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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건ㆍ전쟁ㆍ혁명ㆍ학살

혁명- 1917.02~10월 : 러시아 혁명ㆍ레닌ㆍ케렌스키ㆍ트로츠키

by 당대 제일 2023.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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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은 1917.02월 (러시아 구력)과 10월 (러시아 구력)에 러시아에서 일어나 세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 정권"이 수립된 혁명이다. "10월 혁명" 이후의 "러시아 내전"은 기본적으로 황제를 지지하는 "백군"과 혁명을 지지하는 "적군" 사이의 내전을 말한다

 

1. 러시아 제국의 전제군주정치

러시아 제국은 철저한 전제 군주전제 주도하에 근대화 개혁을 점진적으로 나아가, 그 결과 19세기 후반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전제정치가 그대로 유지되었기 때문에, 사회구조를 바꾸는 개혁안은 철저히 배제되었고, 지식인들과 학생들은 자유주의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사회민주당을 결성하여 사회 개혁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당시 러시아 제국은 격동하는 시대에 황제 니콜라이 2세는 근본적인 개혁의 소리에 대해서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제국이 변화 되는 것을 두려워했었기 때문이다.

차르 (Czarㆍtsar)

러시아나 불가리아 등의 동유럽 슬라브 민족 국가에서 "군주"에 대한 호칭이다. 어원은 라틴어의 "카이제르"로, 로마 황제 "카이사르"에서 왔으며, 고대 러시아에서는 "비잔티움 제국 황제"를 가리켰다. 중세의 슬라브계 여러 문헌에서는 일반적으로 국왕을 의미하고, 공식적으로는 917년 불가리아에서, 1346년 세르비아에서 군주의 칭호가 되었다. 러시아에서는 "이반 3세"가 다른 칭호와 함께 병용하는 형식으로 쓰기 시작하였다.

정식으로는 1547년 "이반 4세"가 대관(戴冠)할 때, 이 칭호를 취한 때부터 1721년 "표트르 1세" 대제가 원로원으로부터 "모든 러시아의 황제(임페라토르)"의 칭호를 받은 이후에는 이것이 러시아 군주의 정식 명칭이 되었으나, "차르"는 이와 병용해서 혁명 때까지 러시아 황제의 관습적인 칭호로서 러시아 내외에서 사용되었다. 1453년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하여, 1472년 "이반 3세"가 그 최후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의 조카 "소피아"와 결혼한 후, 러시아 정교(正敎)의 보호자로서 그 후계자가 되자, 그 풍습과 더불어 정치 이념도 도입하여, 대공(大公)은 차르, 대주교는 총주교(總主敎)라 부르게 되었다. 이 칭호의 채용은 모스크바 대공의 지위 강화를 뜻하였다.

차르 "이반 4세"와 "오다 노부나가"

"이반 4세"가 살았던 시기는 일본 "오다 노부나가"와 거의 겹친다. "이반" 1530~1584년에 죽었고, "노부나가"1534~1582년에 죽었다. 둘 다, 러시아도 일본도 아직 나라가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 있던 시기에 등장하여, 뛰어난 정치적 수완으로 군웅할거의 어지러운 국면을 타개하고, 나라의 통일을 이루었다. 이 무렵 러시아는 스웨덴을 비롯한 여러 나라로부터 위협을 받는 소국에 불과했고, "이반" 자신은 모스크바 대공에서부터 출발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노부나가"가 애초에 오와리의 번주에 불과했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한편으로는 대 귀족들과 또 한편으로는 다른 번주들과 싸우면서, 최고의 자리로 올라선 이 둘은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목표로 삼았다. 한 사람은 교회와 수도원을 탄압했고, 다른 한 사람은 자신에게 저항하던 천태종의 본산인 엔라쿠사를 불태워서 종교 세력을 개편했다. 성미가 급하고, 시기와 의심이 많았으며, 교양은 있었지만 행동거지는 상스러웠고, 인정사정없이 적을 멸했던 것, 상대에게 헤아릴 길 없는 공포를 안겨 줬다는 점도 둘 사이의 공통점이다.

 러시아 혁명과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  : 조지 오웰 (1903~195047필명George Orwell본명 : 에릭 아서 블레어(Eric Arthur Blair)영국 작가언론인)

조지 오웰이 쓴 "동물 농장"은 이 러시아 혁명과 스탈린 시대를 비유해 썼는데, 민중들의 밀가루 반입량이 절반으로 줄어듦에 따라, 빵을 살 수 없었던 것을 존스(니콜라이 2세)가 동물들에게 음식을 주지 않은 것에 비유한 것이고, 니콜라이 2세가 쫓겨난 것을 존스가 장원 농장에서 쫓겨난 것에 비유한 것이다. 러시아 혁명이 성공한 이후 반(反)공산주의 국가들이 연합하여, 러시아를 침공한 러시아 내전은 인간들이 동물 농장의 몇몇 동물을 포섭하여 쳐들어 온 것으로 비유되었다. 일반적으로 나폴레옹은 "이오시프 스탈린", 스노볼은 "트로츠키"를 비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러시아의 역사

고대중세 :  618~1048 (하자르 카간국)  ~ 9C (슬라브족ㆍ루스족)  7C~1240 (볼가 불가르)  8~9C (루스 카간국) 882~1283 (키예프 대공국) 중세 : 1168~1389 (블라디미르 대공국) → 1136~1478 (노브고로드 공화국) → 13~15C  (타타르의 멍에) → 1283~1547 (모스크바 대공국)

근대현대 : 1547~1721 (루스 차르국)  1721~1917 (러시아 제국)  1917 (러시아 공화국)  1917~1991 (소비에트 러시아)  1991~ 현재 (러시아 연방)

2. 1904.02월 : 러ㆍ일 전쟁

1904.02월, 마침내 일본제국이 러시아제국이 점유하고 있던 청나라의 뤼순 항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러일전쟁이 발발한다. 전쟁은 치열한 공방전 끝에 예상을 깨고 일본의 승리였다. 하지만 이전쟁은 애초에 러시아 여론은 물론이고, 일본여론미국영국프랑스등 서방여론마저 러시아의 승리를 점쳤기에 이 전쟁은 러시아에게 큰 타격이었다. 이로써 국민들은 정부에 대한 불만을 폭발시킨다.

3. 1905.01.22: 피의 일요일

1905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러시아 정교회 사제"의 주도로 개혁을 요구하는 민중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민중들은 "차르"의 실체를 보지 못하고, 자신들의 아버지로 믿었다. 1월 초, "프티로프" 공장노동자들이 동료 4명의 해고문제로 파업을 일으키자, 이것은 즉시 전시(全市)에 파급되었다. 전년 말 경찰의 후원하에 "페테르부르크 러시아 공장노동자의 모임"이라는 어용조합(御用組合)을 조직한 "신부 가폰"은 노동자들의 갖가지 경제적정치적 요구를 적은 청원서를 작성하여, 동궁을 향해 청원행진을 할 것을 제안했다.

1905.01.22일, 이른 아침 시내 각 지구의 노동자들은 성상(聖像)황제 차르의 초상을 들고, 사제 가폰 신부를 필두로 수많은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 궁전"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노동조합의 설립근로조건의 향상들을 아버지 "차르"에게 요구하였으나, "차르"는 요구에 무력진압으로 답했다. 황제는 마침 부재중이었으나, 경찰군대가 이 평화적 행진에 대해 발포하기 시작, 광장의 눈(雪)을 피로 물들였다.

비무장한 시위대를 상대로 "차르"의 군대가 발포하였고, 달아나는 군중들을 기마대가 추격하여 학살, 이날 하루에만 사망자 500~600명, 3,0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차르"에 대한 환상이 깨어지고 러시아 제국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였고, 이 사건은 "차르"에 대한 소박한 노동자의 신뢰를 단숨에 무너뜨리고, "러시아 혁명"의 발단이 되었다. 자본가의 착취와 노동자의 인권이 존중되지 않는 열악한 근무환경에 맞선 온갖 파업 투쟁이 끊이지 않았고, 1905.05월 흑해의 포템킨 호의 선원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루마니아 정부에 항복하기도 했다.

1906년 한 해 동안 100만 명이 파업을 일으켰고, 농민 반란이 2,600건이나 일어났다. 이에 러시아 제국정부는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두마"라 불리는 의회를 설치하는 등 개혁을 추진하였으나, 농민들과 노동자들의 생활은 여전히 나아지지 않았다.

4. 러시아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 국민들의 불만은 진정되지 않다가, 1907년 즈음 가서야 겨우 진정되어 갔었다. 한때 러시아는 연평균 7%의 산업 성장화를 보이면서 위세를 떨치기도 했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무렵, "차르"에 대한 불만세력이 여전하다고 여긴 "니콜라이 2세 (1868~191850러시아 제국 마지막 황제폴란드 차르핀란드 대공)"는 이러한 국내의 불만을 진정시키기 위해 많은 병력을 파병하도록 선전했다. 처음에 민중들은 애국심에 불타서 "제1차 세계대전"에 많은 지지를 하였고, 무려 1500만 명이나 전선에 나가 지원했었다.

5. 국민들의 생활고사기 저하

하지만, 지휘관들의 무능함으로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자멸적인 대패를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젊은이들이 군에 지원하여 러시아의 노동력은 급격히 저하되었으며, 민중의 복지에 써야 할 국가예산이 전쟁에 사용되면서, 민중들의 생활은 오늘 먹을 빵과 우유조차 없을 정도로 아주 어려워졌다. 이는 "러시아 제국"이 얼마나 무능한가를 말해주는 증거였으며, 1917년 러시아 민중들에 의해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니콜라이 2세 황제"는 1915년부터 직접 전투지휘에 나서며, 국정은 황후에 맡기고, 황후를 등에 업은 "라스푸틴"을 중심으로 국정도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6. 1917.02월 혁명 (3월 혁명ㆍ03.08~16)시위에서 혁명으로→ 케렌스키 임시정부

 알렉산드르 표도로비치 케렌스키 : 1881~197089제정러시아 정치가프랑스로 망명

"제1차 세계대전"이 장기화됨에 따라, 러시아 민중들의 생활이 더욱 어려워졌다. 당연히 민중들은 민중운동으로 그들의 생존권을 쟁취하고자 하였는데, 1917.02.23일 "페트로그라드 시위"가 그것이었다. 당시 "페트로그라드"의 민중들은 밀가루 반입량이 절반으로 줄어들어 빵을 살 수 없었고, 어린이들에게 먹일 우유도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빵과 우유를 배급받고자 시민들은 새벽부터 밤까지 줄을 서야 했다. 우연히 02.23일은 "국제 여성의 날"이었는데, "페트로그라드" 여성들은 이날 빵과 우유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으며, 그들과 같은 처지의 노동자들이 8만 명이나 시위에 가담하였다.

시위는 노동자들의 "노동쟁의"로 이어졌다. 당시 "일본 대사관" 직원은 시위의 모습을 이렇게 기억했다. "광장에는 수백만 명의 군인들이 군중들을 막고 있고, 기병들이 젊은 장교의 지휘아래 군중들을 거칠게 해산시키고 있다. 곧이어 기병들이 물러나자, 2열 횡대의 근위병들이 일제히 총을 발사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다. 그들은 혁명가를 부르고 "자유를, 시민의 행복을, 조국 러시아의 부흥"을 외치며,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러시아 민중들의 시위는 전쟁에서 돌아오거나, 민중시위 진압을 거부한 일부 사병들이 참여하면서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로 단결하는 "혁명"으로 발전하였다. "푸틸로프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켰고, 니콜라이는 수도방위사령관 하발로프에게 군대를 보내 진압하도록 하였으나, 02. 27일 군대까지 노동자들의 편에 섰다. 결국 03.02일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가 동생 미하일에게 정권을 넘겼으나, 이 혁명으로 폐위되었고, 제정체제가 붕괴되었다. 사회주의자들은 이것을 "부르주아 혁명"으로 판단하고, 정권을 장악하지 않았다. 이렇게 됨으로써, 부르주아와 사회주의자들의 연합 정권인 "알렉산드르 케렌스키 임시정부"가 탄생하였다. 이때 2월은 러시아 달력에 근거한 것이며, 그레고리력으로 하면 "3월 혁명"이 된다.

7. 1917.10월 혁명 (1917.11.07)볼셰비키 혁명 (위원장 : 트로츠키)

레프 다비도비치 트로츠키 : 1879~1940ㆍ61세ㆍ외교관ㆍ사상가ㆍ노동운동가

볼셰비키 혁명가ㆍ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 그의 사상을 따로 "트로츠키주의"라고 한다. 소비에트 연방 전 해군 군사인민위원(1918~1925)ㆍ초대 소비에트 연방의 "외무부 장관"을 맡았으며, "붉은 군대의 창립자"이다.  1917.07월, "볼셰비키"에 가입하기 전까지 양 분파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채 독자적으로 활동했다.  "10월 혁명"에서 "레닌"과 함께 "볼셰비키 당"의 지도자 중 하나로 "소비에트 연방"을 건설했다. "레닌" 사후, "스탈린"과 이론적인 차이가 생겨, 권력 투쟁을 하게 되었다.

사회주의자들로 주축이 된 "알렉산드르 케렌스키의 임시정부"는 민생이 어려워진 원인인 전쟁을 끝내길 바라는 민중들의 열망을 무시한 채, 한계를 드러냄으로써 동시에 경제파탄을 겪자, 민중들의 지지기반을 잃어갔다. 9월로 들어서자, "페트로그라드" 시내에서는 "볼셰비키"가 전국적인 지지를 얻게 되고, "볼셰비키" 세력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1917.11.07일(구력 10.25일) 오전 10시, "볼셰비키 군사혁명위원회(위원장 트로츠키)"가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볼셰비키 1,000명의 적위대를 이끌고 급습함으로써, "케렌스키 임시정부" 타도에 성공하고,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됐음을 선언했다. 이 혁명은 "볼셰비키 혁명"이라고 부르는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혁명"이다. "레닌"이 망명지인 "스위스"에서 급거 귀국한 지, 6개월여 만의 일이었다. 

"트로츠키"는 "연속혁명론"으로" 세계 공산주의 혁명"을 계속 진전시킬 것을 주장했지만, "스탈린"은 "소비에트 연방"을 튼튼한 공산주의 국가로 만든후, "공산혁명"을 확산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트로츠키의 세계 혁명이론"은 서유럽의 공산주의 지식인들과 혁명가들에게 "혁명이론"으로 지지를 받았으나, 결국 "스탈린"과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 "인민의 적"으로 몰려 "소비에트 연방"에서 쫓겨나게 되어, "멕시코"로 망명하였다.  말년에 "멕시코"에서 거주했으나, "스탈린"이 사주한 암살자에 의해 등산용 피켈로 살해당했다.

8. 1917.04월, 레닌의 "4월 테제"

※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1870~192454볼셰비키의 지도자노동운동가

1917년 일어난 2월 혁명 이후, 러시아는 귀족·부르주아들의 "임시 정부"와 노동자· 병사들의 "소비에트"로 대립하고 있었다. 이때 망명지 "스위스"로부터, "독일제국"이 제공한 봉인 열차편으로 귀국한 "레닌"은 혁명의 기운이 타오르던 도시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하였다. 이때 그는 자신을 함성과 박수로 환영하는 민중들에게 병사들이 가져온 장갑차에 올라가서 이렇게 연설하였다.

"친애하는 병사와 노동자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노동자, 병사들의 소비에트를 뜻함)을 러시아 혁명의 승리자, 세계 노동자 군대의 전위로 보고 경의합니다. 제국주의자들의 약탈전쟁은 유럽 전역에 내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세계는 공산주의 혁명의 여명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유럽의 제국주의는 금명간 무너져 버릴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루어낸 러시아 혁명은 이미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세계 공산주의 혁명 만세! " 레닌은 "자본주의의 타도 없이, 종전은 불가능하다."등 10개 항에 걸친 "4월 테제(April Theses)"를 발표했는데, "4월 테제"는 곧 볼셰비키의 방침이 되어, "임시 정부 타도!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임시 정부에 대항했다.

9. "케렌스키 임시정부" 함락

"레닌"의 강력한 요청으로, "볼셰비키 당" 내에서는 봉기의 방침이 결정되고, "트로츠키 (상트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의 의장)"의 지도하에 군사혁명위원회가 설치되어, 구체적인 계획이 진행됐다. 11.06일 새벽 2시, 임시정부 "수상 케렌스키"가 "볼셰비키 신문인쇄소"를 봉쇄하자, "트로츠키"는 전 부대에 무장봉기를 명령했다. 노동자를 주축으로 하는 "적위대"가 전화국, 정부 청사 등 주요 거점을 무혈 점거했다. "제2회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가 열린 오전 11시까지는 임시 정부의 거점인 "동궁(冬宮)"을 제외한 도시 전체가 "볼셰비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11.07일 새벽 2시, 드디어 동궁이 함락됐다는 소식이 소비에트 대회장에 알려지자, 대회장은 환호의 도가니로 변했다. 오전 6시, 해가 떠오르는 가운데 "레닌"이 기초한 "대회 선언"이 낭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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