월에는 "매클렐런 장군"이 다시 "리치먼드"를 점령하기 위해 진군하였지만, "남부군의 로버트 리 장군"의 부대에 저지당했다. "매클렐런"이 "리치먼드" 동쪽으로 퇴각하자, "리 장군"은 "북부군"을 공격했다가, 막대한 피해를 입고 격퇴 당했다. 그러나 "리 장군"은 다시 "잭슨 장군"과 연합하여, "존 포터 장군"이 이끄는 "북부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인 끝에 승리를 거두었다. 결국 "매클렐런 장군"이 이끄는 "포토맥 군"은 "리치먼드" 장악에 실패하고, "요크타운 반도"에서 철수하고 말았다. (7일 전투ㆍ반도 회전(일정 지역에 대규모의 병력이 집결하여 전투를 벌임), 1862.06.25.~07.01일)
1862.07월, "링컨 대통령"은 "존 포프 장군"을 지휘관으로 하는 "버지니아 군"을 새로 창설하여, "리치먼드" 근처로 진격시켰다. 하지만 "북부군"은 "리 장군"이 보낸 "잭슨의 매복 작전"에 당해 패배를 하였고, 다시 "워싱턴" 방면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제2차 불런 전투, 1862.08.29~30). "2차 불런 전투"에서 승리한 "리 장군"은 "메릴랜드"로 진격하다가, "앤티텀(샤프스버그)"에서 재편된 "매클렐런 장군"의 부대와 마주쳐,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메클렐런 장군"은 "리 장군"의 진격을 막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그런데 "리의 작전 명령서"를 손에 넣고서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아, "리 장군"은 "버지니아"로 안전하게 퇴각하였다 (앤티텀 전투, 1862.09.17).
"앤티텀 전투"에서 "북부군"이 승리하자, "링컨 대통령"은 09.22일에 "노예 해방 예비 선언"을 선포했다. 그 내용은 "남부 연합"이 1863.01.01일까지 "연방"에 복귀하지 않으면, 그날을 기해 "남부의 모든 노예를 해방시킬 것"이었다. 그해 11월, "링컨"은 "북부의 포토맥 군" 사령관인 "매클렐런"을 해임하고, "번사이드 장군"을 새로운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리치먼드"로 보냈다. 그 사이 전열을 다시 가다듬은 "남부군의 리 장군"은 "버지니아 주의 프레데릭스버그"에 참호(야전에서 몸을 숨기면서 적과 싸우기 위해 방어선을 따라 판 구덩이)를 구축하고, "북부군"과 맞서 싸웠다. 이때 참호 속에서 전투에 임했던 "남부군"은 5,000여 명의 사상자를 낸 데 비해, "북부군"의 사상자는 12,000명에 달했다 (프레데릭스버그 전투, 1862.12.13).
"프레데릭스버그 전투"에서 패배한 뒤, "북부군 사령관"은 다시 "조지프 후커"로 교체되었다. "후커 장군"이 이끄는 "북부군"은 그해 겨울 내내 "라파하노크 강" 주변에서 "남부군"과 대치 상태로 있었다. 1863.04월, "후커 장군"이 먼저 강을 건너, "챈설러스빌" 근처로 군대를 이동했다. 이때 "후커 부대"는 병력면에서 2배나 우세한 상황이었음에도, "남부군"의 동태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남부군의 리 장군"의 기습을 받아, "라파하노크 강" 북쪽으로 물러나야만 했다. 이 전투에서 "남부군"은 "철벽 장군 잭슨"이 "남부군 경계병"의 오인 사격으로 부상을 입고 사망하는 큰 손실을 입었다 (챈설러스빌 전투, 1863.05.01~05).
※ 남북 전쟁에 철갑선이 등장
"남북 전쟁" 당시, 바다에서는 역사상 최초로 "철갑선"끼리 맞붙어 싸운 전투가 있었다. 1862.03.09일, "버지니아 주 제임스" 강어귀에 있는 "햄프턴로즈 항구"에서 벌어진 해전을 말한다. 이때 "남부군"은 전통적인 "증기 프리깃 함(艦)"인 "북부군의 메리맥 호"를 "노퍽 해군 기지"로 인양한 뒤, 상부 갑판을 철제로 덮어 새로 "버지니아 호"라 이름 붙여, "북부군의 목제 함선들"을 차례로 격침시켰다.
그날 밤, "존 워든 대위"가 이끄는 "모니터 호(북부군의 철갑선)"이 도착했다. "뗏목 위의 양키 치즈 상자"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 배는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전함이다. 그날, 양측의 지원병들이 근처의 다른 전함과 해안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정말 극적인 해전이 벌어졌다. 두 철갑선이 맞붙은 전투에서는 대체로 "모니터 호(북부군)"가 승리를 거둔 것으로 판정되었다. 이 해전은 전세에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양 진영의 사기에는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④ 최대의 격전, 1862.07월 "게티즈버그 전투"
"게티즈버그 전투"는 "남북 전쟁의 동부 전선"에서 "북부군"이 승기를 잡는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게티즈버그 전투. 1862.07.01~03일). 1862.11.19일, "링컨 대통령"은 격전지인 "게티즈버그"에 세워진 "국립묘지 개관식"에 참석하여,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연설을 남기기도 했다.
"남부군의 리 장군"은 유럽 국가들로부터 "남부 연합"을 승인받기 위해, "북부"로 진격하기로 결정했다. 그 사이 "북부 포토맥 군"의 사령관은 다시 "조지 미드 장군"으로 바뀌었다. "리 장군"은 군대를 "펜실베이니아 주 남부 게티즈버그"로 진격시켰다. 양측 사령관은 모두 "게티즈버그를 차지해야 한다"는 결의를 갖고, 필사적으로 싸웠다.
전투가 시작된 1862.07.01일부터 치열한 격전이 벌어져 엄청난 사상자가 생겼다. 이틀째 되는 날에도 중요 고지를 차지하기 위한 공격이 계속되었고, 3일째 되는 날엔 "피켓"이 이끄는 "남부군 선봉대"가 "북부군"이 지키는 "세미테리 능선"을 맹렬히 공격했지만, 큰 타격을 입고 수백 명의 포로를 남겨둔 채, 후퇴하고 말았다. 07.04일 폭우가 쏟아지자, "리 장군"은 그 틈을 이용해, "버지니아"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북부군의 미드 장군"은 무리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리 장군"을 추격하지 않았다. 이 전투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은 "리 장군"은 더 이상 "북부 침공"을 시도하지 않았다. 한편 끝까지 추격하지 않은 "미드 장군"의 결정은 훗날 많은 비판을 받게 되었다.
⑤ 마침내 항복한 "남부 연합"
1865.04월 : 최후의 결전 "파이브포크스 전투"에서 "남부군"의 주력군 "리 장군의 노스버지니아 군" 패배
"서부 전선"에서는 "율리시즈 그랜트 장군"이 1863.07월, "미시시피 강"의 도하점(도하 작전 때 군대가 강을 건너는 지점)인 "빅스버그"를 함락시킨 뒤, "남부 방어"의 중요한 거점을 차지하였다. 이 전투 결과, "북부군"에게는 "미시시피 강"으로 나가는 길이 열렸고, "남부 연합"은 둘로 나뉘었다. 그래서 "빅스버그 전투" 역시 "남북전쟁의 전환점"이 되는 중요 전투가 되었다(빅스버그 회전. 1862~1863.07.04).
"빅스버그 전투"에서 승리한 "그랜트 장군"은 "체터누가(남부의 전략 요충지)"에 포위당해 있는 "북부군의 윌리엄 로즈크랜스 장군"의 군대를 구하기 위해, "테네시 강" 유역으로 진격하였다. "후커 장군ㆍ셔먼 장군"이 보낸 증원 부대까지 합세한 "북부군"은 "룩아웃 산ㆍ미셔너리 산맥"에서 치러진 전투에서 "남부군"을 물리치고, "테네시 강"을 장악하였다(체터누가 전투. 11.23~25).
"서부 전선"에서 계속 승리를 거둔 "그랜트 장군"은 그 공적을 인정받아, 1864.03월에 "북부군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 뒤 "북부군"은 "서부 전선"에서는 "셔먼 장군"이 이끄는 부대가 09.03일에 "애틀랜타"를 점령하고, 11월에는 "대서양" 쪽으로 진격하여, 12.20일에 해안 도시 "서배너"를 함락시켰다. 또 "그랜트 장군"이 직접 참여한 "동부 전선"에서는 "남부군"의 주력 부대인 "리 장군의 노스버지니아 군단"을 섬멸시키기 위한 총공격을 펼쳤다.
1864.05월, "북부군"은 "월더니스 전투"부터 계속 "남부군"을 무찌르면서 진격하여, "피터즈버그"를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포위한 지 9개월 만인 1865.04월, "그랜트 장군"은 "파이브포크스 전투(최후의 결전)"에서 "남부군"의 주력군인 "노스버지니아 군"을 크게 무찌르고 승리하였다. 그 결과, "남부군의 리 장군"은 더 이상은 버틸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04.09일에 "애퍼매턱스 코트하우스"에서 항복을 했다.
⑥ 엄청난 피해를 남긴 "남북 전쟁"
4년에 걸친 "남북 전쟁"에서 "북부"가 승리함으로써, "미국의 연방"은 그대로 유지되었고, "노예 제도"가 폐지되어, 해방된 노예에게 "시민권"이 주어졌다. 그러나 "남북 전쟁"은 당초 예상보다 길게 끌면서, 양측 모두에 엄청난 피해를 안기고 말았다. "북부군"은 약 36만 명이 전사했고, "남부군"은 약 25만 명이 전사하는 인명 피해를 낳았다. 특히 패배한 "남부"는 경제적으로도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전쟁 중이던 1863.01.01일에 "노예 해방 선언"이 발표된 후, 이미 많은 노예들이 "북부"로 도망을 가 큰 타격을 입었다. 여기에 4년여에 걸친 전쟁으로 인해, 땅이 황폐화되어, "대농장 중심"의 남부 지역으로서는 타격을 입지 않을 수 없었다.
1865.04.14일, "링컨 대통령"이 "노예 해방 반대론자"인 "부드"에 의해 암살당하였다. 이로써 그가 주장했던 "관대한 남부 재건 안"이 무용지물이 되었고, "남부"에서는 10년 동안 "군정"이 실시되었다. 그 뒤, "남부"는 사회ㆍ경제적으로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되었다. "북부 자본ㆍ기술"의 유입으로 "남부"는 사회ㆍ경제적으로 엄청난 발전을 하게 되었다. "대규모 농장"은 "소규모"로 바뀌게 되었고, "북부 사람들"의 투자로 자본ㆍ기술이 들어오면서, 섬유ㆍ제철 등의 공업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공업 생산량"이 배로 증가하여, "미국 경제"는 급속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1877년까지 차례로 "연방"에 복귀하게 된 "남부의 백인들"은 무조건 "민주당"을 지지하는 "솔리드 사우스(solid south)"를 결성하여, 정치적으로 "공화당파"와 여전히 대립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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