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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쇄살인ㆍ조폭ㆍ기생ㆍ연예인

주먹ㆍ419 ② 유지광 (1927)ㆍ임화수 (1921)

by 당대 제일 2022. 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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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광 (柳志光ㆍ1927~1988ㆍ61세ㆍ이정재와 10살 차)"은  "이정재"의 권유로 훗날 "화랑 동지회"가 되는 전신 "삼우회"라는 별동대 조직을 만들고, 주먹세계에 입문했고, "행동대장"으로 활약하면서, 1957년 "장충단집회 방해사건" 등 "이승만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자들에게 테러로 악명을 떨쳤다.

 

1. 유지광 (柳志光1927~1988향년 61이정재와 10살 차)

정치 깡패이천 3인방- 이정재(사돈)곽영주유지광

•  출 생 : 경기도 이천   

사 망 : 심근경색 (결혼식 주례 도중장례에는 한국 폭력조직들은 물론 일본의 야쿠자들도 참석하였다.

학 력 : 단국대 정치과전문부(3년 중퇴) 육군보병학교 졸업(중위 전역)

 경 력 : 화랑동지회 이사장ㆍ경기 이천농고 축구진흥실 실장

• 저 서 : 대명 (자서전)ㆍ대의 (大義자서전류보상과 공저)

"419혁명"으로 "1공화국"의 몰락이후, "허정 과도정부" "2공화국"에서 구형 10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고, 1961 "516군사정변" 이후 다시 재 구속되었다조사받던 유지광은 신세를 졌던 "이정재"를 살리기 위해, "모든 테러행위부정선거부정투표모든 습격" "자신이 모두 지시했다"고 자신만 사형을 받게 해달라고 했다.

"임화수"는 살기위해서, 은퇴하여 은둔했던 "이정재"가 지시하지도 않았던 "부정투표부정선거화랑 동지회 정치테러 만행고대생 습격" "이정재가 지시했다"고 거짓증언을 하였다그 치명적인 거짓증언으로 인해, "이정재"가 사형을 받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고, "동대문 패" "조림돌림"을 당하였다

법정에서 "이정재임화수곽영주최인규신정식" 등은 사형을 받았다"임화수"는 거짓증언으로 "이정재"가 먼저 사형 당하게 만들었다"유지광"은 분노했고, 그 후 면회하러 가는 중에 "임화수"에게 달려가 주먹을 날렸다"이정재를 팔았다"고 분노하여, "임화수"를 죽이려 달려들자, "곽영주"가 면회해야한다고 말렸다면회 받은 뒤에는 사형수들은 모두 사형 당했고, "유지광"은 처음엔 사형선고를 받은 뒤, "무기징역" 15년형으로 감형을 받고, 5 6개월간 복역 중, "감형"으로 석방되었다.

"박정희 대통령" "유지광"이 두목인 이정재를 살리기 위해, 자신이 모두 테러를 지시했다고, 자신만 사형 당하게 해 달라며, 자신을 희생하려하는 용기와 희생감이 마음에 들어, "유지광" "사형선고" "무기징역"으로 바꾸어 주었다1978, 고향인 "이천"으로 낙향하였다고향에서 무명의 "이천농고 축구팀"을 전국고교 축구대회에서 4강 진출하는데 공헌하는 등, "이천" 고향 발전에 활동을 벌였다.

류지광

2.  임화수 (林和秀ㆍ권중각(權重珏)ㆍ1921~ 1961.12.21ㆍ향년 40세ㆍ이정재와 4살 차)

정치 깡패영화 제작에 관여(연예계의 황제)ㆍ"학력도 없고, 배운 게 없다"고는 하지만, 극장을 좋아하며 극장 주변에서 일을 하여 생계를 꾸렸다 21살 때 소매치기로 "개성형무소"에서 2, 24살 때 "장물취득 혐의"2년을 더 옥살이하였다.광복 후, "적산가옥"으로 "서울 미나도 극장(평화극장)"을 인수받았으며, 점차 "영화계의 대부" 급부상하여, 훗날 "연예계의 대통령"으로 군림하게 된다.

임화수가 저지른 결정적인 정치 테러는 1960.04.18일에 일어난 "고려대학교 학생습격사건"이다 "이승만 정권"의 비호 아래 온갖 악행을 저질렀고, 연예인들을 선거정치적인 행사에 동원시키며 연예인을 정권여당인 자유당을 선전하고, 표심을 얻는 도구로 사용하였다. 권력과의 유착을 위해, 한국에서 처음으로 연예인들을 성 상납에 이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기도 한다.

•  출 생 : 경기도 여주       •  본 명 : 권중각(權重珏) 어머니의 재가로 개명 

•  사 망 : 사형 (서울형무소에서 교수형) 시신은 비서인 "차민섭(눈물의 곡절)"이 수습장례를 치러주고 임화수 가족들을 돌보고, 홀로 남은 임화수의 어머니를 모셨다.

•  별 칭 : 연예계의 황제

•  : 손씨        •  자 녀 : 21녀   (가족들은 보복당할 우려로, "임씨"에서 "권씨"로 개명하여 산다)

•  경 력 : 반공예술인단 단장대한반공청년단 종로구 단장

임화수

자유당 정권 말기, "이승만의 "대통령 4선 성공이기붕의 '부통령 당선"을 위해, "반공예술인단" 직하여, 연예인들을 "자유당 선거 운동"으로 내몰았다. "대한반공청년단 종로구 단장"이었던 임화수는 자신의 직위를 이용해, 1960년에 발생한 "315 부정선거"에 적극 개입했다가, "공민권"이 제한되었었다1960.03.15일에 치러진 "4대 대통령 선거5대 부통령 선거"에서 "대한반공청년단(단장- 신도환)반공예술인단(단장- 임화수)""자유당 전위대"였다.

1959.11, 배우 "김희갑(별칭- 합죽이)"이 임화수에게 폭행을 당해, 갈비뼈가 3군데나 부러지는 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배우들이 "정치 깡패"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는 비참한 현실을 당시 신문들은 "권력 폭력 앞에 떠는 영화계"라는 머리기사로 보도했다1960.04.19일에 발생한 "419혁명" 이후 "정치테러 혐의"로 체포되었고, 징역 6개월만 받고 풀려났다.

1961.05.16일에 발생한 "516 군사정변" 이후, 군부의 "연예계 정화사업" 과정에서 척결 대상으로 꼽혀 체포되었으며, 이후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고, 1961.12.21일에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3. 최 후

"419혁명"으로 "1공화국"이 붕괴되자, "고대생 습격사건" 등 정치폭력 혐의로 체포되었다조사를 받는 중, 그는 살기위해서 폭로한 "화랑 동지회 사건"으로, "이정재"는 범죄단체 조직 등이 추가되어, 사형당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

그는 재판정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이정재에게 부정투표부정선거정치테러시라소니 린치사건 주모자 배우 상습폭행고대생 습격사건김희갑 구타사건 등 모든 책임을 떠넘기며, 재판 내내 울먹거리며, 갖은 잔꾀를 부리고 모두 "이정재가 지시했다", 거짓증언을 했다이는 훗날 "임화수"의 치명적인 거짓증언으로 "이정재"가 먼저 사형 당하게 만들었다.

사형수들이 마지막으로 가족 면회를 하던 날, "유지광""임화수"를 만나자, 분노가 폭발하여 "이정재를 팔았다"고 그에게 주먹을 날렸다. 이는 "유지광"의 자서전 "대명"에도 언급되는 내용이기도 하다재판에서 "이정재유지광곽영주최인규신정식" 등과 함께 사형을 선고받고, 1961년 사형당하기 전에 "자신은 죽을 수 없다"고 살려달라며 외치며 몸부림치다가, 12.21일에 "서울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4.  생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가 재가하자, 의붓아버지의 성씨를 따라, 이름을 "권중각"에서 "임화수"로 개명했다그 후, "조열승"을 두목으로 삼아 조직을 이끌던 중, 신고를 받고 출동한 "이정재"를 만났고, "이정재"결투로 싸움을 벌여, "조열승"이 패배했고, "임화수조열승"은 이정재의 싸움실력에 흠모하여 친분을 쌓았다.

1949, "반민특위"가 해체되었을 때, "이정재"는 경찰을 사직하고, "포목가게" 장사하려 했다"임화수"는 절대적으로 반대했고, 두목이 되어 조직을 이끌어달라며 수없이 설득했고, "임화수"가 데려온 "김기홍"도 설득했으나, "이정재"는 조용히 장사하며 살고 싶다는 이유로 거절했다"손씨" 성을 가진 "손사장"과 노름하는 중, 친분을 쌓아, 여조카인 "손씨 부인"과 결혼하였다임화수는 폭력을 잘 휘두르는 자였지만, 가정에선 따뜻한 가장이였다.

① 동대문 파 결성ㆍ영화 제작

"한국 전쟁" , 부산으로 피난 온 그는 "연극장"을 차리며, 사업을 하였다. 부산에 도착한 "이정재"를 만났고, 조직의 두목이 되어달라고 부탁했다"이정재"는 임화수의 부탁을 들어주고, "이정재임화수조열승김기홍" 함께 조직을 세웠다.

휴전 후, 서울로 돌아와, "동대문시장"을 재건하였고, "동대문 파"를 세워 세력을 넓혔다"이정재"와 더불어 "동대문 파"2인자로 떠오른 그는 "이승만의 경호책임자 곽영주"의 비호 아래 대한민국 내 최초의 외국합작영화인 "이국정원(1957)2번째 합작영화인 "천지유정(1958)"을 홍콩과 합작해서 만들어냈으며, "길 잃은 사람들사람팔자 알 수 없다" 등의 영화 15편을 제작했다.

"반공예술인단"이라는 반공단체를 조직해 단장이 되어, "자유당 정권"과 더욱 밀착했으며, "경무대"에서 "곽영주"의 영향으로 "이승만"을 만난 자리에서 울면서, "아버지"라고 부를 정도로 이승만의 신임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폭력을 함부로 행사하여, 그에 대한 평이 매우 좋지 않았다

특히 자신이 "동대문사단"의 회장으로 있던 1959.11.27, 배우 "김희갑"의 갈비뼈를 부러뜨린 "합죽이 구타사건"으로 언론의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권력을 위해서면, 출신지나이를 속이는 것은 물론, 예매표를 조작하여 부당한 이득을 챙겼으며, 남자 배우들에게 폭력을 가하고, 젊은 여배우들을 권력자에게 상납하기도 하였다.

② 이정재의 은퇴ㆍ동대문 상인연합회의 회장

"이정재"가 은퇴하며, 물러난 "동대문 상인연합회의 회장" 자리를 이어받고, "신도환의 대한반공청년단" 가입, "대한반공청년단 종로구단" 책임자가 되었다그는 장관이나 국회의원이 되기 위해, "1공화국 자유당"을 모욕하고, 정권반대를 외치는 국민에게 구타 지시와 야당 정치인들에 대한 공공연한 정치테러를 지시하였다.

1960.03, "최인규"의 실수로 "부정 투표한다."는 비밀지령이 언론과 신문에 폭로되었다언론신문에 폭로된 상태에서 그는 지나친 권력욕심으로 "이기붕의 당선"을 위해 부정투표를 할 것을 지시하였고, 그 일로 인해 부정선거로 "이기붕"이 당선되었고, "315 부정선거"가 일어났다.

1960.04.18, 그는 "이기붕""자유당"의 지나친 과잉충성으로 엄청난 보상을 받기위해, "이기붕자유당"의 탄핵하야 시위를 하는 "고대생들을 구타하라"는 지시를 내렸다시위를 하고 돌아가던 "고려대" 학생들을 집단으로 구타하여, 많은 대학생들을 살상하게 하는 이른바 "418 고대생 습격사건"이 발생하였다이 때문에 "419혁명"이 일어났고, 훗날 "516군사정변" 후 사형 당하게 되는데,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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