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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고대ㆍ불가사의 (7대)ㆍ로마ㆍ신화

고대 로마 ③ 삼두정치 (BC 60~30)ㆍ집정관ㆍ콘술ㆍ호민관

by 당대 제일 2023. 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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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두정치 (三頭政治TresviriㆍTriumviri)"는 "로마 공화정 후기"에 2차례에 걸쳐, "3인의 군인 정치가"들이 일정 기간 사적ㆍ공적으로, 세 사람이 하는 정치로, 가를 지배했던 것을 의미한다. 라틴어 "3"을 뜻하는 "트레스 (tres)"와 "남자"를 뜻하는 "비르(vir)"의 합성어에서 유래했다.

 

1. 삼두정치 (三頭政治ㆍTresviriㆍTriumviri)

① 제1차 삼두정치 : 7년 (BC 60~53) 

• 카이사르 (Julius CaesarㆍBC 100~44ㆍ장군ㆍ로마 공화정이 제정으로 변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          • 폼페이우스 (PompeiusㆍBC 106~48장군카이사르의 사위공화정 말, 원로원 파(귀족 파)ㆍ지도자술라의 부관이자 손녀사위ㆍ카이사르와 패전 후, 이집트에서 사망)          • 크라수스 (CrassusㆍBC 115~53ㆍ장군로마 역사상 최대 부호파르티아와 전쟁 중, 대패 사망)

② 제2차 삼두정치 : 13년 (BC 43~30)

 옥타비아누스 (OctavianusBC 63~AD 14ㆍ카이사르 양자ㆍ19세 청년)           안토니우스 (AntoniusBC 83~ BC 30카이사르 오른팔클레오파트라 남편자살)           레피두스 (Lepidusㆍ?~ BC 13이사르의 기병대장 출신ㆍ시칠리아를 얻으려고 옥타비아누스와 대립ㆍ정권을 잃고, 정계 은퇴)

2. 제1차 삼두정치

BC 60년, "카이사르ㆍ폼페이우스ㆍ크라수스"에 의해 시작되었다. BC 62년 말경, "동방"에서 전승을 세우고, 돌아온 "폼페이우스"는 귀족들의 두려움을 불식시키기라도 하듯이 "브룬디시움"에 상륙하자마자, 자신의 군대를 해산했고, "원로원 의원들"의 환영을 기대하면서 전역병들의 정착을 위한 "토지 보상"과 자신이 "동방"에서 취한 조치들의 재가를 요구했으나, 공화주의자 "키케로(Cicero)ㆍ소(小)카토(Cato)"는 물론이고, BC 70년에 "콘술(consul)동료였던 "크라수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한편, "기사 신분"의 이해관계를 대변했던 "크라수스"를 "카토"가 극렬히 반대하면서, "원로원"은 "기사들의 반감"을 증폭시켰다.

또한 "이스파니아(Hispania)"에서 전공을 세우고 돌아온 "카이사르"가 "개선식ㆍ콘술 직"을 요구했으나, "카토"의 반대로 인해, 어렵게 "콘술 직"에 만족해야 했다. 이처럼 3명이 모두 "원로원 내의 공화주의자들"의 반대에 직면했고, 또한 "폼페이우스ㆍ크라수스"가 대립하고 있었을 때, 두 사람보다 나이가 어리고, 정치 경력도 적었던 "카이사르"가 두 사람을 화해시키며, "3인 공조"를 주장해, "제1차 삼두정치"를 출범시켰다(BC 60).

BC 59년, "콘술"이 된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ㆍ크라수스"가 유리한 법들을 제정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딸 "율리아"를 "폼페이우스"와 혼인시켜서, 개인적 유대를 공고히 했다. 그러나 BC 53년, 딸 "율리아"가 출산 중에 사망하고, "파르티아(Partia) 원정"에 나갔던 "크라수스"마저 전사하면서, "제1차 삼두정치"는 사실상 붕괴되었다. 이후 "카이사르ㆍ폼페이우스"의 내전ㆍ폼페이우스의 패배ㆍ카이사르의 독재정치ㆍ암살로, "로마 공화정"은 또다시 정치적 격변에 처하게 되었다.

 전공이 클 경우 : 개선식  "월계관" 수여 / 오바티오(개선식 보다 1단계 아래)→ "금속관" 수여

 임페라토르 (Imperator): 임페리움 (최고위 명령권)을 유지하는 자

"고대 로마(특히 공화정 시대)의 로마군 최고 사령관ㆍ장군의 칭호ㆍ로마제국의 황제 또는 황제권(왕권)을 가진 자의 칭호ㆍ공화정 시기에는 대외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군사 지도자의 칭호

3. 제2차 삼두정치

BC 44년, 카이사르 사후, "옥타비아누스"(Octavianusㆍ19세의 청년으로 카이사르의 양자로서, 로마 정치무대에 등장), "안토니우스"(Antoniusㆍ카이사르의 오른팔), "레피두스"(Lepidusㆍ독재관 카이사르의 기병대장을 지냄)"가 함께, BC 43년 가을, "북이탈리아의 보노니아"에서 만나, "공화주의자들"에 대해 "공동투쟁"을 합의하고, 이른바 "제2차 삼두정치"를 결성했다.

"제1차 삼두정치"가 단지 "3인의 사적인 공조"였다면, "제2차 삼두정치"는 우호적인 "호민관 티티우스"가 발의한 법을 근거로, "국가재건 3인 위원 (tresviri rei publicae constituendae)"이라는 이름으로 BC 42년부터 "5년 임기"로 공식 출범했다. 그러나 "제2차 삼두정치" 역시 BC 36년, "시칠리아 전쟁" 직후, "레피두스"가 권력에서 제거되면서 균열이 생겼고,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와 손잡고, "동방"을 거점으로 세력을 확대해 나가자,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세력을 규합한 "옥타비아누스"와 내전 상태로 빠지면서, 와해되었다. 결국 BC 31년, "악티움(Actium) 해전"과 BC 30년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전투"에서, "안토니우스 파 군대"가 패하고, "안토니우스ㆍ클레오파트라 여왕"이 자살함으로써, "로마 제국"은 사실상 "옥타비아누스의 1인 정치시대"로 넘어갔다.

4. 인물ㆍ용어 정리

 키케로 (CiceroㆍBC 106~43): 로마 시대 정치가ㆍ웅변가ㆍ문학가ㆍ철학자

BC 43.12월, 모든 희망을 버리고, "로마"를 피신하던 "키케로"는 "제2차 삼두정치"에 의해, "살생부 명단"에 올라가게 되고, 그 뒤 "안토니우스"의 사주를 받은 부하에 의해, 암살당했다.  "키케로"는 "머리와 두 손"이 잘려 죽었는데, "안토니우스"는 "키케로의 머리와 두 손"을 "로마 광장"에 내다 걸었다. "공화주의 신념"을 잃지 않고, 글로써 "안토니우스"를 규탄한 "키케로"를 두려워했던 것이다.  철저한 "공화주의자인 키케로"와 "공화정에 반발"을 가지고 있는 "카이사르"는 정치적으로 반대의 입장이었으나, 편지를 주고받을 정도로 상당한 친분이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베레스 반박문 : 로마 최고의 명문으로 손꼽힌다.

"키케로"는 "베레스(시칠리아 법무관)"에 대한 승소로 "로마 최고의 변호사"로 이름을 떨치게 된다.  "베레스"의 무자비한 갈취ㆍ탄압에 시달리던 "시칠리아 주민들"은 "로마법"의 공정한 집행이 속주에서도 적용되길 바라는 마음에, 당시만 해도 신참인 "키케로"에게 변론을 부탁했다.  "베레스"의 변호는 당대 최고의 변호사인 "호르텐시우스"가 맡았고, "배심원"을 맡은 "원로원 의원"은 이미 매수됐으며, 여러 정황을 봐서도 "키케로"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반전은 화려한 "변론"에서 시작됐다.  "키케로"는 "베레스 반박문"으로 불리는 장문의 "변론서"를 통해, 극적으로 승소를 이끌어냈고, 이 "반박문"은 의사들의 "히포크라테스 선서" 만큼이나, "변호사"들에겐 중요한 교본이 됐다.

소(小) 카토 (CatoㆍBC 95~46): 대(大) 카토의 증손자ㆍ공화정 말기의 정치인ㆍ스토아학파 철학자

"카이사르"와 대적하여, "로마 공화정"을 수호한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 부패가 만연한 로마의 정치 상황에서, 완고하고 올곧은, "청렴결백함의 상징적 인물"로 유명했다.

 집정관콘술 (執政官ㆍConsul): 왕을 대신한 로마의 최고통치자 (대통령)ㆍ1년에 2명 선출정무관 중 최고 지위

"집정관"이 임기를 마치면, "전직 집정관(Proconsul)"이 되며, "전직 집정관이나 전직 법무관"만이 "속주 총독"이 될 수 있었다. 군사ㆍ행정ㆍ법의 대권을 장악하고, 원로원 임원 임명ㆍ추천ㆍ원로원과 민회를 필요에 따라 소집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된다.  매년 민회의 투표를 거쳐 2명이 선출, 임기는 1년, 1달씩 교대로 집무, 상호간의 합의 하에 업무를 본다.  (상호견제와 균형을 유지ㆍ권력의 집중방지). 정식으로 1월 1일 날 선출된 "집정관"들은 비상시에는 1명의 독재관(dictator)에게 전권을 위임(6개월을 넘지 못함) 

⑤ 호민관 (護民官ㆍtribunus)

평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민정 호민관"(tribunus plebis)과 군사적인 일을 처리하는 "군사 호민관" (tribunes militium)으로 나뉘는데, 보통 "호민관"은 "민정 호민관"만을 지칭할 때가 많다.  "호민관 제도"는 "로마"가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바뀌고 15년 후인 BC 494년 처음 도입되었다.  호민관은 오직 "평민 계급"에서만 선출될 수 있었고, 초기에는 2명이었으나, 나중에는 10명까지 늘어났다.

"호민관"은 "민회"에서 독점적으로 법률을 발의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고, 때에 따라서 "원로원"을 소집하고, 청원할 권리가 있었다.  또한 "집정관"이나, 다른 "정무관"의 결정이나, 다른 "호민관"의 결정에 대하여, 그것이 "평민의 권익"에 배치될 때에는 "거부권"을 가짐으로써, 무효화하거나, 중재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호민관"은 "평민회"에서 선출했으며, "민회"를 소집하고, "의장"으로서 주재하며, 평민들의 요구를 대변하고, 그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일을 했다.  "호민관"의 의무ㆍ기능은 "정무관"의 전횡을 막아달라고,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모든 평민들의 생명ㆍ재산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언제든 찾아와 도움을 청할 수 있도록, "호민관"은 밤낮 자기 집 문을 열어 놓아야 했고, 도시 밖으로 나가지 말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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