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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 역사 • 사건 • 인물

사건- 41.12 : 진주만 (眞珠灣ㆍPearl Harbor) 공습

by 당대 제일 2022. 1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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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만 (眞珠灣ㆍPearl Harbor) 공습"은 "미국 하와이 주 오아후 섬"의 "미 해군 진주만 기지"를 "일본 해군"이 기습한 공격이다. 1941.12.07일 아침, 일본 해군이 진주만에 대한 공격을 가했다. 기습 공격은 "미 태평양 함대"와 이를 지키는 "공군ㆍ해병대"를 대상으로 감행 되었다.

 

1. 진주만 (眞珠灣ㆍPearl Harbor) 공습

"야마모토 이소로쿠 사령관"은 "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쟁"의 시작으로 폭격을 계획하였고, "나구모 주이치 부사령관"이 지휘를 맡았다.  항구에 있지 않았던 "태평양 함대"의 "항공모함 3척ㆍ유류 보관소ㆍ병기창" 등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  미국은 이와 같은 자원을 이용해서, 6개월~ 1년 사이에 원상복구를 할 수 있었다.  미국 국민들은 "진주만 공격"을 배신행위로 보고, "일본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일치단결하여 복구에 전력을 기울였으며, 이는 훗날 일본 제국의 패망으로 이어졌다.

• 일 시 : 1941.12.07 (일)             • 장 소 : 하와이 주 진주만             목 적 : 미국 태평양에서의 해군력을 무력화하여, 전면전이나 동시 다발적인 준비된 공격을 잠시나마 막는 것             결 과 :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는 즉각적인 이유가 되었다.  일본 제국의 기습 공격 성공

• 지 휘 : 야마모토 이소로쿠(사령관)ㆍ나구모 주이치(부사령관)ㆍ이와사 나오지(26세, 입안자)             피 해 : 군인(2,334명 사망1,143명 부상)민간인(103명 사상)항공기(188대 상실159대 손상)전함(4척 침몰1척 좌초3척 손상)순양함(3척 손상)구축함(3척 손상)기타 함선(2척 침몰1척 좌초2척 손상) / 일본 : 군인(64명 사망ㆍ포로 1명)항공기(29대 상실74기 손상)소형 잠수함(4척 침몰1척 좌초)

※ 진주만 (眞珠灣Pearl Harbor)

미 태평양 함대 사령부가 있는 곳ㆍ미 하와이 주 오아후 섬ㆍ호놀룰루의 서쪽에 위치한 만1887, 선박을 위한 수리석탄 공급소를 유지보수 할 예외적인 이용권을 취득하였다 "진주만"의 원래 이름은 "진주의 물들(Waters of Pearl)"을 뜻하는 "와이 모미(Wai Momi)" 또는 "긴 언덕"을 뜻하는 "푸울로아(Puʻuloa)"였다.

일본은 "만주(만주사변ㆍ1931.09~ 1932.02)"를 점령한 몇 년 뒤인 1937년부터 중국과 전쟁을 하고 있었다.(중일전쟁ㆍ1937.07~ 1945.09) 1941년, 일본과 미국과의 오래된 긴장이 더 고조되었다. "미국ㆍ영국"은 일본의 무기 제조에 필요한 "고철 수출"을 금지했으며," 석유 수출 금지ㆍ미국 내 일본 재산 동결ㆍ일본 선박의 파나마 운하 통과 거부"로 중국 내에서의 군사행동을 위축시키고자 했다.

1941.11.26일, "헐 노트(Hull note)"를 마지막으로 외교적 노력은 절정에 다다랐고, "도조 히데키 수상"은 자신의 각료들에게 이것이 최후통첩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석유 봉쇄"는 유전이 없어서 대부분의 석유를 "미국ㆍ인도네시아"에서 수입하던 일본에게 치명적인 위협이었다.

※ 헐 노트 (Hull note): 미국과 일본 간의 협정의 기초 개요 (日米協定基礎概要案)

일본 제국의 진주만 공격과 미국의 대일선전포고 이전에 미국 정부가 일본 제국에게 전달한 문서1941.11.26, "미국 국무장관 코델 헐(Cordell Hull)""주미대사 노무라 기치사부로"미일교섭 대사 구루스 사부로"에게 전달하였으며, 사실상의 대일 최후통첩이었다.

2. 일본 지도자들은 3가지 선택을 할 수 있었고, 마지막 방법을 선택했다.

 미국ㆍ영국의 요구에 응하여, 중국에서 철수하는 것           유류 부족이 군사력 약화를 가져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           충돌을 확대하여, 동남아시아의 자원 획득을 시도하는 것

1941.11.26일, "일본 연합 함대"가 "진주만"을 향해 출정한 날이다. ("헐 노트(Hull note)" 통지일) 일본은 미국이 제시한 "헐 통지문" 내용과 상관없이 그 이전부터 전쟁을 준비해 왔었다. 그 근거로 일본이 전쟁을 준비한다는 보고서를 "주일 미국 대사관 조지프 그루(Joseph Grew) 대사"가 본국에 송신하였으나, 유럽 내 전쟁 문제에 몰두하던 미국 정부는 그것을 묵살하였다.

일본은 "진주만" 수심이 15~ 30m밖에 되지 않아, 그 정도 수심에서 어뢰공격을 하기 위해, 어뢰 머리에 "충격완화장치ㆍ수평안정장치"를 장착하여 "B5N 뇌격기"로 뇌격하여, 최소 16발~ 최대 21발이 적함에 명중하였다.

일본군의 "공격 임박설"에 대한 사전 정보들은 많았으나, 아무도 이 정보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1941.01월, "주일대사 조셉 그류"는 "일본군의 진주만 공격계획 정보"를 입수했다. 공격개시 수 시간 전, "진주만" 외곽에서 1대의 "잠수함"이 발견되고, 다른 1대는 원인 불명인 채 침몰되었으며, "오아우 북쪽" 해안 레이더 기지에서는 거대한 비행물체가 포착되었다. 많은 관리들은 "일본군의 공격임박설"을 알고 있었으나, 그 대상이 일본으로부터 5,000마일 떨어진 "진주만"이 아닌 "필리핀"이라고 생각했다.

1941.12.07일, "진주만의 일요일" 아침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하루의 일과가 진행되었지만, "진주만" 북쪽 200마일에서는 차가운 물살을 가르며 항진하는 항모 위에서 항공기들이 발진하고 있었다. 일본군 항공기의 라디오에는 하와이 방송국에서 흘러나오는 달콤한 음악이 들려오고,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어서 공격 목표물을 훤히 볼 수가 있었다고 당시 공격에 참가했던 "일본제국 해군 소좌 미쯔오 후지다(Mitsuo Fuchida)"는 회고했다.

심지어, 레이더에 일본군 전투기ㆍ폭격기가 감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당일 아침녘에 오기로 한 "B-17 폭격편대"로 오인하게 된다. 다만 당시 "일본군 함재기"는 "항공모함"의 위치가 노출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크게 우회해 "진주만"의 북동쪽 방향에서 접근하였기 때문에 충분히 오인의 여지가 있었으며, 실제로 이후 군사재판에서도 당시 근무자들에 대한 태만을 적용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3.  진주만 공격 이후 상황

"루즈벨트 대통령"은 12.07일을 "치욕의 날"로 선포했고, 그로부터 3일 뒤 "미국 의회"는 전쟁을 선포했으며, 미국인들은 일본이 본토로 쳐들어 올 것을 대비해 전쟁 준비를 했고, 애국심에 군대에 자원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한인들은 "진주만 공격" 이후, 일본인에게 반감을 사게 된 미국의 생각을 반겼으며, 미 정부에 한인으로 구성된 미 육군부대를 훈련시켜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캘리포니아주 방위군 휴스 대령"은 "한인 중대"를 조직하는데 협조해 주겠다는 약속을 해왔으며, 이에 나이가 18~ 64세까지인 한인들 50명이 지원했고, 중국인ㆍ필리핀인들도 가세하여 "동양인 대대"가 구성되었다. 대대 이름은 "맹호군"이었고, 대대장은 "김용성"이었다. "맹호군"의 정식 인가가 1942.04.26.일에 나왔고, 대대기가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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