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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 역사ㆍ사건ㆍ인물

인물 : 미야모토 무사시 (1584~1645)ㆍ도장깨기ㆍ60회 대결 무패

by 당대 제일 2022.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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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모토 무사시 (宮本武藏ㆍ궁본무장ㆍ1584~1645ㆍ61세)"는 유명한 "사사키 고지로"와의 시합을 비롯하여, 평생 60여 회의 대결에서 단 1차례도 진 적이 없는 "전설적인 검객"으로, 일본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이른바 "도장 깨기"를 하였다. 평생 아내를 얻지 않았고, 머리에 빗질을 하거나, 목욕도 하지 않은 채, 떠돌이 낭인생활을 했다. "서화ㆍ불상 조각"에 능했으며, "노장(老莊)사상"에 영향을 받은, 단순한 "검객(칼잡이)"이 아닌 도인이었다.

 

1. 미야모토 무사시 (宮本武藏궁본무장1584~1645향년 61)

• 본 명 : 미야모토 마사나(宮本政名)       • 별 칭 : 니텐(二天) 화가ㆍ무사        출 생 : 일본 미미사카(美作) 또는 하리마 (播磨)        저 서 : 고린쇼 (五輪書오륜서ㆍ병법서)         작 품 : 고목명견도 (枯木鳴鵑圖)포대관투계도 (布袋觀鬪鷄圖)

어려서부터 여러 곳을 여행하며, "검술"을 익힌 결과, "쌍검"을 사용하는 검도인 "니토류(二刀流)"를 개발하여, "니텐이치류(二天一流)의 시조"가 되었다. 당시 검법에는 "쌍검"을 쓰는 일이 극히 드물었기 때문에, "무사시의 방법"이 주목을 받았던 것 같다. 

"무사시"가 유명한 것은 일본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이른바 "도장 깨기"를 하였다는 것이다. "도장 깨기"란 각지의 여러 고수의 무인들과 계속하여 겨루어, 자신의 독창적인 무예를 완성하고 입증하였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특히, "무도의 비법"을 기록한 저서인 "고린쇼(五輪書)"는 "병법서"로서 유명하다. "비즈니스맨"에게도 필독 도서로서, 평가가 높다.

"무예"에 버금갈 정도로 "그림"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10여 점의 "수묵화(水墨畵)"를 남겼다고 한다. 특히, "금조류(禽鳥類) 묘사"를 잘 했는데, 그 필법은 "송원화(宋元畵)의 감필체(減筆體)"를 바탕으로 하면서, "검객 다운 패기에 차 있다"는 평이 있다. "일본 에도시대" 초기의 무사이기도 한 이색적인 "화가"로서, 힘 있고, 직선적이며, 무사다운 패기가 있으며, 예리한 기백을 간직한 "약필(略筆)"에 의한 "수묵화", 특히 "새 그림"을 잘 그렸다.

각지를 전전하고, "검"을 추구하며, "시칸(仕官ㆍ낭인 중인 무사가 다이묘를 모시는 것)"자리를 찾아 다녔다고 전해진다. "검술가"로서 "무사시"의 명성은 높았지만, "시칸"으로 요구한 "지행(知行ㆍ치교오ㆍ봉급)"이 1,000석 이상으로 상당히 높았다.(당시 검술사범은 많아야 200~ 500석 정도가 평균이었다고 한다.)

또한, "고집 센 성격"으로 어느 곳에서도 "등용을 꺼려했다"고도 한다. 1640년, 우여곡절 끝에 "구마모토" 영주인 "호소카와 다다토시(細川忠利)"의 객으로서 안주할 땅을 얻은 "무사시"는, 그 곳에서 남은 생애를 그림ㆍ병법서를 남기며, 보냈다. 그는 죽기 2년 전인 1643년, 그와 마음을 나눈 "구마모토" 영주인 "호소카와 다다토시(細川忠利)"의 지시로 "운간사"라는 절에 머무르면서, "오륜서(五輪書)"를 집필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멸망 후 30년 가까이 지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이어 "3대 쇼균 이에미쓰" 집권 20년 때였다. 끊임없이 자신을 연마하는 "구도자"로서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이기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도 서슴지 않는 강한 면모도 있다. 승리에 집착하는 마음. 그것이야말로 "무사시의 강함"을 받치는 최대의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2. 일본의 3대 검호

① 이도 류 (쌍검 사용): 미야모토 무사시 (宮本武藏ㆍ궁본무장ㆍ1584~ 1645ㆍ향년 61세)

평생 60여 회의 대결에서 단 1차례도 진 적이 없는 "전설적인 검객"ㆍ이른바 "도장 깨기"를 하였다.

② 투구 가르기 : 야규 미츠요시 (柳生三厳ㆍ야규 주베에(柳生十兵衛)ㆍ1607~ 1650ㆍ향년 43세)

에도시대 전기의 다이묘ㆍ쇼군(에도막부 3대) "도쿠가와 이에미쓰(2대 도쿠가와 히데타다(도쿠가와 이에야스의 3남)의 아들)"을 보좌하였다.

③ 츠바메가에시 (내려치다가 갑자기 베는 기술간류): 사사키 코지로 (佐々木 小次郎ㆍ1585?~ 1612ㆍ향년 27세)

미야모토 무사시의 라이벌ㆍ전국시대 말기~ 에도 시대 초기에 활약했다고 전해지는 일본의 검호"간류지마(巖流島) 결투"에서 "간류(岩流사사키 코지로)3척의 칼을 들었고, 두 사람은 동시에 만났으며, 무사시는 목도의 일격으로 이를 격파했고, 코지로는 즉사했다"고 한다.

"무사시"가 "쌍검"을 쓴다면, "코지로"는 "모노호시자오(바지랑대)"라고 불리는 "3자 길이의 장검(80cm)"을 쓰는 것이 특징이다. "간류도"의 일본도 길이는 사실은 약 80cm정도로 계산된다고 한다.  사학계의 추측에 의하면, "코지로"는 "거인"이라 불릴 정도로 키가 컸다고 하는데, 162cm정도로 추산 되며, 그 시대 일본사람들의 평균 키는 133cm 정도였다.

"모노호시자오(物干し竿ㆍ빨래 너는 장대)"라는 "3척에 달하는 장도"를 사용했다고 한다.  "코지로"는 "주조류"의 "가네마키 지사이"에게 검술을 배워 "인가목록"을 받지만, 스스로 검술연구를 거듭하여, "간류(긴 칼을 사용하며, 제비치기라는 기술을 연마)"라는 새로운 검법을 창시한다.  "츠바메 카에시(燕返し)"라는 기술은 전설에서는 "하늘을 나는 제비를 잘라 떨어뜨리는 것"으로 익혔다고 하는데, 이 기술에 대해서도 어떤 형태였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실제 있었던 기술로 여겨진다.

내려치다가 갑자기 베는 기술인 듯하다.  사실 "츠바메가에시" 자체가 수수께끼의 기술인데, 기술 유래는 "제비를 잡으려고 만든 기술"이라든가, "제비의 모습을 본뜬 기술"이라든가, 나룻배에서 강 위를 날라 가던 제비를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베어서 붙은 이름이라는 등, 여러 가지 말들이 있다.  이 기술이 "코세츠"가 아닌가 하는 추측을 낳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코세츠"가 크게 횡베기를 해 상대방의 칼을 흔들리게 한 뒤, 방어하는 칼이 제자리로 돌아가려고 할 때, 역으로 다시 횡베기를 해서 상대의 칼을 날려버리고, "가사 베기"로 적을 참살하는 기술이어서, "츠바메가에시" 처럼 빠르게 3번 베고, 막을 수 없다는 점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3. 병법서 "고린쇼 (五輪書)"의 서문

나의 병법을 "니덴 이찌류(二天一流)"라 이름 한 뒤, 수년에 걸쳐 단련하여, 내가 체득한 바를 로소 문자로서 서술해 보려고 한다때는 1642(강에이 20)10월 상순, "규히고"의 땅 "이와도(岩戶)(,구마모도시의 서쪽) 아리아께 "에 면한 "긴부(金峰)"에 올라, 하늘을 요배한 다음에 "관음"을 요배하고, "부처" 앞에 나아갔다.

"효고현" 태생 무사, "신멩 무사시노가미(新免武歲守)". 후지와라겐싱, 60세이다나는 어렸을 때부터 "병법무예의 길"에 전념하여, 13세 때에 처음으로 결투했다그 상대인 "신도류(新當流) 아리마 기헤이"라는 병법자에게 이기고, 드디어 16세때, "다지마국(효고 현의 북부) 아귀야마"라는 강력한 병법자와 대적하여 이겼다21세 때, "교토"에 상경하여, 천하의 무예 장인들과 만나서, 몇 차례의 승부를 겨루었지만, 한 번도 실수를 저지른 적이 없다. 이것은 13세에서 28, 29세까지의 일이다.

그러나 30세를 넘어서, 스스로가 걸어온 행적을 뒤돌아보니, 본인이 이제까지 이긴 것은 결코 병법을 깊이 연구한 때문이 아니며, 태어날 때부터 몸에 지닌 재능이 있어서 그것이 "천리"에 합당했거나, 아니면 상대의 "병법이 불충분했음"이 아닐까 하고, 스스로 미숙한 점을 통감했다그 후에도 더욱 깊은 도리를 터득하려고 조석으로 단련을 거듭한 결과, 스스로 "병법의 진수"를 터득하게 되었다. 50세 무렵의 일이었다. 그 이래로, 특별히 탐구할 길도 없이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병법의 도리에 따라, 모든 무예와 기능의 길로 임하고 있기 때문에, 일체의 사물에 대해 나로서는 스승이 없었다. 모두 스스로 깨달아 얻은 것이다지금 이 책을 저술함에 있어서도 "불법"이나, "유교"의 오랜 말을 빌리지 않고, "군기""군법"옛것을 쓰지 않고 있으며, "니덴이찌류"의 견해와 진실한 의미를 써 내려고, 하늘의 "도리""관세음"을 거울삼아서, 1010일 밤, 새벽 4시에 붓을 들어 쓰기 시작한 것이다.

4.  도장 깨기

① "무사시"의 검술실력이 당시 최강이었을까?

1931년, "요미우리 신문 주최 좌담회"에서 "무사시의 검술"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 "60전 불패"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당시 "무사시"는 "간사이 지방"에 틀어박혀, "관토 지방"의 유명검객들과는 대결을 하지 않았고, 특히, "관토" 제일검객인 "야규 무네노리"와는 대결하지 않았다. 이것은 "천하 최강 검객 무사시"가 완전하지 못한 점이다.

② "요시오카 검술도장"과의 충돌

"미야모토 무사시"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 "다케조"는 당시 "교토"에 있는 "요시오카 도장"에 시합을 청하고, 여러 명의 제자들을 쓰러뜨린다. 하지만, 그는 다시 "교토"를 떠나고, 1년 뒤 "요시오카 세이쥬로"와 시합할 것을 약속한다. 1년 뒤, "세이쥬로"는 "무사시"와의 대결에서 한 쪽 팔을 잃고, 도장의 명예회복을 위해, 그의 동생 "덴시치로"가 다시 "무사시"와 결투를 하지만, 그 역시 "무사시"에게 목숨을 잃는다.

이에 분개한 "요시오카 도장" 사람들과 여러 동문들은 힘을 합해 "무사시"를 없애려 하나, 70명이나 되는 사무라이들과의 결투에서 "무사시"는 승리하고, 본능적으로 "이도류의 이치"를 깨우친다. "세이쥬로"와의 대결 이전 1년 동안, "무사시"는 "무사 수업"을 떠나는데, 이 때, 맨 먼저 간곳이 "창술"로 유명한 "보장원"이었다. 여기서 "무사시"는 "인슌"의 수제자 "아곤"을 쓰러뜨리지만, "인슌"과의 대결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③ 무소 곤노스케 (인슌)

"곤노스케"는 원래 시골의 한적한 곳에서 지내던 "농군"에 지나지 않았으나, 후에 "무소류"라는 "장술의 시조"가 되는 사람이다. 아직 그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을 때, "곤노스케"는 "무사시"와 대결을 벌이게 되는데, 이 시합에서 "곤노스케"는 "무사시"에게 패배하게 되고, "무사시"를 스승으로 모신다. 그의 저서 중, "도모의 일수"라는 제목의 책이 있는데, 여기서 "곤노스케"는 당시 "무사시"와의 시합을 자세히 언급하고 있는데, "무사시"에게 패배한 일이야 말로, 자기 인생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기억이라고 하고 있다. 싸우기로 한 날 숲속... 시간은 흘러 저녁이 된다.

무 사 시 : "곤노스케 미안, 모르고 깜빡 잠이 들었네". 사실 그는 "곤노스케"가 무서웠던 것이다.        곤노스케 : "~ 왔군.. 만약 죽으면 시체는?"        무 사 시 : "여기.. 숲속에.." 무사시는 떨고 있었다. 상대가 상대이니 만큼. 불현듯 "무사시"의 눈앞으로 거미가 실을 뽑으며, 내려가는 광경을 보게 된다.  "무사시"는 하늘을 보게 되고, 깨닫는다. 같은 하늘아래 같은 인간인 것을. "곤노스케"도 인간이다.  그 후 안정은 되찾는다.

"곤노스케"는 "무사시의" 안정에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한다. 둘은 조용히 침묵을 지킨다.  "곤노스케"는 "무사시"의 허술함을 보고 순간, 공격을 하고, 빈틈을 포착한 "무사시"는 "목도"로 "곤노스케"의 머리를 찍는다. 그는 정신을 잃고 기절한다.  무 사 시 : "곤노스케, 그대는 진검승부였다면, 이미 죽은 목숨이다."

④ 시시도 바이겐

"바이겐"은 "사슬 낫"이라는 무기를 잘 쓰는 사람이었는데, "사시도 바이겐"이라는 이름은 개명한 것이고, 원래 이름은 "츠지카제 고헤이", "무사시"가 17세 때 죽인 "텐마"의 동생이다. 그는 "텐마"의 복수를 위해, "무사시"를 습격하지만, 결국 "무사시"의 손에 죽고 만다.        무 사 시 : "너는? 예전의 고헤이? 예전엔 칼을 썼는데, 사슬낫을 쓰다니, 어케 된거냐?"        바 이 겐 : (삐쭉) "미야모토, 말이 많아졌구나. 승부로 말하자."  쟁쟁한 접전. 그 때, 어릴 적 아버지(신멘 무니사이)가 떠오르면서 "무사시"는 검 한 자루을 더 꺼낸다.  양손에 칼을 쥔다. 이것이 바로 "무사시"의 최강 "이도류"다.

 바 이 켄 : (두근두근) "크다.. 아니다! 빈틈투성이다, 간닷~ "        "무사시""바이켄"의 사슬을 칼로 막아내고, 다른 손에 쥐어있던 칼로 "바이켄"을 찍는다 "바이켄"은 막으려다가, 손가락이 절단된다.

⑤ 간류ㆍ사사키 코지로 (간류지마(巖流島) 결투)

"무사시"와 "간류(사사키 코지로)"의 대결로 유명한 "간류지마(巖流島) 결투" 역시 실제로 존재는 했었던 것으로 보이나, 그 과정에는 많은 기록의 차이가 있다. 기본적으로 최초의 기록에 해당하는 1654년(무사시 사후, 9년 후)의 "코쿠라 비문(小倉碑文)"에 의하면 "간류(岩流)는 3척의 칼을 들었고, 두 사람은 동시에 만났으며, 무사시는 목도의 일격으로 이를 격파했고, 코지로는 즉사했다"고 한다. "코쿠라 비문"이 최초이다 보니, 이를 근거로 "무사시는 지각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 이후, "무공전(무사시의 전기ㆍ"이천기"의 원 사료)"에 따르면, "무사시"는 승부의 시간을 알리는 "파발꾼"이 계속 와도 늦잠을 자다가, 일어나서는 천천히 아침밥을 먹고서는, 유유자적 노를 깎아 "목도"를 만든 후에야, 비로소 결투장에 나타났다고 한다. 그리고 "칼집을 버렸으니, 넌 진거나 다름없다"라는 패기를 시전해 주고는 간류를 패 죽였다고 한다.

한편 동시대의 "부젠국(豊前国)의 "누마타노부모토(沼田延元ㆍ코쿠라한(小倉藩ㆍ당시 호소카와(細川)씨)가문의 장로ㆍ모지성(門司城) 대리인)"의 문서 "누마타가기(沼田家記)"의 기록은 이것과는 조금 다르다. 여기에서는 "무사시"와 "간류"의 제자 사이에 어느 쪽의 병법이 최고인가를 다투다가 사부끼리 결투해서, 누가 최고인지 겨루어보자고 해서, "무사시ㆍ간류 코지로"가 맞붙게 되었는데, "간류"가 결투에서 패배한 후에, "무사시의 제자들에게 살해되었다"고 적혀있다.

"누마타가기"는 "전국시대"의 실존 가문인 "누마타가(沼田家)"에 관한 기록이므로, 그 신빙성은 비교적 높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간류지마(巖流島) 결투ㆍ간류(사사키 코지로)"의 실존에 대해 중요한 증거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이 기록을 따른다면, 의문스러운 점은 엄연히 1:1 결투에서 "간류"는 혼자 나타난 데 반면, "무사시"는 혼자 오지 않고 제자들이 같이 왔다는 점, 스승이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제자들이 "간류"를 죽일 충분한 이유가 없다는 점, 게다가 "무사시"가 승자임에도 불구하고, 섬의 이름이 "간류지마(巌流島)"가 되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관해, "간류지마(巌流島)"가 있는 "시모노세키" 지방에는 1가지 색다른 일화가 전승되어 내려오고 있다. "간류"가 "무사시"와 약속을 해, "이자키로부터 후나지마(후일의 간류지마)"로 건너가려고 했는데, 어부가 "간류"를 말렸다. "무사시는 제자를 여러 명 거느리고 먼저 후나지마로 건너갔습니다.  다수에 혼자, 혼자서는 당해낼 수 없습니다. 돌아가 주십시오."

그러나 "간류"는 이렇게 말하며, 억지로 "후나지마"로 건너갔다. "무사는 두 번 말하지 않는다. 굳게 약속한 이상, 오늘 건너가지 않는 것은 무사의 수치, 만약 다수로서 나를 치려한다면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무사시다."

어부가 말했던 대로 "무사시"의 제자 4명이 가세해, 마침내 "간류"를 죽였다. 그러나 "간류"를 말렸던 어부들이 "간류"의 의로운 마음에 감동해 "묘"를 세웠고, 지금처럼 "간류섬"이라 부르게 되었다. 어느 쪽이 사실이든 정확한 진위 여부는 알 수 없다. 다만 어느 정도 의심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이와 관련한 "음모론"도 존재하는데, 사실 "사사키 코지로"는 "카쿠레키리시탄"이었고, "무사시"와의 결투는 사실 결투가 아니라, "코지로를 끌어내, 암살하려는 것이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누마타카기"의 기록을 염두에 보면, 결투에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무사시"의 제자들이 "코지로를 죽였다"는 부분이 의아하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 의하면, "카쿠레키리시탄인 코지로"를 부담스러워한 "호소카와 가문"에서 "무사시"를 사주해 결투를 빙자해, "코지로를 암살했다"고 본다. 흥미로운 주장이긴 하나 실제 역사적 근거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아무튼, 그래서 그때까지는 "간류 코지로" 등으로 불렸는데, 사후 130년이 지나 씌여진 "이천기"에서야 비로소 "사사키"라는 "성"이 갑자기 붙어서, "사사키 코지로"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무송전"에도 "코지로"라고 밖에 안 적혀 있는데,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다. 그 이후, 이 의문의 검사의 이름이 "사사키 코지로"가 된 것은 바로 이 "이천기"에 근거한 것이다.

5.  생 애

1584년, "오카야마 현, 아히다 군, 오하라 정, 미야모토 촌"에서 태어났다. 1585년,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전 일본을 통일하고, "막부 정권"을 수립하기 1년 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신멘 무니사이"로 당시 "사무라이"이자, "검객"으로 명성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무니사이"는 무슨 이유에서 인지, 시골로 내려와서, "시골 무사"로 전락한다.

"가계"는 확실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신멘 무니사이(新免無二齋)"의 양자 또는 아들이라고 하며, 어머니 쪽 가계를 이어, "미야모토 무사시 요시쓰네(宮本武藏義恒)" 또는 "겐신(玄信)"이라고 했다한다.

어머니 "오마사"는 "무사시"가 3살 때 이혼하게 된다. "무니사이"는 "오마사"의 가족들이 살고 있는 "하리마 지방"으로 어린 아들을 함께 보낸다. 그는 "어머니" 손에 길러지고, 가끔 50km나 떨어진 거리에 있는 아버지를 찾아가곤 했다. 이 때, "무니사이"는 직접 "무사시"에게 엄격하게 검술을 가르쳤다. 

또한 "무사시"는 장터에서 "북치는 사람"을 보고, 그가 두 손을 자유자재로 놀리는 것에 감탄하고, 이때부터 "양손으로 검을 쓰는 것"을 연구한다. 하지만 "무니사이"는 이런 "무사시"에게 "양쪽에 검을 쥐면, 힘을 집중하지 못한다"고 반대하여, "무사시"와 검론을 벌인다. 그는 곧 "무사시가 검술에 천재적인 재능이 있음"을 알게 된다.

 13살 때 싸움 : "아리마 기베이"와 싸움

13살 "무사시"가 첫 검술시합에서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상대를 죽였다는 것은 아주 놀라운 일이다. 16C의 "일본" 이야기지만, 13세의 나이에 누군가를 죽였다는 점에서 이 시합은 아주 특별하다. 그의 상대는 "아리마 기베이"라는 자로, 이미 그 근방에서는 "신토류의 대표적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이 싸움은 엄격한 의미에서 "검술 시합"이라고 하기 어렵다 3년 뒤, "무사시"는 "타지마"지방에서 온 상대(아귀야마라)와 결투를 벌이게 되는데, 물론 아주 쉽게 상대를 쓰러뜨린다.

어느 날 "무사시"는 다음과 같은 방문을 읽게 된다. "누구든지 나에게 도전하려는 자는 여기에다 글을 남겨라! - 아리마 기베이 -" "무사시"는 여기에다가 "내가 내일 너에게 도전하겠다."고 적고, 자신의 이름을 적는다. 그날 저녁, 도전을 응락한 "기베이"로부터 "시합 장소"가 통보되어 오고, 다음날 아침 "무사시"는 한손에 검을 들고, 시합장소로 향한다. 시합은 기대한 것과는 정반대로 전개되었는데, "무사시"는 아주 짧은 시간에 그를 쓰러뜨렸다.

 1600년 : "세키가하라" 전투

1600년 당시, "동부"의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부 다이묘 제휴세력들"을 물리침으로서, 천하의 패권을 차지한다. "무사시"는 바로 이 전쟁에서 17세의 나이로 "서군"의 편에 가담해 "군졸"로 싸우지만, 결국 "패잔병" 신세가 되어 쫓기는 몸이 된다. 하지만, 당시의 유명한 "선승 다쿠앙"의 도움으로 위기를 면한다.

"만화(배가본드)"에서는 "다케조"가 "다쿠앙"의 도움을 받아, 21세 때 "교토"에 나타나기까지의 이 3년간의 행적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는데, 소설의 내용을 빌리자면, "히메지성 이케다 데루마사 성주"의 배려로 다케조는 3년간 세상과는 단절된 수행을 하게 된다. 3년간의 수행을 거쳐, 이름도 "미야모토 무사시"로 개명하고, "교토"에 다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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