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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 역사ㆍ사건ㆍ인물

용어 : 천황 (텐노)ㆍ쇼군 (장군)ㆍ막부ㆍ다이묘ㆍ사무라이ㆍ태합

by 당대 제일 2022.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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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 (天皇 : 텐노)ㆍ쇼군 (將軍 : 장군)ㆍ막부 (幕府 : 정권)ㆍ다이묘 (大名 : 영주)ㆍ사무라이(侍 : 무사/ 낭인)ㆍ태합/ 태합하 (太閤ㆍ太閤下: 전임 섭정ㆍ관백)을 말한다. "천황"이라는 표기를 사용하게 된 것에 대해서, 일반적인 속설로는 중화권의 황제인 "천자 (天子)"보다 높이려는 의도로 썼다는 얘기도 있다. 그런데 중화권에서의 "천황"은 중국 신화에 나오는 주신인 "옥황상제"를 일컫는다.

 

1. 일본 천황 (天皇Emperor of Japan일왕 (日王) ) : 텐노

"천황"은 존재하지만, 실질적인 권한은 "막부"에 있는, "고려 무신정권"과 같은 역사가 오랫동안 이어져 왔다. 현재 : 제126대 천황인 나루히토이다.

• 비리법권천 (非理法權天): 천황의 절대권을 의미        • 만세일계 (萬世一系): 일본 황실의 계보가 한 번도 끊어지지 않고 존속되었다고 주장하는 의미        • 팔굉일우 (八紘一宇): 일본제국 때, 세계의 만방이 모두 천황의 지배하에 있다는 의미

"천황"은 일본 "군주"로 "황실"의 대표로, 주권을 가진 일본 "국민"의 총의에 기한 "일본의 상징"이자, 국민 통합의 상징이며, 외교 관계에서 "국가원수" 지위에 있다.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역사ㆍ문명이 중국ㆍ한국에 비해 가장 늦게 형성된 나라이며, 인류 구성도 독특해 "남방계ㆍ중국ㆍ한반도에서 도래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국가이다. 중국 "수나라"에 "견수사", "당나라"에 "견당사"를 파견하여, 문물을 수용하였다. 8C 를 전후하여, 국호를 "왜"국에서 "일본"으로 고치며,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해, "일본 서기ㆍ고사기"의 내용을 통해, "천황"의 신격화ㆍ신화들이 서술된다.

"초대 천황"은 "진무텐노(1대)"로 BC 660년경에 즉위한 사람인데, 거의 "신화"에 가깝다. 이 시기의 "동 아시아"는 "중국"을 제외하면 거의 역사가 형성되지 않았고, 기록도 전무하다. "진무 천황"에 대한 서술을 보면, "100세를 넘은 나이에 1명의 인물이 행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업적(후대 기록)등을 봤을 때, 실존한 인물은 아니라는 게 일반적인 견해로, 그냥 "신화적인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 쇼군 (將軍) : 정이대장군 (征夷大將軍)장군 (將軍)대수장군 (大樹將軍)어소 (御所)

서구에서는 "쇼군"을 사실상의 "국가원수"로 보고, "막부""쇼군국(Shogunate)"이라 칭하기도 한다. 막부시대 수장1192년 이후, 700년간 지속1867, 메이지유신(명치유신)으로 폐지ㆍ타국에서는 "정이대장군""국왕"으로 간주하는 것이 통상적이었다.

일본의 역대 "무신 정권(武臣政權)""막부(幕府)의 수장(首長)"을 가리킨다 "막부의 정이대장군"은 주로 "우에사마(上様)"라고 불렸다 "에도 시대"까지 최고 권력자의 직책으로 존재하였으나,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 폐지되었다.

"일본""영외관 장군직" 중 하나로, 1192"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의 우두머리가 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 1192~1199)""세이이 다이쇼군(征夷大將軍)"이라는 호칭을 사용한 이래, 역대 "쇼군""무신정권의 장()"이라는 개념으로 사용되어 왔는데, 그것은 곧 "막부의 주재자(主宰者)" 미하게 되었다.

"무신정권의 쇼군""가마쿠라 막부(1192~1333)"시대의 9, "무로마치 막부(1338~1573아시카가())시대의 15(재임포함 시 16), 에도막부(1603~1868도쿠가와(德川)도쿠가와 이에야스(川家康1603~1605)시대의 15대등 모두 합쳐 39(재임포함 시 40) 700년간 지속되었다 그러나, 1867년의 "정복고" , "메이지유신(明治維新)"으로 폐지되었다.

1600, "가을 교토"에서 북동쪽으로 약 80km 떨어진 곳에 있는 "세키가하라()"에서 벌어진 규모 전투에서 "이에야스"는 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실권은 없으나, 의례적인 권위는 가지고 있던 "왕실"은 그동안 "이에야스"에게 그의 세력을 반영하는 "직책 명"을 수여해왔는데, 마침내 1603"쇼군(將軍)"이라는 칭호를 부여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일본 최강의 "다이묘""이에야스""덴노(天皇tenno)"의 이름 아래, 평화를 유지하는 무를 공식적으로 맡게 되었다.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세이이타이쇼우군)"라는 명칭의 직책은 "나라 시대헤이안 시대""미시(동쪽의 오랑캐)""혼슈" 동쪽 방면으로 정벌할 때, 임명된 장군이다 "에미시"를 서쪽해안 방향으로 공격하는 장군은 "정적대장군(征狄大將軍세이테키타이쇼군)""" 진군하여, "하야토" 등을 공격하는 장군은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세이세이타이쇼군)"으로 불렀는데, 이는 중국의 "화이관(중화사상중국이 자국의 문화와 국토를 자랑스러워하며, 민족을 배척하는 사상)""일본" 상황에 적용시켜 생겨난 이름들이다.

당초에는 "정동 장군"과 같이 "정동(征東)"이라는 표현을 쓰다가, "정이(征夷)"를 사용하게 되었다 "가마쿠라 시대""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막부"의 수장이자, "동국 무사단의 동량" 리키는 말이 되었고, 이 직책은 "무가 동량 가문"이 대를 이어 계승하는 경향이 생겼다 이미 "조정"을 통제하고, "무가"를 거느리는 "일본의 실질적 통치자"를 의미하는 직책이 되었다.

3. 막부 (幕府): 야전사령부무가정권중세 "가마쿠라~에도"시대, 무가(武家)정치의 시행정청(施行政廳)

"중세 일본""가마쿠라(鎌倉)~ 에도(江戶)"시대, "무가(武家)정치의 시행정청(施行政廳)"및 무가정권ㆍ"정이대장군"의 원정 시, "본진"을 가리키던 말이던 것이, "전시의 사령부""전후"에도 "정치적 기관"으로 존재하게 되면서, 실질적으로 "무가정권의 정청"을 말하게 되었다 이후 역사상 일본에서는 "가마쿠라 막부무로마치 막부에도 막부"가 존재해 왔다.

"중국"에서 ""을 대신하는 지휘관이 편 "진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 뜻에서 "대장군의 진영", 나아가 "무관의 임시 정청"으로 그 의미가 파생되었다 "중국"에서 출정(出征) 중에 있는 "장군의 본영(本營)"을 가리킨 데서 유래하였는데, 출정 중에 일정한 거소(居所)없이 수시로 천막을 쳐서, "진영"을 둘러싼 것을 "()"라고 하였기에 이 명칭이 붙었다.

"일본"에서는 "근위대장(近衛大將)의 거관(居館)"을 지칭하였는데, 진화하여 "근위대장 자체"를 뜻하게 되었다. 그 뒤 장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가 "가마쿠라""무가정치"를 시작하고, 1190"근위(右近衛) 대장"에 임명되자, "거관"을 이렇게 불렀고, 1192"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이 되면서 "장군 자체" 가리키게 되었다.

"에도 중기 이후"에 이르러서는 "장군장군의 거관무가정권 그 자체"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 사실 "막부"라는 말이 "무가정권" 자체를 가리키게 된 것은 "에도 시대" 중기 이후의 일로, "유학자"들이 창안한 용례이다.

4. 다이묘 (大名) : 봉건 영주(領主)제후(- 울타리 번현재 현 크기)

"막부"시대에 "1만석 이상의 독립된 영지"를 소유한 영주, 1868"메이지 유신" 이후, 폐지ㆍ10~ 19C에 걸쳐, 일본 각 지방의 영토를 다스리며, 권력을 누렸던 "영주"를 말한다.

"다이묘""쇼군" 바로 아래의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고, "사무라이"들을 고용하여, 자신들의 ""를 지키도록 하였다"막부"와의 친소(친함과 소원함)에 따라, "신판(親藩)후다이(譜代)도자마(外樣)" 3부류로 누었다. "슈고 다이묘(守護大名)""다이묘" 라는 명칭을 가장 먼저 얻은 첫 번째 집단이었다

"막부"가 제정한 "무가제법도(武家諸法度)"를 엄격하게 준수하여야 하였다. 그 중에는 "()의 신- 증축의 금지다이묘 끼리의 허가 없는 혼인금지500석 이상의 적재 선박 건조금지기독교 엄금" 등의 조항이 있었다. 최고는 "가가(加賀)의 마에다 번(前田藩102만 석)미나미큐슈(南九州)의 시마즈씨(島津氏77만 석)도호쿠(東北)의 다데씨(伊達氏62만 석)" 순이었다.

5. 사무라이 (): 무사(武士)농민/상민 위의 계급화

낭인 (浪人, 소속이 없는 사무라이)로닌 (주군을 잃은 사무라이)ㆍ"다이묘"의 싸움안전을 위해, "농민"을 착출하여, 무장시킨 것이다.

맡은 "실무"라는 것이 말 그대로 "조정의 국사 전반에 관련된 것"으로 굳이 "무예" 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차츰 "무예"를 직능으로 하는 "부시(武士)"를 가리켜, "사무라이"라 부르는 경우가 많아지게 되면서, "사무라이 = 무사"라는 공식이 성립하게 된 것이다.

원래는 "가까이에서 모신다."는 뜻의 단어, "()"에서 나온 말로, "귀인을 경호하는 사람"을 가리켰으, "헤이안 시대" 이후, "일반적인 무사"를 가리키게 되었다. "상급 무사""하급 무사"차별은 심했고, "사무라이""()"을 무단이탈(탈번) 시에는 "사형" 당하였으며, "주군"을 잃은 "사무라이""로닌"이라 불리며, "칼솜씨"를 제외한 기술이 없어, 특별한 직업 없이 유랑하거나, 걸식하며, 살인청부 등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원래는 통상 "위계 6" 정도의 조정을 섬기는 "관인(하급 기능직 관인)"이면서, 동시에 상위 "귀족다이후(大夫)"를 섬기는, "사무라이혼(侍品)"이라 불린 신분이 바로 "사무라이", 출세한다 해도 "귀족의 말석""5위 정도"까지 오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6. 태합태합하 (太閤太閤下) : 전임 섭정관백

좁은 의미 : "섭정관백" 직을 그 후계자에게 물려준 인물만을 가리킨다. 넓은 의미 : 현직 "태정대신(太政大臣)좌대신(左大臣)우대신(右大臣)"의 삼공까지를 포함한다 경칭 : 전하(殿下), 직접 부르는 경우에는 "태합전하(太閤殿下)"라고 불렀다 출가한 "태합""선정태합(禅定太閤)"이라고 부르며, "선합(禅閤)"이라고 약칭하기도 한다.

가장 유명한 "태합""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로서, 1591년에 양자 "도요토미 히데쓰구(臣秀次)"에게 "관백" 직을 물려준 뒤, "태합"을 칭하였다 근세에 "태합"이라는 말로 불린 것이 "히데요시" 뿐이었기 때문에, "태합"이 고유명사로 오해되기 쉬우나, 실제로는 "전임 섭정 또는 전임 관백" 등에 대하여, 보편적으로 쓰이는 명사이다.

사서에서는 "히데요시""도요토미(豊臣) "에서 따온 "풍태합(豊太閤)"이라고 칭하는 경우가 많다 그가 전국 규모로 실시한 "검지(検地, 토지조사)"는 당시부터 "태합검지(太閤検地)"라고 불렸다.

"가마쿠라 시대(1185~1333막부가 정치의 중심이 된 시기)"의 관백 "니조 요시자네"는 동생 "치조 사네쓰네"에게 "관백" 직위를 물려주고, "내람(内覧, 일본 천황에게 올리는 문서와 천황이 재가한 문서 일체를 먼저 볼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역직)"에 임명되어서, "태합"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그 자손인 "니조 요시모토"13년에 걸쳐, "관백" 직을 지내어 직접적인 혈연관계가 없는 다른 가문의 당주가 "관백"이 된 뒤에도 "태합"을 칭하여, "내람"으로서 권세를 누려, 그 뒤 3번이나 "섭정"에 재임명되었다.

"메이지 유신"으로 "태정관제(太政官制)"가 폐지되어, "섭정관백" 직이 없어지자, "태합"이라는 말도 과거의 유물이 되어, 역사서에서만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뒤에도 종종 쓰여, "히데요시", 낮은 신분 혹은 극빈층에서 크게 출세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栄)" 등을 "금태합(今太閤, 오늘날의 태합)"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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