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규 (崔仁圭ㆍ1919~1961.12.21ㆍ42세)"는 1960년 "3ㆍ15 부정선거"를 총지휘하여 유혈사태가 벌여졌고, "시위대ㆍ학생들"에게 발포명령을 내려 진압을 하고, 체포한 "시위대ㆍ학생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고문을 했으며,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었다.
1. 최인규 (崔仁圭ㆍ1919~1961.12.21ㆍ향년 42세ㆍ이정재와 2살 차)
내무부 장관ㆍ제4대 국회의원(광주군)ㆍ4ㆍ19혁명의 한 원인을 만든 장본인
1960년 "3ㆍ15 부정선거"를 총지휘하여 유혈사태가 벌여졌고, "시위대ㆍ학생들"에게 발포명령을 내려 진압을 하고, 체포한 "시위대ㆍ학생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고문을 했으며,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었다. 1960년 "4ㆍ19혁명"으로 "자유당정권"이 무너지자, "3ㆍ15 부정선거"를 총지휘한 원흉으로 지목받아 05.03일 구속되었다. 1961년 "5ㆍ16 군사정변" 이후, "혁명재판"에서 "사형선고" 판결로 1961.12.21일에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 출 생 :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 • 사 망 : 사형 (서울형무소에서 교수형)
• 학 력 : 1945 - 경성 연희전문학교 상학과 → 1949 - 미국 뉴욕대학교 상학과 학사 → 1957 -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3기
• 총 선 : 국회의원(경기 광주군) 제3대, 자유당 43.58% (2위) 낙선 → 제4대, 자유당 58.64% (1위) 당선
10세 때, "상일공립보통학교(광주군 구천면)"에 입학, 4학년 때인 1932년 "서울중앙기독교청년회 속성과"에서 1년을 공부한 실력으로, 1933년 "서울 보성고등보통학교" 2학년 보결시험에 합격하였다. 1941년 "경성고등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생명보험 주식회사"에 입사하여 광복 때까지 근무하였다. "연희전문학교 상과"를 거쳐, 1947년 "뉴욕대학교 상과대학"에 편입학하고, 1949년 졸업하여 귀국하였다. 1949년, "대한교역공사(大韓交易公社) 업무부장"으로 들어가, 1950년 정부의 동남아시아 무역사절단 대표로 파견되기도 했으며, 이사장까지 승진하였다. 그러나 공사의 해산으로, 1951년 발족한 "한국무역진흥주식회사"로 옮겨, 상무이사로 재직하였다.
1954년, "3대 총선"에 "자유당" 공천으로 "경기도 광주"에서 입후보하였으나, "신익희"에게 패배하여 낙선하였다. 1955년, "이기붕"의 알선으로 "국제연합 한국부흥위원회(UNKRA) 뉴욕주재 한국대표"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 "제네바 회담"에 "한국업저버"로 참석하였으며, 1956년 "외자청장(外資廳長)"이 되었다. 1958년, "4대 총선"에 다시 "광주군"에서 "자유당" 공천으로 입후보하여 당선되고, 9월에 "교통부장관"에 기용되었다.
1959.03월, "이기붕"의 추천으로 "내무부장관"이 임명되었다. "최인규"는 나태하게 지령을 수행하다가, 실수로 "이기붕이 당선을 위해 부정 투표한다."는 지령을 언론ㆍ신문에 폭로되었다. "임화수"의 지나친 권력욕심으로 부정투표가 실행되었고, 부정선거로 "이기붕"이 당선되었으며, 그 일로 인해 전국적으로 유혈충돌이 벌여졌다.
2. 곽영주 (郭永周ㆍ1924~1961.12.21ㆍ향년 37세ㆍ이정재와 7살 차)
정치 깡패ㆍ이천 3인방- 이정재ㆍ곽영주ㆍ유지광경찰인ㆍ경무대 경무관ㆍ이승만 경호책임자 (현, 대통령 경호실 실장)
• 출 생 : 경기도 이천 • 별 칭 : 부부통령 (막강한 권력)
• 사 망 : 사형 (서울형무소에서 교수형) 사형당하기 전, "이승만 대통령 각하 만세!"를 외쳤다.
• 학 력 : 경성공립직업학교 (현, 서울과학기술대학교) → 1956 - 국방대 행정학사 1기
• 경 력 : 1956 - 자유당 경찰행정특보위원
1945.08.15일 광복 이후, 동향 선배인 "이정재"의 도움으로 "수도경찰학교"를 입교ㆍ수료하였다. 1949년, 그는 "이승만"을 만나, 자신을 소개를 했다.
"~ 하옵니다."는 말이 눈에 띄어 마음에 들은 "이승만"은 "훌륭한 충성심"이라며 칭찬ㆍ발탁되었다. 이후 "이승만"의 총애를 받아, "경무대 경호책임자"로 임명되었다. 막강한 권력으로 "부부통령"으로 불렸다.
그는 동향 출신의 선배인 "이정재"와 막역하여, 정치깡패를 비호하기도 했고, "이정재"를 국회의원으로 만들기 위해, 권력남용을 수없이 해왔다. "이기붕"이 "이정재"의 "이천의 선거"를 빼앗으려 경찰을 동원하여, "동대문 패"를 체포를 하자, "곽영주"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며, "이정재"에게 선거양보를 하라며 설득하였고, 결국 "이정재"는 "이기붕"에게 "이천의 선거"를 양보해주었다.
1960년 "4ㆍ19혁명"이 일어나, 학생들이 "경무대" 앞에서 시위를 하자, "곽영주"는 "이승만 대통령"의 안전을 위해, "학생시위대"에게 발포 명령을 내려, "경무대" 앞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후 제1공화국이 몰락하고, 제2공화국이 들어서고, "이승만"을 따라, "미국 하와이"로 가려고하다가 구속되었다. "5ㆍ16 군사정변" 이후,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정치깡패 비호ㆍ권력 남용ㆍ4ㆍ19혁명 당시 경무대 앞으로 밀려온 학생시위대를 향한 발포 명령" 등으로, "사형선고" 판결로 1961.12.21일에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3. 신정식 (申廷湜ㆍ ? ~ 1961.10.19)
정치 깡패ㆍ제1공화국 자유당 정권시절 조직폭력배 서대문파의 중간 보스급
"4ㆍ19혁명" 당시, "서대문 이기붕"의 집 앞에서 데모를 하던 "최기태(경성 전기공고 학생)"을 쇠망치로 머리를 때려 살해한 혐의로, 1960.08.20일 체포ㆍ구속된 자이다. "5ㆍ16 군사정변"이후, "고대생 피습사건" 등으로 1961년 "이정재ㆍ임화수ㆍ곽영주ㆍ최인규ㆍ조용수" 등과 함께 사형이 선고되었고, 교수되었다.
• 별 칭 : 돼지
1960.10.13일 오전 10시, 신정식은 "이옥자(처)"와 면회를 하면서, "면회가 끝나더라도 돌아가지 말고 면회소 부근에서 기다려라."고 일러놓았다. 면회가 끝난 후, 일단 면회실에서 나왔다가, 직원의 감시를 피해, 다시 면회실로 들어가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옥자(처)"를 안으로 불러들여, 어린 애를 받아 안고, "통문증(면회표)"을 어린아이의 손에 쥐인 채, 오전 10:20분경 "형무소 문"을 태연히 빠져나갔다.
경찰에서는 "이옥자(처)"를 구속ㆍ취조하여, 지난 10.12일 면회할 때, 신사양복 1벌을 차입한 것이 밝혀짐으로서, 신정식이 처와 더불어, 미리부터 탈옥을 계획하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10.15일, 탈옥 52시간 만에 다시 체포되었다. "서울 마포구"의 지인 집에 숨어 있다가, 경찰에 발각돼, 체포되었다.
조사결과, 탈옥 목적은 자신의 범행을 증언한 동료 깡패 2명에게 복수하기 위한 것으로 밝혀졌다. 재차 구속된 신정식은 1961년 "5ㆍ16 군사정변"에 의해 정권을 획득한 "군사정권"에 의해 진행된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61.10.19일 "서울형무소"에서 정치깡패의 대부 "이정재"와 함께 교수형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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