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본 - 역사ㆍ사건ㆍ인물

용어 : 일본 제국ㆍ관동군(1906~)ㆍ만주국군(1932~)ㆍ산해관(山海關)

by 당대 제일 2022. 12. 12.
반응형

 

"관동군 (關東軍)"은 1906~1945까지 존재했던, 중국ㆍ소련을 침략할 목적으로, 중국 동북지방을 강점하고 있던 "일본제국 육군" 주력부대 중 하나이다.

 

1. 관동군 (關東軍)ㆍ만주 국군 (滿洲 國軍)ㆍ만주국

① 관동군 (關東軍): 1906~1945 : 병력 1933년 (10만 명)→ 1941년 (100만 명)

"산해관 (山海關)"의 동쪽에 주둔한 "일본군"이라는 의미ㆍ"만주국(일본 제국이 세운 괴뢰 정권)"을 설치하는 데, 주동적 역할 → "만주국"에 상주

• 명령 : 대본영 (만주국 신징 특별시 뤼순커우 구)         • 지휘 : 야마다 오토조(山田乙三) 대장

• 편성 : 직속부대(659부대(방역급수대)- 731부대ㆍ100부대(군마 방역창))ㆍ1방면군(3군ㆍ5군)ㆍ3방면군(30군ㆍ44군)ㆍ17방면군(58군ㆍ4군ㆍ34군ㆍ대륙철도사령부)

• 참전 : 중일 전쟁 일본의 만주 침공ㆍ챠하루 전투ㆍ소비에트 연방-일본 국경 분쟁ㆍ하산호 전투ㆍ할힌골 전투ㆍ만주 전략공세작전ㆍ제2차 세계 대전

"관동군 사령관"이 "주만(駐滿) 대사"를 겸하면서, 중국 동북지방 전역을 실질적으로 통치했다. "관동군"은 괴뢰 정권인 "만주국"을 실질로 통치하는 기구였고, "관동군 사령관"이 만주국의 실권자였다.

"러일전쟁(1904.02~1905.09)"에서 승리한 일본은 "러시아 조차지(租借地)"인 "랴오둥 반도(遼東半島"를 인수하여, "관동주(關東州)"를 만들고, "관동도독부"를 두었다.  이때 "관동주"와 "남만주철도" 경비를 위해 병력을 주둔시킨 것이 "관동군"의 시초이다.  이후 "관동도독부"가 폐지되고, 그 밑에 있던 "육군부"가 독립하여 "관동군사령부"가 되었다.

② 만주 국군 (滿洲國軍): 1932~ 1945년

만주국 (일본 제국의 괴뢰국)의 육군

• 명령 : 만주국ㆍ관동군        • 지휘 : 총사령관 강덕제 (청 제국 마지막 12대 황제 선통제 푸이ㆍ1906~ 196)

• 참전 : 러허 성 침공 작전ㆍ소비에트 연방-일본 국경 분쟁ㆍ건차자도 사건ㆍ할힌골 전투ㆍ2차 세계대전

③ 만주국 (滿洲國): 일본제국이 "만주사변(1931.09월)" 직후부터 만주 지역에 세운 괴뢰국

1931년, 일본제국 육군의 주력부대 중 하나였던 "관동군"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지역을 점령하였고, 1932.03.01.일 "선통제 푸이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다가 퇴위)"를 황제로 내세웠다.

2. 만주 국군 (滿洲國軍)

1932.03월, "만주국" 건국 이후 "동북군"의 일부였던 "장쉐량(6만 명 규모) 부대" 등 여러 부대를 모태로 삼아 창립되었다.  초기에 무기는 "동북군"에게 빼앗은 노획물을 바탕으로 삼았고, 많은 수의 군사가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비정규군"이며, "아편 중독자"도 있었기 때문에, 초기의 전투 능력은 높지 못했다.

1932.08월, "만주군 2천명"이 항일 부대에게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하는 등 충성도도 크게 떨어졌다. 창립 당시부터, 일본인이 "고문"을 맡아 조종하였고, 군대 이동ㆍ연습ㆍ장비 교체ㆍ인사이동과 같은 주요 결정에 "관동군"의 승인을 받는 지휘체계였다. 각 성 별로 "경비군"을 창설하였고, 1933.02월에는 "만주국 황제 푸이"와 고위 관리들을 호위하는 별도의 군대로 "금위대"가 창설되었다. 1934년, "만주국" 정부가 인정하는 학교를 졸업한 사람만이 "만주군 장교"가 될 수 있도록 법이 제정되었다.

① 장쉐량 (張學良ㆍ1898~2001ㆍ103세ㆍ중화민국 군벌 정치가) : 1936.12.12일, 시안(西安)에서 장제스(蔣介石)를 구금하고 "제2차 국공합작" 관련 요구를 한 이른바 "시안 사건"을 주도

② 장쭤린 (張作霖ㆍ1875~1928ㆍ53세): 중화민국 국민정부 만저우 지방 베이양 군벌 계파 시대의 봉천군벌

 동북군 (동북변방군): 1920년대 만주에 주둔하던 "중화민국 정부의 지방군"이다. 당시 중국 유일의 육ㆍ해ㆍ공 편제를 갖춘 군대

3. 관동군 (關東軍)간토군

"만주국(일본 제국이 세운 괴뢰 정권)"에 상주한 "일본제국 육군"의 주력 부대 가운데 하나"관동군"은 괴뢰 정권인 "만주국"을 실질로 통치하는 기구였고, "관동군 사령관" "만주국"의 실권자였다용어 자체는 "산해관(山海關)의 동쪽에 주둔한 일본군"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활 동 : 1919.04~ 1945.08월        병 력 : 10만 명(1933)  100만 명(1941 "관동군 특별대연습(關東軍特別大演習)" )        역 할 만주 지배        본 부 만주국 신징특별시 뤼순커우 구        명령 체계 대본영

 참 전 : 중일 전쟁- 일본의 만주 침공챠하루 전투소비에트 연방-일본 국경 분쟁ㆍ하산호 전투할힌골 전투2차 세계 대전만주 전략공세작전

"일본 제국"은 중국을 침공하는 전진기지로서, "만주"를 활용하고 있어서, "관동군"은 그 주변지에서 일본이 지배하는 지역을 확대하고, 중국을 침략하는 선봉으로서 다양한 음모 공작과 작전을 수행했으며, "중국인조선인"을 대상으로 하여, 끔찍하고 반인륜적인 실험을 자행한 "100부대731부대" 운영을 위시해 수많은 전쟁 범죄를 저지르기도 했다.

1928, "참모 고모토 다이사쿠""장쭤린(張作霖)"을 폭사시켰고1931, "참모 이타가키 세이시로이시와라 간지" "만주사변"을 획책해, 1932년 일본 제국의 괴뢰 정권인 "만주국"을 세웠다1932, "관동군 사령관""주만(駐滿) 특명전권대사"겸하고, 중국 동북 지방을 실질로 지배하기 시작한 이 기간에 "관동군""남만주철도주식회사"와 함께, 식민지를 공고히 지배하고 일본의 이익을 위해 철도 사업을 했다"만주국"의 주요한 정책 입안과 집행은 "관동군 사령관"에게 재가(裁可)받아야 했다.

"소련"을 대상으로 한 전쟁 준비와 중국 침공을 준비하느라고 관동군의 병력은 차츰 증강되었다1933년에는 규모가 10만 명이었는데, 1938"장고봉 사건"1939"노몬한 사건"으로 "소련"도발했다가 패했다. "나치 독일""소련"을 침공한 후에는 "독일"을 도와, "소련"을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병력을 크게 늘려, 1941"관동군특별대연습" 때는 약 100만 명이 되었다그러나 1941, 일본이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자, 1943년 가을 이후에는 전력을 "동남아시아"를 위시한 "남방 전선"으로 이동하게 되어, "만주"에는 형식적 전력만 남았다.

1945.08.06, "미국""원자폭탄"을 투하한 이후, "미국"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한 계산으로 "소련" 협력하여 신속하게 점령지를 "소련군"에게 넘겨주어, "소련군""미국"보다 먼저 한반도에 진군하도록 협조한다.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후인 1945.08.19"관동군 사령관"도 무조건 항복했다.

4. 산해관 (山海關) 천하제일관

"만리장성"의 동쪽 끝에 있는 "관문"으로, 군사 요충지였다. "허베이 성 친황다오 시 산하이관 구"에 속한다. 북서로는 "옌산 산맥", 동으로는 "보하이 만"이 있다.  "만리장성 동단"에서 만날 최초 관문이라는 의미의 별칭인 "천하제일관"으로 불리는 "산해관"을 통과하여, "중원으로 향로(向路)를 입관한다"고 하며, 그 외부에 있는 동북 지역을 "관외"나 "관동"이라고 칭하여, 명칭이 "관동주ㆍ관동군도"이다.  "산해관"을 기준으로, 동측을 "관동"이라고 명명했던 실정(實情)에서 유래한다.

"한(漢) 때"는 "임유관"으로 칭했고, "수(隋)나라 문제(文帝)"의 오만한 국서에 반발, 598년 "고구려 영양왕" 때, "강이식 장군"이 선제공격했던 "임유관 전투"의 배경지이다. "명 때"는 "산해위"를 설치하면서, "산해관"으로 불렀다.

"명 말 누르하치ㆍ홍타이지"에 의한 "만주족" 침입을 몇 번이나 잘 방어한 "수장 오삼계"가 "청"에 항복할 때까지, 난공불락 요새였다. "청" 성립 후, 공식 이름을 "임유현"으로 바뀌었지만, 그 후에도 "산해관"으로 부르기도 했다.

1931년, "유조호 사건(만주사변 발발)", 1932년, "만주국 건국"과 계속되는 전화의 확대로 1933.01월에 "관동군"이 "산해관"을 점령했다. "일본군"이 "산해관"을 점령해, "북경 공략 동부 루트"가 열리면서, 2월에는 "열하작전"을 진행하여 "열하성"을 장악하고, "만주국"에 병합하였다. 

① 둔황 이관 (二關)

북쪽으로는 "옥문관", 남쪽으로는 "양관"이, 변경을 지키기 위해 서 있어, "실크로드(서역)"의 중요한 관문 역할을 했던 곳이다.  "옥문관"을 지나면 북도(北道)로, "양관"을 지나면 남도(南道)로 통하였다.

② 옥문관 (玉門關): "만리장성"의 서쪽 끝

"둔황시"의 서북쪽으로 98km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실크로드"의 중요한 관문 역할을 했던 곳이다.  "한나라와 당나라" 두 나라에 의해 건립되었다. 현재의 "옥문관"은 "당나라" 시대에 만들어진 유적지이며, 이곳은 그 당시의 많은 "시인묵객"들의 소재로 사용되었다.

③ 양관 (陽關)

"둔황시"에서 남쪽으로 75km 떨어진 관문이다.  "한무제" 때, 세워진 방어 요새로 "옥문관"과 함께 "서역"으로 통하는 문호이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