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본 - 역사ㆍ사건ㆍ인물

인물 : 후쿠자와 유키치 (1835~1901)ㆍ메이지유신 토대ㆍ김옥균 후원

by 당대 제일 2022. 12. 11.
반응형

 

"후쿠자와 유키치 (福澤諭吉ㆍ1835~1901ㆍ66세)"는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ㆍ지폐(1만 엔 권) 인물ㆍ메이지 유신의 사상적 토대 사상가ㆍ근대화의 아버지로, 게이오기주쿠(게이오 대학)ㆍ지지신보(산케이 신문 전신)의 창설자ㆍ교육가ㆍ저술가이다. 1868년, "도쿠가와 막부 가문"의 지배를 종식시키고, "메이지 유신"을 세우는데 영향을 미쳤다.

 

1. 후쿠자와 유키치 (福澤諭吉ㆍ1835~ 1901ㆍ향년 66세)

동아시아에서 "자유(自由)"라는 개념이 최초로 등장시킨 인물"국민(國民)"이라는 용어를 정착시킨 인물근대 일본에 "복식부기 개념ㆍ보험"을 최초로 소개한 인물그가 설립한 "게이오 대학"에서는 오로지 "후쿠자와"에게만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허락되고, 다른 교수교원에게는 선생님이라는 칭호를 쓰지 않는다.

1860년대부터 개항ㆍ개화를 주장하고, 자유주의ㆍ공리주의적인 가치관을 확립ㆍ막부 철폐와 구습 타파 등을 주장하고, "부국 강병론ㆍ국가 중심의 평등론"을 역설하였다.  "일본에 복을 주기 위해 하늘이 내린 위인"이라는 "이광수"의 극찬처럼 일본 근대화에 크게 공헌한 대표적 계몽사상가로, 국내 개화파 지식인(김옥균ㆍ박영효ㆍ유길준ㆍ최남선ㆍ이광수 등)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의 후원자였다.

 출 생 : 일본 오사카 부젠        사 망 : 일본 도쿄         분 야 : 난학(네덜란드 학)정치사상철학교육

 호 : 삼십일곡인 (三十一谷人ㆍ산주잇코쿠진)         가 족 : 외삼촌 "나카무라 쓰히로"의 양자 나카무라 유키치(中村諭吉)         저 서 : 서양사정(西洋事情)학문의 권유문명론의 개략(1875)         사 상 : 탈아론(脫亞論아시아 탈피) 제국주의 침략을 정당화         명 언 : 독립자존 (그의 계명이기도 하다)

① 동아시아에서 "자유(自由)"라는 개념이 최초로 등장시킨 인물

그는 단어 "liberalㆍliberalism"이라는 단어를 "자유"라는 단어로 해석하였다. "자유(自由)"라는 한자어는 그가 불교 용어를 참고해서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그는 억압되지 않는 것, 자기 스스로 권리를 향유하고 누리는 것에 대해 "자유"라는 이름을 명명하였다.

②  그가 정착시킨 "국민"이라는 용어

처음 "근대 일본"에서 "국민"이라는 용어는 광범하게 사용된 것은 "국민지우(國民之友)"라는 잡지의 제목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1887년, 창간된 이 잡지의 제목은 "미국" 잡지 "Nation"을 모방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 사회에 "국민"이라는 용어를 근본적으로 정착시킨 핵심적인 인물은 일본 근대화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근대화론의 선구자이자, "김옥균" 등 조선 개화파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후쿠자와 유키치"였다.

그는 초기에 서양 민권사상을 받아들여, "국민ㆍ인민"을 혼용하여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는 점차 국가구성원의 용어로서, 권리의 측면이 강조되는 "인민" 대신 "국민"을 채택함으로써 국가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강조하고, 명확하게 국권(國權)을 민권(民權)의 우위에 설정하게 된다. "一国の帝王は一家の父母の如し(일국의 제왕은 가족의 부모와 같다), 国は国民の殻なり(국가는 국민의 껍데기이다)"라는 그의 글에서도 분명히 드러나듯, 그는 분명하게 "국권론자"로 전향하면서 "일본의 국가주의적 제국주의"와 보조를 맞추었다.

그리고 "국권론"의 전제 위에 규정되었던 이 "국민"의 개념은 일본 제국주의에서 "신민(臣民)"과 사실상 동일한 것이었다. 당시의 "일본 대제국 헌법ㆍ교육칙어"에서는 "汝臣民(여신민ㆍ너희 신민들)"이라는 용어가 출현하고 심지어 1945년 일본 천황의 "항복조서"조차도 이 "汝臣民(여신민)"으로 시작하고 있다.

2. 조선 개화기의 사상가들의 스승이자, 한국 개화파에 영향을 준 인물로 알려져 있다.

• 제자 : 김옥균ㆍ박영효ㆍ홍영식ㆍ유길준ㆍ윤치호ㆍ서재필ㆍ서광범

• 이광수 : 그에 대한 흠모ㆍ열정으로, "조선의 후쿠자와"를 자처한 그 역시 "후쿠자와"와 마찬가지로 조선의 계몽사상가ㆍ언론인ㆍ대 문장가로 활동하면서 특히 우리 민족의 열등성을 강조한 "민족개조론"을 쓰기까지 했는데, 여기서 "후쿠자와"의 영향이 그대로 나타난다.

1882년, "임오군란" 후, 조선에서 "청나라 세력"이 확대되자, "조선 급진개화파"를 지원해서 그들이 스스로 국내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고 봤다. 그러나 1884년 "갑신정변"의 실패는 그의 기대를 저버렸다. 그는 조선에서 온 제자들(김옥균ㆍ박영효ㆍ홍영식ㆍ유길준ㆍ윤치호ㆍ서재필ㆍ서광범)을 대상으로 서구 문물과 학문을 배워야 한다고 가르쳤고, 그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조선인 개혁자들과의 만남을 계기로 하여, 조선의 개혁 운동에도 지원ㆍ자문하게 된다. 그는 당시 조선은 "일본 메이지 유신" 직전의 상황과 흡사하고, 소규모 무력 투쟁도 일어나고 있었다고 보고, 이때 조선에서 개혁을 실시한다면, "자유주의적인 영세중립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다고 보고 이들을 지원하였다. 그가 "일본의 문명개화의 주역"이라는 것이 조선에 알려졌기에, 조선인 청년 개화 인사들은 "이토 히로부미ㆍ이노우에 가오루" 대신, 그를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다.

1875년, 그가 저술한 "문명의 개략"이 조선에 입수되면서, 그의 "문명 개화론"은 조선의 1880년대 개화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고, 1881년부터 일본을 방문한 "김옥균ㆍ서재필ㆍ박영효ㆍ유길준ㆍ윤치호" 등은 일본을 방문하여, 그를 만나면서 그의 식견에 탄복하였다. 그는 "자신의 조국을 개혁하겠다."는 이들의 애국심을 높이 평가하여, 이들을 적극 후원하였다. 그는 "유길준"에게 "문자지교"라는 그의 저술을 "국한문 혼용"으로 번역하게 하였다.

1881.03.06일, "김옥균"은 그와 면담을 하며, 조선 독립에 협력을 의뢰했다.

1882.07.23일, "임오군란"이 발발하자, 그는 "요코하마 정금은행"에서 17만원의 대출금을 얻어 조선 측 배상금 일부를 대신 납부해주기도 했다. 1884.12.04일, "갑신정변" 당시, 그는 "프랑스 공사"의 함대에 "일본 자유당"의 민병대 청년들을 보내, "김옥균 일파"를 지원하려고 했지만, "이토 히로부미"의 반대로 무산되고 만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뒤, 개화파 인사들에 대한 혹독한 형벌과 연좌제를 보고 비분강개하여 당일은 식음을 전폐하였다. 그는 아까운 인재들을 잃었다며, 대성통곡하였다.

1885.03.16일, "갑신정변"에 가담한 일부 인사들과 유가족의 비참한 처우를 전해 듣고 분개, "시사 신보"에 "탈아론(脫亞論ㆍ아시아 탈피)"를 발표하였다. 1885.08월에는 "조선 인민을 위하여 조선 왕국의 멸망을 기원한다."며, 조선 정부를 규탄했다. 여기서 그는 "인민의 생명도, 재산도 지켜주지 못하고, 독립 국가의 자존심도 지켜주지 않는 그런 나라는 오히려 망해 버리는 것이 인민을 구제하는 길이다."라며, 조선 정부를 강력 비판하였다.

그는 1890년대 후반, "조선의 멸망"을 예견하였다.

그러나 그 조선을 멸망시키는 것이 "일본"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에 의하면, 조선 정부가 외국의 침입으로부터 자국민을 보호하지 못하며, 지배층은 국민의 권익 보호에 관심이 없다. 그리고 일반백성들 조차도 부패와 탐욕, 위법 행위를 자행하는 등 내부적으로도 심각하게 부패해 있다고 지적했다. 조선의 멸망은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부패한 정권과 척족, 무능한 관리들의 세습과 부정부패판인 정부의 멸망은 당연한 것이며, 머지않은 조선의 멸망을 축하한다는 투의 논설 "조선 인민을 위해서 그 나라의 멸망을 축하한다."를 남겼다.

1894.12월 조선으로 귀국한 "서재필"이 "유길준ㆍ윤치호"와 손잡고 "신문사 개설"을 시도하며, "서재필ㆍ유길준"의 신문 도입취지 설명을 듣고, 이들에게 조언을 해주고 적극적으로 후원해주었다. 자신의 시사신보사의 시찰ㆍ견학부터 신문 인쇄기와 활자ㆍ우수한 성능의 타자기와 잉크ㆍ종이 등도 알아봐 주기도 했다. 그는 이들에게 한자ㆍ한글을 혼합한 "국한문 혼용 방법"을 권고하였으며, 한국 최초의 근대 신문 "한성순보"의 간행에도 후견, 조언을 해주었다. 

3. 평가

① 긍정적 평가

"메이지 유신" 이후, 관계 진출 권유를 거절하고, 언론과 대학을 세워, 오직 "일본정신의 근대화"를 위한 계몽사상가로 활동해, 일본인들이 존경을 보내고 있다. 서양문명의 충격 속에 일본을 주권적 국민국가로 만들기 위한 정신적 토대를 만든 위대한 사상가로 평가된다. 일본에서는 "근대화의 아버지"로 간주된다. 반대로 한국ㆍ중국에서는 제국주의 침략을 부르짖은 "탈아론(脫亞論)"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는 오늘날 일본 우익의 뿌리로 평가된다.

그는 "갑신정변" 이후인 1885.03.16일자 일본의 "시사신보(時事新報)"의 사설을 통해, 일본의 서구문명화와 "탈아(脫亞ㆍ아시아 탈피)"를 부르짖으며, "중국과 조선을 클리어(청소)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고, 그해 08.13일자에 "조선 인민을 위해서 그 나라의 멸망을 축하한다."는 제목의 기사를 싣기도 했다. 그는 개인과 국가의 자주 독립을 위해서는 "서양 문명의 도입이 급선무"라고 하며, "영국의 입헌정체(立憲政體) 실천"을 주장하였다.

대표적인 명언은 "독립자존"으로 그의 계명이기도 했다. 

이 의미는 심신을 독립시키고, 자기 자신을 존중하며, 품위를 지키는 것이다. 또 베스트셀러가 된 "서양사정ㆍ문명론의 개략" 등의 저서를 발표하여,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이 "중화사상ㆍ유교정신"에서 탈피하여, 서양문명을 좀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흐름을 만들었다. "회계학"의 기초가 되는 "복식부기"를 일본에 소개하였다. 또한 일본에 "근대 보험 제도"를 소개한 것도 그였다. "서양안내서"에서 "재난청합"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생애청합(생명보험)ㆍ화재청합(화재보험)ㆍ 해상청합(손해보험)"의 3종류 "재난청합"을 소개ㆍ설명하였다.

② 부정적 평가​

그의 "탈아(脫亞ㆍ아시아를 벗어남) 이론"이 일본을 "군국주의ㆍ제국주의ㆍ전쟁"으로 몰아넣었고 원폭피해를 당하게 만들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1만 엔 권의 얼굴"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전쟁 후 지폐에 인쇄될 인물은 "민주주의에 공헌한 일본인"으로 정해져 있었고, 그는 "자유 민권 운동"을 반대하고 있었다. 그는 "법리(法利)"에 대한 일반의 자유 중시를 일국의 독립과 결부시키고 있다.

이는 그가 민권ㆍ인권보다 국권ㆍ국법을 우선시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말해준다. "탈아입구(脫亞入歐ㆍ아시아를 벗어나 구미를 본받는다) 이론"은 일본 군국주의의 이론적 발판이자, 역사 교과서 왜곡을 주도하고 있는 "일본 우익의 이념적 원류"라는 부정적인 평가도 있다.

4.  "7심훈(7가지 마음의 교훈)"을 남겼다?

후쿠자와 심훈ㆍ후쿠자와 유키치옹 심훈ㆍ후쿠자와 7훈 칠칙ㆍ유키치 심훈ㆍ심훈ㆍ7칙

그는 "7개의 가르침"이라는 것을 남겼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작자불명의 위작"이다. 이는 "일본 메이지 시대ㆍ다이쇼 시대"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하나의 시대정신(時代精神)으로 인식되었으며, 근현대 일본의 명언이자, 잠언의 하나로 알려졌다.

거짓말을 하면서 진실을 왜곡하면 유지할 수 없는 그런 인간관계는 비참한 인간관계라고 역설하였다. 그는 항상 참되고 진실하고 성실할 것을 주창하였다. 또한 인생의 주인은 자신이라며, 최종 결정은 자기 스스로 내려야 함을 강조하였다.

• 세상에서 가장 즐겁고 멋진 것은 일생을 바쳐 할 일이 있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것은 인간으로서 교양이 없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것은 할 일이 없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추한 것은 타인의 생활을 부러워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것은 남을 위해 봉사하고, 결코 보답을 바라지 않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모든 사물에 애정을 갖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5. 생 애

그는 "신분사회ㆍ문벌제도는 부모의 원수였다"고 말할 정도로 새로운 세상을 꿈꾸기도 했다. "하급무사" 집안에 태어난 그는 봉건적이고, 계급적 질서의 근거로 비판받았던 "성리학" 중심의 "한학"을 배우는데 반발하여, "나가사키ㆍ오사카"에서 "난학(네덜란드 학)" 공부에 몰두하였다. 1858년, "도쿄 에도"에 "네덜란드어 어학교"인 "난학숙(蘭學塾)"을 열었다.

8살 때, 친형인 "후쿠자와 산노스케"의 문인이 되어, 그로부터 "성리학"을 수학하였다. 14~15세 무렵, "시라이시 쇼잔(白石照山)"이 세운 서실에 다니며, "논어ㆍ맹자ㆍ시경ㆍ서경"을 떼고, 이어 "사기ㆍ춘추 좌씨전ㆍ노자ㆍ장자" 등도 두루 섭렵하였다. 특히 그는 "춘추 좌씨전"은 책 내용을 통째로 암기하였다. 14살 이후부터, "인문고전"을 접한 이후로 지독한 "인문고전 독서광"이 되어, 두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후, "메이지 유신의 사상적 토대를 닦았다"고 알려져 있다.

1860년, "네덜란드 선박" 함장의 수행원으로 "미국"에 건너간 뒤, "막부의 구미지역 견외사절단"으로 "프랑스ㆍ영국ㆍ독일ㆍ아프리카" 등을 방문하고 귀국, 자신의 견문을 알리고 개항을 주장하였다. "도쿄"로 돌아와서 당시 세계의 중심이 "네덜란드"가 아니라 "영국ㆍ미국" 등 영어권이라는 사실에 놀라, 학문의 방향을 "영학(英學)"으로 바꾸었다.

"메이지 유신" 기간 중, "메이지 천황"의 입각 제의를 사양하고, 학문 연구ㆍ계몽사상 교육ㆍ토론 교육ㆍ언론 활동 등 정부 밖에서 "메이지 유신"의 이론적 토대ㆍ개화청년 양성에 주력하였다. 서구사상ㆍ문물의 일본 도입을 위해 앞장섰고, 평소 강조한 것처럼 재야에서 일본의 힘과 독립을 증진시키는 데 기여했다.

2번째 순방 길에는 "영국"을 방문, "런던"에서 "만국박람회"를 시찰할 때, "증기기관차ㆍ전기 장비ㆍ활판 식자기" 등을 유심히 관찰하였다. 이어 "러시아"를 방문, "사할린" 국경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들어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육군 병원"에서 수술하는 것을 견학했다.

"막부"로부터 지급받은 여비 400냥으로 "영어 설명서ㆍ물리 설명서ㆍ유럽의 지도ㆍ지리서"를 사서 일본으로 가져갔다. 유럽 여행길에 "토지거래 계약서 작성" 등 문화적 차이에 놀라면서, 당시 일본의 책에도 나오지 않았고, 유럽인에게는 흔하지만 일본인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일과 일상에 대해 조사했다. 예를 들어 "서양식 병원ㆍ은행업무ㆍ고리대금ㆍ보험업무ㆍ우편법ㆍ징병징집제도ㆍ선거제도ㆍ의회제도" 등에 대한 것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사절단 수행원"의 참여 경험을 통해, 그는 일본에 서구 문물과 양학의 보급이 필요함을 통감했다. 또한 프랑스인 청년 "레온 드 로니"와 친교를 맺고, "아메리카와 동양 민족학회의 정회원"이 되어, 일본인으로는 "외국 학회의 정회원"이 된 인물들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이때 보고 느낀 바를 기록한 "서양사정"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서양문명의 유행은 막을 방도가 없다. 일본은 문명화를 받아들여 아시아에서 새로운 축을 마련했다. 그 이념이 "탈아(脫亞)"다. 근대화를 거부하는 중국과 조선은 서양이 압박하는 가운데 독립을 유지할 방법이 없다. 일본은 이웃과 헤어져 서양열강과 함께 움직이자. 우리는 마음속에서부터 아시아의 나쁜 친구를 사절해야 한다."며, "서구 문물"을 일본이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그는 "프랑스와 영국"에서 궁금한 걸 물었는데, 이런 기록이 있다. 관찰력이 돋보인다. "프랑스"는 징병제라는데 "영국"은 징병제가 아니란다. 도대체 왜 나라마다 제도가 다른 것일까 궁금했다. 선거법은 아예 이해조차 되지 않았다. 도대체 어떤 법률에 기초해서 실행하는지, 국회는 어떤 관공서인지 물었다. 그러니 질문 받은 상대방은 그저 웃을 수밖에. 더 황당한 것은 당파가 둘로 나뉘어 태평천하에서도 정치적인 싸움질을 해댄다는 점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적인 상대방과 함께 술 마시고 밥을 먹는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 닷새고 열흘이고 걸려서, 간신히 납득했다.

동양에는 유형의 것으로는 "수리학", 무형의 것으로는 "독립심" 이 2가지가 없었다. 정치가가 국사를 처리하는 것도, 실업가가 상거래와 공업에 종사하는 것도, 국민에게 보국의 생각이 많고, 가족이 단란한 정으로 충만한 것도, 그 유래를 따져보면 자연히 그 근본을 알 수 있다. 비근한 예를 들면, 지금의 이른바 입국이 그렇고, 확대해서 말하면 인류 전체가 그렇듯이 인간만사는 "수리"를 빼놓고는 논할 수 없으며, "독립" 외에는 의지할 곳이 없다는 소중한 진리를 우리 일본에서는 가볍게 여기고 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