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미카제 (神風ㆍKamikaze)"란, "제2차 세계대전" 말기, 1944.10.25일, "필리핀 레이테 섬"에서 전투기에 폭탄을 싣고 적함에 충돌하여 자살 공격한 "일본 제국"의 결사 특공대이다. "가미카제"는 13C "원나라"의 일본 원정 당시, 태풍이 불어 침공군이 저지된 것을 "신이 일으킨 바람"이라 부른 데에서 따온 것이다.
1. 가미카제 (神風ㆍKamikaze): 1944.10.25일, "필리핀 레이테 섬"
1944.10.05일, 결국 "필리핀"에 "특공"을 가하기로 결정을 하고, "필리핀"에 자폭공격을 행했다. 일본이 "특공"을 행했던 이유는 앞으로 "반년이면 연료가 전부 떨어질 것"을 알고, 어서 전쟁을 끝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필리핀 공격"을 최후의 공격으로 하고, 7:3으로 강화조약을 맺어서 "만주사변" 때, 일본으로 되돌리는 것이 목적이었다.
"가미카제"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당시 황태자였던 "아키히토"는 "가미카제"에 대한 장교의 설명을 듣자, "그럼 병력을 소모하는 것뿐이 아닌가?"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 원나라 일본 원정
2번(1274ㆍ1281)에 걸쳐, "원나라의 쿠빌라이 칸(1215~1294ㆍ79세)"이 시도한 "일본(대마도ㆍ이키 섬ㆍ규슈)"에 대한 군사 침공을 말한다. 당시 "쿠빌라이 칸"은 사위인 "고려 충렬왕(1236~1308ㆍ72세)"에게 고려군의 출정을 강제로 요구하여 만들어진 "여몽원정군"이 일본을 침략했으나, "일본군"의 완강한 방어와 도중에 만난 태풍으로 인해 실패하였다.
2. 실 제
1944.10.25일, "필리핀 레이테 섬" 인근에서 발생한 해전 도중, 갑자기 "일본군 제로센 전투기" 5대가 "미 해군 함대"를 향해 돌진했다. 그 중 1대가 "미 항공모함 세인트 로"의 비행갑판에서 폭발하면서, "세인트 로"는 "최초로 가미카제에 의해 격침된 배"로 기록된다. 사실 처음 "미군"은 이 현상에 대해, 그저 "엔진이 고장 난 항공기"에 의한 "충돌 사고"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이것이 단순한 "충돌 사고"가 아닌, 애초부터 의도된 그들의 전술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42.06월 발생한 "미드웨이 해전"으로 일본은 1년간 양성할 수 있는 "조종사 수"를 그날 하루 만에 잃었다. 그리고 이후 이어진 몇 번의 전투를 거치면서, 숙련된 조종사 수는 그야말로 급감했고, 여기에 더해 압도적인 성능을 자랑하는 "미군 신형 전투기"들이 등장하면서, 일본은 더욱 수세에 몰렸다.
곧 이에 대한 댓가로 일본은 1944.06월 발생한 "필리핀 해전"에서(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 미군의 약 4배가 되는 476기의 항공기를 잃는 "대참패"를 기록하면서, 사실상 항공 전력이 궤멸된 상태에 이른다. 결과적으로 일본은 미군에 비해, "항공기 성능과 조종사 역량" 모두 상대가 되지 않는 최악의 상황에 몰리자, "더 이상 정상적인 방법으로 전쟁을 이어나갈 수 없다"는 결론 끝에 "가미카제 공격"을 계획한 것이다. 곧 일본은 전국에서 지원자를 모집했고, 당시 상황에 대해 한 일본군 장교는 "지원자가 마치 벌떼처럼 몰려들었다"라고 표현했다.
이들은 "최소한의 훈련" 만을 받고 실전에 투입됐는데, 그 훈련에는 어떻게 목표물에 충돌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지, 또 만약 목표물을 찾지 못할 경우 어떻게 되돌아오는지, 등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이들은 "절대 눈을 감지 말라"고 교육 받았는데, 왜냐하면 충돌 전에 눈을 감는 행위는 성공률을 낮출 수 있기에, 충돌을 앞두면 꼭 눈을 뜬 상태로 "필살"이라고 소리쳐야만 했다.
한편, 현대에 이르러, 과연 이 비상식적인 전술이 자발적으로 이뤄졌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는데, 2006년 "요미우리 신문의 와타나베 쓰네오 편집장"은 일본 민족주의자들의 "가미카제 미화"에 대해 이러한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그들이 용맹함과 기쁨으로 가득 차서, "천황 만세!"라고 울면서 떠났다는 것은 모두 거짓말이다. 그들은 도살장의 양이었고, 일부는 일어서지도 못하고, 정비병들에 의해 운반되어 기내로 밀려들어갔다"
출격이 결정된 조종사들은 "유서 1통"을 집으로 보내고, 마지막으로 항공기에 탑승하기 직전, "일종의 의식"을 진행했다. 이들은 "일본 천황"이 내린 "사케"를 나눠 마시고, 사후 진급 약속과 함께, 특히, "야스쿠니 신사에 안치된다."는 보장을 받았다.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 천황"이 참배하기 위해 방문하는 유일한 신사로, 일본인들은 "야스쿠니 신사"에 안치되는 것을 엄청난 영광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신사에서 만나자"라는 작별 인사를 끝으로, 조종사들은 항공기에 몸을 실었다.
"가미카제용 항공기"에는 폭발 시 최대한의 위력을 내기 위해, 폭탄들과 연료가 가득했다. 또한, 이들은 레이더를 피해, "미 군함"에 접근하기 위한 2 가지 방법을 썼는데, 하나는 파도 위에서 저고도로 비행하다가 목표물이 시야에 보이면, 급히 고도를 높인 다음, 최대한의 속도로 충돌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처음부터 아주 높은 고도에서 비행하다가 목표물이 시야에 보이면, 비스듬히 하강하여 충돌하는 것이었다.
이때 미군은 목재로 된 갑판을 사용했기에, 만약 공격이 빗나가기만 해도 몇 주 동안은 배를 사용하지 못하는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가미카제 부대"가 최대의 활동을 한 시기는 "태평양 전쟁" 최후의 전투로 불리는 "오키나와 전투" 때였다. 이때 일본은 "미군의 상륙 작전"이 수행 중이던 1945.04.01.~ 05.25일까지, 무려 약 1,500기의 항공기를 작전에 동원했지만, 약 30척의 미 함선을 격침시켰을 뿐이었다. 이는 전쟁 말기가 되면서, 일본군의 숙련된 조종사들은 거의 남아있지 않고, 수준 미달의 신참 조종사들로만 "가미카제 부대"가 꾸려진 탓이었다.
한편, "미 공군" 웹페이지와 많은 군사 전문가들에 따르면, "태평양 전쟁"을 통틀어 약 2,800회의 "가미카제 공격"이 있었고, 그 중 약 14%만이 목표물에 도달하여, "미 함정" 약 50여척이 침몰하고 368척이 손상을 입었으며, 미군 약 4,900명이 사망하고, 4,800여 명이 부상당했다고 기록했다. 결론적으로 앞선 수치가 증명하듯, 이 무모하고 비상식적인 전술은 "이미 개전부터 결정되어 있던 태평양 전쟁의 결말"을 엄청난 희생을 통해, 단지 조금 지연시켰을 뿐이었다.
3. 역사
"자폭 공격"을 목적으로 한 부대가 편성된 것은 전쟁 말기이다. "가미카제 특공대"를 편성하기 전부터, 자발적으로 자폭 공격이 행해진 경우도 있었다. 1944.04.14일, "안다만 제도"로 향하는 육군 수송선을 호위하던 비행기가 "미 해군 잠수함"이 발사한 어뢰 3기를 발견, 기관총을 난사하면서 어뢰에 돌진하여, 전사하고 어뢰파괴에 성공했다.
1944.08.20일, "미 육군 항공군 B-29 폭격기"에 의한 "야하타(八幡) 공습"에서는 요격하러 나온 비행기가 폭격기에 몸통 박치기를 하여, 공중 폭발을 일으켜 추락시켰다. 또 파편으로 인해 타격을 받은 폭격기도 함께 추락하여, B-29 2기를 격추하였다.
1943.06.29.일, "적 함선에 대해 특공(특수 공격)"을 행하는 "특수항공대" 편성의 구상이 본부에 제출되었지만, "아직 그럴 시기가 아니다"라며, 이를 거부했다. 후에 "마리아나 해전"이 일본의 패배로 끝나자, 다시 "특공대" 편성 의견이 나왔다. "마리아나 해전" 이후에, "더 이상 다이아타리(体当たり) 밖에 방법이 없다"는 의견이 많아지고, 일본 해군에서는 "특공병기"의 연구가 진행되었으나, 이는 "가미카제 특공대"와는 관계가 없다.
가미카제는 비행기 부대였지만, 해상에서도 이러한 것들이 있었다. 일본에서 갑표적(甲標的)이라는, 적에게 다가가 어뢰를 발사하는 소형잠수함 병기가 개발되었는데, 실제 진주만공격때도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 갑표적은 어뢰발사후 다시 모함으로 돌아오는 것을 목표로 했으며 처음에는 자폭 공격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갑표적은 자력으로 모함까지 귀환하는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고 실제로 작전 수행후 돌아온 갑표적은 하나도 없었다. 사실상 일회용 병기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나중에는 이것을 토대로 인간어뢰가 구상되어 특공에 사용된다.
4. 관련
① 사사카와 료이치(1899~ 1995ㆍ96세): 가미가제 특공대 개념의 창안자
"일본 오사카 부"에서 양조장 장남으로 태어나, 1925년 지방 의원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예능 사무소"를 운영하는 한편 주식에 손을 대 재산을 모았고, 군에 비행기ㆍ비행장을 헌납했다. 전후 "A급 전범 용의자"로 체포돼 "스가모 감옥"에 3년간 수감됐지만, 이후 불기소 결정을 받아 석방됐다. 언론에서 "파시스트ㆍ우익"으로 불렸다.
② 오니시 다키지로 (1891~1945ㆍ54세): 가미카제 특공대 아버지
일본의 해군 중장으로, 전황이 악화되자 자살공격을 제안하였다. 일본이 항복을 한 후, 할복자살을 시도하였고, 15시간 후에 사망하였다. 유서에서 전사자에게 자살공격을 명령한 것을 사죄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일본의 재건과 세계 평화에 힘써줄 것을 당부했다. 그가 할복에 사용한 칼은 현재 "야스쿠니 신사"에 전시중이다.
③ 아아 가미카제 특별공격대 : "가미카제 특별공격대"의 전과를 기리는 군가
1944.10월, "레이테 만 해전" 이후, "가미카제 특별공격대"의 공격전과를 기리기 위해서 만들어진 군가로, 작사는 "노무라 토시오", 작곡은 "오세키 유우지"가 했다.
④ 반자이 돌격 (반자이 도쓰게키ㆍ만세돌격): 백병전ㆍ일본군의 자살돌격
일본군이 "덴노 헤이카 반자이(천황 폐하 만세ㆍ天皇陛下万歳)를 외치던 것에서 유래하였고, 일본군이 "태평양 전쟁" 중에 사용했던 전술. "태평양 전역"에서 적에게 포위되거나, 적의 중심을 뚫고자 했을 때, 총검이나 카타나(일본 고유의 도검)를 들고, 적진 중심으로 달려 들어가 공격했다. "백병전"이라는 구식 전술은 "현대 화기"로 무장한 "미군"에게 통하지 않았다.
⑤ 가이텐 (回天): 인간어뢰ㆍ길이 14.7mㆍ780Kg의 탄두 탑재
전술무기로 어뢰의 명중률을 높이고자, 어뢰에 조정 장치와 스크류를 달아 조종사가 직접 어뢰를 몰고 적함에 들이받게 함으로써, 마치 수면 아래에서 이뤄지는 가미카제와 같은 방법
⑥ 후쿠류(伏龍): 자살잠수부ㆍ장비 = 잠수복 + 3.5L 용량의 압축 산소통 2개
"엎드린 용"이라는 뜻으로, 연합국의 본토 상륙 저지를 위해 "수중 가미카제 공격" 목적ㆍ보통의 잠수부처럼 보였지만, 3.3m 정도의 긴 장대 끝에 15kg tnt를 장착한 기뢰를 소지하였다. 주로 해지에 숨어 있다가, 연합국의 배가 보이면 배 근처로 지나가, 막대 끝의 기뢰를 배와 충돌하여 폭파시키는 임무를 수행하였고, 물론 잠수부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⑦ 신요우 (震洋): 자살 보트 • 가이류(海龍): 자살 잠수함
⑧ 바이카 (梅花): 자살 공격기 • 토카 (藤花): 자살 공격기 • 오카 (櫻花): 자살 공격기
⑨ 미쓰비시 A6M 영식 함상 전투기 : 제로센 전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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