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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쇄살인ㆍ조폭ㆍ기생ㆍ연예인

주먹 : 잇폰 김두한 ① 1918~1972 (54세)

by 당대 제일 2022. 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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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폰(입폰) 김두한 (金斗漢ㆍ1918~ 1972ㆍ53세)"은 일제 강점기 말, 1935년 18세 약관으로 "경성(서울)"의 유력한 깡패두목으로 군림하였으며, 일설에는 민족말살정책에 거부하는 등 일본제국에 저항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진위 여부는 알려져 있지 않다.

 

1.  김두한 (金斗漢1918~ 1972향년 54별칭- 잇폰(입폰))

조선 조직 폭력배의 우두머리 (18세)ㆍ김좌진의 서장자ㆍ국회의원(3대ㆍ6대)ㆍ관련사건 : 한독당 내란음모사건ㆍ국회 오물 투척 사건

•  호 : 의송 (義松)        •  별 칭 : 잇폰 (입폰)

•  학 력 : 경성 교동보통학교 2학년 중퇴 (중학교 입학자격 검정고시 합격)

•  사 망 : 고혈압 (성북구 정릉동 무허가 자택)

•  부 모 : 김좌진- 오숙근(1처)ㆍ나혜국(2처)ㆍ측실- 김계월(생모ㆍ박계숙)ㆍ이씨

•  부 인 : 4명- 이재희(장녀 김을동)ㆍ김부미(2처)ㆍ김순옥(3처)ㆍ박정인(4처)

•  자 녀 : 4남 2녀

1918.05.15일, 서울 종로구에서 "김좌진의 아들"로 출생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부자가 실제로 얼굴을 맞댄 것은 1924년(6세) 때, "만주"에 가서 외조모와 함께 만난 것이 전부다. 만주에서 외조모와 함께 부친 "김좌진"을 상봉했으나, 당시 "봉오동 전투ㆍ청산리 전투" 등 이후 일제의 "간도 참변", 그리고 "자유시 참변"으로 민족진영과 공산진영 간의 대립 등으로 경성으로 다시 오게 되었다.

일설에는 "김두한이 김좌진 장군의 아들 아니다"는 의심을 가지고, 친자여부에 대한 확인을 거치기 위하여, "김좌진 장군"의 후손들과 "김을동" 측과의 유전자 검사를 진행하려 했으나, "김을동" 측에서 거부하였다는 악의적 음해가 있었다. 실제로 "김좌진"의 후손을 자처하던 "위연홍(조선족 여인)"은 "김을동" 측에서 유전자검사를 요구하자 사라져버렸고, 가짜로 밝혀졌다.

해방 후, 미군정기에는 잠시 "조선청년전위대 대장 (조선공산당 산하)"로 있었으나, 이내 탈퇴하고 우익으로 전향하여 "반탁운동" 등 좌우대립에서 반공투쟁ㆍ정치테러를 저질렀다. 한국전쟁 시, 부산으로 내려가 건달생활을 계속하였다. 

국회의원(3대ㆍ6대)을 지내면서 "이승만 정권ㆍ박정희 정권"의 독재를 비판하였다. "6대 국회의원" 당선 직후, "한국독립당 내란음모사건"으로 옥고를 치렀고, "한국 비료주식회사"가 사카린을 밀수하자 국회에서 "삼성"과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며, 국무위원 및 "정일권 국무총리" 등에게 오물을 투척하였다.

7대 국회의원 "경기도 수원 신민당 후보"로 선거 유세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전깃불 관련 발언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찬양했다는 혐의로 "반공법"으로 옥고를 치렀다. 이후에는 "박정희 정권"의 독재를 비판해 오다가, 1972.11.19일 "조일환"이라는 사람을 만나고 자택으로 돌아오는 중, 길가에서 쓰러져, 의식불명이 되고 뇌출혈로 진단받았으며, 11.21일 오전 09:05분 "서울 성북구 정릉동 무허가 자택"에서 "고혈압"으로 사망했다.

"한홍구 (역사학자)"는 그에 대해 "우리 역사에서 참으로 악역을 많이 맡았지만, 분명히 그 어딘가 미워할 수 없는 구석이 있다. 나름대로 자기 입장을 갖기 위해 열심히 살았지만, 그는 주변의 모사들에 의해 이용되는 경우가 많았고, 끝내 자신의 이름보다 장군의 아들이란 아버지의 후광 속에 들어가야만 빛을 발하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라고 평가했다. 1945년 8ㆍ15 광복 이후 해방정국에 좌ㆍ우익 대립에서 "9월 총파업ㆍ전평 습격" 등 좌익에 대한 살상에 대한 비판이 있다.

① 국회의원 당선낙선

무소속(김관철 살해미수)→ 자유당(사사오입 개헌)→ 무소속→ 진보당→ 노농당→ 무소속→ 한국독립당→ 신민당

• 당선 : 제3대 국회의원 (무소속ㆍ종로구 을 4선거ㆍ1954.05.20) 당선 / 제6대 국회의원 보궐선거 (한국독립당ㆍ용산구): 1965년 한일협정 반대 등으로 보궐선거 당선

• 낙선 : 제4대 민의원 (노농당ㆍ종로구)ㆍ제5대 민의원 (무소속ㆍ충남 홍성) / 제6대 국회의원 (무소속ㆍ종로구)ㆍ제7대 국회의원 (신민당ㆍ경기 수원)

② 구 속

1947. : 대한민청 사건 등으로 미군정 의해 포고령 위반으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1949.06 : 이승만 정부에 의해 국가보안법 등으로 투옥되어 옥고

1954 : 이승만 정부를 비판한 혐의로 선거법 위반과 부하 김관철에게 충고하며 공포탄을 쏜 것이 원인이 되어, 김관철 살해 미수로 구속 → 자유당 입당 조건으로 석방

1966.01 : 한국독립당이 5단계 혁명계획을 수립하고 정부전복을 기도하였다는 국가보안법 위반 및 내란음모 혐의로 구속 → 석방결의안 통과 → 5년 구형 → 김두한 등 전원 무죄 선고

1966.09 : 한국비료 주식회사가 사카린을 밀수한 사건으로 국회에서 대정부 질문 중, 국무위원 등에게 미리 준비한 똥물을 투척 → 국회의원직을 잃고 구속

1967.06 : 제7대 국회 선거 때 경기도 수원시에 신민당 후보로 출마, 유세 도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전깃불 발언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찬양했다"는 혐의로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 → 남산 중앙정보부에서 고문 → 박정희 정권의 독재 비판

2. 사카린 밀수사건국회 오물투척 사건

막대한 정치 자금이 필요했던 "박정희 대통령" "이병철 회장"이 손잡고 벌인 일로, 1966.05.24, "삼성그룹"의 계열사인 "한국비료공업주식회사"가 정부 정치자금과 관련해, 건설자재로 가장하여, "사카린 2,259 포대( 55t)"를 대량으로 밀수입하려다 발각된 사건이다.  당시 "삼성"에서 "중앙일보"를 세우고, 언론계에 진출할 시기와 맞물려 있었다는 점인데, 그래서 "사카린 사건"에 대한 경쟁 언론사(경향신문 등)의 공격이 따가웠던 것이다.

 일 시 : 1966.05.24     결 과 : 한국비료 국가 헌납삼성 이병철의 은퇴국회 오물투척 사건 발생

 파 문 : "박정희 정부"가 외친 구호가 "구악일소(부패척결)"이었는데, 사건으로 정권의 모순이 드러났다.

09.22,  본회의장에서 "사카린 밀수사건"에 대한 대정부 질의 도중, "이만섭 의원(민주공화당)김대중 의원(민중당)"은 삼성 "이병철"을 구속해 "법정 최고형"에 처할 것을 요구했다.

다음 순서인 "김두한 의원(무소속)" 하얀 보자기로 싼 통을 들고 와서, "국민의 재산을 도둑질하고, 이를 합리화시키는 당신들은 총리나 내각이 아니고, 범죄 피고인에 불과하다"고 고함을 지른 뒤, "맛을 봐라"면서, 국무위원 석에 앉아 있던 "정일권 무총리장기영 부총리" 등 여러 명의 각료들을 향해, "인분(人糞똥물)"을 투척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09.24, "김두한"은 이 사건 후,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한 뒤, 국회의원 자격을 잃는다10.05, "장준하(사상계 사장)" "민중당 대구 유세"에서 "박정희 대통령" "밀수두목"으로 규탄했고, 이 발언의 책임을 물어, "장준하(10.26) " 구속되었다,

"국회 인분투척사건" 직후, "정일권 내각"은 일괄사표를 제출했다. "민복기(법무장관)김정렴(재무장관)"이 해임되었으나, "정일권 총리"의 사표는 반려돼, 6 7개월이라는 최장수 총리기록을 남겼다삼성은 "한국비료" 주식의 51%를 국가에 헌납했으며, "이창희(이병철 2째 아들)" 구속됐다.

 김두한 의원(무소속)

이병철이 밀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정부가 범죄를 저지를 만한 환경을 조성해 줬기 때문이다. 민족주의를 파괴하고, 재벌과 유착하는 부정한 역사를 되풀이하는 현 정권을 응징하고자 한다. 국민의 재산을 도둑질하고 이를 합리화시키는 당신들은 총리나 내각이 아니고, 범죄 피고인에 불과하다. 그러니 우선 너희들이 밀수한 사카린 맛을 봐라. (국회 회의록)

 하얀 보자기로 싼 통

통 안에는 "파고다 공원"에서 퍼 온 "인분"이 담겨있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채원기(김두한 국회비서)" 거사 전날 "김두한 의원" 집인 "서울 신문로" 주택 화장실에서, "김두한 의원채원기 비서"가 코를 막으며 직접 푼 것으로 확인됐다.

똥

3. 생애

① 어린 시절

"교동 공립보통학교"에 잠시 다녔으나, "조선총독부"에 의해 "김좌진 가족"으로서 불령선인으로 지목되는 한편, 집안의 사정이 여의치 않아 제대로 다니지 못하였다. "개성"에서 살다가, 1930년 11세 때 혼자 "경성"에 왔으나 거지들에게 잡혀, "수표교" 아래에서 살아가다가, 원씨 성의 한 노인을 만나 16세까지 성장하였다. "왜놈의 공부는 할 필요가 없다. 곧 독립하니 그때 공부하라"는 원 노인의 뜻에 따라 학교는 다니지 않고 운동에만 전념하였다. 이후 "원 노인"마저 죽자, 그는 서울에서 조직 폭력배들을 때려눕히며, 1935년 나이 17세에 "우미관"을 장악하였다.

또한 개인적으로 1930년 후반, 배우 "김승호 (김희라 부친)"을 동양극장 극단에 소개하고 곤경에 처한 "정복수(권투선수)ㆍ황병관(레슬링 선수)"를 도와주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이후, 1942년 "조선총독부"로부터 조선인 강제징용으로 "징용장"이 발부되었는데, 이때 그는 "조선총독부"와 협상하여, "경성특별지원청년단(반도 의용정신대)"를 조직하였다.

② 해방 정국 활동

1945년 해방 이후, "건국준비위원회" 등에 참여하여, "일본군 무기고"를 점령하거나 치안에 힘을 기울이며 활약하였다. 그러나 곧 "군정기"로 인해, "건국준비위원회" 등 단체들이 해체되자, "정진영(죽마고우ㆍ프롤레타리아 공산주의자)ㆍ박헌영ㆍ신불출(만담가)"과 인연으로 "조선공산당 전위대장"을 역임했으며, "인민군 남조선 사령관(소장)"으로 임명하겠다는 제의도 있었다고 한다.

"박갑동(남로당 총책)"에 의하면, 그가 "전위대장"에 임명된 이후, 민족진영에서는 "조선공산당"에 대해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이후 "임정" 계열 비밀결사인 "백의사"와 "장덕수ㆍ이규갑" 등으로부터, 부친 "김좌진"의 죽음에 대해 알게 된 그는 "조선공산당"을 탈퇴하고, 우익으로 전향하였다.

그 뒤 "이승만ㆍ김구ㆍ김규식 명예회장ㆍ유진산 회장ㆍ김두한(감찰부장 겸 별동대 총대장)"으로 하여 "대한민청"이 조직되었는데, 그는 "대한민청의 실질적 지도자"로서 "반탁운동" 등 좌우대립에서 우익의 선봉장 역할을 하면서, "산정호수 김일성 별장습격ㆍ박헌영 납치미수ㆍ국군 준비대 습격ㆍ학병동맹 습격ㆍ전평 본부습격ㆍ심영/ 신불출 습격ㆍ9월 총파업" 등에 활약하였고, "김원봉 습격ㆍ좌우합작 방해(여운형 협박 벼랑에서 낙하사건/ 김규식 협박)" 등에도 관여하였다.

"좌우합작 방해" 이후, "경교장"에서 "김구"의 격려와 충고 이후에는 "임정 계열" 인물들과 대립이 없었다고 한다. "박갑동(남로당 총책)"에 의하면, "미군정ㆍ경찰"에 잡히면 안심했고, "별동대"에 잡히면 죽는다며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③ 체포ㆍ석방

그는 "좌우대립"과정에서 5회 피습 당했다고 하며, 이후 계속 "좌우대립"에서 우익 선봉장으로서 활약하였으며, 청년단체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훗날 "반민특위"의 체포 대상이 되는 "박흥식" 등 친일파 자본가들 집을 습격하기도 했다고 하며, 1원도 사사로운 곳에 쓰지 않았다는 근거로 자신의 집(서울 종로구 삼청동)을 저당 잡히고, "이승만"의 친필 휘호를 보여주며, 영수증을 썼다고 한다.

1947년, "대한민청 사건" 등으로 "미군정" 의해, "포고령 위반"으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3심판관이 사퇴서를 제출하는 등 재판 과정에서도 좌우간에 대립이 극심하였고, 1948.03.21일 김구는 "근일에 김두한 군의 사건을 보아도 우리가 얻는 바, 교훈이 많다.  김 군이 자기범행에 대해서 법적 제재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으나, 그 범행이 애국적 동기에서 나왔다고 간주할 수 있으며, 또 그가 위대한 애국자 김좌진 장군의 영사(令嗣)라는 점에서 보면, 그에 대한 구명운동은 그토록 열렬하지 못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말하였다. 1948.03.24일, "지청천ㆍ이범석" 등이 "존 하지"에게 진정하는 등 그의 구명운동을 벌였다.

 제1공화국ㆍ한국전쟁

1948년, "대한청년단"의 감찰국장 겸 건설국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이후 노동운동에 투신하여 노동운동가로서도 활동했으며, "이승만"에게서 "국민방위군 사령관" 등 요직제의가 왔으나, 독재노선에 들어선 "자유당 정권"에 비판적이었던 그는, 제의에 난색하며 거절하였다. 이후 "이승만 정부"에 의해, "암살표적", "김구" 암살시기인 1949.06.17일 국가보안법 등으로 투옥되어 옥고를 치렀다.

1950년 "6ㆍ25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과거 "별동대 대원"으로 추정되는 4명과 극적으로 배를 구해 한강을 건널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인민군"과 전투를 벌이며, 계속 남하하여 부산에 도착하였는데, 회고록에는 당시에 부산에 피난해 있던 고위층이나 사회 유력인사들의 행태에 큰 실망을 느끼고 그들을 응징했다는 부분이 보인다.

 국회의원 정치활동

1954.05.20일,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종로구 을구 4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자유당"에서 "이승만 종신제"를 위한 무소속 의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김두한은 "이승만 정부"를 비판한 혐의로, 선거법 위반과 부하 "김관철"에게 충고하며 공포탄을 쏜 것이 원인이 되어, "김관철 살해미수"로 구속되었는데, "자유당 입당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자유당 의원총회"에서 "이승만 종신제" 추진 핵심인물 중 1명이었던 "장경근"의 뺨을 때리기도 했다.

"이승만 3선 개헌" 때, 개헌한 공고 서명을 거부하였고, 국회에서 1954.11.27일 비밀투표를 한 결과, 재적의원 203명ㆍ참석의원 202명 중, 찬성 135표ㆍ반대 60표ㆍ기권 7표로 1표 차로 부결을 선포되었으나, 자유당은 "사사오입 개"헌을 일으켰다. 이후, "반 자유당" 의원들은 제명 조치되어 탈당하였고, 그도 "무소속"으로 활동하였다.

1956.01월, "진보당 추진위원회"에 조직부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부흥주택대지 2중 매매 혐의"로 시경에 내사를 받아 "진보당"을 탈퇴하였고, "노농당"으로 옮겼다. "이승만 정부"에 대한 비판하였고, "이정재"에게 국회 휴게실에서 권총으로 협박을 당했으나, "이정재를 호통쳤다"고 한다. 야당은 테러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조사위원회를 결성하려고 했으나, 당사자인 "김두한"은 야당의 결성을 반대하였다.

1956.07.27일, 지방선거 입후보 방해에 대한 야당 국회의원들이 거리시위를 한 "7ㆍ27 데모사건"에서 거리시위를 진압하는 "김종원 치안국장"의 지휘하의 경찰들과 몸싸움을 벌였다. 시가행진 이후, "김두한" 등 야당 의원 15명은 "이기붕 의장" 사직권고 결의안을 제출하였다. 지속적으로 "이승만 정부"를 비판하였고, 1956.10.05일 "이승만을 민족반역자"라고 비판하여, "국가원수 모독죄"로 의원징계 받았다.

1957.05.25일, "장충단 공원"에서 열린 야당 시국강연회에서 "경호 총책임자"를 맡았다. "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제3대 국회 당시, "한국불교 태고종ㆍ대한불교 조계종" 대립에서 "비구승"을 옹호하여, 종로구에 "대처승 본부"를 두고 있던 종교 인사들에게 탄압을 받았으며, 또 당시 "민주당" 바람 영향 등으로, "4대 국회 종로구"에서 "노농당" 후보, "5대 국회 충남 홍성"에서 "무소속", "6대 국회 종로구"에서 "무소속"등 연이어 낙선하였다. 이후 "4대 대통령 선거"에서 "조병옥 선거운동"에 참여하였다.

 제2공화국 시절

1960.08월, "장면"이 차기 총리로 유력시되자, 친일파였다는 소문이 다시 확산되었다. 08.19일, 국회에서 "장면의 총리지명 동의안 표결"이 있기 전, 그는 국회의사당에 나타나 장면의 친일경력을 문제 삼았다. "장면에게 역사적인 귀한 표를 던져서는 안 된다"는 내용과 "장면"의 창씨개명을 적은 문건을 뿌리고, 그를 국무총리로 뽑는다면 의사당을 불살라 버리겠다고 외쳤으나, 사전 제지당했고, "장면"의 총리 인준안은 무난히 통과되었다. 총 유효득표수 225표 중, 찬성 117ㆍ반대 107ㆍ기권 1로, 정족수를 채우고 총리에 피선되었다.

⑦ 제3공화국 시절

"5ㆍ16 군사정변"이후, 1962.03.01일 건국훈장 수여식 때, 그는 "부친 김좌진"을 대신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받았다. 일각에서는 그 역시 독립운동가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지만,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의 조직 폭력배와 결투한 것은 독립운동과는 무관하다는 비판 여론이 나오면서, 사라졌다. 이후에 그는 "5ㆍ16 군사정변"에 대해 관망하는 입장이었으나, "군이 원대 복귀한다"는 공약을 믿고 "애국단"을 조직하였으나 곧 해체되었다.

⑧ 한독당 내란음모사건

1965년, "한일협정 반대" 등으로 보궐선거에서 "용산구 한국독립당 후보"로 출마하여 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1966.01.08일, "5단계 혁명계획을 수립하고, 정부전복을 기도하였다"는 국가보안법 위반 및 내란음모 혐의로 구속되었다. 01.29일, 국회에서 "김두한 의원 석방결의안"이 통과되었고, 04.28일에 5년을 구형받은 이후, 05.10일에 "김두한"을 비롯한 모두 전원 무죄 선고되었다.

이후 용산에서 이재민이 발생했을 때, "서울시장"과 만나 봉천동에 터를 마련해서 생계를 이주시키게 하였고, 판잣집 철거문제와 갈등이 발생할 때마다 앞장서기도 했다고 한다. 1966.09.22일, "한국비료 주식회사"의 "사카린 밀수사건ㆍ국회 오물투척 사건"이 터진다.

 말년

"국회 오물투척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병보석으로 석방된 그는 "7대 국회의원선거" 때, "경기도 수원시 신민당 후보"로 출마하였다. 1968년, 선거 유세에서 "북한에 전깃불이 더 일찍 들어왔다"는 발언을 했다가, "북한을 찬양했다"는 혐의로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서대문 형무소 교도관 서윤환은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된 그날 저녁 김두한 씨가 비에 젖은 채 감방에 왔는데, 손과 발에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온몸이 피멍 투성이었다"고 하며, 그 다음 날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심한 고문을 당했지만 돌아와서는 "서 동지, 나 죽을 뻔 했어"라며 웃을 뿐 불만은 토로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석방된 그는 "박정희 정권"의 독재를 비판하였다. 1972.11.19일, "조일환"이라는 사람을 만나고 자택으로 돌아오는 중, 길가에서 쓰러져 11.21일 오전 09:05분 "서울 성북구 정릉동" 무허가 자택에서 "고혈압"으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는 "조시원"이 장례위원장으로 "광복장"으로 치렀다. 공교롭게도 그가 죽은 1972.11.21일은 "박정희"가 "유신헌법" 찬반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압도적인 지지로 "유신헌법을 확정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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