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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쇄살인ㆍ조폭ㆍ기생ㆍ연예인

국내 술집 ① 종류 (BarㆍPubㆍTavern)

by 당대 제일 2022. 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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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집주점 (酒店BarPubTavern)""술을 파는 가게"를 뜻하며, 983(고려 성종2), "송도"에 처음으로 "주점"의 설치를 허가한 것으로 전해진다. 1102(고려 숙종7)부터는 서민의 주점이 처음으로 곳곳에 생기기 시작했다.

 

1. 주점에 관한 기록은 "고려시대"에 비로소 나타난다.

983(고려 성종2), "송도"에 처음으로 "주점"의 설치를 허가한 것으로 전해진다.

1102(고려 숙종7)부터는 서민의 주점이 처음으로 곳곳에 생기기 시작했다.

당시 "개경""우 주점"을 두고, ""에 주점을 내었는데, 이러한 "관설주점"은 당시 "해동통보동국통보"등의 화폐를 주조하여, 유통시키기 위한 유인책이었다고 한다.

결국 "화폐통용"의 이익을 교육하려는 목적으로, "관설주점"을 개설한 것이다.

이러한 "관설주점"이 국가로부터 허락받은 주점이라면, 그 외에도 민간에서 운영하는 주점도 있었다.

문헌에 나타나는 구체적인 기록은 없으나, "고려가요 쌍과점""술파는 집에 술 사러 갔더니, 그 집 주인이 내 손목을 쥐더라."는 것을 보아, 민간에도 술을 소매하는 집이 이미 정착하였던 것 같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고려시대"에 국가적 종교로서, 각종 특혜를 누리던 "불교 사원들"이 가장 규모가 큰 "주점"이었다는 사실이다불교사원들은 "세금"을 면제받고, "국수마늘소금" 등을 판매하면서, "숙박업"까지도 하였다.

"고려시대" 이후, "조선시대 효종 대"에 이르러, 화폐가 점차 유통됨에 따라, 숙박을 해결할 수 있는 "주막"이 생겨나게 되었다.

"주막"은 조선후기에 "장시(場市)"가 번성하고, "역참제도"라는 교통제도가 발달함에 따라, 더불어 창하였는데, "장시"에 모여든 사람들이 화폐를 지불하고 음식을 먹고 잠을 잘 수도 있었으며, 곳에 따라서는 접대부를 두는 곳까지도 있었다.

"주막(酒幕)의 막()은 집을 의미하는 것"으로, 대부분 주()자를 적은 깃발을 내걸어 주막임을 표시했다.

"주막"19세기 후반부터 여행자가 불편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전국의 교통요지 곳곳에 생겼다.

그러던 것이 "조선시대" 말기에 이르러서는 상업이 활발해짐에 따라, "헌주가소주가병주가주막로주점내외술집모주가색주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주점"이 등장하였다.

 

2. 주점의 종류

① 헌주가 (규모가 큰 양조장ㆍ한말)

한말의 "헌주가"는 비교적 규모가 큰 "양조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주로 "약주"를 만들어, 도매를 하며, 소매도 하였다. 술값은 선금이나 현금으로 지불하고, 일정 기간에 1번씩 계산하였다.

부업으로 "탁주ㆍ백주"를 약간 만들기도 하는데, 6~7칸의 공간에 2석들이 큰독 50~ 60개를 갖추고 있었다.

 

② 소주가 (소주의 제조ㆍ판매가 주)

"서울 이남"에서도 "탁주가"를 겸하는 일이 많으나, "서울 이북"이 규모가 커서, 큰독 70~80개에서 100개까지 갖춘 곳이 적지 않았다. 유명한 서울 "공덕리"에 50∼60호와 합해서 줄잡아 100호 정도가 연간 2,500석을 만들었다고 한다.

 

③ 병주가 (= 술집ㆍ바침술집ㆍ소매집)

술을 소매하는 집으로, 문간에 술병을 그려 붙이고, 중간에 손님이 술 생각이 나면, "중 노비"에게 돈을 주어, 근처 "병주가"에서 사다가 마시는 것이다.

"병주가"에서는 "소주ㆍ약주ㆍ백주" 등은 "헌주가ㆍ소주가"에서 사다 팔지만, "탁주"는 직접 빚어 팔았다.

 

④ 목로술집 (선술집ㆍ조선말기~ 6ㆍ25전쟁 전)

1900년대 초만 하더라도 서울에는 "요정" 같은 것은 없었고, 일반 대중이 많이 이용하는 "목로주점"이 술집의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조선시대 말기에 등장하여, 6ㆍ25전쟁 전까지 성행하였다.

술잔을 놓는 긴 나무를 "목로"라고 하고, 이것을 놓아 술자리를 마련한 "목로술집"은 사방이 터진 온돌에 큰솥을 걸어 놓고, 주인이 손님에게 술을 떠서, 끓는 물에 중탕을 해서, 손님 잔에 부어 주는 것이다.

뒷골목이나 으슥한 곳에, 좁은 목판을 벌여놓고, 술한잔에 너비아니나 술국 등을 곁들여 파는데 술값만 받는다.

"서울" 장안에는 "당주동ㆍ청진동ㆍ모전다리(무교동)ㆍ이문안(종로2가)ㆍ동관 대궐 앞(종로4가)ㆍ구리개(을지로2가)" 등에 많이 모여 있었다."동대문 시장" 동문 밖의 "흥코집"ㆍ"동관" 동문 안에 "동양루"ㆍ"신설동"의 "형제 집" 등이 꽤 유명한 편에 속했다.

 

⑤ 내외주점 (內外ㆍ몰락양반가 술집ㆍ1920~)

몰락한 양반의 위상을 가늠하는 사회현상으로 "내외(內外)주점"을 들 수 있다.

술집해서 호구할 생각은 엄두도 못 냈을 양반도 술집을 내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에 들어서부터였다.

물론 "내외술집"에는 술집표시가 없다.

알음알음으로 찾아가, 문전에서 판자문을 약간 밀고, "이리 오너라."하며, 손님이 왔음을 알린다.

그럼 안방에서 "들어오셔. 청마루에 자리를 깔고 앉으시라, 여쭈어라"하는 마님소리가 들린다.

"내외술집"은 일하는 사람이 전혀 없는 경우에는, 중문 안에서 "개다리소반" 만을 내민다고 "팔뚝 집"이라고도 하였다. 하지만 이런 "내외술집"도 나중에 "색주가"로 전락하여, 그 풍습은 없어졌다고 한다.

 

⑥ 이동 술집 (어머니ㆍ아내의 술집, 조선시대~ 일제시기)

서울의 풍물로 "광주리 소주방" 또는 "공덕리 소주방"이라는 "이동 술방"이 있었다.  주종은 "소주"로, "오지병"에 담아, 머리에 이고 다니며, 장터ㆍ성안에 드는 길목에 펴놓고 술을 판다.  향학열이 남달랐던 "황해도 신계ㆍ곡산ㆍ안악" 등지에서, 자녀ㆍ남편을 출세시키고자 어머니ㆍ아내가 길거리로 나선 것이다.

급속도로 발전한 "민속주"는 "조선시대"에 전성기를 이루었고, 일제시기를 거쳐, 서양 술들의 유입으로 더욱 다양화되었으며, 각 가정에서는 "자가양조"였고, 세금을 부과하지 않았으나, 1909년 "주세법"이 발효되어, 생산량에 따라 과세하는 "간접세"가 생긴 후, 5차에 걸친 "주세령"의 개정으로 1934년에는 "자가용 술 면허자"가 완전히 없어졌다.

"천업"으로 여겨왔던 "주조업"에 "양반계급"이 다투어 종사하게 됨에 따라, "주조업자"가 비대해지고 술의 품질이 "주세"를 위하여, 규격화 되어감에 따라, "명주"가 사라지고, 심한 주세에 백성들의 원성은 높아졌으며, "밀주"의 성행과 일제의 단속의 악순환이 되풀이되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전통주"는 차츰 그 자취를 감추게 되고, 풍류가 깃든 조상의 술 빚기도 없어졌다.

"개화기"를 거치고, 시장경제가 발달하면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음식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무슨 무슨 음식점"이란 상호가 없었다고 한다.

그저, "술손님ㆍ밥 손님"을 맞아들이다가, 찾아오는 손님 측에서 자연히 그 집의 모양ㆍ위치ㆍ음식점 주인의 별명을 붙여서 부르게 되고, 그러다가 음식점은 자연스럽게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회나무 집ㆍ오동나무 집ㆍ이문안 설렁탕집ㆍ잠바위 설렁탕집ㆍ백목다리 장국밥집ㆍ황포추탕집ㆍ형제추탕집" 등 이런 식으로 음식점 이름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⑦ 나라베(줄서기) 술집 : 주당들을 몸살 나게 한 술집 (일제시기 말)

당시 뭐니 뭐니 해도 서러운 것은 "굶주림"이었다. 일제 말기에 한창 식량기근에 허덕인 적이 있었다.

그러니 술의 "기근 사정"에 이르러는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곡물로 빚던 술을 금해서, "밀주(密酒)"가 철저한 통제를 받았음은 물론이다.

그래도 천행으로 "주당(酒黨)"의 숨통까지 막기는 무엇했는지, 일제는 조그만 선심을 하나 베푼 적이 있는데, 즉 "나라베(줄서기) 술집"의 출현이다.

오후 5시만 되면 문을 열던 "나라베 술집"은 천하의 주당들을 몸살 나게 만든다.

그나마 어물쩍대다가는 "한 잔술"도 차례가 가지 않는 비극적 종말이 두려워, 오후 3~4시부터 술집 앞에는 때 이른 장사진을 치는 진풍경이 연출되곤 했었다.

 

⑧ 카페 : 멋쟁이들이 출입하던 곳 (일제시기)

지금도 다양한 형태로 영업을 하고 있는 "카페"는 "일제시기" 때부터 이미 성행했다.

당시 서울에는 "낙원ㆍ왕관ㆍ엔젤ㆍ태평양" 등의 카페가 있었다.

"붉고 파란 등불 밝지 못한 샹들리에 아래, 담배연기 술 냄새를 재즈에 맞춰, 춤추는 젊은 남녀의 옷깃이 소용돌이친다. 그 틈에 흘러나오는 여급의 목소리는 누님처럼 차분히 가라앉고 오히려 사나이들의 언행이 초조하고 격앙돼있다." (김동환의 30년대 카페 풍경의 묘사다.)

 

⑨ 요정 : 밀실정치의 대명사 요정 (일제시기~ 5ㆍ16 이후 번창~ 1970년대 말)

"5ㆍ16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더욱 번창하다가, 1970년대 말까지 인기를 얻었던 "요정"은 "일제시기" 때부터 비롯됐는데, 한말 사양의 궁중에서 퇴출당한 것은 "궁녀"만이 아니다.

8도에서 음식솜씨 좋다하여 선상된 "숙수(음식을 잘 만드는 사람)"들도 퇴출대상이었다.

그 가운데에는 "고종 황제"가 흡족해하는 "간을 가장 잘 맞춘다"는 "안순환"이라는 "숙수"가 있었다.

일제의 "강제 병탐" 후, "궁"에서 퇴출당한 "안순환"은 "황로마루(현, 광화문 4거리 남동쪽 모서리)"에 "조선요리 집"을 차렸다. 당시 풍토로서 "조선요리 집"이란 벤처산업 가운데 하나였다.

이것이 한국 현대사에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명월관"이다.

"명월관 본점"은 1,200평의 땅에 건평 600평이 넘는 큰 집에, 종업원 수가 120명이나 되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규모 큰 기업형 "요정"이었다.

이밖에 "식도원ㆍ국일관ㆍ송죽원ㆍ태서관" 등의 "요정"이 당시에 성행했다.

1970년대, "요정"의 산실은 단연 "삼청각"으로, 1972년,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 6,000여 평 대지에 건축되어, 1970년대 "여야 고위정치인의 회동ㆍ 남북 비밀협상ㆍ한일회담의 막후 협상장소"로 이용하였던 곳으로, "제4공화국 유신시절 요정정치"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는 손님이 줄어들어, 1990년대 중반 이름을 "예향"으로 바꾸고, 일반음식점으로 전환하였으나, 경영난으로 1999.12월에 문을 닫았다.

해방 후, 미군의 주둔과 6ㆍ25를 통하여 "서양 술"이 선보였고, 이로 인하여 부유층들은 "고급 양주"를 선호하게 되었다.

서민들은 집에서 술을 담그기 시작했는데, 조선시대의 "명주"들은 사라지고, 획일적인 개량식 "막걸리"가 주종을 이루었다. 6ㆍ25 이후에도 서민들은 정치적 불안과 가난에 시달렸다.

그리하여 이때의 술은 현실을 잊게 해주는 역할을 했다.

해방과 6ㆍ25를 거치는 동안, 8도에서 서울로 사람들이 모여들어, "전주식당ㆍ부산횟집ㆍ평양식당ㆍ함흥냉면집" 등 지방 고유의 전통 음식을 파는 식당이 늘어나게 됐다.

"평양냉면집 "우래옥"ㆍ곰탕집 "하동관"ㆍ돼지갈비를 전문으로 하는 "최대포집ㆍ남포면옥ㆍ부민옥"ㆍ오장동 "함흥냉면"ㆍ청진동 해장국집 "청진옥"" 등이 비교적 오래된 음식점으로 꼽히는데, 이 밖에도 전통을 자랑하는 음식점은 많았다.

일제 해방과 6ㆍ25는 상당수 업종전환 및 메뉴 변경을 실시하게 한 큰 사건이었다.

"곰탕ㆍ설렁탕ㆍ해장국ㆍ도가니탕ㆍ보신탕" 등 "탕의 전성시대"를 알리는 계기가 된 것이다.

 

⑩ 포장마차 : 도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는 곳 (해방이후~ )

해방이후부터 생겨나, 지금까지도 계속적인 인기와 명맥을 이어온 장수업종의 하나로서, 주머닛돈이 부족한 서민층의 애환을 달래주는 주점의 형태이다.

1950~ 1960년대, "청계천" 등지에서 광목으로 윗도리만 겨우 가린 채, "참새구이"에 잔 소주를 팔던 "포장마차"는 1970년대에 접어들며, 요즘의 모습과 비슷해졌다.

198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포장마차"는 대표적인 서민 주점이었다.

지금도 30~40대 샐러리맨들은 그 옛날 "잠원동 한신 포차"같은 정통 포장마차에 대한 향수를 되새기곤 한다.

그러나 얼마 뒤, 개발 바람과 함께, 상당수의 "포장마차 촌"이 사라졌고, 현재는 "종로ㆍ인사동ㆍ사당동" 등에서 근근이 명맥을 잇는 정도다.

 

⑪ 대폿집 : 훈훈한 정이 오가던 곳 (해방이후~ )

"대폿집"이란 말은 해방 전만 해도 없었고, 그때 술집은 "목로 집ㆍ목로술집ㆍ선술집"이라고 했다.

그러다 해방이후, "대폿집"이라는 말이 쓰였고, 1960~70년대까지 "대폿집"은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던 곳으로, 붉은 페인트로 "왕대포"라고 씌어진 창문이 달린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면, 커다란 드럼통에 화덕을 만들고 연탄불을 피워, 실내는 매캐한 냄새와 사람들의 훈기로 가득 차 있다.

연탄불 위에는 안주거리가 끓고, 담배연기ㆍ음식물의 훈기ㆍ정겨운 친구의 체온이 느껴지는 그리운 풍경이었다.

 

⑫ 카바레 : 자유부인이 드나들던 곳

"자유부인(1955ㆍ교수부인의 춤바람을 다룬 영화)"의 인기가 말해주듯, 1950년대 도시에서는 "춤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그 당시 서울에는 "카바레ㆍ댄스홀"이 급증했다.

1961년 통계에 따르면(서울/전국), "카바레(17/ 67개소)ㆍ바(144/ 328개소)ㆍ다방(1,086 /2,083개소)"가 서울에 있었고, "카바레"는 5ㆍ16이후, 그때까지 유행했던 "댄스홀"이 폐쇄되면서, 성행하기 시작했다.

당시 "카바레"는 주로 "중ㆍ장년층"들을 위해 공간이었으며, 주로 "소주ㆍ막걸리"를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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