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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건ㆍ전쟁ㆍ혁명ㆍ학살

혁명- 1789.07.14~27 : 프랑스 대혁명 ④ 로베스피에르ㆍ공포정치

by 당대 제일 2023.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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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스피에르 (Robespierreㆍ1758~1794ㆍ향년 36세)"은 "프랑스 혁명"을 주도한 혁명가프랑스 부르봉 왕조/ 대혁명기 정치인ㆍ철학자ㆍ법률가ㆍ1793년 "공안위원회(公安)"를 장악하고, 자코뱅 당(소시민층소생산자 층 기반"공포 정치"를 행하다가, 도리어 1794년 "테르미도르의 쿠데타"로 반대파인 "조제프 푸셰"에게 축출되어결국 자신도 1794년 "단두대"의 희생양이 된다. 사실상 "독재자"로서 "프랑스"를 지배했고"숙청"을 통한 공포 정치로 많은 반대파를 단두대에 보냈기 때문에"루소의 피로 물든 손"이라고 칭했다.

 

1. 로베스피에르 (Robespierreㆍ1758~1794ㆍ향년 36세)

"루이 16세(1754~1793ㆍ향년 39세ㆍ부르봉 왕가 출신(1774~1792년까지 통치)ㆍ마리 앙투아네트ㆍ왕족ㆍ귀족층ㆍ폴리냑 공작부인ㆍ뒤바리 백작부인" 등을 국민의 적으로 규정, 이들을 모두 사형에 처해야 된다고 역설하였다. 1793.01.21일, "루이 16세"를 단두대에서 보내 사형에 처했고, "루이 16세"의 처형을 지켜보았다.

18C 계몽 철학가 "루소ㆍ몽테스키외"의 이상을 목표로 한 "자코뱅파"의 유능한 지도자로, "좌익 부르주아 계층"의 신념을 가졌다. 그의 굴하지 않는 고집ㆍ관점은 "The Incorruptible (부패할 수 없는 자)" 이라는 별명을 얻게 하였다. 특히, "블라디미르 레닌ㆍ이오시프 스탈린ㆍ호치민ㆍ피델 카스트로" 등은 그를 이상적인 혁명가의 모범으로 규정하였다. 헌신적이고 청렴한 정치인, 민중의 처지에서 진심으로 개혁하려 한 개혁자ㆍ혁명가ㆍ공산주의자였다는 시각과 독재자ㆍ냉혹한 정치가라는 시각이 사회 변화와 발전을 추구하는 세력과 수구ㆍ중도 세력 간에 양립한다. 그는 사치스럽지 않고 탐욕스럽지 않았으며, 금주ㆍ금연 등 절제적인 삶은 이상주의자, 혁명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자코뱅당ㆍ공안위원회"에서 독재권을 휘둘렀다고 비난했으나 그는 그런 권력을 지닌 적이 없었다. 반혁명세력ㆍ부자들은 그의 "평등주의 사상"을 비난했으나, 투쟁적인 민중들은 오히려 과감하지 못하다고 비판했다. 그가 죽은 뒤 그의 명성은 무자비하게 공격받았으며, 그가 쓴 논문은 대부분 소각되었다. 역사는 그를 피에 굶주린 야수가 아니면, 소심한 부르주아로 묘사했다.

그러나 19C에 들어와 대중운동이 고양됨에 따라, "프랑스"와 여러 나라에서 이 "박해받은 애국자"에게 존경을 표시하기 시작했으며 그의 유명한 연설들도 다시 출판되었다. 사회적 이상은 극단적인 부의 불평등을 줄이고, "소소유자(小所有者) 계급"의 수를 늘리며, 모든 사람에게 직장과 교육을 보장해주는 것이었다. 그는 계몽주의의 소산이었으며, 애국자였고, 책임감과 희생정신을 지닌 인물로서, 오늘날까지 상당한 영향력을 남기고 있다.

"파리의 르 그랑 학원"에서 수학한 후, 1781년 아라스(Arras)에서 변호사를 개업하여 변호사로 활동했고,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등 왕실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다. 1789년 시민층의 지지를 받아 "3부회 의원"에 피선되고, "국민 의회"에서는 제한 선거의 철폐, 봉건제 폐지, 영주(領主)와 귀족이 사사로이 탈취한 토지반환 운동 등을 주관하였다.

"자코뱅 당"의 창당에 참여했고, 후에 당내 급진파의 지도자로 활약했다. 프랑스 대혁명 후, 1793년 "공안위원회(公安委員會)"를 장악했으나, 1794년 "테르미도르 반동" 때 "조제프 푸셰"에게 축출되어, 결국 자신도 1794년 "단두대"의 희생양이 된다. 1794.07.28일, 로베스피에르는 "콩코르드 광장"에서 자신이 많은 사람을 처형했던 도구인 "단두대"에 올라가, "생 쥐스트ㆍ조르주 쿠통", 친동생인 "오귀스탱 로베스피에르" 등 22인과 함께 살해됐다.

로베스피에르가 죽은 뒤, 그의 명성은 무자비하게 공격받았으며, 그가 쓴 논문과 저서들은 전량 압수되어 소각되었다. 일부 국외로 망명한 로베스피에르 추종자들에 의해 몇 편의 단편 저술과 단편 논설이 전한다. 이후 프랑스 내에서도 그는 "왕당파"와 "나폴레옹 파"에 의해서는 피에 굶주린 야수가 아니면, 편협한 독재자로 묘사되었고, 반대로 "급진주의자"들 내에서는 소심한 부르주아 내지는 현실감각이 결여된 고집불통의 고지식한 원칙주의자로 묘사되었다.

로베스피에르의 명성은 부침을 반복해오다가, 20세기 이후에 복권되어, 조명하는 여론이 요원의 불길처럼 대두하기 시작했다. 1920년대에 역사가 "알버트 마르티에즈 (Albert Mathiez)"에 의해 칭송받으며, 최고조를 이루었다.

2. 체포유언ㆍ단두대에서 처형

체포되는 과정에서 권총에 턱뼈가 날아가 말을 제대로 못하게 되는 바람에, 유언을 남기지 못했다. 교도관들이 보기 흉한 그의 턱뼈를 붕대로 대충 고정시켜놓은 채 그는 다음날 단두대 앞에 서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은 당대의 연설가가 죽기 전에 무슨 말을 할까 기대했지만, 거칠게 떼어진 붕대 때문에 턱뼈가 달랑달랑거리는 와중에,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처절한 비명뿐이었다. 어째서 그런 꼴로 잡혀왔는가에 대해서는 크게 2가지 설이 있다.

1번째는 고발 이후 잡히기 직전, 그는 자살하기 위해 턱에 총구를 대고 총을 발사하는데, 불행히도 죽지 않고 턱뼈만 날아갔다는 설이다. 권총으로 자살할 때, 턱 밑을 대고 쏘면, 무의식적으로 고개가 뒤로 젖혀지기 때문에, 대부분 저렇게 턱이나 코까지 날아가고 죽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2번째는 그를 체포하기 위해 모인 프랑스 국가 헌병대 중 하나인 "샤를앙드레 메르다"라는 헌병 사병이 지근거리에서 그의 입에다 발포했다는 것이다. "메르다"는 이 사건 이후 출세해 "나폴레옹 1" 치하에서 육군 기병대령까지 올랐다가, "보로디노 전투"에 연대장으로 참전해 전사육군 준장으로 사후 추서됐다.

이미 자기가 죽인 "루이 16마리 앙투아네트" 부부보다 훨씬 비참하게 죽는 신세가 되었다. 굳이 사형을 집행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미 턱뼈가 날아갔기 때문에, 음식을 먹을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리고 말았고, 이렇게 된 상태라면 다른 사람이 유동식을 계속 목구멍으로 넣어주지 않으면 굶어죽게 된다.

3. 사상신념

① 무신론 반대 및 이신론적 믿음

"로마 가톨릭"이었다가 "이신론"으로 견해를 수정한 그는 "무신론"에는 반대하였다. "자크 르네 에베르"는 성직자 계층 역시 봉건제도의 주요 지지자임을 거듭 반복하였다. 로베스피에르는 미신적인 신앙은 비판하였지만, 신의 존재는 확신하였다. 신의 존재를 믿던 그는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자크 르네 에베르"에게 반감을 갖고, 서로 감정적으로 갈등하였다.

"루소"의 영향을 받아가면서 "루소 식의 이신론자(理神論者)"가 되었지만, 그는 신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反) 그리스도교 운동"과 이성숭배라는 "가면무도회"를 인정하지 않았다. 1793.05월 로베스피에르는 국민공회에 제출한 한 보고서에서 신의 존재와 영혼의 불멸성을 긍정하였다. 로베스피에르는 점차 혁명 세력과 국민들을 하나의 시민종교, 그리고 절대적 존재에 대한 신앙심으로 단결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1793.06.08일 국민공회 의장으로서 그가 "튈르리 공원"에서 최고 존재를 기리는 제전을 벌였는데, 이는 그의 적들에게 그를 공격할 또 다른 무기를 제공한 셈이 된다. 가톨릭, 개신교 신자들에게는 새로운 사이비 종교를 창설하려 한다고 비난을 받았고, 무신론자들에게는 종교 세력과 야합하려 한다는 비난이 가해졌다.

② 기회의 평등권 보장

왕족귀족사제 계층이 부권력을 독점하는 현상을 반대하였다. 또한 인간은 유한한 존재라 확신했던 로베스피에르는 한 사람의 절대자의 통치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었다. 따라서 모든 이들에게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 그리고 두 번의 실수까지는 고의성이 없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봤다. 왕족귀족 계층을 대신해 부르주아 층이 사회의 기득권자가 되는 것, 기득권을 손에 쥔 부르주아와 중소 지식계층이 왕족, 성직자 이상으로 신분제도를 교묘하게 만들리라는 것, 군사 쿠데타의 가능성 등을 염려하였다. 신분 차별 철폐여성의 참정권 획득흑인 노예 석방과 시민권 부여 또는 아프리카로의 복귀 등은 언젠가는 발생할 필연적인 일이라고 내다보았다.

그는 기득권의 고착, 극단적인 부의 불평등을 줄이고, 기회와 실력에 따른 공정한 경쟁 시스템, 평균 수준의 학력과 지적 능력을 가진 시민들의 수를 늘리며, 모든 사람에게 직장과 교육을 보장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지역, 출신 학교, 직업으로 사람의 귀천을 나누는 사람을 심하게 경멸하였다.

4. 생 애

 루이 16세왕실 사형

1792.12월 "국왕 루이 16세"의 처형 여부를 결정하는 재판에서 로베스피에르는 11회의 연설에서 모두 사형을 요구했다. "사형제도 폐지론자가 국왕에게만 냉혹하다"는 비판과 야유가 쏟아졌지만, 그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1792.12.03일 행한 연설에서는 망설이던 자들까지 끌어들였다. 비인간적인 절대왕정과 신분체제로 억압당한 사례를 끊임없이 반복 상기시키고, 그는 부르주아와 중소 지식인으로 구성된 온건파들은 왕과 귀족을 몰아내고 자신들이 기득권을 차지하려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부르주아 층과 중소 지식인들에게 경고하는 차원에서라도 국왕과 그의 사치스러운 아내는 죽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새로운 잡지 "국민에게 보내는 편지(Les Lettres à ses commettants)"를 창간, 창간 초기의 잡지들을 통해 프랑스 국내 각지에 자신의 견해를 알렸다. 그는 루이 16세ㆍ마리 앙투아네트왕족과 귀족층폴리냑 백작 부인뒤바리 부인 등을 국민의 적으로 규정, 이들을 모두 사형에 처해야 된다고 역설하였다. 1793.01.21일, 루이 16세를 단두대에서 보내 사형에 처했고, 그는 루이 16세의 처형을 지켜보았다.

 공포정치

1793.01.21일 "집정관"이 되었다. 그는 건강한 정신 하에 건강한 육체가 깃든다며 범죄와 약탈, 도적질에 대해서 엄격히 다스렸다. 그는 무기를 소지하고 약탈, 강간을 한 자와 뇌물을 수수한 부패 관료에 대해서는 무조건 지역의 공개장소에서 교수형에 처하는 것으로 처리하였다. 06.02일, "상 퀼로트"의 지지를 얻어, "국민 공회"에서 "지롱드파"를 추방하고, 최고 권력을 장악하면서 공안위원회, 보안위원회, 혁명재판소 등의 기관을 이용해서, "공포 정치(Terreur: 테뢰르는 테러의 어원)을 단행하면서, 반대파를 단두대로 보내 숙청하였다. 그리하여 "지롱드 당"을 물리치고, "자코뱅 당"의 독재정치를 펼쳤으며, 혁명에 반대하는 외국 세력도 물리쳤다. 그러나 "루이 앙투안 드 생쥐스트"와 함께 공포정치를 폈는데, 루이 16세를 처형한 지 1년 만에 1만 7000명을 단두대에서 처형하고, 지방 곳곳에서 "반혁명파"를 처형하였다.

이외에도 프랑스 최고의 과학자로서 손꼽히던 "앙투안 라부아지에", 루이 16세를 변호했던 "크레티앵 기욤 드 라무아뇽 드 말제르브", 유명한 천문학자이자 혁명 초기 국민의회 의장을 지냈던 "장 실뱅 바이이", 낭만주의 시의 선구자이던 "앙드레 드 셰니에", 독일 출신의 프랑스 장군 "니콜라 뤼크네르" 등을 단두대에서 처형하였으며, 동지였던 "조르주 당통"도 부정부패 혐의로 처형하였다. 이들과 가깝게 지낸 인사들도 불이익을 받았는데, "앙투안 라부아지에"의 조수였던 "엘테일 이레네 드 듀퐁" 등은 미국으로 망명한다. 하지만, "당통바이이"를 처형하자, 혁명파 내부에서도 그를 경계하기 시작했고, 새로운 쿠데타를 준비해야 한다는 주장이 공공연히 제기되었다. 

이런 공포정치를 향한 불만이 고조하여, 1794년 결국 "테르미도르의 반란"이 일어났다. 하지만 로베스피에르가 왕당파 및 왕당파 비호자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처형에 반대하는 점에 대해서도 "조제프 캉봉자크 르네 에베르" 등 일부는 반발하였다. 그의 공포정치에 대한 반대와 동시에 어느 정도 소극적인 태도, 반대파에 대한 무조건 처벌 반대 등에 대해서도 불만을 품는 세력이 등장하였다.

갈등물가 상승

국왕과 귀족들을 처형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끄는 "자코뱅 당 산악파"와 "지롱드 당" 사이의 분쟁은 해소되지 않고, 오히려 "지롱드 당"과 "왕당파 중 온건파벌"이 연대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그는 화근이 될 "지롱드 당"을 전부 처형해야 한다는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식량 부족치안 부재약탈 등이 계속되자, 그는 절도범살인자에 대해서 무조건 처형과 현장 사살로 대응했다. 식량부족과 기근현상은 계속되었고, 프로이센오스트리아는 프랑스에 대한 수출중지 등의 봉쇄령을 내렸다. 식량난과 물가상승으로 국민의 불만과 피로는 누적, 혁명의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샤를 뒤무리에 장군"을 비롯한 고위 장교들이 망명하거나 오스트리아에 투항하자, 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파리의 상퀼로트와 빈민들, 급진적 자유주의자 및 공화파, 자코뱅당 산악파는 일종의 정치적 연대를 구성, "인민전선"을 형성했다.  1793.05.26일 로베스피에르는 "떨쳐 일어나 봉기하자"고 촉구했으며, 06.01일 "지롱드 당" 지도자들을 반혁명 혐의로 기소하고, "뒤무리에 일파"를 반역죄로 기소하는 국민공회 내 급진파의 포고령 발의를 지지했다. 06.02일 "지롱드당" 및 "뒤무리에" 기소 포고령은 29표의 반대를 물리치고 압도적인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지롱드 당"이 몰락하자, "자코뱅당의 산악파"는 국가의 식량난과 경제난을 해결해야 하는 과제를 떠맡았다. 혁명을 전후해서 공화정을 인정할 수 없었던 일부 지역의 소귀족 및 공작, 백작령 등에서는 분리독립을 시도했고, 연방주의 운동이 나타났다. 또한 북서부 "방데"에서 발생한 반(反)혁명 반란으로 위협받고 있었고, 왕당파는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등 외국 세력의 개입을 계속 촉구하였다.  그 와중에 온건 혁명파의 이탈 및 소극적인 태도는 계속되었다. 

밖으로는 프랑스 대혁명의 전파를 원치 않는 오스트리아ㆍ프로이센 등이 주도하는 "반프랑스 연합군"과 대치하고 있었으므로, 로베스피에르는 이를 모두 해결해야 했다. 혁명 정부의 유지를 위해서는 모든 역량을 동원해야 했다. 필요한 것은 바로 "단일한 하나의 의지(une volonté une)"라고 일기에 썼는데, 그는 하나의 "집중화된 중앙권력"이 필요하다고 인식했다. 혁명정부의 필수 권력기관, 수사기관들이 창설되고 로베스피에르가 직접 나서서 권력, 수사, 정보기관들을 지휘하였다. 하지만 소수파로 전락한 "지롱드 당"은 "왕당파"와 손잡고 "자코뱅 당"을 타도하려 했다.

테르미도르의 반란

사람들은 다들 언제 "로베스피에르"가 자신을 죽일지 걱정했다"프랑스 혁명력"의 11번째 달인 "테르미도르(양력 1794.07월)" 초에 시작되었다. 그는 다시 여론의 지지를 얻을 목적으로 07.23일 공안위원회와 07.26일 국민공회에 출석하여 자신은 사심이 없이 일했음을 밝히고, 국민의 공정한 판단을 호소했다. 07.26일, 가 공회에 나타나 "반혁명파"를 숙청하겠다고 말하자, 의원들은 "반혁명파가 누구냐? 이름을 밝혀라!"고 저항했다. 이것은 그의 마지막 연설이 되었다.

07.26일의 마지막 연설에서 그는 처음에는 박수갈채를 받았으나, 곧이어 동요가 일면서 끝내는 의회의 재석의원 과반수가 그에게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자코뱅당 산악파"는 이미 "관용파"와 "강경파"로 나뉘었고, 그가 무차별 처형을 강행한다고 본 "관용파"와 반대로 우유부단하다고 본 "급진파"가 모두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국민회의"에서의 연설을 마치고 26일 저녁의 "자코뱅 클럽"의 모임에서 로베스피에르는 뜨거운 환영을 받았지만, 07.27일 "반대파"들은 "국민의회 회의장"을 사전 봉쇄, 로베스피에르가 출입하지 못하게 함으로서 로베스피에르의 "입법의회 연설"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07.27일 "부르주아 층"과 "온건파 왕당파" 및 "온건파 혁명파"가 주도하는 "반 로베스피에르 파"는 행동을 개시했다. 그러나 로베스피에르를 구해줄 사람은 없었다. 그의 공포 정치는 민심을 그에게서 떠나보냈던 것이다. 국민의회는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동생 "오귀스탱" 및 동료 3명을 반혁명 혐의로 재판정에 고발했다. 로베스피에르는 "뤽상부르 감옥"으로 호송되었지만, 그곳의 간수장은 로베스피에르의 투옥을 주저하였다.

 실각최후

07.27일, 파리 시청으로 갔다. 그곳에는 지지자들과 "상퀼로트 파" 일부가 집결해 있었고, 그는 마음만 먹었다면, 시청 주변 혹은 외곽에서 반대파에 대해 투쟁을 계속 지속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파리 코뮌 정부"가 시내 몇몇 지구에 무장부대를 소집해 놓고, 시청에서 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군사를 일으키자는 권고에 대해 그는 "봉기 주도"를 거부했고, 몇 시간 후 그를 위해 죽음을 맹세했던 그의 친위부대도 결국은 해산하기 시작했다.

"국민공회"는 07.27일부로 의장직을 박탈하고, 로베스피에르를 "범법자"로 선포하였다. 지지자들을 해산시킨 후, 그는 시청에서 스스로 자신의 턱에 권총을 쏴 자살을 시도했지만, 중상을 입어 잔류한 지지자들을 당혹하게 했다. 07.27일 저녁 늦게 국민공회의 병사들은 시청을 공격해, 손쉽게 그와 그 추종자들을 체포하였다. 그때까지 살아 있던 "강경파"의 또 다른 지도자이자 의 열렬한 추종자인 "생 쥐스트" 역시 순순히 체포된다.

1794.07.28일, 그는 "콩코르드 광장"에서 자신이 많은 사람을 처형했던 도구인 "단두대"에 올라가 살해됐다. "생 쥐스트조르주 쿠통오귀스탱 로베스피에르 (친동생)" 등 22인과 함께 살해됐다. 108명이 그의 이념을 지지한 죄로 사형 당했고, 수백 명이 투옥되었다. 그의 서거로 혁명 주도권은 "부르주아"가 장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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