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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요리 전문점 ① 명월관 (明月館)ㆍ태화관 (泰和館)ㆍ국일관 (國一館)

by 당대 제일 2022. 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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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시대"의 한국요리 전문점으로는 "명월관(明月館)ㆍ태화관 (泰和館)ㆍ장춘관(長春館)ㆍ식도원(食道園)ㆍ국일관(國一館)"이 있었으며, 대한제국의 궁중잔치 음식을 도맡았던 전선사(典膳司)의 책임자(長)로 궁중 요리를 하던 "안순환(安淳煥ㆍ1871~1942ㆍ71세)"이 궁중에서 나와서 오픈하였다.

 

1. 명월관 (明月館청풍명월 (淸風明月)에서 따온 이름)

기생 요릿집의 대명사최초의 조선 요리옥

설 립 : 1909~ 1918.05.24 (화재로 소실)

위 치 : "동아일보" 광화문 사옥 자리(서울 종로구 세종로 139번지)

크 기 : 건물 (600여 평)지 (1,200여 평)

 2층 양옥집 (양식/조선식)1(일반석)2(귀빈석)매실(특실)

명월관

대한제국의 궁중잔치 음식을 도맡았던 전선사(典膳司)의 책임자()로 궁중 요리를 하던 "안순환(安淳煥)"이 궁중에서 나와서 오픈, "궁중요리"를 일반인에게 공개하게 되었고, """궁중 나인 출신"이 담그는 술을 받아쓰는 바람에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약주소주" 등을 팔았지만, 나중에는 "맥주정종" "일본 술"을 팔았다.

1932년 조사에 의하면, 하루 매상이 "500원 이상"이었고, 종업원의 숫자도 120여 명이나 되었다.

종업원은 손님을 안내하는 "보이"음식을 만드는 ""인력거 "차부(車夫)"까지 포함한다 "안순환"은 화재를 당한 후, 새로이 "태화관(인사동)식도원(명동)"을 개점했다.

1909년경, "관기제도(官妓制度)"가 폐지되자, 갈 곳 없던 "궁중 기녀관기"들이 이곳에 모여들어, "명월관"은 사교장으로 유명해졌고, 영업이 점차 번창하기 시작하였다. 갈 곳 없던 관기들이 이곳을 찾아온 것은 당연했다.

유한 "조선요리서양요리"를 만들었고, 주요 손님들은 "고위 관료재력가, 외국인" 등이었다.

주로 일본조선 "고관대작"이나 "친일계 인물"들이 자주 드나들었으며, 문인언론인들도 출입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명월관"은 친일파들이 나라를 일본에 팔아먹은 돈으로 방탕하게 노는 곳이 되었다. "이완용송병준이지용" 등의 상징적인 "친일파"들이 단골손님이었다.

1918.05.24, "명월관"이 불타버렸는데, 화재 원인에 대해 당시 여러 이야기가 나돌았다.

"친일정객들이 나라 팔아 받은 돈으로 거들먹거리던 곳"이었기 때문에, "기생에게 욕본 고관의 분풀이" 때문에, "가산을 탕진한 아들을 둔 시골 양반들 때문에 불이 났다"는 등의 이야기가 무성하였다.

 

2. 명월관 별관

설 립 : 1919~ 1950.09 (화재로 소실)

위 치 : "피카디리 극장" 자리 (서울 종로구 돈의동 139번지)

"명월관"이 화재로 소실되자, "이종구(李鍾九재력가1937년 종로권번 인수장춘관(長春館) 주인)" "안순환"에게 "명월관 간판(상호 명칭)"3만원을 주고 인수하였고, "명월관 별관" 간판을 걸게 하였다.  "명월관 별관""31운동" 이후, 우국지사들의 연락 장소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광복 이후, 운영방식으로 대지가옥은 "종구"가 소유했으나, "영업권"은 종업원들이 공동 관리했고, 1950"625전쟁"이 발발하자, "북한 공산군"의 종로 일대 사무실로 사용되다가, 공산군의 철수 당시, "이종구"는 납북되었고, "명월관 별관"은 불태워졌다.

 

3. 태화관 (泰和館"명월관"의 별관)

설 립 : 1918.05.24~ 1919.05 (화재로 소실)

위 치 : "태화 빌딩하나로 빌딩" 자리 (현, 서울 종로구 인사동 2529)

마담 : 주산월 (朱山月1894~1982손병희 3째 부인)

1919.03.01일 오후 3, "민족대표(33)"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곳이다.

태화관

• "안순환"은 "이종구 (장춘관 (長春館) 주인)"의 소개로, "순화궁(順和宮ㆍ이완용의 별장)"을 사들여, "명월관"의 별관인 "태화관(太華館)"을 개점ㆍ영업하였다.

"순화궁(順和宮)"본래 "이완용의 별장"이었는데,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정사를 논하기도 했던 곳으로, "이완용"이 이사하며, "요릿집"으로 개점하였다.

순화궁(順和宮): "영응대군(세종대왕 8번째 왕자)"의 딸 "길안현주"와 사위 "구수영"이 살았고, 저택은 "구수영" 후손으로 이어져 내려오다가, 조선 후기에는 문신 "김흥근"의 소유가 되었다. "헌종" 사후, "후궁 경빈 김씨"가 나와 살면서, "순화궁(順和宮)"이 되었다. 이후 "이윤용이완용"이 소유하였다.

 

4. 식도원(食道園)

위 치 : 서울 명동

1921년 경, "안순환""명동"에 또 다른 조선 요릿집인 "식도원(食道園)"을 새로 개점하였다.

 

5. 국일관 (國一館)

설 립 : 1921년 경

위 치 : "국일관 프라자" 자리 (서울 종로구 관수동 20번지)

주로 장사하는 신흥부호의 출입이 잦았다.  광복 후 혼란기에는 "간첩 사건"으로 연루되었던 "기생 김소산"도 이곳에서 일하였다.

1950"625전쟁" 뒤부터는 "정객기업가" 등의 출입이 잦았으며, 당시 "송죽관(松竹館)" 등과 함께, "일류 요정"으로 손꼽혔다.

1921.07.27, 영업규칙 위반으로 당시 "종로경찰서"로부터 영업정지 처분을 받았다가, 그해 08.12 "심진택"의 명의로 다시 허가를 받아, 재 개업을 하였다.

1923.01.04, "장택상" 등이 가담한 "고학생자조단체(苦學生自助團體)"인 이른바 "갈돕회사건(일명 신년연합간친회 사건)"이 이곳에서 일어나 파문을 일으킨 바 있다.

1934년경, 경영주인 "최남 (崔楠)"은 당시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이기붕 (李起鵬ㆍ1896~1960ㆍ국방부 장관)"을 지배인으로 고용하기도 하였다.

 

6. 안순환 (安淳煥1871~194271) 전선사 장선주선과장조선음식 전문가

대한제국 마지막 "대령숙수"이자, 최고의 근대 주방장, 뛰어난 사업가

대한제국의 궁중잔치 음식을 도맡았던 "전선사(典膳司)"의 책임자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요릿집인 "명월관(明月館)"을 설립한 조선음식 전문가

1887(16), 서당에 들어가 수학하였고, 17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려운 가정 형편을 생각하여, 가족이나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고, 혼자 힘으로 잘 살아 보겠다고 다짐하였다

1896(25), "관립 영어 학교"에 입학하였고, 뒤이어 "무관학교"에 들어갔지만, 생활의 어려움으로 그만두었다.

1899(28), "대한제국 탁지부(度支部) 전환국(典圜局) 건축 감독"이 되어, 궁중의 일을 처음으로 맡았고, 그 뒤 "전환국 기수(技手)"를 거쳐, 국왕의 음식을 담당하는 "궁내부(宮內府) 전선사 장선(掌膳)주선과장(主膳課長)"을 지냈는데, 점차 "나인별감내시" 등의 인원이 축소되었고, 1907년에는 "궁내부"마저 "총감부"에 의해서 폐지되었다.

3품의 "이왕직사무관(李王職事務官)"에 올랐지만, 몇 달 뒤에 스스로 사퇴하였다.

사퇴할 때, "궁내부"에 소속된 궁중의 남자 요리사인 "대령숙수(待令熟手)"를 모아, 1909년에 "고종 어극 40년 칭경기념비" 건너편에, 조선 궁중 요릿집인 "명월관"을 열었다.

1930(59), "경기도 시흥""안향"을 모시는 "녹동서원(鹿洞書院)"을 창건하였고, 구로구에 민족의 시조인 단군을 모시는 "단군묘(檀君廟)"를 세웠다.

그 뒤 유교 부흥을 위해 "조선유교회(朝鮮儒敎會)"를 창립하고, 능력을 갖춘 유학자를 양성하려고 "명교학원(明敎學院)"을 운영하면서, 전국에서 선발된 유생에게 무료 교육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1939.11(68), "조선총독부"가 전시체제 강화와 유도황민화를 위해, 조선의 유림을 동원해 조직한 "조선유도연합회"의 평의원에 선임되었다. 1942"일월시보사 사장"으로 재임 중,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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