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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쇄살인ㆍ조폭ㆍ기생ㆍ연예인

주먹ㆍ419 ① 이정재 (1917~1961ㆍ44세)

by 당대 제일 2022. 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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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 (李丁載ㆍ1917~1961.10.19ㆍ44세)"는 1954년 "사사오입 개헌" 당시국회방청객 난동, 1955년 자유당 창당동지회 방해, 1956년에는 대통령선거 당시 야당의 집회를 방해테러를 가하고, 1957년에는 장충단공원 정치테러사건을 저지르는 등 정치테러의 주요인물로 악명이 높았다.

 

1. 이정재 (李丁載ㆍ1917~ 1961.10.19ㆍ향년 44)

건달ㆍ정치 깡패ㆍ씨름협회 회장ㆍ제1공화국 시절, 정치 주먹깡패로 악명ㆍ씨름을 잘하여 고향인 이천에서 열린 전국 씨름 대회에서 소를 10마리나 가지고 갔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 김두한 (金斗漢ㆍ1918~1972ㆍ향년 54세)

•  출 생 : 경기도 이천 부농의 아들

•  사 망 : 사형 (서울형무소에서 교수형)ㆍ시신은 장인 "김기홍"이 수습하여, 가족들과 함께 장례를 치루고, 유해는 고향인 경기도 이천군 호법면 유산리 산에 안장

•  호 : 합당 (闔堂)

•  별 칭 : 동 카포네(동대문의 알 카포네), 말렌코프 (스탈린 측근ㆍ소련 수상)

•  학 력 : 휘문고보→ 신흥대학(新興大學ㆍ경희대 전신) 국어국문학과

•  처 : 김씨 부인    •   자 녀 : 1남 1녀        •  가 족 : 사돈- 유지광 / 처남- 김기홍

•  경 력 : 화랑동지회 회장ㆍ자유당 도시행정특보위원

이정재

< 5ㆍ16 군사정변 이후,  육군 공수특전단 대원들에 의해, 시민들 앞에서 조리돌림 당하고 있는 이정재 >

"김두한"의 추천으로 경찰특채가 되어 경찰이 되었고, 그 후 "김두한"과 친구가 되었다. 당시 경무대 경찰서장이던 "곽영주"와는 개인적인 친분 및 동향 선배로서 손이 닿아 있었다. 정부 수립 후, "반민특위의 특경대 요원"으로 활동했다고도 전해진다. "곽영주(고향의 후배)"를 "수도경찰학교"에 입교ㆍ수료하게 했고, "경찰"에 합격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줬다.

그러나 "반민특위"는 1949.06.06일, "장경근"에 의한 "이승만 정권"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해체당하여, 이정재에게 체포당했던 "노덕술"이 풀려났고, 분노한 "노덕술"은 이정재를 고문을 했다.

1954년 "사사오입 개헌" 당시, 국회방청객 난동, 1955년 자유당 창당동지회 방해, 1956년에는 대통령선거 당시 야당의 집회를 방해, 테러를 가하고, 1957년에는 장충단공원 정치테러사건을 저지르는 등 정치테러의 주요인물로 악명이 높았다.

2. 최 후

이정재는 1961.10.19, 가족면회 때, "형 집행"에 대하여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하며, 특히 아들 "이정수"에게, "아버지는 사회에서 생각하는 것 같이 깡패는 아니다. 너도 기가 죽지 말고 남자답게 살아나가야 한다. 사람이 죽고 사는 건 문제가 아니다."고 말했다고 한다.

"419혁명" 후인 1960.04.28., 검찰에 자진 출두하여, 정치테러의 원흉으로 "허정 과도정부"에 의해 구속되었다가 풀려났으며, "장면 국무총리""2공화국"이 들어서고 다시 체포되었으나, 가벼운 형량을 선고받고, 1961.02.10.일 석방되었으나, "516군사정변"으로 다시 정변세력에게 체포되었다"시라소니""린치사건"을 부인했고, "김두한이화룡""이정재를 구하려고 힘을 썼다.

처음에는 형량이 가벼울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임화수""화랑 동지회"라는 범죄단체 조직에 관한 내용이 다른 폭력조직의 증언으로 폭로됨으로써,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이와 관련해서 "유지광"은 훗날 자서전에서 "임화수"가 살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화랑 동지회 사건"폭로하였다고 기록하였다.

"혁명재판"이 열리자, "김동진""암살지령 사건단성사 앞 저격사건"으로 증인으로 나와 증언하였고, "김기홍"도 증인으로 나와, "시라소니 린치사건1958~1960년의 정치테러 부정선거고대생습격사건 " 이정재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증언하기도 했다"임화수"는 살기위해, "시라소니 린치사건배우 상습폭행김희갑 구타사건모든 정치테러 지시 고대생 습격부정선거" 등이 이정재가 지시했다고, 치명적인 거짓증언을 했다.

군법회의에서 "임화수유지광곽영주최인규신정식" 등과 함께 사형을 선고받고, 그 해 "임화수유지광신정식"을 비롯한 여러 폭력조직원들과 함께, 거리에서 "조리돌림"을 당하였다"임화수"의 치명적인 거짓증언으로 인해, 1961.10.19일에 "교수대"로 끌려갔고, 사형당하기 전에 마지막 말을 남겼다 이 말을 남기고, "서울형무소 형장"에서 처형되었다.

"내가 키우다시피 한 사람들 몇몇이 배은망덕하게도 터무니없는 증언으로 나를 무고했다고 들었습니다. 섭섭한 일이지만, 그들도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을 거요 엎질러진 물은 주워 담을 수 없는 법 모두들 자식들이 있는 몸들이니, 이 일로 인해 아들 대에 가서, 절대로 원수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나의 마지막 바람입니다."김복록(매부)"에 의하면, 형이 집행 전, 가족들과 면회에서 가족 일을 걱정하는 등 태연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3.  생 애

경기도 이천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나, 중앙고등보통학교를 다니다가, 휘문고등보통학교로 전학하였다그 후 서울 신흥대학(新興大學경희대학교의 전신)에 입학하게 된다이후 "태평양 전쟁"으로 일제의 강제징용장을 받고, "경성"으로 상경하여, "근로보국대""김두한의 반도의용정신대" 서기를 보다가, "김두한"의 추천으로 "경찰 특채"가 되어, 경찰이 되었다그 후, "김두한"과 친구가 되었다.

해방 후에 "경찰"에 복직했고, 우 대립으로 "좌익"들과 수없이 싸우며, 체포하였다"제주 43사건"에도 참여했고, 이정재의 싸움실력을 흠모한 "임화수조열승김기홍"은 이정재와 친교를 맺었다정부 수립 후, "반민특위의 특경대 요원"으로 활동했다고도 전해진다.

그러나 "반민특위"1949.06.06, "장경근"에 의한 "이승만 정권"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해체당하여, 이정재에게 체포당했던 "노덕술"이 풀려났고, 분노한 "노덕술"은 이정재를 고문을 했다이승만의 지시로 "반민특위 형사들"이 풀려났고, 결국 그는 경찰을 사직하고, "동대문시장"에서 "포목 장사"를 시작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피난을 가지 않았고, 서울에 남았다과거에 경찰을 했다는 이유로 북한군에게 체포되어, 생사의 위기에 처했을 때, "김기홍"이 공산군으로 위장하여 도움으로써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이 일로 두 사람은 "처남 매제 지간"이 되었다"부산"에 도착한 "이정재""임화수"의 부탁으로 새로운 조직을 세우고, 두목이 되었다주먹세계에 투신하여, 1953년에 "동대문 상인연합회"를 조직, 회장에 취임하였다.

① 시라소니 (이성순) 린치사건

"625전쟁" 당시, 부산에서의 인연으로 호형호제로 지냈던 당대 최고의 주먹 황제인 "시라소니"가 금전적으로 도움을 받는 모습을 평소 못마땅하게 여겼던 "동대문 패""김기홍임화수조열승 이석재김사범" 등이 분노하여, "시라소니"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고, 비열한 계략으로 좁은 곳으로 유인하여, "시라소니"에게 "흉기(망치몽둥이나이프도끼)"린치를 가했으니, 이른바 "시라소니 린치 사건"이 벌어졌다.

이정재는 "자유당"의 모종일로 인해, 바쁜 상태였고, "명동 패"와 싸움을 원하지 않았다"김기홍"을 보내, "명동 패"와 화해할 방법을 찾으라고 지시했고, "이화룡"을 찾아간 "김기홍""시라소니"의 잘못을 지적하고, "린치사건"은 이정재와 아무 관련이 없다고 설득했고, 분노한 "명동 패" 화해가 가능한지 미지수였으나, 이정재는 계속 화해를 시도하였다.

"동대문 패"의 간부였던 "이석재"는 후환을 없앤다는 이유로 "시라소니"가 입원한 병원으로 찾아가 남은 한쪽 다리를 부러뜨렸고, 소식을 들은 이정재는 분노했고, "이석재"의 뺨을 때렸다또한 "명동 패"에도 그 소식을 듣고, 다시 "동대문 패"와 싸움을 벌였다.

 김동진ㆍ이석재의 배신ㆍ주먹계 은퇴

"김동진"은 명예롭지 못한 "동대문 패"에 실망이 컸고, 이정재는 "김동진"에게 "3세력 살해음모"를 지시하는 "지령서"를 내렸다그러나 "김동진"은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동대문 패"에 혐오감을 들어, 이정재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나라에서 생계가 어려운 불행한 사람들을 위해서 내는 세금인줄 알고 내었던 세금을 착복착취로 사기를 당하고, "동대문 패"에 불만이 컸던 "정양원""시라소니의 복수"를 원하는 "KLO 대원들" 불러냈고, 그들에게 복수할 기회를 만들어줬다"김동진"은 거짓으로 "자유당"에서 모종일로 연락이 왔다고 하여, 자주 만났던 "요정 한식집"에서 만나자고 예약을 했다

"요정 한식집"은 휴업이라 직원들이 없었고, 이정재는 "김동진"의 계략으로 "정양원KLO대원들"에게 구타를 당해, 중상을 입었다"김동진"의 배신으로 "동대문 패"는 분노하였고, "동대문 패" 간부들은 "정양원KLO대원들"을 제거하자고 제의했으나, 이정재는 거절했고, 자신을 죽일 기회는 있었으나, 저들은 자신을 죽이지 않았기에 이 일을 덮어두기로 하고, "김동진"을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김동진" "이정재에게 야당(민주국민당호헌동지회) 요인들에 대한 테러3세력 살해음모계획에 암살하라는 지령 받은 것"을 언론에 폭로하며, 공개하면서 잠적했다이후 영화를 보기 위해, "단성사"로 갔다가, "단성사 저격사건"으로 "이석재"의 총에 맞았고, 원으로 후송됐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고, 회복 후 퇴원하여 "주먹"를 은퇴하게 된다.

 김기홍과 결별ㆍ자유당의 감찰부 차장

1954"김기홍""자유당"이 무너져가는 상황이고, 이기붕이 제안했던 사사오입 개헌 개입과 정치권력 제안, 모종의 일로인해 조직이 몰락에 처하게 되자, 조직에는 더 이상 이득이 없고, "자유당은 무너지고, 영원한 권력이 없는 법이니, 자유당과 결별하여 국회에 나가지 말고, 반드시 거절해야한다"고 설득했지만, "이정재"는 듣지 않았고, "이기붕"의 제안을 승낙한 "이정재"와 결별하였다.

"동대문 상인연합회"를 개설한 후, 조직을 체계적으로 유지관리하기 위해, "이기붕"과 연을 맺어 자유당의 감찰부 차장" 등 당원이 된다당시 경무대 경찰서장이던 "곽영주"와는 개인적인 친분 및 동향 선배로서 손이 닿아 있었다.

④ 1958 총선 (이천 국회의원 선거)ㆍ"이기붕"과의 알력ㆍ자유당과 결별ㆍ은퇴 (후임 임화수)

그는 정치에도 큰 야망을 보여, 자신의 고향인 "이천"에서 "국회의원"으로 출마하려고 하였다그는 이천에서 13대째 내려온 토박이였다당시 "이천"의 자연 부락이 무려 296곳이나 되었는데, 그는 모든 부락들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마을의 대소사애로 사항을 보고 받고, 이를 해결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생계가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고, 625전쟁 때 사망한 마을 주민을 위해 "위령비"를 건립하여 해마다 제사를 지내는가 하면, "이천군"의 각 학교에 재정 지원은 물론 장학금을 지급하기도 했다"이천"에선 이정재의 인기는 대단했고, 따라서 1958년 총선 때, 감히 "이정재"에게 대항할 사람이 없었다.

1958, "이기붕" 자신의 선거구인 "서대문구"에서 국회의원 당선이 불확실해지고, 낙선 위기가 오자 선거구를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했다"이기붕"은 자신의 "6대 선조의 묘"가 있는 "이천"을 선택하였다그러나 "이천"은 이정재가 "자유당 공천"을 받을 것을 예상하고, 표밭을 잘 닦아 놓은 상태였다그러나 "이기붕""한백수장경근"을 보내, "이정재"에게 "이천의 선거"를 내주라고 했고, 출마하지 말라고 압력을 넣었다.

그러나 수없이 이용만 당했던 이정재가 분노하여 이를 거절하면서, 서로 간에 걷잡을 수 없는 풍파가 일어난다"이기붕자유당"에서 경찰력을 동원하여, "정치 테러집회 테러선거 테러국회 테러황금마차 습격사건충정로 도끼사건" 혐의로 "동대문 패"들을 구속하고, 갖은 횡포를 부리는 바람에 이를 견디지 못한 "이정재""이천 선거"를 빼앗기게 될 위기가 오자 통곡하였다

결국 "이천 선거구""이기붕" 양보하였고, "자유당"과 결별하고, "동대문 상인연합회"의 회장 자리를 "임화수"에게 넘긴 뒤, 은퇴하였다이 때 "이기붕"을 상대하기 위해, "이천"에서 출마했던 "연윤희(민주당 후보)"는 중앙당에 보고도 없이 입후보를 사퇴한 후, 행방불명이 되었다가, 5일 만에 "국회기자실"에 와서 "이기붕 씨와의 대결에서 승산이 없기 때문에, 사퇴했다"고 엉뚱한 변명을 늘어놓아 국민을 아연케 했고, "이기붕"은 무투표로 당선되어, 간신히 체면을 유지할 수 있었다은퇴 후, 북악산 쪽에 자리를 잡고, "흉가"라 불리던 헌집 1채를 헐고, 새로 주택을 지어 거기서 은둔생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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