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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쇄살인ㆍ조폭ㆍ기생ㆍ연예인

조선 요리 전문점 ② 명월관 (明月館) 변천사

by 당대 제일 2022. 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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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월관 (明月館)"은 서울에 있었고, 조선요리업의 "원조(元祖)"로 이름이 높다보니, 지방에서도 "명월관 (明月館)"이라는 간판을 내고 요릿집을 운영하는 이가 당시에는 많았다.

 

1. 1971년 "중앙일보"에 연재를 한 조선권번 출신 "이난향의 회고"에서 보더라도 "명월관"은 "공간"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명월관은 서울에 있어서 조선요리업의 "원조(元祖)"라는 이름이 높다보니, 지방에서도 "명월관"이라는 간판을 내놓고 요릿집을 운영하는 이가 많았다.

"명월관"에는 많은 기생 중에서도, 어전에 나가 춤과 노래를 불렀던 "궁중 기생"과 인물ㆍ성품ㆍ재주가 뛰어난 "명기들"이 많이 모여들어, 자연히 장사도 잘 되고, 장안의 명사ㆍ갑부들이 모여들어 "일류 사교장"이 되었다.

① 1910년대, "명월관"은 이색적인 광고를 한다.

"종로 거리"에 우산을 받쳐 든, 꽃 같은 "기생들의 행렬"을 등장시킨 것이었다. 나이 든 기생이 앞에 서고, 솜털이 보송보송한 어린 "동기(童妓)"가 뒤를 따르는 행렬은 구경꾼들의 눈을 번쩍하게 했고,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앞서 가던 "기생"이 선창을 하면, 뒤에 따르던 기생들이 화답하면서 가는 행렬은 "요릿집 명월관" 선전이었다.

우산 끝에는 "명월관에 꽃다운 기생 산홍이가 새로 왔으니, 많이 왕림해 달라"는 식의 종이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요릿집에서나 구경할 "기생"을 백주 대낮에 구경하게 된 횡재에 군중들은 이들 행렬을 따라 나섰고, 행렬이 "종로"에서 "동대문 쪽"으로 방향을 틀면, 구경꾼도 이들을 뒤따랐다.

② 1930년대에 들어서자, "명월관"에 "언론인ㆍ문인"들은 "신학문"을 닦고, 시대의 첨단을 걷는 이들이 뒤늦게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들의 발걸음이 잦아지자, "명월관"은 생기를 되찾기 시작했고, 기생들은 이들의 재치 있는 이야기에 솔깃해졌다고 한다.

"옥양목 두루마기에 도리우찌 모자를 썼고, 신발은 자동차 타이어 속으로 만든 경제화를 신고 있었다. 어느 모로 보나 좌석의 손님들과는 어울릴 옷차림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손님이 방을 잘못 들어온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좌중에 계신 손님들이 모두 일어나 정중하게 대접하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이분이 바로 육당 최남선 선생이라는 것을 알고 나는 깜짝 놀랐다. 육당 선생께서는 별로 말씀이 없었으나 백운선의 영변가를 좋아하셨고, 음성은 쇳소리였다. 내가 육당 선생의 처음 인상을 "복덕방 목침" 같다고 손님들에게 말했더니, 그 후 이 말은 육당 선생님의 별명처럼 돼버렸다.  춘원 이광수 선생은 얼굴색이 유난히 빨간 것이 인상에 남아있으며, 수주 변영로 선생은 그때부터 술을 많이 들었는데, 김금련의 노래를 무척 좋아했다."

1930년에는 "춘해 방인근" 씨가 주동이 된 "동부인회"가 가끔 "명월관"에서 베풀어졌다. 이 모임에는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모였다. "이광수ㆍ박인덕ㆍ백인제(의사)ㆍ오긍선(세브란스 전 학장)ㆍ백명곤(음악가)ㆍ차재일(숭실전문교수/테너가수)ㆍ김억ㆍ김동인ㆍ윤백남ㆍ안석영" 등 문인들의 모습도 보였다.

"언론계 인사"치고, "명월관"에 드나들지 않은 이가 거의 없었는데, 이것은 명월관에 "장춘각"이라는 그윽한 "특실"과 2층에 피로연을 할 수 있는 "큰 홀"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보다는 외상이 후하고, 외상값 독촉을 심하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2. 명월관 시기별 변천사 : 1기 (1910년대 초) ~ 7기 (1940년대 후)

① 제1기 : 1910년대 초  (주 고객층 : 이름만 남아있던 "조선왕조 왕족들ㆍ옛 대한제국의 고관관직을 했던 친일파들"이었다)

② 제2기 : 1910년대 후 (주 고객층 : 망국대부의 자제들ㆍ부유한 집안의 자제들)

여기서 나라 잃은 망국의 슬픔이, 아이러니하게 "공간으로서 명월관"에서 드러난다.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나라를 지키지 못한 "무능한 위정자"의 자제들은 해야 할 일도, 울분을 토로할 공간도 마땅히 없었기에, "명월관"에서 기생과의 유흥이 유일한 삶의 모습이었다. 이 때문에 자연히 "늙은 고객들"은 발을 끊게 되고, "그들의 자제" 덕분에 손님들이 갑자기 젊어지게 되었다.

③ 제3기 : 1920년대 초 (주 고객층 : 일본 유학생들의 사각모자ㆍ대학생들)

물론 겉으로 드러나 있지는 않았지만, "상해의 애국지사"도 빼놓을 수 없다. 더구나 1919년 "3ㆍ1운동"으로, 사회의 변화는 "기생"의 세상 보는 눈을 바꾸어 놓았다. 바로 "여성운동ㆍ독립운동"으로 투신하게 되는 "기생", 즉 "사상 기생"이 생겨나게 된다.

1919.03.19일, "진주"에서 만세시위를 벌인 기생조합 소속 기녀집단을 "기생 독립단"이라고 하는데, 03.29일에 "수원권번" 기생 30여 명이 검진을 받으러 "자혜의원"으로 가던 중, "수원경찰서" 앞에 이르자 "김향화(金香花)"를 선두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병원에 가서도 검진을 거부하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또 돌아오는 길에 "경찰서" 앞에서 다시 독립만세를 부르고 헤어졌는데, "김향화"는 체포되어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04.05일에는 "해주 기생들"이 "해주 종로"에 집합하여, 만세를 부르고, 남문에서 동문을 경유하여, 서문으로 시위 행진하였는데, 이때 체포된 "김월희ㆍ문월선"은 징역 6월, "이벽도ㆍ문향희ㆍ해중월" 등은 징역 4월이 언도되었다. 이 사건은 "3ㆍ1운동"이 한국민족 전체의 운동이었음을 보여 주는 것으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당시 기생 중에는 "민족의식"이 투철하여, 일본인들을 골탕 먹인 예도 많았다.

④ 제4기 : 1920년대 후 (주 고객층 : 신문 언론인ㆍ문인들)

1929년, "조선총독부 20주년 시정기념 박람회"로 "명월관"에 지방 부자들이 서울 기생을 보러 올라오면서 고객의 계층이 급격하게 변하였다. 그러면서 "기생들"은 일본 유학을 가거나, 근대식 학업으로 "신여성처럼 살겠다."고, 기생을 폐업하는 이들도 많이 생겨났다.

⑤ 제5기 : 1930년대 (주 고객층 : 사업가들)

"양장" 차림에 "양산"을 받쳐 들고, "인력거 위"에 올라앉은 기생의 모습 속에, 이미 서화ㆍ기예를 익히고, 예의범절을 배워, 조신하게 처신하던 "옛 명기"의 모습은 그림자조차 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⑥ 제6기 : 1940년대 전반 ~ 휴업 시기 ( "명월관"으로 출퇴근하던 기생들이 "비단 옷" 대신, "몸 빼 옷"을 입을 수밖에 없게 되자, "명월관"은 휴업하게 된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당시 신문 기사를 보면, "기생의 친일 행적" 역시 목격할 수 있다.

"웃음과 노래를 파는 연약하고 자유롭지 못한 몸이기는 하나, 애국의 열성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푼푼이 모으고 모은 돈으로 8개의 고사 기관총을 헌납하는 헌납식은 관내의 "조선권번ㆍ한성권번ㆍ동권번ㆍ본권번ㆍ경성요리업 조합ㆍ신정유곽" 등의 "기생ㆍ창기ㆍ예기"등 1,000여 명의 손에 의하여, 오후 3시 가을빛 짙은 장충단공원에서 감격과 찬양을 받으며, 성대히 거행되었다. 헌납식이 끝난 후, "창기ㆍ예기ㆍ기생들"이 섬섬옥수를 들어, 가을 하늘을 향하여 헌납한 기관총의 실연을 하였다."

⑦ 제7기 : 1940년대 후반 (주 고객층 : 미 제5공군 장병들 (미군들로 마지막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요리상"의 다리가 높아지고, "서양 댄스" 중심의 파티였다. 이로써 "기생"과 함께, 한 공간으로서의 "명월관"은 어느새 사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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