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리틀 공습 (Doolittle Raid)"은 1942.04.18일, "제임스 해롤드 둘리틀 (지미 둘리틀) 중령"이 지휘하는 "B-25 미첼 경폭격기 편대"가 "항공모함 USS CV-8 호넷"을 출발하여 "일본 본토"를 폭격한 사건이다.
1. 연합군 반격 (둘리틀 공습ㆍ산호해 해전ㆍ미드웨이 해전)
① 1942.04.18 : 둘리틀 공습 (Doolittle Raid)

"둘리틀 중령"의 지휘 하에 "도쿄ㆍ요코하마ㆍ요코스카ㆍ가와사키ㆍ나고야ㆍ고베ㆍ욧카이치ㆍ와카야마ㆍ오사카" 등 일본 각지를 "B-25 미첼 폭격기(16대)"로 폭격하였다. 이 공습으로 사상자 363명, 가옥파괴 약 350동의 손해를 주었다. 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불침의 하늘"이라 호언장담하던 일본의 군부, 특히 일본해군 상부에 준 충격은 엄청났고, 미국은 비록 일본에 큰 피해를 입히진 않았지만, 이 사건은 미국인들에게 큰 희망을 주었다.
그리고 이 "둘리틀 공습"을 토대로 1942.06월 초에 미ㆍ일 양국의 운명을 뒤바꾼, "진주만 공격" 후 2번째로 대규모 전투인 "미드웨이 해전"이 벌어지게 된다. 일본 본토가 취약하다는 것을 드러낸 심리적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가장 큰 공습의 효과는 일본군이 "미드웨이"에 재앙적인 폭격을 개시했다는 것이었다.
② 1942.05.04~ 08 : 산호해 해전 (태평양, The Battle Of The Coral Sea)
"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쟁"의 주요 전투 중 하나로, 일본 해군과 미국ㆍ호주연합 해군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1942.05월, "전함"이 보이지 않은 채, 오직 "항공기" 만이 사용된 첫 전투가 "산호해 해전"이었다.
• 결 과 : 일본군 전술적 승리ㆍ 미군 전략적 승리 • 피 해 : 미국 : 전사(656명)ㆍ항공기(69대)ㆍ정규 항모(2척)ㆍ함선(3척) / 일본 : 전사(966명)ㆍ항공기(92대)ㆍ경 항모(1척)ㆍ함선(4척)

양측 "항공모함"이 서로를 발견하면서 시작되었고, 그 직후 서로를 향해 직접적인 공격을 가했다. 일본은 "남태평양"에서 방어를 강화하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뉴기니"의 수도 "포트 모레스비"ㆍ"남동 솔로몬 제도"의 "툴라기"를 소유하고자 하였고, 이를 위한 작전명은 "MO 작전"으로 불린다. 여기에 일본의 "정규 항공모함(2척)ㆍ경 항공모함(1척)이 "침공대"를 지원하기 위해 남하하였다. 함대의 총책임자는 "이노우에 시게요시 제독"이었다. 미국은 암호해독을 통해, 일본군의 계획을 알아냈고, "정규항모(2척)ㆍ미국-호주 순양함대"를 파견하였고, 이 함대의 총책임자는 "프랑크 플레쳐 제독"이었다.
05.03~ 04일, 일본군은 성공적으로 "툴라기"를 침공, 점령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몇몇 전함이 "미국 정규항모 요크타운"의 항공공격을 받아 침몰하거나 손상되었다. "미국 항공모함"이 근처에 있음을 알아차린 일본 함대는 연합군의 함대를 수색ㆍ격멸하기 위해 "산호해"로 진입하였다.
05.07일, 양측 함대는 2일간 계속해서, 서로의 "공격기"를 주고받으며 격렬하게 싸웠다. 첫날, 미국은 일본의 "경 항공모함 쇼호"를 침몰시키는 성과를 거두었고, 일본은 구축함 1척을 침몰시키고 급유함 1척을 대파하여, 첫날은 "미국의 판정승"으로 끝났다. 그러나 다음날, 일본이 "미국 정규항모 렉싱턴"을 대파하여 스스로 침몰하게 했으며, 다른 "정규항모 요크타운"도 대파시킨데 반해, 미국은 일본의 "정규항모 쇼카쿠"를 대파, "정규항모 즈이카쿠"를 소파하는데 그쳐 더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런 과정에서 양측은 엄청난 "항공기" 피해를 입었으며, 양측 함대 모두 물러났다. 공중 엄호력이 약해진 것을 우려한 "이노우에 제독"은 "포트 모레스비 침공군"을 물렸으며, 후일을 기약했다.
가장 비싸고 진수시간이 오래 걸리는 "정규 항모"가 침몰하였으므로, 피해상황만 놓고 보면, 일본의 승리였으나, 이후의 전쟁전개상황을 고려해 보았을 때, 역사가들은 "미국의 승리"로 판단한다. 그 이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일 항공모함 쇼카쿠ㆍ즈이카쿠"이다. "쇼카쿠"는 대파 당했고, "즈이카쿠"는 항공기의 손실이 막심하였으나, 일본의 산업력으로는 보충이 늦었다. 결국 이 두 "항공모함"은 이후, "미드웨이 전투"에 참가하지 못하였으며, 미국은 "미드웨이"에서 일본을 이길 수 있었다.
"미드웨이"에서 일본은 완전히 허를 찔렸으나, "쇼카쿠ㆍ즈이카쿠"가 포함되어 있었다면, 모든 전략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이를 뒤집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판단이다. 물론, 미국 역시도 이 전투에서 "정규항모 렉싱턴"을 잃고, "요크타운"도 큰 손상을 입었지만, 엄청난 수리력을 발휘하여, "요크타운"을 끝내 "미드웨이 전투"에 참가시켰기 때문에, "산호해 해전"은 일본이 전술적으로는 승리하였으나 전략적으로는 미국이 이겼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미드웨이 전투"에서 패한 일본은 다시 "포트 모레스비"를 공격하지 못했으며, "연합군"은 이후 "과달카날 전투ㆍ뉴기니 전투"에서 큰 이점을 얻을 수 있었다. 이후 "남태평양"에서의 일본의 방어는 부서졌고, "2차 세계대전" 일본의 항복에 크게 기여하였다.
③ 1942.06.04~ 07 : 미드웨이 해전 (미드웨이 섬 해전)
"태평양"의 전략요충지인 "미드웨이 섬"을 공격하려던 "일본 항모기동부대"가 벌떼처럼 기습적으로 달려든 "미 항공기"의 공격을 받아 궤멸되어, 참패를 당한 전투이다. 미국이 일본으로부터 전쟁의 주도권을 가져와, "태평양 전쟁"의 판도를 바꾼 해전이다.
• 결 과 : 미국(연합군)의 결정적 승리 • 피 해 : 미국- 전사(307명)ㆍ항공모함(1척) / 일본- 전사(3,057명)ㆍ항공모함(4척)

"일 항공모함" 4척의 손실로 일본군의 확장 정책은 제한이 가해졌고, "연합함대" 또한 베테랑 조종사 다수의 사망으로 운용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미드웨이 해전"은 "산호해 해전"에 이어, 처음부터 "전투함"의 포격전 없이, "항공모함 함재기"로 치러진 2번째 전투로, 서로 직접 보는 일 없이, 오직 "항공기" 만으로 승부를 냈다. 이 전투에서 미국은 일본의 "항공모함 4척"을 격침시켜, "태평양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반격으로 나설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일본"이 "산호해 해전"에 이어, "미드웨이 공략"을 결심하게 된 것은 "둘리틀 폭격대"의 "일본 본토 공습" 때문이었다. 당시 일본군 지휘부는 "괴링"의 큰 소리 못지않게, "감히 외국군이 일본 본토를 공격하지 못한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는데, 당시 일본과 전쟁 중이던 교전국 중에 "일본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국가는 없었기 때문이다.
1942년 중반, 일본군은 "인도양~ 중앙태평양"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으나, 이것을 유지하거나 방어할 물자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욱이 "연합함대 정책"은 방어 전략에 있어서 부적절하다는 것도 밝혀졌다. 대신에, 일본군은 "남태평양과 중앙태평양" 지역에 추가적인 공격을 가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진주만"에 주둔한 요원들은 "포트모르즈비"가 다음 공격이 될 것이라는 것을 밝혀낸 "연합군 암호 해독가"들의 성공으로 인해, "미군"은 일본군의 전략을 알아채게 되었다. 일본이 "포트모르즈비"를 점령한다면, "북부ㆍ서부 호주" 일대의 제해권을 일본군이 장악하게 되며, 이렇게 되면 "호주"가 고립될 위험이 있었다.
1942.05월, "전함"이 보이지 않은 채, 오직 "항공기" 만이 사용된 첫 전투가 "산호해 해전"이었다. "렉싱턴"이 격침되고, "요크타운"이 큰 피해를 입었지만, 일본군은 "항공모함 쇼호"를 잃었고, "쇼카쿠" 또한 큰 피해를 입었으며, "즈이카쿠"의 일본 공군이 막심한 피해를 입어, "미드웨이"에서 두 항공모함 모두 출격할 수 없게 되었다. 연합군의 손실이 일본군보다 컸음에도, "포트모르즈비"에 대한 공격은 폐지되었고, 일본군의 침공 병력이 철수함으로써, 연합군은 전략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일본군은 "호주"에 대한 침공 계획을 폐지하였다. 또한 이 전투 후, 일본군은 "전함ㆍ전투기ㆍ잘 훈련된 조종사"들이 부족하게 되었다.
"산호해 해전" 이후, "야먀모토"는 작전이 가능한 "항공모함"이 총 4척(소류ㆍ카가ㆍ아카기ㆍ히류)이 있었다. "야먀모토"는 "니미츠 제독"이 "USS 엔터프라이즈(CV-6)ㆍUSS 호넷(CV-8)"만을 보유하고 있다고 믿었다. "USS 사라토가(CV-3)"는 어뢰 공격으로 수리에 들어갔고, "요크타운"은 "산호해 해전"에서 피해를 입어, "일본 정보국"은 이 배가 격침되었다고 믿었으나, "요크타운"도 "미드웨이 전투" 3일 후 출격할 수 있었고, 민간 요원들이 중요한 전투에 참여할 수 있었다.
1942.05월, 연합군 암호 해독가는 "야마모토"의 다음 활동이 "미드웨이 환초 공격"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이것은 "미 항공모함"을 함정으로 이끌어내어, "태평양"에서 미국의 전략적 전력을 파괴시키려고 하는 것에 있었다. "야마모토"는 "둘리틀 공습"에 맞서, 일본의 방어전선을 확장시키기 위한 계획으로 "미드웨이"를 점령하고자 했다. 초기에 일본군은 "알류산 열도"를 공격하기 위해, 북쪽으로 이동했다. 다음 계획은 "니미츠"에 남아있는 항공모함을 제거할 기회를 얻기 위해, "미드웨이"를 점령하는 것이 되었다.
"나구모 제독"은 전술적 사령관이 되었지만, "미드웨이 침공"에 중점을 두었다. 이는 "야마모토"가 "니미츠"의 개입에 어떠한 대안도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 함대"의 장거리 비행기 순찰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플레쳐"의 항공모함은 들키지 않고 엄폐 위치로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나구모 제독"은 4대의 항공모함에서 272대의 비행기를 운용할 수 있었고, 미군은 348대의 전투기를 운용할 수 있었다.
"니미츠"가 예상한대로, 일 함대는 "미드웨이"에 06.04일 도착하였고, "PBY 카탈리나 정찰기"에 의해 발견되었다. "나구모 제독"은 "미드웨이"에 첫 공격을 수행했으며, "플레쳐"는 그의 항공모함을 발진시켜, "나구모"의 항모에 접근하기를 원했다.
9:20분경, 미국의 첫 항모가 도착했고, "호넷"의 "어뢰폭격기"가 도착했으나, 이들의 공격은 협조가 잘 안되었으며 비효율적이었다. 이들 전투기는 1척도 격침하지 못했으며, 15대의 전투기 모두 "제로기"에 의해 격추되었다. 9:35분경, "엔터프라이즈"에서 추가적인 "어뢰폭격기(15대)가 공격을 가했지만, 14대가 격추되었다. "플레쳐"의 공격은 비조직적이었고, 비효율적인 것처럼 보였지만, "나구모"의 전투기들을 해상고도까지 낮추는데 기여해, 더 많은 연료ㆍ탄약을 소모하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급강하 폭격기"가 고고도에서 접근했을 때, "제로기"는 방어할 위치에 없었다. 더욱이 "나구모 제독"의 항공모함 4대는 어뢰를 피하기 위해 편제에서 이탈했고, "대공화망"을 집중시킬 수 없었으며, "급강하 폭격기"는 "일 항모"에서 항공요원들이 전투기를 재급유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일본군 전투기" 정찰이 수행되지 않고, 항공모함이 최대로 취약해졌을 때, "엔터프라이즈ㆍ요크타운"에서 출격한 "SBD 돈틀리스"가 공격을 수행했다. 일 항공모함 "소류ㆍ카가ㆍ아카기"가 화염에 휩싸였으며, 몇 분 후 항공모함 내에서 수많은 인명 피해가 났다. "히류"는 "급강하 폭격기"에 맞서, 미 항공모함에 반격을 가해, "요크타운"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미 항공모함들의 2차 공격 때, "히류"가 발견되어, 완전히 파괴되었다.
"히류"는 "나구모 제독"이 사용할 수 있는 마지막 항공모함이었다. "항공모함"을 잃고, 미군이 일본 전함의 범위에서 벗어나자, "야마모토"는 공격을 취소하였다. "미드웨이"는 "미국 기지"로 남아 있게 되었다.
2. 1944년 : 일본군 반격 (임팔 전투ㆍ대륙 타통 작전)
① 1944.03.08~ 07.03 : 임팔 전투 / 우호 작전 (ウ号作戦)→ 일본
"버마(현, 미얀마)"를 점령한 일본군이 "인도"를 점령하기 위해, "인도"의 "임팔"을 공격했다가, 영국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전투
• 장 소 : "인도"의 "임팔" • 결 과 : 연합군의 결정적 승리→ 일본군은 막대한 손실ㆍ전쟁이 끝난 후, "자유인도 임시정부"는 소멸 • 교 전 : 영국ㆍ중화민국ㆍ인도 제국 - 일본 제국ㆍ자유인도 임시정부 • 병 력 : 영국- 보병사단(4개)ㆍ기갑여단(1개)ㆍ공수여단(1개) / 일본- 보병사단(3개)ㆍ전차연대(1개) • 피 해 : 영국- 17,500여명 사상ㆍ 일본- 52,879명 사상

"영국 제14군"의 몇몇 부대가 "일본군"의 공격으로 고립되었고, 4월 무렵 "임팔 일대"에 공격이 집중되었다. "일본군 사단"은 "코히마"로 진격해, "인도 임팔"로 이어지는 주요 도로를 차단했지만, "코히마" 전체를 점령하는데 실패했다. 1944.04월, "임팔"로 향하는 공격이 실패로 돌아갔고, 새로 온 "연합군 편성부대"가 일본군을 "코히마"의 점령지 일대로 몰아내면서, "인도 전체"에 대한 일본군의 반격에 제동이 걸렸다.
② 1944.04.17~ 12.10 : 대륙 타통 작전 (大陸打通作戦)
이치고 작전 (一号作戦)→ 일본ㆍ예상계회전 (豫湘桂会戦)→ 중국ㆍ"중일 전쟁"기간 동안, 전쟁 막바지에 "중국 대륙"에서 행해진 "일본 제국"의 최후의 대규모 공격 작전을 말한다. 전술적으로는 성공이었으나, 전략적으로는 불가능한 목표를 세웠기 때문에 "비운의 작전"이 되었다.
• 장 소 : 중화민국 허난 성ㆍ후난 성ㆍ광시 성 • 결 과 : 이후 중국 사회에는 대규모 혼란이 발생했는데, "중국 공산당" 게릴라 요원들은 이 작전 이후의 혼란을 이용해,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며, 교외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해나가기 시작했다. • 교 전 : 중화민국ㆍ일본 제국 • 병 력 : 중화민국- 군사(100만 명) / 일본제국- 군사( 51만 명)ㆍ탱크(800대)ㆍ대포(1500문)ㆍ차량(15,500대)
일본군은 "중국 전역"에 걸쳐, 대규모 반격 작전을 감행했다. 이 작전은 "2차 세계대전" 사상, 가장 큰 규모의 공세로, "중국 본토"의 일본군 점령지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잇고, "미군 폭격기"의 본부가 있는 "중국 남동부"를 점령하는 것이 목표였다. 이 무렵, 미군이 훈련시킨 "조지프 스틸웰" 휘하의 "중국군" 25만 명은 "버마 전역"에서 "무기대여법"의 일환으로 고립되어 있었다. 일본군은 작전 중 1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이 공격 이후 일본군은 중국 본토에 많은 점령지를 확보하였으나, 중국군의 반격으로 "광시 성" 점령은 실패했다.
주요 전술적 승리에도 불구하고, 작전은 일본군에게 어떠한 중요한 전략적 이익이 없었기에, 전반적으로 실패로 끝났다고 볼 수 있다. "중국군" 대다수가 이 지역에서 철수하는데 성공했고, "서부 후난 성 전투"의 예에서 보듯 "중국군"은 일본군의 주요 거점에 반격을 가했다. 일본군은 작전 후, "중국군"을 완벽히 패배시키는데 실패했으며, "태평양"에서 일본군의 지속적인 패배로 일본은 "중국"에 완전한 승리를 거두기 위한 물자ㆍ시간이 부족해졌다.
3. 1944년 - 연합군의 공세 (사이판 전투ㆍ필리핀 해전)
① 1944.06.11~ 07.09 : 사이판 전투→ 07.07 일본군 전멸
태평양 "사이판 섬"에서 치열하게 벌인 전투로, 양측 모두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특히 일본군은 이 전투에서 최초로 전원 옥쇄(전멸)을 감행해, "사이판"에 살던 일본 민간인들까지 모두 자살했다. 이 전투의 여파로 일본에서는 "도조 히데키 수상"이 사퇴하게 된다.
"사이판 섬"은 "북 마리아나 제도"의 섬이자, 전략적 요충지였는데, 당시 "B-29 슈퍼포트리스"를 이용하여 일본 본토(도쿄 포함)을 폭격하는데, 가장 가까운 위치라 비행장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미군은 이 1개의 섬을 점령하기 위해, 포탄(138,391발)ㆍ조명탄(5,882개)ㆍ야포(291,405발)가 사용되었는데, 이 무게를 합하면 모두 8,500 Ton이나 된다. 719대의 상륙함 중, 204대가 파괴당했고, 새로운 전차가 처음 선보여 위력을 발휘했다.
• 장 소 : 사이판 섬 • 결 과 : 미국의 승리, 사이판 탈환으로 일본 본토 공격이 수월ㆍ"일본 홋카이도"를 제외한 모든 일본 본토가 "B-29 슈퍼포트리스"의 공습을 받게 됐고 이는 "도쿄 대공습"으로 이어지게 되고, "사이판 섬"은 미국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 교 전 : 미국ㆍ일본 제국 • 병 력 : 미국 - 상륙부대(66,779명)ㆍ총 병력(71,000명) / 일본제국- 31,000여 명 • 피 해 : 미국 - 2,949명 전사ㆍ10,364명 부상 / 일본제국- 3,1629명 전사ㆍ 500여명 자살ㆍ민간인 사상- 24,000여명
• 자 결 : "사이판"을 지키는 "일본군 사령관"에는 "나구모 주이치ㆍ사이토 요시쓰구" 장군이 있었는데, 07.07일, "사이토 장군"은 칼로 자신의 가슴을 찔러 자결하고, 07.08일 "나구모 장군"도 자신의 동굴 진지에서 권총으로 자결했다. • 자 살 : 당시 "사이판"에는 일본군을 따라온 많은 민간인들이 살고 있었다. 패전 후, 민간인들은 앞에 있는 아이들을 던지거나, 아이들을 껴안은 부모들은 들쑥날쑥한 바위가 있는 절벽 아래로 뛰어 내렸으며, "마피"주변을 지나던 순찰함은 물위에 떠 있는 수많은 시신 때문에 아주 천천히 지루하게 항해를 해야 했다. 그곳을 "자살 절벽ㆍ만세 절벽"으로 부른다.

1944.06.11일, "조지 마셜 제독"은 전투기(225대)를 발진시켜, 일본 전투기(150대)를 파괴시켰고, 항공모함(16척)에서 전투기(900대)를 발진시켜, "사이판" 전역을 폭격하고, 미 함대는 4일 동안 함포 사격을 퍼부었다. 일본 조종사들은 2배나 되는 "미군 조종사"들을 상대해야 했고, "항공모함"은 불능이거나 수리 중에 있었다. 일본군은 상당한 "대공포"가 있었으나, "예광탄ㆍ레이더"가 부족했다.
06.15일, 새벽 05:42분, "터너 조이 제독"이 상륙 명령을 내려, 08:12분 해변 상륙을 알리는 깃발이 휘날리자, 폭격기ㆍ전투기가 상륙한 해변에 100파운드 폭탄ㆍ5인치 로켓포를 대량 발사해 기선을 제압하고, 수륙양용전차가 환초를 통과해 공격을 시도했다. 일본군이 75mm와 105mm 야포를 동굴 입구에 숨겨두었기 때문에 진격을 멈춰야 했고, 밤에는 일본군이 야간 기습을 하여, "게릴라 전술"을 이용해 미군에게 많은 피해를 입혔다.
07.09일, 16:15분, "터너 조이 제독"은 "사이판이 확보되었다"고 발표했다. 이는 "일본군의 조직적 저항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며, 남은 일본군의 잔당에 의해 많은 미군들이 죽었는데. 이 전투에서 양측 모두 많은 피해를 냈고, 특히 일본군은 대부분이 전멸했다.
② 1944.06.19~ 06.21 : 필리핀 해전
"오자와 지사부로"제독이 일본 함대ㆍ전투기(430대)를 이끌고, "스프루언스 제독"의 "미 제5함대"를 4차례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일본 해군은 첫날 전투에서 "300대 이상"의 전투기가 격추되고. "2척"의 항공모함이 침몰했다. 그리고 일본 해군이 "오키나와"로 북진하던 중, 항공모함 1척과 100대 이상의 전투기를 또 다시 손실했다. 이에 비해 미국은 2일간 전투 중, 130대의 비행기와 약간의 "항공모함" 손실을 입었을 뿐이었다. 그 이유는 일본군의 군수물자 부족과 일본의 조종사들은 3개월밖에 훈련을 받지 못한 상태였으나, 미군 조종사들은 2년의 훈련을 받은 점 등에서 일본군의 패배가 컸다.
• 장 소 : 필리핀 해 • 결 과 : 미국의 승리 • 병 력 : 미국 - 항공모함(7척)ㆍ경항모(8척)ㆍ전함(7척)ㆍ전투함(79척)ㆍ함재기(956대)ㆍ잠수함(28척) / 일본제국- 항공모함(5척)ㆍ경항모(4척)ㆍ전함(5척)ㆍ전투함(43척)ㆍ함재기(450대)ㆍ지상발진(300대)
• 피 해 : 미국 - 전함(1척)ㆍ항공기(123대) / 일본제국- 항공모함(3척)ㆍ유조선(2척)ㆍ전투함(6척)ㆍ항공기(550~645대) • "58 기동함대"의 구성 (미태평양 제5함대 최고사령관- 레이먼드 A.스프루언스 대장) : 5개 함대전투단(Task Group)편성, 호위- 잠수함(28척)ㆍ중순양함(8척)ㆍ경순양함(13척)ㆍ구축함(58척) / 1함대 전투단 : 지휘- 소장 "조셉 클라크", 4척의 항공모함(호넷ㆍ요크타운ㆍ벨리우 우드ㆍ바탄) / 2함대 전투단 : 지휘- 소장 "알프레드 몽고메리", 4척의 항공모함(벙커 힐ㆍ와스프ㆍ캐봇ㆍ몬트러이) / 3함대 전투단 : 지휘- 소장 "존 리브스", 4척의 항공모함(엔터프라이즈ㆍ렉싱턴ㆍ산 하신토ㆍ프린스턴) / 4함대 전투단 : 지휘- 소장 "윌리엄 K.헤릴", 3척의 항공모함 (에섹스ㆍ랭글리ㆍ코펜스) / 7함대 전투단 : 지휘- 중장 "윌리스 리", 7척의 빠른 전함(워싱턴ㆍ노스캐롤라이나ㆍ인디애나ㆍ아이오와ㆍ뉴저지ㆍ사우스다고타ㆍ앨러배마) / 호위- 잠수함(28척)ㆍ중순양함(8척)ㆍ경순양함(13척)ㆍ구축함(58척)
③ 1945.02.19~ 03.26 : 이오지마 전투 (이오 섬 전투)
"오가사와라 제도"의 "이오 섬"에서 벌어진 전투로, 미군의 작전명은 "디태치먼트 작전"이었다. 태평양 전쟁 말기, "미군ㆍ일본군"은 수백 개의 섬에서 전투가 있었는데, 유일하게 미군의 손해가 일본군의 피해를 넘어선 전투이다.
• 장 소 : 일본 이오 섬 • 결 과 : 미국의 승리ㆍ미 공군의 일본 본토 공습기지 확보 • 병 력 : 미국- 110,000명 / 일본제국- 21,000명 • 피 해 : 미국- 6,821명 전사ㆍ19,189명 부상 (피해율 : 40%) / 일본제국- 20,703명 전사 (피해율: 96 %)
※ 이오지마 (硫黄島ㆍ유황 섬ㆍ"지마"는 섬이라는 말) : "가잔 열도"에 속하는 "화산섬"으로, 섬의 표면이 대부분 "유황"의 축적물로 뒤덮여 있었고, 식용수는 짠 우물물ㆍ빗물에 의존

일본군은 1941년 개전 당시, 해군 전투대(1,200명)ㆍ육군(3,800명)을 인근 "지치지마 섬"에 배지하고 있었는데, 이 부대가 "이오지마"를 관할하고 있었다. 개전 후, "남방 전선"과 "일본 본토"를 묶는 "항공수송의 중계지점"으로서 "이오지마"의 중요성이 인식되어, 해군이 "이오지마"에 비행장을 건설하고 있었다. 당시 항공병(1,500명)과 항공기(20기)를 배치하고 있었다.
"미 해병대"가 "이오지마"에 상륙하기 시작하여, 03.17일 섬을 장악했으며, 거의 모든 일본군 부대가 전멸했다. 03.26일, "구리바야시 다다미치 대장" 이하, 남은 300명의 일본군이 마지막 돌격을 했으나, 전멸했다. 1944년 여름, "미군"은 "마리아나 제도"를 공격ㆍ점령했으며, "마리아나 제도"의 비행장을 거점으로, 11월부터는 "B-29 폭격기"를 이용해 일본 본토 각지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리아나 제도"에서 일본 본토까지는 거리가 상당했으며, 일본군이 "마리아나 제도"에서 일본 본토로 이어지는 중간 지점에 있는 "이오지마"에서 "미군 폭격기"의 이동을 미리 예측하고 저지했기 때문에, "B-29 폭격기"들과는 달리, 먼 거리를 비행하지 못하는 "호위 전투기"들이 곧바로 비행장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일이 잦았다. 결국 호위 전투기들을 잃은 B-29 폭격기들이 일본군의 요격을 받는 일이 잦았다.
반대로, 일본군은 "이오 섬"을 근거지로 하여, 가까운 "마리아나 제도"로 내려가, 미군의 비행장을 자주 공격했고, 이 결과, 일본군은 12월에만 11기의 "B-29"를 파괴했다. 따라서 "미군 태평양 통합작전본부"는 "이오지마"를 점령하고, 일본군의 항공기지를 파괴한 뒤, 미군의 "전진 항공기지"를 마련하기 위해, "이오지마 공격"을 결정했다.

④ 1945.04.01~ 06.23 : 오키나와 전투 (아이스버그 작전)
"이오지마 전투"에 이어 최초로 "일본 영토" 내에서 벌어진 "미군ㆍ일본군"의 "전면전"으로, 미군은 최초로 "태평양 전쟁"에서 가장 커다란 피해를 냈으며, 일본인들에게 "본토 공격"으로 큰 충격을 주었다. 미군은 많은 피해를 내면서도 "오키나와"를 점령하면서, 가까운 "규슈" 지역 등을 폭격할 수 있게 되었고, 일본의 패망을 앞당겼다. 일본 제국군은 "사령관ㆍ군인"뿐만 아니라, 주민들에게도 "할복자결"을 명해, 수많은 주민들이 "수류탄"으로 자결하거나, 가족끼리 서로 목 졸라 죽이는 비극이 일어났다.
• 장 소 : 일본 오키나와 • 결 과 : 미군의 승리→ 일본의 패망 촉진 • 교 전 : 미국ㆍ영국ㆍ캐나다ㆍ호주ㆍ뉴질랜드 / 일본 제국 • 병 력 : 미국- 541,000명ㆍ항공모함(40척)ㆍ수송선(158척)ㆍLST(184척)ㆍLSM(89척)ㆍ전함(18척)ㆍ구축함(200척)ㆍ함선(1300척) / 일본제국- 120,000명 (오키나와 주민방위대 2만 명 포함)
• 피 해 : 미국- 46,195명 전사ㆍ55,162명 부 / 일본제국- 110,000여 명 전사ㆍ12만 명 주민 사망

미군은 "이오지마" 점령 후, 일본영토 내로 쳐들어가기 위해, 미군 탈환지역에서 가장 가깝고, "일본 규슈" 지역을 폭격할 수 있는 "오키나와 섬"을 골랐는데, 미군은 "사이먼 B.버크너 중장"의 지휘 아래, 183,000명에 달하는 대군을 이끌고, 상륙 준비를 했다.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상륙 전 1달 동안, "3만 발"에 달하는 포탄을 상륙지역에 쏟아 부었다. 일본군은 "우시지마 미쓰루 중장"과 "조 이사무 소장" 등을 보내, 방어 진지를 구축하게 했다.
상륙 당일 오전, 미군은 "주력 4개 사단"이 "오키나와 가데나 만"으로 순조롭게 상륙하였다. 아무 저항 없이 광대한 "오키나와 북부 지역"을 장악했는데, 일본군들은 주로 남쪽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04.05일부터 미군이 방심한 사이, 일본군의 "사령부 슈리 성"에서 무수한 "동굴 진지"가 미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미군은 "수류탄ㆍ화염발사기"로 "동굴 진지"를 하나하나 제거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일본군은 미군이 방어선을 뚫을 때까지 싸우고, 뚫으면 다음 방어선으로 후퇴를 했다. 미국은 남쪽을 점령하기가 너무 어려워지자, 섬의 남쪽에도 상륙을 했다. 05.29일, 미군이 "슈리 성"을 함락시켰고, 05.31일에 "일본군"은 "전력의 85%"를 잃었다. → 일본군 사령부는 "섬 남쪽" 지역의 "마부니 고지 동굴"로 퇴각했고, 결전을 준비를 했다. → 06.11일, "오로쿠 지구"에서는 해군사령관 "오타 미노루"와 군대 대부분이 전멸했다. → 06.15일, 일본군의 남은 병력 6천 명이 미군의 화력에 견디지 못하고, 붕괴됐다. → 06.18일, 미군 지휘관이던 "버크너 중장"이 일본군의 포격으로 급작스럽게 전사하지만, 전세는 되돌려지지 않았다. → 06.23일 오후 4:30분,"우시지마 미쓰루 중장ㆍ조 이사무 소장"이 "할복자살함"으로써 전투는 종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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