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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 역사ㆍ사건ㆍ인물

인물 : 3대 무장 ① 오다 (1534~1582)ㆍ도요토미 (1536~1598)

by 당대 제일 2022.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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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무장 (武將)은 "오다 노부나가 (직전신장ㆍ1534~1582ㆍ48세ㆍ통일 시작)ㆍ도요토미 히데요시 (풍신수길ㆍ1536~1598ㆍ62세ㆍ거의 통일)ㆍ도쿠가와 이에야스 (덕천가강ㆍ1543~1616ㆍ73세ㆍ통일ㆍ에도시대)"이다.

 

1. 무로마치 시대

실정시대 (室町時代ㆍ1336~1573)ㆍ240년  / 전국시대 (1467~ 1615)ㆍ148년

1336년,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가 "겐무(建武) 정권"을 쓰러뜨리고, 정권을 잡은 때부터 1573년, "아시카가 막부(足利幕府)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게 멸망될 때까지 약 240년간의 시대ㆍ"교토(京都) 무로마치(室町)"에 궁전을 세웠기 때문에, 통상 "무로마치 시대"라고 한다.

좁은 뜻으로는 "남북조(南北朝)의 통일"이 이루어져, "막부의 일원정치"가 시작되기까지의 56년 간과 "오닌(應仁)의 난"이 일어나, "전국시대(戰國時代ㆍ무로마치 막부 말기부터 시작된 일본 혼란기ㆍ중국 춘추전국시대 빗댄 말)"로 접어든 1467년 이후를 제외한 기간을 말하기도 한다.

전대(前代)인 "가마쿠라(鎌倉)시대"까지는 천황을 받드는 "구게(公家)정권ㆍ막부 정권"이 양립하는 "2원 정치"였다.  "아시카가 시대"는 "구게 정권"을 물리치고, "무가(武家)에 의한 단독정권"을 수립한 것이 특징이다. "아시카가 시대"는 "왜구(倭寇)"가 가장 많이 발호하던 시기로, 일본 서해안의 무사(武士)나 어민들이 선단을 만들어, 조선과 중국 연안에서 해적행위를 자행하였다. 세종 때, "쓰시마 섬(對馬島)"을 정벌하여, 왜구 침범을 응징하고, 매년 50척의 무역선 내조를 허용하여, 공식적인 통상관계가 수립되었으나, "왜구"는 근절되지 않았다3대 쇼군 "요시미쓰(義滿)"때, "명나라"에 내조(內朝)하여, "명"으로부터 처음으로 "일본 국왕"의 칭호를 받았으며, "명"과의 교역도 활발하였다.

정치적으로는 "고다이고 천황(後醍蝴 天皇)의 친정(親政)"을 내세우는 "남조"에 대하여, "고묘천황(光明天皇)"을 옹립하고(북조), "남조"를 굴복시킨 권력의 확립기ㆍ최성기ㆍ쇠퇴기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사회적으로는 "장원(莊園)제도"가 붕괴되고, 그 대신 "슈고다이묘(守護大名)"가 각처에서 세력을 뻗어, "슈고다이묘들"의 세력 균형위에 유지되다가, 1467년 "오닌(應仁)의 난"이 일어나면서, 이들 "슈고다이묘들"의 세력이 각축전을 벌이는 "전국시대"를 겪은 뒤, 멸망하였다.

문화적으로는 "교토 기타야마(北山)"에 세운 "킨카쿠(金閣)"를 대표로 하는 "기타야마 문화(北山文化)"와 "히가시야마(東山)"에 세운 "긴카쿠(銀閣)"를 대표로 하는 "히가시야마 문화(東山文化)"등 "무가 문화"가 개화하였고, 동시에 "서민계급" 대두에 따른 서민문화가 형성되었다.  "오토기조시(お伽草子)ㆍ교겡(狂言)ㆍ렌카(連歌)"등 다소 외설적이지만, 생기발랄한 문화였다.

 

2. 성격 (무로마치 시대 3대 무장)

< "갑자야화 (마쓰우라 세이잔의 수필)"에 수록된 센류 >

오다 노부나가 (직전신장ㆍ1534~1582ㆍ48세ㆍ통일 시작): 울지 않는 두견새는 죽여 버리겠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풍신수길ㆍ1536~1598ㆍ62세ㆍ거의 통일): 울지 않는 두견새는 울게 해 보이겠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덕천가강ㆍ1543~1616ㆍ73세ㆍ통일): 울지 않으면 울 때까지 기다리겠다.

① 오다 노부나가 (직전신장ㆍ織田信長ㆍ1534~ 1582ㆍ48세)

목소리는 꽤 큰 편이며, 항상 무예를 좋아해, 천하고 상스럽다. 화통하고 행동력 있는 지배자. 과격하고, 급한 데가 있다. 키가 크며, 마른 체격으로 수염이 적다.  좋은 이해력과 명석한 판단력을 가졌고, 사람들로부터 이상할 정도로 외경을 받고 있다 결단력이 뛰어나고 전술에 치밀함이 있지만, 규율을 지키지 않으며, 부하의 진언을 대부분 따르지 않는다. 사람들로부터 이상할 정도로 외경을 받고 있다.

겸손히 자신을 낮추는 일은 거의 없으며, 자신 이외의 "다이묘" 대부분을 경멸하여 마치 자신의 부하나 다름없이 낮춰 말한다. 사람과 대화할 때, 돌려 말하거나 둘러대는 것을 싫어한다. 정의롭고 자비를 베푸는 행동을 즐겨 한다. 오만하고 명예를 존중한다. 술은 마시지 않는다. 사업에 만전을 기하는 한편, 공명에 최선을 다한다. 신과 부처 등, "우상"을 경시하여, "점"은 일체 믿지 않는다.  명목상은 자신의 종교가 "법화종 불교"라고 말하고 있지만, "조물주ㆍ영혼 불멸ㆍ사후 세계" 등의 존재는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② 도요토미 히데요시 (풍신수길ㆍ豊臣秀吉ㆍ1536~ 1598ㆍ62세)ㆍ오사카 성(히데요시의 집)

임진왜란을 일으킨 장본인ㆍ"조선(징검다리)ㆍ명"을 정복하고, "인도"까지 정복하려 한 것ㆍ"일본" 통일 후, 군인ㆍ무기는 남아돌고, 땅은 부족하여, 전쟁 시작ㆍ전쟁 반대제후 : 사야가(沙也可ㆍ김충선ㆍ1571~?)): 부산 상륙 후, 3,000명 부하와 바로 항복ㆍ임진왜란/ 병자호란 때의 무장ㆍ조총기술까지 조선에 전파

체격이 왜소하며, "추남"인데다가, 손가락이 6개인 "다지증"이였다고 한다.  "문맹"이었고, 이 때문에 "사이쇼 조타이"가 "히데요시"에게 글을 읽어주는 역할을 전담했다.  출신이 미천했기 때문에, 글을 읽지 못하고, 교양이 없는 인물로 여겨지기도 한다.  혼자 공부하여, "시"를 지을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하며, "노(能)"연기도 잘 했고, 선사(禪師)인 "센 리큐(千利休)"에게서 "다도(茶道)"를 열심히 배워, 종종 "다도회"를 베풀고 솜씨를 자랑했다.

"내정"보다는 "전쟁"에 어울리는 "리더"라는 견해가 있다. 특히 "임진왜란"과 관련하여, 장기적으로 부하들을 응집시키는 데에 실패한 "히데요시"는 결국 그 특유의 전투 지휘관 기질을 발휘하는 쪽으로 "정치노선"을 변경했고, 이를 위해 "임진왜란"을 일으킨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내정"과 관련하여, 그는 "가타나가리ㆍ태합검지"를 통해, "병농분리ㆍ노동력의 생산력 향상"에 힘썼으며, 이 정책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의 정책으로 계승되기도 하였다.

③ 도쿠가와 이에야스 (덕천가강ㆍ德川家康ㆍ1543~ 1616ㆍ73세)

"인내의 귀재"로 평가받는다. 일본 사람들은 그를 늘 "일본의 10걸"로 선정하면서, 존경하고 있다. 어린 시절, "부"를 여의고, 여러 차례 죽음의 위기를 겪었으며, 계속 복종을 강요당해왔다.  반면, "에도시대"에 서민들 사이에서는 천하 통일의 과정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며, "살쾡이 영감"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철저히 복종하며, "임진왜란" 도중에도 "영지만 지키며, 신중히 대처하였다"고 평가받는다.

3. 오다 노부나가 (직전신장ㆍ織田信長ㆍ1534(오와리 구니)~ 1582(교토)ㆍ48세)ㆍ나고야

전국 (戰國) 아즈치 시대 (安土時代)의 무장 (武將)ㆍ나고야 (名古屋ㆍ오와리 평야 중심부에 위치)"소총부대"를 조직한 최초의 "다이묘 (大名ㆍ봉건 영주)". 죽기 직전까지, 일본의 거의 50%를 지배하는 데 성공했다.

명 언 :  내 강운을 믿는다. 포기하지 않고 성공할 때까지 계속한다. 일은 찾아서 하는 것이다. 자신이 찾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주어진 일만 하는 것들은 잡병들일 뿐이다. 넌 정작 필요할 때, 쓸모가 없구나!

"아시카가 막부(足利幕府)"를 무너뜨리고, 일본 전국의 50% 정도를 자신의 지배하에 통일시킴으로써, 오랜 "봉건전쟁"을 종식시켰다. "다이묘들"이 지니고 있던 "분권적 구(舊)질서"를 무너뜨리고, 일본의 "정치적ㆍ경제적" 통일에 이르는 기반을 닦았다.  사실상의 "전제군주"로서, 중앙정부를 안정시키고, "전국 통일"을 이룰 여건들을 조성했다.

과감한 정책을 실시하여, "구체제ㆍ구관습의 타파ㆍ새 인물의 등용ㆍ금은 광산의 경영ㆍ화폐의 주조ㆍ도로- 교량의 정비ㆍ관소(關所, 검문소)의 폐지" 등 혁신적인 정책으로, 새 시대의 도래에 대응하였다. 이것을 기반으로 한 천하통일의 위업은 "도요토미 히데요시ㆍ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계승되었다.

1549년, 아버지 "노부히데(信秀)"의 영지를 이어받아, "오와리국(尾張國ㆍ愛知縣)"의 태수가 되고, 친척들과 영지 내의 주요가문들을 복종시킴으로써 뛰어난 전략적 재능을 과시했다. 아버지는 재산을 많이 모았으며, "무사 출신"의 가신들을 둔 정부 관리였다.

1560년 경, "오와리 구니"의 모든 영토를 자신의 손 안에 넣음으로써, 뛰어난 전략적 재능을 과시했다. 같은 해 인근 지방의 대영주였던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대군을 무찌름으로써, 일본을 놀라게 하고 일본 통일을 향한 첫발을 내디뎠다. "오와리 평야" 중심부에 위치한 "나고야(名古屋)의 신흥 계급만이 아니라, 비옥한 "오와리 평야"의 농업생산을 자신의 통제하에 두었다. 1562년, 이웃 "미카와 구니(三河國)"의의 유능한 봉건영주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동맹을 맺었다. 이 동맹으로 "배후지의 안전을 확보했다"고 생각한 그는 1567년 작전기지를 북쪽 "기후(岐阜)"로 옮겼다.

1563년,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를 도와 "교토"로 진군함으로써, "요시아키"가 "쇼군(將軍)"이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원래 "요시아키"는 자신의 형이자, 전임 "쇼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義輝)"가 암살당하자, "쇼군" 직에 앉기를 열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요시아키"와 사이가 틀어지게 되었으며, 마침내 1573년 그를 폐위시켰다.  비록 명목상으로는 "아시카가 막부"가 1597년 "요시아키"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긴 했지만, "노부나가"의 이 같은 행동은 사실상 "아시카가 막부 (무로마치 막부 (室町幕府))"의 종말을 의미했다.

1571년, 일본 불교의 한 종파인 "천태종(天台宗)"의 본산 "엔랴쿠사(延歷寺)"를 초토화했다. "천태종"은 8C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이래, 전통적으로 정치ㆍ종교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그 사이, 불교의 한 종파이며, 광신적인 "잇코 종(一向宗)"은 지방 "소 영주들"의 충성심을 저버리지 않음으로써, "요시아키"를 지원하고, 신도들로 하여금 여러 지방의 권세 있는 "다이묘들"과 손잡게 함으로써, 일본을 통일시키고자 하는 노부나가에 완강히 저항한 "잇코잇키(잇코의 난)"를 일으켰다.

그는 "잇코 종"과 직ㆍ간접적으로 10년 이상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1580년, 마침내 그가 "잇코 종"의 정치적ㆍ군사적 중심지인 "오사카 혼간사(本願寺)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황실의 중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많은 장원ㆍ사찰 토지를 빼앗았고 이렇게 확보한 토지를 사무라이ㆍ부농들에게 분배함으로써, 이들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했다.

"교토"에 자리를 잡자, 그는 "예수회 선교사"에 대한 보호조치를 확대했으며, "수도"에 교회를 세우고 "아즈치에 신학교"를 건립하도록 후원했다. 이러한 조치는 "그리스도교"를 장려하는 것이, "불교사찰들"의 영향력을 약화시킬 수 있는 정치적인 수단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1582년, 그동안 여러 곳에서 반란이 일어나 이를 평정하였으나, 6월 "혼노사(本能寺)"에서 부하인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불만을 품은 모반 습격을 받고, 부상을 입었으며, 자살하였다.

4. 도요토미 히데요시 (풍신수길ㆍ豊臣秀吉ㆍ1536(오와리 구니)~ 1598(후시미)ㆍ62세)ㆍ오사카

임진왜란을 일으킨 장본인"오다 노부나가"의 몸종 출신"센고쿠ㆍ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무장(武將)ㆍ오사카 성(히데요시의 집)ㆍ"히데요시 정실(正室)"은 후사를 낳지 못했으며, "측실"이 아들을 1명을 두었을 뿐인데, "히데요시"가 죽을 당시 6세에 불과했다. 사후, 2년 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실권을 장악했고, 1603년에 "도쿠가와 막부"가 세워졌다.

• 명 언 : 슬플 땐 웃어라, 기쁠 땐 더 크게 웃어라.  이슬로 태어나, 이슬로 사라질 운명이던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

16C "오다 노부나가"가 시작한 "일본통일"의 대업을 완수했고, 죽을 때까지 최고위 직인 "다이코(太閤, 1585~1598)"를 지냈다. 1558년 이후, "노부나가"의 휘하에서 점차 두각을 나타내어 중용되어 오던 중, 1582년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모반으로 웅지(雄志)를 펴지 못하고, "혼노사(本能寺)"에서 죽은 "노부나가"의 원수를 그가 처단함으로써, 그 뒤를 이어 전국을 통일하고자 했던 "노부나가"의 대업을 완수하기 위해 "일본 전역 정벌"에 나서, "천하통일"을 이룩하였다.

젊어서는 "기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郞)", 후에는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라고 하였다가, "다조대신(太政大臣)ㆍ간파쿠(關白)"가 되었다.  1585년, "천황"으로부터 "도요토미"라는 "성"을 하사받아, "도요토미 히데요시"로 불리게 되었다.

일본 전역을 정복한 후, 해외침략의 야심을 품고, 2차례에 걸쳐 "조선"을 침략해, "임진왜란"을 일으켰으나, 조선 전투의 불리한 결과와 실패에 크게 상심하여, 죽었다.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그가 취한 최초의 행동은 그때까지 되풀이되던 "왜구의 노략질"을 국가적 규모로 확대한 "임진왜란(1592.05.23(음 04.13)~ 1594)"을 일으킨 것이다.

• 1차 (임진왜란): 1592.05.23~ 1594 (2년)→ 화의 (1594~1597)    • 2차 (정유재란): 1597.08.27~ 1598.12.16 (2년)

"나고야(名古屋)"에 지휘소를 차린 그는 "출정군"을 9개로 나누어, 158,800명을 선두로 "조선"을 침략하게 하였고, "조선"은 처음에 패배하였으나, 전열을 정비한 관군ㆍ의병ㆍ수군의 활약으로 "왜구"를 모두 퇴각시켰다. "전란"으로 "조선"은 귀중한 문화재가 소실되었으며, 노략질 당했고, "조선의 도공(陶工)"을 납치한 일본은 "도자기 문화"를 이룩하는 터전을 마련하였다. 

1554년, "오다 노부나가"의 "고모노 (小者ㆍ몸종)"으로 일한다.

그는 "노부나가"의 눈에 들기 위해, 온갖 잔일을 도맡으면서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선조실록"에는 "노부나가에게 고용되기 전에, 그의 행차 앞에 옷을 벗고 드러누워 있었는데, 부하들이 죽이려는 것을 노부나가가 제지하고 나서, 소원을 물으니, "도저히 제가 가난해서 살 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여, 노부나가가 그에게 변소지기 일을 시켰더니, 그가 청소한 변소에서 냄새는커녕 티 하나도 나지 않았고, 노부나가가 자신의 신발을 만들도록 시켰더니, 정성을 다해 신발을 만들어 바쳤다"는 이야기를 수록하고 있다.

하루는 "노부나가"가 "금 술잔"을 깊은 우물 속에 빠뜨렸는데, "히데요시"는 큰 물동이 수백 개를 구해서 물을 담았다가, 한꺼번에 우물에 쏟아 부어, 우물이 뒤집히면서 물 위에 떠오른 "금 술잔"을 재빨리 집어내어 바쳤고, 이로써 "노부나가의 총애"를 받아, 출세 길이 열렸다고 한다.

"노부나가" 휘하의 "보병"이 되었는데, "쾌활한 성격ㆍ세련된 매너ㆍ총명한 두뇌"로 인해, "사무라이"로 발탁되었다. "오다 노부나가"의 "오와리 국(尾張國ㆍ愛知縣)출생으로, 하급 무사인 "기노시타 야우에몬"의 아들로태어났으며, 소년 시절에 집을 떠나, "도토미 구니(遠江國ㆍ현, 시즈오카 현(靜岡縣)"으로 가서, "다이묘(大名)"의 한 가신(家臣)의 "시종"이 되었다. 그는 곧 고향으로 돌아와, 당시 일본의 세력자인 "오다 노부나가" 휘하의 "아시가루(足輕ㆍ보병)이 되었는데, 곧 "사무라이"로 발탁되었다.

1568년, "노부나가"가 "중부 일본"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원정에 나섰을 때, "히데요시"는 몇몇 주요전투에 참전했고, 1573년 강력한 "다이묘" 2명을 패퇴시킴으로써, "오미 구니(近江國) 나가하마(長浜)의 영주"가 되었다.  1577년부터, "노부나가"의 명령을 받고, "산인-산요(山陰山陽:中國地方) 지방"의 정벌에 나섰으며, 그 과정에서 "빗추 구니(備中國)"을 침공했다.  그는 "하리마 구니(播磨國)의 히메지 성(姬路城)"에 진을 치고, "다카마쓰(高松)의 다이묘인 모리 데루모토"를 포위 공격했다.

1582년, "노부나가"는 자기의 가신인 "아케치 미쓰히데"의 기습을 받고 할복자살했는데, "히데요시"는 즉시 "모리"와 휴전하고, 동쪽으로 진격하여, "야마자키(山崎) 전투"에서 "미쓰히데"를 처단함으로써 "노부나가"의 원수를 갚았다.  "오다 씨(織田氏)의 가신회의"에서 "히데요시"는 "오다 씨"의 영주로 "노부나가의 손자를 추대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다른 2명의 가신들은 "노부나가의 3째 아들"을 옹립해야 한다."며, 반대하고 나섰다.

1583년, "히데요시"는 2명의 가신 중, 1명을 패퇴시켜 할복자살하게 했으며, 여러 성들을 차례로 함락시킨 뒤, 그해에 "이시야마 혼간지" 터에 "오사카 성"을 축조한다. 이어 그는 200년 이상이나 끌어온 "내전 상태"를 종식시켜 전국을 통일하고자 했던 "노부나가"의 대업을 완수하기 위해, 일본 전역의 정벌에 나섰다.

1584년, "노부나가의 2째 아들"을 옹립하고자 했던 강성한 "다이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전투를 벌였으며, 승부가 분명하게 나지 않은 상태에서, 두 사람은 "동맹 관계"를 맺었다. 1585년, "간파쿠(關白)에 임명된 이래, "태정대신(太政大臣)"이 되었으며, "덴노(천황)"으로부터 "도요토미(豊臣)"라는 "성"을 하사받아, "도요토미 히데요시"로 불리게 되었다. 그 뒤, 정적(政敵) "모리 데루토모"와 휴전을 하고, 일본 서부의 "시고쿠ㆍ규슈"를 정벌했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도움을 간혹 받기도 했다.  1590년, "이에야스"의 원조 아래, "간토(關東)ㆍ오우(奧羽)" 지방을 복속시킨 뒤, "다이묘 연합"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며, 이 연합은 전국을 장악하는 "정부"를 구성했다.

일본 전역을 정복한 "히데요시"는 "간파쿠"의 지위를 조카인 "도요토미 히데쓰구(豊臣秀次)"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은퇴한 간파쿠"를 뜻하는 "다이코"가 되었다. 이어 "조선 침략"을 준비했는데, 최종목표는 "중국ㆍ필리핀ㆍ인도"의 정복이었다.  "나고야(名古屋)"에 지휘소를 차린 그는 "출정군"을 9개로 나누어, 158,800명을 선두로 "조선"을 침략하게 하였다.  그러나 1592년에 처음 침공한 "조선 반도"의 정복도 여의치 못했는데, 이는 일본의 원정군 규모가 "조선 침략"을 완수할 정도가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중국"과의 잠정적인 휴전을 파기하고, 1597년 "제2차 조선침략"에 나섰으나, 조선 전투의 불리한 결과에 크게 상심하여,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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