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스쿠니 신사 (靖國神社(정국신사)ㆍYasukuni Shrine)"는 8만여 개에 달하는 "일본 전역의 신사" 가운데서도 가장 규모가 큰, "신사 중의 신사"로 불린다. 1978년,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제2차 세계대전 A급 전범들"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하였다. 이후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로 주변국과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1. 야스쿠니 신사 (평화로운 나라ㆍ나라를 편안하게 한다는 뜻)
일본 최대의 신사ㆍ황국신사ㆍ호국신사ㆍ전쟁의 하신들을 추모하는 신사ㆍ
• 설 립 일 : 1869년 • 규 모 : 99,000 m2ㆍ246만 6천여 명 안치 (태평양 전쟁 전몰자)
• 위 치 : 일본 도쿄 지요다구(千代田區) "일본 도쿄(東京)"의 한 가운데인 "지요다구(千代田區) 황궁" 북쪽에 있는 신사(神社)
• 목 적 : 황군의 혼령을 달래기 위한 국가 신사ㆍ1869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직후, "막부(幕府)군"과의 싸움에서 숨진 영혼을 "호국의 신"으로 제사 지내기 위해, 건립되었다.
• 명 칭 : 건립 당시 명칭은 "도쿄 쇼콘샤(招魂社)"로, 일본 전역에 세워진 "쇼콘샤" 가운데 "황실"이 직접 납폐하는 으뜸 신사였다. 이후 "쇼콘샤"는 일본의 대외침략과 발맞추어, 국가 신도의 군사적 성격을 대표하는 "신사"로 자리 잡았고, "세이난(西南) 전쟁" 2년 뒤인 1879년에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2001년 현재, "야스쿠니 신사"에는 총 246만여 명의 전몰자가 안치되어 있다. 오무라 에키지(일본 육군의 아버지)의 동상ㆍ대형 함포 등 각종 병기ㆍ자살특공대인 가미카제(神風) 돌격대원의 동상ㆍ전함 야마토의 특대형 포탄ㆍ군마와 군견의 위령탑ㆍ제로센(0戰) 전투기 등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전쟁 유물ㆍ전범의 동상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전시되어 있다.
"야스쿠니 신사"의 상징인 흰 비둘기가 평화를 의미하는 것과는 반대로, 전시물들은 전쟁ㆍ전투의 의미를 부각시키고 있어, 전쟁박물관인지 신사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만큼 이중성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전몰자를 호국의 영령으로 제사하고, 여기에 "천황의 참배"라는 특별한 대우를 해줌으로써, 전쟁 때마다 국민에게 "천황숭배ㆍ군국주의"를 고무ㆍ침투시키는 데 절대적인 구실을 하였다. 또 전몰자들은 천황을 위해 죽음으로써 생전의 잘잘못은 상관없이 신(神)이 되어, 국민의 예배를 받았다.
일본의 젊은이들은 "야스쿠니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전쟁터로 떠났을 만큼 모든 가치의 기준을 천황에 대한 충성 여부에 두었고, 따라서 "야스쿠니 신사"의 제신(祭神) 원리는 국민의 도덕관을 매우 혼란하게 만들었다. "천황"을 위한 죽음은 대부분 명분 없는 침략전쟁에서의 죽음이었기 때문에, "일본 군국주의"는 이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로, 신화의식을 조작해, "야스쿠니 신사"를 탄생시킨 것이다.
전쟁이 끝난 뒤, "연합군 총사령부"는 "야스쿠니 신사"의 호국적 성격을 알고, 단순한 종교시설과 순수한 전몰자 추도시설 중, 하나를 택하라고 일본에 강요, 일본은 종교시설을 택하였지만, "야스쿠니 신사"의 특수한 기능인 "전몰자 추도시설 기능"을 완전히 박탈하지는 못하였다.
1947년, "일본"은 "신헌법"에서 정교분리를 규정한 뒤에도, "야스쿠니 신사"가 종교 시설이자, 전몰자 추도시설임을 인정하였고, 1960년대 말부터는 "야스쿠니 신사"를 국가의 관리 아래 두자는 법안을 계속 제출하였다. 비록 여론에 밀려 번번이 실패하기는 하였지만, 갈수록 이러한 주장들이 설득력을 얻기 시작하였고, 급기야 1978년에는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를 비롯한 "A급 전범(14명)이 합사되는 일"이 발생하자,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일본 보수우파 세력"은 "A급 전범은 연합국이 일방적으로 규정한 것일 뿐, 일본 국내법상으로는 범죄자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등,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을 부채질하였고, "일본" 정부 역시 "후생성"이 중심이 되어, 민관합동기구가 결정한 일일 뿐이라고 발뺌하였다.
1985년, "나카소네 야스히로 (中曾根康弘)"가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공식 참배하였다. 2000년, "이시하라 신타로 (石原愼太郞) 도쿄도 지사"가 공식 참배하였다.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小泉純一郞) 총리"가 공식 참배하는 등, 일본 군국주의의 망령을 부활시키고 있어, 주변국뿐 아니라 국제적인 비난을 받고 있다.
2. 1948.11.12 : "A급 전범자" 피고인(28명) 중, 25명의 피고인에게 "유죄"를 선언
교수형 (7명)ㆍ종신형 (16명)ㆍ금고 20년 (1명)ㆍ금고 7년 (1명) 선고
< 교수형 (7명) >
• 도조 히데키 (Hideki Tojoㆍ61세ㆍ판결 시 64세): 도쿄 수상ㆍ육군대장ㆍ참모총장
사유 : 1941.12.08, 하와이(Hawaii)의 군항 "진주만" 불법공격ㆍ미국군과 일반인을 살해한 죄ㆍ도쿄 수상ㆍ육군대장ㆍ참모총장ㆍ"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A급 전범ㆍ1941.10.18.~ 1944.07.18일까지 내각총리대신(수상ㆍ국무총리)ㆍ 1945.08월 일본 패전 후, 권총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ㆍ"불교"에 귀의했으나, 처형되기 전까지도 전혀 참회하지 않았다. 1935년 관동군 헌병사령관ㆍ1937년 관동군 참모장ㆍ1938.05~ 12월까지 고노에 내각의 육군 차관ㆍ1938~1939년까지 육군 항공총감ㆍ1940.07~41.10월까지 고노에 내각의 육군장관
• 마쯔이 이와네 (Iwane Matsuiㆍ68세ㆍ판결 시 71세): 아이치 육군대장ㆍ상해 파견 군사령관
사유 : 포로 및 일반인에 대한 국제법 위반 (남경대학살)ㆍ1933년 육군대장ㆍ대 아세아 협회 창립자의 1인ㆍ1937.10월~ 1938.02월까지 중지나 방면 군사령관ㆍ1938.07~ 40.01월까지 군사 참의관
• 히로타 히로노리 (Kouki Hirotaㆍ68세ㆍ판결 시 71세): 주 소련대사ㆍ외상ㆍ수상
사유 : 태평양 전쟁에 이른 일본의 침략 정책 작성ㆍ1930년 주소 대사ㆍ1933.09~34.07월까지 사이토 내각의 외무대신ㆍ1934.07~36.03월까지, 오카다 내각의 외무대신ㆍ1936.03~37.02월까지, 국무총리ㆍ1937.06~38.05월까지, 고노에 내각의 외무대신ㆍ1940년 내각 참의
• 도이하라 겐지 (Kenji Doiharaㆍ63세ㆍ판결 시 65세): 오카야마 육군대장ㆍ아리마로주 특무기관장
사유 : 중국 침략의 죄ㆍ1931년 아리마로주 특무기관장ㆍ1933년 관동 군사령관ㆍ화북 자치정부 최고 고문ㆍ1938~40년까지, 만주주둔 5군사령관ㆍ1941년 육군 항공총감ㆍ1943년 동부 군사령관ㆍ1944~45년까지, 싱가포르(Singapore) 제7방면 군사령관
• 이타가키 세이시로 (Seishiro Itagakiㆍ61세ㆍ판결 시 64세): 이와테 육군대장ㆍ중국파견 군 총참모장
사유 : 중국 침략ㆍ미국에 대한 평화의 죄ㆍ1936~37년까지 관동군 참모장ㆍ1938.06~39.08월까지 고노에ㆍ히라누마량 내각의 육군 장관 겸 쓰시마 사무국 총재ㆍ1939.07월 중국 파견군 참모장ㆍ1941.07~1945년까지 조선 군사령관ㆍ1945.04월 싱가포르 제7방면 군사령관
• 기무라 헤이타로우 (Heitaro Kimuraㆍ58세ㆍ판결 시 61세): 이타마 육군대장ㆍ버마 파견 군사령관
사유 : 영국에 전쟁 선포한 죄ㆍ1940년 관동군 참모장ㆍ1941~44.02월까지 고노에ㆍ동조 내각의 육군차관ㆍ1944년 미얀마(Burma) 방면 군사령관
• 무토 아키라 (Akira Mutoㆍ54세ㆍ판결 시 57세): 구마모토 육군중장ㆍ육군 생 군무국장
사유 : 일부 포로 학대의 죄ㆍ1939.10~ 42.04월까지 육군생 군무국장ㆍ1943년 수마트라섬 제2사단장ㆍ1944.10월, 필리핀 이군 14 방면군 참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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