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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 역사 • 사건 • 인물

사건- 45.08 : 천황 항복 방송 (45.08.15일 정오)ㆍ옥음방송 (玉音放送)

by 당대 제일 2022.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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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08.15일 정오, "쇼와 천황 (쇼와 텐노ㆍ본명 : 히로히토 (裕仁)ㆍ1901~1989ㆍ향년 88세)"이 전날에 녹음한 일명 "옥음방송 (玉音放送)"이 라디오를 통해 퍼졌다. "항복 방송"에는 "무조건 항복하겠다."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다.

 

1. 항복 방송 (천황의 항복 방송옥음방송 (玉音放送))

쇼와 천황 (쇼와 텐노본명 : 히로히토 (裕仁)1901~1989향년 88)

일본의 제124대 천황"태평양 전쟁"에 대한 "천황 히로히또"의 생각 : "군부와 의회가 전쟁 결정을 내렸고, 입헌군주로서 재가했을 뿐이다.", 전쟁 책임을 부정

 옥음 방송 (玉音放送항복방송)

"옥음(玉音)"은 일본에서 "일본 천황"의 목소리를 높여 부르는 명칭으로 알려져 있다일본 제국의 "쇼와 천황"이 무조건 항복을 알리는 "대동아 전쟁 종결의 조서" 줄여서 "종전 조서 (終戦詔書)"를 읽은 라디오 방송을 말한다. 일본 정부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날 즈음, 일본 군대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여, 이 방송을 통해 일본 국민들에게 일본의 항복을 알리게 된다.

녹음방송은 "오키나와 전투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 폭탄 투하소련의 만주 침공" 이후인 1945.08.15 일본 표준시 기준 정오에 "NHK 라디오 방송"을 통해 방송되었다.

하지만 "옥음방송"을 녹음할 때, "녹음 판"의 상태가 좋지 않았으며, "쇼와 천황"이 사용한 언어는 "궁정체"였기 때문에, 국민들에게 "쇼와 천황"의 뜻을 전달하기가 어려웠다.

때문에 "옥음방송"이 있은 뒤, 아나운서 "와다 노부카타""조서 전문"을 해설을 덧붙여 풀어서 읽었다. "와다""천황 폐하께서는 폐하의 명을 받들지 아니하고 무기를 자진해 거두어들인 백성을 나무라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짐의 이 한 몸은 어찌되든 간에 더 이상 국민이 전화에 쓰러지는 것을 눈을 뜨고 볼 수 없었다." 말씀하셨습니다. 국민에 대한 큰 자비와 사랑을 내려주신 천황 폐하의 성은을 입은 백성들 중 어느 누가 자신의 불충을 반성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덧붙였다.

1945.08.17일에는 "아시아태평양 전역"의 전장에 전투를 중지하고, "무장 해제"를 명하는 "육해 군인에게 내리는 칙어"를 발표하였다이로써 "일본 제국""패전국"이자, "전범국"이 됐으며, "일본제국"이 강제로 지배하고 있던 "조선"은 해방되었고, "타이완""청나라"를 계승한 "중화민국"을 이끄는 "장제스"에게 반환됐다.

2. 당시의 전황

1945.08.06: "미국" "몰락 작전"의 일환으로, "규슈 남부 침공 작전ㆍ원자폭탄 사용"을 추진했다.  "에놀라 게이"라는 애칭을 단 "B-29 폭격기""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해, 10만 명 이상의 즉사자를 냈다.

1945.08.09: "나가사키"에도 원자 폭탄을 투하해, 4만 명 이상이 죽음을 당했다. 같은 날, "소비에트 연방"은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거부했다는 것을 구실로, "불가침 조약"을 깨고, "만주"를 침공했다.

"나가사키"에서 원자폭탄이 터지고, "소비에트 연방""만주"를 침공하기 시작하자, "스즈키 간타로 내각""포츠담 선언" 수락에 대해, 논의하는 회의를 열었다"아나미"를 비롯한 "군부 강경파""천황제"를 비롯한 국체(國體)의 존중무장해제와 복원을 대본영이 책임지고 실시하는 것일본을 점령하지 않는 것전범자 처벌은 일본 정부에 위임한다는 것"을 항복 조건으로 내걸었다.

"군부 강경파""전범 재판"을 자율화하여, 최대한 처벌을 면하고자 했다"마쓰자카 히로마사(사법대신)야스이 도지(국무대신)오카다 다다히코(후생대신)" 등 일부 문관도 군부의 의견을 지지했다08.12, "쇼와 천황""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고, 그 뜻을 "황실"에 전했다.

항복을 반대하던 군대는 "궁성 사건"을 일으키고, "아쓰기 호가스미가우라 호"의 비행장에서도 "쿠데타" 시도했지만, 모두 수포로 돌아갔으며, "오히려 쇼와"로부터 지지를 잃으면서, 저항 의지를 상실했다군대의 저항이 일단락된 후, "항복 선언"의 사전 작업으로 "스즈키 간타로 내각""미국연합군" 각 정부에 "포츠담 선언"을 수용하겠다고 통지했다.

3. 옥음 방송 (玉音放送항복방송) 내용

1945.08.13, "일본 내각회의"에서 "포츠담 선언" 수락을 결정해, 중립국인 "스위스"를 통해 전달했다"태평양 전쟁 종전 조서", "일본 도쿄도 고쿄"에서 "쇼와 천황"이 몇 번 수정을 거쳐 완성했고, 08.14일 밤 11:20분부터 NHK 운영진 8명의 도움을 받아, "고쿄"에 녹음시설을 설치해서 녹음했다총 녹음 시간은 5분이었는데, 당시의" SP 레코드"에는 3분밖에 가지 않았으므로, 2장에 걸쳐서 녹음했다08.15일 정오, 방송한 내용은 "와다 노부카타"가 진행을 맡았고, 다음과 같이 시작했다.

"지금부터 중대하온 방송이 있겠습니다. 전국의 청취자 여러분께서는 기립하여 주십시오. 천황 폐하께옵서 황공하옵게도 전국민에 대하여 칙서를 말씀하시옵게 되었습니다. 지금부터 삼가 옥음을 보내드리겠습니다.다음 "기미가요"가 연주되었고, "천황"이 종전조서를 읽으며, 옥음방송이 시작되었다. 방송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짐은 깊이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상을 비추어 본 결과 비상의 조치로써 시국을 수습코자 하여 여기에 충량한 그대 신민에 고하노라짐은 제국 정부로 하여금, 4국에 대해 그 공동성명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게 했다무릇 제국 백성의 안녕을 꾀하고 세계만방이 공영의 즐거움을 함께 하는 것은, 예로부터 황실 조상이 남긴 법도로서 짐이 삼가 신불에 바친 바이다앞서 미국영국 두 나라에 선전포고를 한 까닭도, 동아시아의 안정을 간절히 바라는 것이었을 뿐으로, 다른 나라의 주권을 빼앗고 그 영토를 침범하는 것과 같은 바는 처음부터 짐의 뜻이 아니었다.

그런데 전쟁은 4년이 지나면서, 육해군 장병이 용맹하게 싸우고, 문무백관이 근면히 일하고, 일억 백성이 멸사봉공하여도 국면을 호전시킬 수 있을 정도를 벗어난 지 오래되었다세계의 대세 또한 우리에게 이롭지 아니하였을 뿐만 아니라, 적은 새로이 잔혹한 폭탄을 사용하여 끊임없이 무고한 백성을 살상하고 참담한 피해를 입힌 져, 참으로 전쟁은 예측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거기에 일찍이 제국은 교전을 계속하였으나, 이로써 마침내 우리 민족은 멸망에 치닫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인류의 문명마저 무너질 위험에 놓여 있다짐이 어떻게 해서든 수많은 제국의 백성들을 보호하고 황실의 신령께 사죄하며, 제국 정부로 하여금 공동 성명에 응하게 한 연유가 이와 같다.

짐은 제국과 함께 줄곧 동아시아의 해방과 공영을 위해 노력한 여러 우방들에 대해 안타까운 뜻을 보이지 않을 수 없다. 제국의 백성으로 태어나 전쟁터에서 죽고, 일하던 곳에서 죽고, 또 제 명을 살지 못하고 죽은 이들과 그 유족들을 생각하면 오장육부가 찢어지는 것 같다이제 부상을 당하고 재난을 당하고, 가업을 잃은 이들의 후생복지를 짐은 깊이 마음에 두는 바이다.

앞으로 제국이 받아야 할 고난은 일찍이 어림한 바 보다, 더 클 것이다그대들 백성의 충정을 짐은 잘 알고 있었지만, 짐은 이제 시운(時運)을 따르는 바, 고난을 참고 견디며, 후세를 위해 평화로운 세상을 열려 한다짐은 국체를 지킬 수 있으며, 충성스럽고 선량한 그대 신민들의 일편단심을 신뢰하며 항상 그대 백성들과 함께 있음을 기억하라.

허나 짐에 대한 충성이 격해져 함부로 일의 발단을 번거롭게 하고, 동포를 물리치고, 시국을 어지럽게 하여 대의를 그르치고, 세계로부터 신의를 잃는 일을 짐은 가장 경계하는 바이다모름지기 온 나라 한 집안 자손이 서로 확실히 전하여, 하늘이 주신 땅이 불멸함을 믿고, 책임이 무겁고,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생각하여, 장래의 건설에 총력을 기울이고, 도의를 두텁게 하고, 지조를 공고히 하리라 선서하고 국체의 정수를 앙양하고, 세계의 흐름에 뒤쳐지지 않을 것을 기대한다.

그대들 신민은 짐의 이 뜻을 꼭 마음에 두고 지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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