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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 역사ㆍ사건ㆍ인물

인물 : 3대 무장 ② 도쿠가와 이에야스 (1543~1616)

by 당대 제일 2022.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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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오다 노부나가 (직전신장ㆍ1534~1582ㆍ48세ㆍ통일 시작)"가 쌀을 찧어, "도요토미 히데요시 (풍신수길ㆍ1536~1598ㆍ62세ㆍ거의 통일)"가 반죽한 떡을, "도쿠가와 이에야스 (덕천가강1543~161673통일)"가 먹었다."고 생각했다.

 

1. 도쿠가와 이에야스 (덕천가강ㆍ德川家康ㆍ1543(오카자키)~ 1616ㆍ73세)ㆍ나고야

 "센고쿠 시대~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武將)ㆍ센고쿠 다이묘 (大名ㆍ봉건 영주)"도쿠가와 막부(1603~1867)"의 창시자ㆍ일본 마지막 막부인 "에도(도쿄)"에 막부"아시카가 막부"가 세력이 약해져, 군웅 할거하는 1C에 걸친 혼란시대를 종식시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켰다가 사망하면서, 국내에서 힘을 비축한 "이에야스"는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을 지휘하며, 강력한 정적들을 제압하고, "일본"을 통일했다. 자신의 근거지 "에도(도쿄)에 막부"를 열고, 첫 "쇼군(1603~1605)"으로, 정치체제를 안정시켰다.

• 명 언 :  자기의 분수를 알아라. 모자라는 것이, 넘치는 것보다 낫다.  오로지 자신만을 탓할 것이며, 남을 탓하지 말아라. 마음에 욕심이 차오를 때는 빈궁했던 시절을 떠올려라. 인내는 무사장구의 근본이고, 분노는 적이다. 이기는 것만 알고 지는 것을 모른다면, 반드시 해가 미치게 된다. 풀 잎 위에 이슬도 무거우면, 떨어지게 마련이다. 무슨 일이든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음을 알면, 오히려 불만을 가질 이유도 없다.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먼 길과 같다. 그러니 서두르지 말아라.

2. 도쿠가와 가 (家): 참근교대 (参勤交代ㆍ산킨 코타이)

"산킨(参勤ㆍ참근)"은 일정기간 "주군(쇼군)의 슬하"에 오고 가는 것, "코타이(交代ㆍ교대)"는 여가를 제공받아, "영지에 돌아가 행정 사무를 보는 것"을 의미한다. 각 "번"의 "다이묘"를 정기적으로 "에도(도쿄)"를 오고 가게 함으로써, 각 "번"에 재정적 부담을 가하고, "볼모"를 잡아두기 위한 "에도 막부"시대의 제도이다.

이 제도에 따라, 각 "번"은 "도쿠가와 가(家)"에 반기를 들기가 매우 힘들어졌고, "도쿠가와 가"가 15대에 걸쳐 번영을 누리는 요인이 되었다. "다이묘"들은 "1년 주기"로 "에도(江戸)"와 자신의 영지를 오가지 않으면 안 되었고, "에도"를 떠나는 경우에도 "자신의 정실부인ㆍ뒤를 이을 아들"을 "에도"에 늘 상주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측실ㆍ다른 서자의 경우는 이러한 의무에서 자유로웠다)

"이에야스"는 어촌인 "에도(江戶ㆍ현, 도쿄)" 가까이에 있던 작은 요새ㆍ농경지에 수천 명의 가신들ㆍ군사장비ㆍ식솔들을 신속히 이주시켰는데, 이곳은 "교토(京都)" 근처에 있던 "히데요시"의 근거지에서 걸어서, 1달가량 걸리는 위치에 있었다. "이에야스"가 "에도"에 거점을 정하고, "막부 정권"이 들어서면서, "에도"는 향후 250년간 평화를 구가하며, 사회적ㆍ경제적ㆍ문화적으로 큰 번영을 이루었다. "가마쿠라 시대(1192~1333)"를 기원으로 보고 있으며, 당초 "다이묘"들이 표하는 복속의 의례로써 시작되었던 것이나, "에도시대(1635)에 3대 쇼군 "이에미쓰"에 의해, "도쿠가와 쇼군 가"에 대한 군역 봉사를 목적으로 제도화되었다.

3. 1541년, "도쿠가와" 주변 인물 탐구

오카자키 성 (마츠다이라 가문ㆍ이에야스 부친 )ㆍ카리야 성 (미즈노 가문ㆍ이에야스 모친 쪽)

당시 큰 세력은 오다 가문 (오와리 성)ㆍ이마가와 가문 (슨푸ㆍ스루카ㆍ도토우미 성)상대적으로 약한 세력은 마츠다이라 가문(오카자키 성)ㆍ미즈노 가문(카리야 성)

• 마츠다이라 히로타다 (1526~1549ㆍ23세): 당시 15세오카자키 성주ㆍ히로타다는 오다이(계모의 딸)과 결혼도쿠가와 이에야스 (1543~1616)의 부친

• 미즈노 타다마사 (1493~1543ㆍ50세): 당시 48세카리야 성주ㆍ아들 : 미즈노 노부모토ㆍ오다이 오빠딸 : 오다이 (도쿠가와 이에야스 모친)

• 케요인 :"히로타다" 계모이며, "타다마사" 전부인"키요야스(히로타다 부친)"의 무력이 두려워, "타다마사"가 이혼하고, "키요야스"에게 재가감.

② 오다 노부히데 (1510~1551ㆍ41세): 오와리 성주  아들 : 오다 노부나가 (당시 8세)

노부나가는 "미노의 사이토 도산(1494~1556ㆍ62세)"의 딸인 "노히메가"와 결혼 (1548)

"이마가와 요시모토(1519~1560ㆍ41세))": 이마가와 가문(슨푸ㆍ스루카ㆍ도토우미 성주)오케하자마 전투(1560)에서 노부나가에게 살해당함. 장수 : 다이겐 셋사이(1496~1555)ㆍ센사이 선사 승려  / 매부 : 카이의 다케다 신겐(1521~1573) / 아들 : 이마가와 우지자네(1538~1615): 1568년 "다케다 신겐 + 도쿠가와 이에야스"군에 의해, "스루가 침공"을 받고 패하며, 사실상 "다이묘"로서는 멸망

4. 생애 요약

지금의 "나고야"에서 동쪽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한 무사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유년 시절은 평화롭지만은 않았다. 7살 때, 군사적 상황이 어려워져 "슨푸(현, 시즈오카 시)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 "이마가와 가문"의 인질이 되어야 했다. "슨푸"에서 군사ㆍ행정 기술을 익혔고, "이마가와 가문" 군대를 통솔하면서 군사적 경험을 쌓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그의 가문은 거의 몰락하고 말았다.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오다 노부나가"와의 전투에서 사망한 것을 계기로 고향인 "오카자키"로 돌아가 가문의 영주가 되었다. 그리고 몇 달 후, "노부나가"와 동맹을 맺고, 가문의 영지를 다스리는 일에 힘썼다. 1560년대 후반, "이마가와 가문"이 몰락하자, 이 기회를 이용해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해나갔다. 그는 유력한 무장인 "노부나가"와의 동맹에 의존해, 계속되는 내전의 역경을 이겨내는 한편, 서서히 영토를 확장하여, 1580년대 초반에는 강력한 "다이묘"가 되었다.

1582년 "노부나가"가 죽고, 그의 부하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의 지위를 그대로 계승했다. 당시 전성기를 구가했던 그는 "히데요시"의 최대 정적으로 부각되었으며, 두 사람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여러 차례 벌어졌으나 승부는 결정나지 않았다. 결국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에게 충성의 맹세를 하게 되었다.

1589년부터, 시작된 "오다와라 성" 점령전에서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에게 협력하여 전투를 벌였고 그 땅을 영지로 받게 되었다. 그는 어촌인 "에도" 가까이에 있던 작은 요새와 농경지에 수천 명의 가신들ㆍ그들의 군사장비ㆍ식솔들을 신속히 이주시켰다. 그는 유력 "다이묘"들과는 달리,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에 참가하지 않았다. 대신 군대를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자신의 영지가 가능한 한 안전하게 방비되도록 했다. 또한 "에도" 부근의 대규모 농경지를 자신이 임명한 관리의 직할로 두도록 함으로써, 주민들에게 가능한 한 많은 식량이 보급되도록 했으며, 균등 과세를 위해 토지조사를 세밀히 실시했다. 그리고 성을 개축하고 도시의 성장을 촉진시켰으며, 주민들의 원활한 식수보급을 위해 토목사업을 벌였다. 그리하여 1598년 "히데요시"가 세상을 떠났을 당시, "이에야스"는 가장 강력한 "다이묘"가 되었다.

"히데요시"가 죽자, 유력 "다이묘"들 사이에 다시 권력투쟁이 일어났는데, "이에야스"가 결국 승리를 거두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다이묘"들의 재배치였다. 충성스러운 가신을 가까이 배치하고, 적대 다이묘들의 영지를 빼앗았으며, 여러 해에 걸쳐 "다이묘ㆍ궁중 세력ㆍ승려ㆍ가신"들을 견제할 수 있는 법률을 만들고 감독기관을 두었다. 당시 실권은 없으나 의례적인 권위는 가지고 있던 "황실"은 1603년 그에게 "쇼군(將軍)"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이로써 일본 최강의 다이묘인 "이에야스"는 천황의 이름 아래 평화를 유지하는 임무를 공식적으로 맡게 되었다.

1604~1614년 동안, 권력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 다이묘들을 동원해 "에도 성"을 개축했다. 수년간 멀리 떨어진 곳에서 커다란 석재와 목재를 운반하기 위해 수천 척의 배와 수만 명의 인원이 동원되었다. 그가 죽었을 때, "에도 성"은 "넓은 해자(垓字)ㆍ높은 석벽(石壁)ㆍ나무로 된 긴 흉벽(胸壁)ㆍ큰 문루(門樓)ㆍ곡식과 동전이 가득찬 넓은 내화(耐火)창고" 등이 그물처럼 얽혀 있는 세계 최대 규모의 성이 되었으며, 주변 저택에서는 "다이묘"들이 인질 생활을 했다. 1615년 고향인 "슨푸"로 돌아간 그는 이듬해인 1616년에 병사했다. 

5. 1562년,  "오다 노부나가 (직전신장ㆍ나고야 다이묘)"와 동맹

"오다 노부나가ㆍ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뒤를 이어, 여러 가지 정책을 수행하여, "일본 근세 봉건제" 사회를 확립하였다.  1562년, 당시의 강력한 "나고야의 다이묘(大名)"인 "오다 노부나가 (직전신장)"와 동맹을 맺었다. 그의 힘을 빌려, "스루가(駿河)ㆍ도토미(遠江)ㆍ미카와"를 영유함으로써, "동해 지방"에 일대세력을 구축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풍신수길)"이 죽자, 1600년 "세키가하라(關ケ原)전투"에서 그의 지지 세력을 제거하고, 지방 제후를 압도하여, "일본 전역"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 해,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이 되고, "에도"에 막부를 개설, 패자(覇者)로서의 지위를 합법화하였다. 1614~1615년, 2차례에 걸쳐, "오사카(大阪)전투"를 일으켜,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秀賴)"를 중심으로 한 "도요토미의 잔당"을 완전히 멸망시켜, 대망의 천하통일을 완성하였다.

1605년, "히데타다(3남)"에게 "쇼군" 직을 물려준 다음에도 "오고쇼"의 자격으로, "슨푸"에 머무르며 정치에 참여하였다. 사후에는 "닛코 동조궁"에 묻혔다. 그는 100여 년 동안 무사들이 이루려 했으나 실패한 일, 즉 자신의 가문들을 영원한 권력의 자리에 오르게 하고, "일본 전역"에 지속적인 평화를 가져오는 일을 성공적으로 이룩해냈다.

1590년대에 "이에야스"는 "서부 일본"에 근거를 둔 몇몇 유력 "다이묘들"과는 달리 실패로 끝나버린 "히데요시"의 2차례에 걸친 "조선 침략"에 참가하지 않았다. 대신 동쪽에 있는 새 영지로 옮겨가게 된 것을 계기로 삼아, 군대를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자신의 영지가 가능한 한 안전하게 방비되도록 했고, "정예군"은 영지의 외곽ㆍ주요 접근도로에 배치하고 가장 세력이 약해, 위험이 없는 군대를 "에도" 가까이에 배치했다.

"나고야(名古屋)"에서 동쪽으로 꽤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무사집안인 "미카와(三河)"의 "오카자키(岡崎)" 성주 "마쓰다이라 히로타다(松平廣忠)"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당시 지방 무사가문들은 끊임없이 지속되는 내전 속에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해야만 했다. "이에야스"의 유년시절은 평화롭지만은 않았는데, 아버지는 "연형합종(連衡合從)"의 그물에 빠져들어 끊임없이 전투에 참가해야만 했다.

그가 2세였을 때, 동맹관계의 변화로 인해, 어머니는 영원히 그의 가문과 결별하게 되었고, 7세 때에는 군사적 상황이 어려워져, "어린 이에야스"는 "슨푸(현, 시즈오카 시(靜岡市))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 강력한 가문인 "이마가와 씨(今川氏)"의 인질이 되어야 했다. 

"슨푸"에서의 훨씬 안정된 생활 속에서 그는 군사ㆍ행정 기술을 익혔고, 특히 매사냥을 즐기게 되었다. "이마가와 씨"를 위해 군대를 통솔함으로써, 군사적 경험을 쌓기 시작했다. 그러나 "슨푸"에서 보낸 몇 해 동안 그는 일신상으로는 편안했지만, 늘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549년, 아버지가 측근 가신 손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접했고,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자신의 가문이 몰락해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아야 했다.

1560년,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는 서부의 강자 "오다 노부나가"와의 전투에서 사망했다.

젊은 "도쿠가와"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고향인 "오카자키(혼슈(本州)중부 아이치 현"으로 돌아가, 생존해 있던 친척ㆍ가신들을 수습하여 "가문의 영주(領主)"가 되었다. 몇 달 뒤, "노부나가"와 동맹관계를 맺는 한편, "이마가와 씨"의 무능한 신임(新任)영주를 오랫동안 잘 달래서, "슨푸"에 있는 아내ㆍ아들을 불러들였다. 그 뒤, 몇 년 동안 다른 가문들과 싸우는 일이 없게 되자, 그는 자기 영지(領地) 내의 반란세력이었던 불교 종파들을 분쇄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또한 자신의 소규모 군대의 지휘체계를 개선하고, 행정관을 임명했으며, 과세ㆍ소송ㆍ치안 절차를 규정하고, 시행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560년대 후반 "이마가와 씨"가 몰락하자, "이에야스"는 이 기회를 이용해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해나가, 1570년에는 본거지를 작은 연안도시인 "하마마쓰(浜松)로 옮기고, 이곳을 자신의 영지 내의 상업적ㆍ전략적 요지로 개발했다. 그는 유력한 무장인 "노부나가"와의 동맹에 의존해, 계속되는 내전의 역경을 이겨내는 한편, 서서히 영토를 확장하여, 1580년대 초반에는 강력한 "다이묘(大名)"가 되었다. 이때 "오카자키"를 비롯하여, "하코네(箱根)"의 산간지방까지 펼쳐진 비옥하고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을 영지로 두게 되었다.

1582년, "노부나가"가 자신에게 반기를 든 부하의 습격을 받고 상처 입은 몸으로 자결하자, "노부나가" 휘하의 가장 유능한 무장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신속하게 "노부나가"의 죽음을 설욕한 뒤, "노부나가"가 이룩했던 정치적 지위를 그대로 계승했다.

 당시 전성기를 구가했던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최대 정적(政敵)으로 부각되었으며, 두 사람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여러 차례 벌어졌으나, 승부는 결정 나지 않았다. 그러나 신중한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에게, "충성의 맹세"를 했고, "히데요시"는 만족하여 "이에야스"의 영지를 그대로 인정해주었다.

1580년대 후반, "히데요시"가 "일본 남서부의 다이묘들"에 대해, 영향력을 넓혀나가는 동안, "이에야스"는 착실히 자신의 기반을 강화해 나갔다. 그는 가신들의 세력을 강화하고, 영지의 농업생산성을 높였으며, 행정의 신뢰성을 향상시켰다. 1586년, "이에야스"는 영지의 방비를 굳건히 다지기 위해, "히데요시"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좀 더 동쪽에 위치한 "슨푸", 즉 "그가 인질로 유년시절을 보냈던 곳"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 호조 씨 (北條氏) 정벌 >

1589년, "히데요시"는 "하코네" 산지 동쪽에 대규모 영지를 가지고 있던 "다이묘 가문인 호조 씨"로부터 충성의 맹세를 받아내기로 결심했다. "호조 씨"가 이를 거부하자, "히데요시ㆍ이에야스"는 대규모 육ㆍ해군을 동원하여, 해변에 위치한 "오다와라 성(小田原城)"에 근거를 둔 "호조 씨"의 군대를 봉쇄했다. 끈질긴 지구전ㆍ포위전 끝에 "호조 씨"는 식량부족으로 끝내 항복했다. "히데요시"의 권유에 따라, "이에야스"는 "하코네" 서쪽의 5개 연안지방을 반납하는 대신, 동쪽에 있는 "호조 씨"의 영지를 물려받았다.

한편 "에도" 부근의 대규모 농경지를 자신이 임명한 관리의 직할 하에 두도록 함으로써, "에도 성(城)"에 사는 주민들에게 가능한 한 많은 식량이 보급되도록 했으며, 균일한 과세를 위해 토지조사를 세밀히 실시했다. 또한 모든 농민들의 무기를 몰수하여, 농민반란의 가능성을 감소시켰으며, 장인(匠人)과 상인들을 "에도 성"으로 불러 모았다. "성"을 확장ㆍ개축하고, 도시의 성장을 촉진시켰으며, 주민들의 원활한 식수보급을 위해, 토목사업을 벌였다.

그리하여 1598년 "히데요시"가 세상을 떠났을 당시, "이에야스"는 일본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강력한 군대와 가장 생산성 높고, 잘 정비된 "영지"를 운영하고 있었다. "히데요시"가 죽자, 유력 "다이묘들" 사이에 다시 권력투쟁이 일어났는데, "히데요시"의 가신들 중에 가장 강성하고 존경받던 "이에야스"는 권력투쟁 속에서, "동군(東軍)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1600년, "가을 교토"에서 북동쪽으로 약 80km 떨어진 곳에 있는 "세키가하라(關ケ原)에서 벌어진 대규모 전투에서 "이에야스"는 승리를 거두었다. 

"세키가하라 전투"의 승리로 명실상부한 패자(覇者)가 된 "이에야스"는 그 패권을 영속시키기 위한 조치를 신속히 취했다. 이 과정에서 여러 명의 "적대적 다이묘들"로부터 영지를 빼앗았을 뿐만 아니라, 아직 복속시키지 못한 "다이묘들"의 근거지 가까이에 있는 전략적 요충지에 자신의 심복들을 배치했다. 또한 자신과 자신의 충성스런 가신들을 위해, "중부 일본"의 거의 전역을 직할지로 만들었다.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한 뒤에는, 여러 해에 걸쳐, "다이묘ㆍ궁중세력ㆍ승려ㆍ가신들"을 견제할 수 있는 법률을 만들고, 감독기관을 두었다.

당시 실권은 없으나, 의례적인 권위는 가지고 있던 "왕실"은 그동안 "이에야스"에게 그의 세력을 반영하는 "직책 명"을 수여해왔는데, 마침내 1603년 "쇼군(將軍)"이라는 칭호를 부여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일본 최강의 "다이묘"인 "이에야스"는 "덴노(황실)"의 이름 아래, 평화를 유지하는 임무를 공식적으로 맡게 되었다. 2년 뒤, 정식으로 은퇴한 그는 "에도"를 떠나, 옛 고향인 "슨푸"로 돌아가 쾌적한 생활을 보냈다. 이때 "쇼군"의 지위를 아들 "히데타다(秀忠)"에게 물려줌으로써, 이 지위가 "도쿠가와 가문의 세습적 특권임"을 확고히 했다.

"쇼군" 시절이나, 은퇴 후에나, 그는 외교문제에 있어, "전권(專權)"을 휘두르기를 좋아했다. 당시 "중국의 명(明)조"는 붕괴 직전에 있었으므로, 해외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다. 그러므로 주로 "중국"을 상대해왔던 "일본"은 "포르투갈ㆍ네덜란드ㆍ영국" 등의 무역 요구와 "네덜란드ㆍ스페인" 등의 포교(布敎) 요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무역을 병기ㆍ상업적 이득ㆍ폭넓은 정보를 얻는 수단으로 여겼기 때문에, 이를 환영했다.

그러나 1612년 "외교사건"의 발생을 계기로, 그는 선교사들을 자신이 힘들여 만들어놓은 정치체제에 도전하는 위협적 요소로 보기 시작했다. 그 뒤, 2년 동안 선교활동을 중지시키고, "그리스도교의 포교"를 탄압했으며, 후계자들 역시 30년 동안 "이에야스의 반(反) 그리스도교 정책"을 충실히 수행했다. 그 결과, "일본" 내에서 "그리스도교"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으며, 무역도 "나가사키(長崎)"를 통해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1604~ 1614년, 아들 "히데타다"로 하여금 "다이묘들"을 동원해, "에도 성"을 증축ㆍ개축시키는 일을 벌였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커다란 석재ㆍ목재를 운반하기 위해, 수천 척의 배ㆍ수만 명의 인원이 수년 동안 끊임없이 동원되었다. 그가 죽었을 때에도, "성"은 "넓은 해자(垓字)ㆍ높은 석벽(石壁)ㆍ나무로 된 긴 흉벽(胸壁)ㆍ큰 문루(門樓)ㆍ곡식과 동전이 가득 찬 넓은 내화(耐火)창고" 등이 그물처럼 엮어져 있는 세계 최대 규모의 "성"이 되었으며, 주변 주택에서는 "다이묘들"이 인질생활을 했다. 이제 "에도"는 "장인ㆍ상인ㆍ관리ㆍ노동자들"이 활발히 움직이는 도시ㆍ항구로 번영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대규모 공사(工事)를 통해, "이에야스"는 더욱 강성해진 반면, 그 비용을 부담해야 했던 "다이묘들"은 훨씬 가난해졌다. 그러나 "이에야스"는 "도쿠가와 가문"의 강성한 군사력이 절대적 정치권력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가문의 기반이 굳건하다"고는 느끼지 않았다. 비록 "히데타다"가 "쇼군"이 되긴 했지만, 그것이 반드시 정통성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이는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秀賴)"가 아직 살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사카 성(大阪城)"에서 성장한 "히데요리"는 점차 추종 무사들을 모아들여, "도쿠가와"의 정통성을 위협하는 인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1614년까지 "히데요시"를 따랐던 세력들이 대부분 죽자, "이에야스"는 마지막 정적인 "히데요리"를 별 위험 없이, 제거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두 진영의 오랜 긴장상태가 지속된 뒤, "이에야스"는 군대를 동원해, 산발적이고 특기할 것 없는 싸움을 2차례 치른 끝에, 마침내 "오사카 성"을 함락시키고, "히데요리" 등 "성"의 실력자들을 제거했다. "도쿠가와" 세력들에게 유리하게 "영지"를 배분한 뒤, 고향인 "슨푸"로 돌아가, 이듬해인 1616년 병사했다. 그는 100여 년 동안 무사들이 이루려 했으나 실패한 일, 즉 자신의 가문들을 영원한 권력의 자리에 오르게 하고, "일본 전역"에 지속적인 평화를 가져오는 일을 성공적으로 이룩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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