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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고대ㆍ불가사의 (7대)ㆍ로마ㆍ신화

고대 로마 ④ 스파르타쿠스 (검투사)ㆍ크라수스 (장군)과 대결

by 당대 제일 2023. 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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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타쿠스 (SpartacusㆍBC 109~71ㆍ38세)"는 고대 "로마시대"에 자유를 얻기 위해 싸운 "검투사(Gladiator) 노예""트라키아(현, 그리스 북부~불가리아에 걸친 지역ㆍ당시에는 그리스와는 구분되어 바르바로이로 불리던 문화권)" 출신ㆍ"그리스 스파르타"와는 별 관련이 없을 가능성이 높다. "불가리아인"들은 3대 조상을 "트라키아인ㆍ남 슬라브족ㆍ불가르족"으로 보기에, "트라키아" 출신인 "스파르타쿠스"를 자국의 영웅으로 여긴다.

 

1. 스파르타쿠스 (SpartacusㆍBC 109~ 71ㆍ38세)

"노예 검투사들"은 대부분 전쟁 포로 출신이었으며, 그들은 "로마 콜로세움(Colosseum)"과도 같은 "아레나(arena)"에서, 피에 굶주려 환호하는 군중들 앞에 서서 목숨을 건 결투를 해야만 했다. 때로는 맹수를 상대로, 때로는 다른 검투사를 상대로 싸워야만 했다. 나 역시 신(神)이 아닌 이상 언젠가는 상대방의 칼과 창에 참혹히 죽어가게 될 것이라는 공포감 속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해나갔던 것이다.

이런 비참한 운명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킨 노예 검투사들의 지도자가 바로 "스파르타쿠스"였다. 

그들은 전투에서 계속 승리를 거두며, 많은 다른 노예들을 규합하여 큰 세력으로 성장해나갔고, "로마제국"은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게 된다. 결국 최후의 전투에서 패하여 그들의 반란은 진압되었고, 살아남은 자들은 모두 체포되었다. 반란을 진압한 이는, "줄리어스 시저 (Julius CaesarㆍBC 100~44)ㆍ폼페이우스 (PompeiusㆍBC 106~48)"와 함께 "로마제국 1차 삼두정치"를 펼친 것으로 유명한 "크라수스 (CrassusㆍBC 115~53) 장군"이었다.

"스파르타쿠스"는 "로마 진압군"과의 마지막 전투 속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살아남아 체포된 그의 추종자들 6,000여 명은 모두 실제로 "십자가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이탈리아 반도" 동남단의 항구도시 "브린디시 (Brindisi)"에서 시작해 "나폴리 (Napoli)" 근처의 고대 도시 "카푸아(Capua)"를 거쳐 "로마"로 통하는 "아피아 가도 (Via Appia)"의 길가에 6,000기가 넘는 십자가들이 세워지게 되었고, 거기에는 "십자가형"을 당한 노예들의 주검들이 매달리게 되었다. 그들을 진압한 "크라수스 장군"은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주검들을 몇 년이고 그대로 방치함으로써, 그 길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로마제국"을 거역한 반란자들의 운명이 얼마나 비참하게 끝나는지를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

패배한 "스파르타쿠스"의 잔존 병사들 중 6,000명이 포로로 잡혔고, 이들은 노예들이 다시는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기 위한 본보기로, 전원을 로마의 법정 최고형인 "십자가형"으로 처형되었다. "크라수스"는 "아피아 가도"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노예들이 오랜 기간 고통받다 죽는 모습을 다른 노예들이 보고 반란은 생각도 못하도록 하기 위해 일부러 채찍질을 하지 않고 매달아버렸다. 

그러나 반란 노예들은 놀랍게도 "십자가" 위에서도 의연했으며, 심지어 매달린 채로 "로마군"을 조롱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살아서 도망치는 데 성공한 "노예군" 잔당들은 산에 숨어서 산적질을 하며 살아갔지만, 이들 중 누구도 "스파르타쿠스"의 위업을 재현할 수는 없었고, 나중에 추격해온 "로마군"에 의해 몰살당했다. 그리고 이후 로마인들은 검투사들의 경기장 주변에 군대를 배치했다. 만약 반란을 일으키면, 미리 죽여버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절대로 "스파르타쿠스"를 잊지 못했다. "키케로ㆍ카이사르"도 "스파르타쿠스"를 언급한 바 있고,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를 가리켜 "새로운 스파르타쿠스"라고 비난한 바 있다. 반란 150여년 후인 79년에 화산 폭발로 멸망한 도시 "폼페이 유적"에서도 "스파르타쿠스"가 말을 타고 싸우는 모습을 그린 낙서가 발견되었다.

2. 평 가

① 인품

적대적 "로마인"들의 기록에서도 그는 무분별한 살육을 제지하는 등 고결한 성품을 지녔다고 알려져, 고결한 성품의 남자가 어쩌다 노예의 신분이 되어서 봉기에 나서게 되었는지 호기심을 자극한다.  "로마군"을 연파하고 멀리 도망쳐서 개인의 안위라도 챙길 수 있었던 상황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돌아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것도 호기심을 자극하는 요소다.  결국 현대에 이르러 그의 이름은 단순한 "노예 해방의 상징"을 넘어, "자유를 갈망하는 인간의 의지ㆍ모든 억압에 대한 저항"을 상징하게 되었다.

② 후대의 평가

• 영화 스파르타쿠스 (1960): 출연- 커크 더글러스ㆍ로렌스 올리비에ㆍ진 시몬스ㆍ찰스 로턴            • 볼테르 : "스파르타쿠스 전쟁"을 가리켜 "가장 정의로운 전쟁ㆍ인류 역사상 유일하게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 칼 마르크스 : "프롤레타리아의 진정한 대표자"라 극찬했고, 이후 사회주의ㆍ공산주의 진영은 영웅으로 떠받들었다. "로자 룩셈부르크ㆍ카를 리프크네히트"가 세운 "독일 극좌 혁명 단체"의 이름도 "스파르타쿠스 연맹"이었다.             로널드 레이건 : "자유"를 위해 싸우고, 희생한 사람의 예로 "스파르타쿠스"를 들기도 했다.

③ 군사적 역량

기록에 따르면, 그의 군사적 역량은 상당히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사치품 구입을 금지하고 병기를 비축하는 한편, 보초를 세우고 정찰을 게을리 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 등 단순히 요행이나 수박 겉핥기로 알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기본적인 병법을 충실하게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단순히 "기본만 하는 수준"도 결코 아니었고, 대단히 "지능적"이기도 했다. 놀라운 계략을 여러 차례 써서 "로마군"을 속이고 승리를 거두었다. 정석적인 지휘능력도 비범하여, 정면 대결에서도 몇 차례나 "로마 군단"을 격파했다.

"스파르타쿠스"가 본래는 고귀한 출신이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왜냐하면 당시 이런 군사 기술은 노예의 처지에 습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스파르타쿠스"가 1류 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은 존재한다."폼페이우스ㆍ카이사르" 같은 당대 제일의 로마 명장들과 직접 대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상대한 "로마 군" 대부분은 새로 모집된 병사들로, "로마군" 내에서는 아시아 원정에 나간 로마군이나 "폼페이우스"가 이끌고 간 원정대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긴 했다.

지휘관 "크라수스"도 지휘관에게 걸맞는 리더십이나 전술적 재능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라 기강잡는다고 생각해낸 것이 "데키마티오"였을 정도였다. 그러나 휘하의 병력은 3류나 4류도 아니고, 오합지졸 그 자체에다가 지휘관의 작계까지 수차례나 씹어먹는 트롤러 노예들이었다. 게다가 애시당초 몇몇 검투사들을 뺀 대다수가 군사 훈련은 커녕 무기도 잡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는데 이런 자들로 이루어진 사실상의 폭도 무리를 이끌고, 아무리 2군 급이라지만 당대 최강이던 "로마군", 그것도 "집정관급 군단"을 몇 번이나 격파한 군사적 능력은 결코 낮춰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게다가 막판 상대한 "크라수스" 군대에는 패하기는 했지만, 전투력이 문제가 아니라 병력면에서도 압도적이었는데도 큰 피해를 입고 나서야 겨우 승리할 수 있었다.

④ "크라수스 (CrassusBC 115~53) 장군"에 대한 평가 

그는 단순히 축재만 한 것이 아니고, 공공시설 건설 등에도 사재를 많이 기부했으며, 정치가로서도 상당한 무게감을 갖고 있었다. 선출된 법무관의 직위는 해마다 단 8명만이 선거로 선출되는 직위이므로 인기가 없다면 얻을 수 없는 직책이었다. 당시 역사서에는 로마 정계의 위엄있는 주요 인사로 묘사했다. 따라서 역시 젊은 나이부터 로마 정계의 주요 인사인 "폼페이우스"에 강한 경쟁의식을 갖고 있었는데 "폼페이우스"가 이미 엄청난 군사적 성취를 이미 이룬 데다, 또 그해에 "히스파니아"에서 "퀸투스 세르토리우스의 반란"을 진압함으로써 명성을 날리고 있었기에, 그에 대항하고자 자신이 이 희대의 노예 반란을 진압했다는 명성을 얻길 원했다.

그는 "스파르타쿠스의 노예 반란군"을 멋지게 격파하여 기대에 부응한다. 이걸 보면, 그의 군사적 재능도 그렇게 욕먹을 정도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다만 로마 역사가들에겐 "카르헤 전투"가 로마 역사상 최대의 참사 중 하나였으므로, 그의 군사적 재능을 최대한 깎아야했다. "카르헤 전투"에 맞먹는 참사인 "아라우시오 전투ㆍ칸나이 전투" 정도인데 "아라우시오 전투"의 경우, 게르만족이 상당한 대군이었으므로 변명의 여지가 있었고, "칸나이 전투"의 경우, "한니발"이 너무 먼치킨이라 정신승리가 가능하였다.

하지만 "카르헤 전투"의 경우, "수레나스"라는 역사에 잠깐 등장한 인물에게 상당한 병력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7개 군단이 전멸당하다시피 하였으므로, "크라수스"의 군사적 재능을 최대한 깎아내려야만 "로마"의 체면이 서는 것이었다. 또한 "크라수스"가 "스파르타쿠스"를 격파한 걸 대단한 일이라고 하면, "반란 노예" 따위가 "로마"와 대등한 상대라는 걸 인정하는 게 되기도 하다.

3. 스파르타쿠스의 죽음

그가 목표로 한 항구에는 이미 동방에서 돌아온 "로마 군단"이 상륙하고 있었다. 길이 막힌 그는 다시 후퇴하면서 활로를 모색했지만, 그의 부하들이 "로마 놈들과 싸우자"며, 후퇴 명령을 거부한 것이다. "스파르타쿠스"는 여기서 "로마군"과 정면으로 싸우면 어떻게 될지 알고 있었지만, 부하들이 너무 완강해 어쩔 수가 없었다. "로마군"과의 전력 차이를 알고 있던 그는 "노예군"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이 전투에서 승리한다면 좋은 말을 많이 얻을 것이고, 진다면 더이상 말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과 함께 자신의 말을 베어버린다.

그 후 "스파르타쿠스"는 "크라수스"와 전투를 벌이지만, 압도적인 열세에 몰렸다. 물론 "카르헤 전투"에서 보듯, "크라수스"는 군사적 재능이 뛰어나지 않은 편이었으나, 그가 동원한 병력은 8개 군단의 48,000명과 보조군 12,000명을 합쳐 무려 60,000여 명에 달하였다. 특히 2번의 연이은 패전에 잔뜩 긴장한 "원로원ㆍ크라수스"가 직접 선발한 이 8개 군단병들의 무력은 "산적떼"에 지나지 않는 "스파르타쿠스 반란군"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우수했다. 결국 "스파르타쿠스"는 마지막 수단으로 돌격대를 이끌고, "크라수스"를 죽이기 위해 돌진한다. 성공했다면 승리했겠지만, "로마군"은 전력을 다해 이를 저지했고, "스파르타쿠스"는 그의 손으로 2명의 "백인대장"을 베어 쓰러뜨리고, "크라수스" 근처에 접근하는데 성공할 정도로 분전했으나, 결국 "로마군"의 집중 공격을 받아 "돌격대"가 전멸하면서 힘이 다하여 쓰러지고 만다.

"스파르타쿠스"의 죽음은 "노예군"의 붕괴를 가져왔고, 그것으로 전쟁은 막을 내린다. "플로루스(로마 역사가)"는 "그는 거의 임페라토르(Imperator)처럼 싸우다 죽었다"고 기록했다.  "임페라토르"는 장군ㆍ사령관을 의미했지만, "플로루스"의 시대에는 "황제"를 의미하는 단어였다.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던 일개 검투사가 "황제처럼 싸우다 죽었다"는 평가를 받은 것이다.  임페라토르(Imperator): 임페리움(최고위 명령권)을 유지하는 자 : "고대 로마(특히 공화정 시대)의 로마군 최고 사령관ㆍ장군의 칭호ㆍ로마제국의 황제 또는 황제권(왕권)을 가진 자의 칭호ㆍ공화정 시기에는 대외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군사 지도자의 칭호

"스파르타쿠스"의 최후를 묘사한 기록 중 하나는 그가 동료들에게 버림받은 후에도 싸우다가 죽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무릎에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싸우다가 동료들과 함께 죽었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그가 "자유의 투사다운 최후"를 맞이한 것에는 변함이 없다. 심지어 마지막 전투에서 싸운 노예들에게도 "노예들은 검투사의 지휘를 받는 병사들답게, 용감하게 싸우고 사나이답게 죽어갔다"는 찬사가 바쳐졌다. 그가 화려한 갑옷이 아닌 "노예군" 전우들과 전혀 다를 게 없는 초라한 복장을 하고 있었던 탓이었는지, 그가 전사한 것은 거의 확실하지만 "로마군"은 전투 후에도 전장에 쓰러진 시신들 중 어느 것이 그의 시신인지 끝내 확인하지 못했다.

그런데 살아남은 상당수의 "노예군" 패잔병들이 하필 서둘러 "로마"로 강행군하던 "폼페이우스군"을 만나 격파당하는 바람에, "폼페이우스"는 자신이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마무리 지었다"고 "원로원"에 서신을 보낸다. 이것을 "원로원"은 그대로 인정하였다. 물론 "원로원"이 "크라수스"의 공적을 모를 리가 없었지만, 그들 입장에서는 안그래도 공화국 최고의 거부로 영향력이 높은 "크라수스"가 군사적 성취까지 얻음으로써, 정계의 중심인물로 우뚝서는 상황을 원치 않았다. 당시 "폼페이우스"는 어차피 "스페인"에서의 활약으로 개선식을 할 것이기에 "폼페이우스"에게 이왕 거행할 개선식에 "스파르타쿠스 토벌 업적"을 덧씌워주고, 반대로 "크라수스"에겐 개선식을 주지 않으려는 수작을 부린 것이었다. 때문에 "크라수스"에겐 "개선식"이 아닌 1단계 아래인 "오바티오"라는 퍼레이드를 주었다.

그리고 "원로원"으로서는 "크라수스의 개선식"을 절대로 허가할 수 없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개선식"을 치를 정도라면, 매우 중요한 전쟁에서 이겼다는 뜻인데, 당시 "로마인"에게서 물건에 지나지 않는 노예 검투사와의 전쟁에서 이겼다고 "개선식"을 허락하면, "스파르타쿠스"가 엄청나게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크라수스"의 공을 인정해(그리고 크라수스의 뜻이 반영돼서) "원로원"은 "오바티오" 때, 수여하는 "금속관" 대신 "개선식"을 치른 사람에게만 수여하는 "월계관"을 수여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선식"을 치르지 못하게 되면서, "카이사르ㆍ폼페이우스"와 달리, "공화국 원로원ㆍ시민들"에게 인정받을만한 "군 공이 없다"는 "크라수스의 컴플렉스"가 두드러지게 되며, 이는 결국 "카르헤 전투"에서 그의 무모한 결단과 몰락으로 이어진다.

 카르헤 전투 (BC 53.05.06) : 로마군ㆍ파르티아군의 전투

"터키 남동부의 하란"에서 벌린 "크라수스"의 동방 원정 욕구 / 로마 사상 최악의 패배 중 하나 : 카르헤 전투ㆍ칸나이 전투ㆍ아라우시오 전투ㆍ야르무크 전투ㆍ토이토부르크 전투ㆍ아드리아노플 전투ㆍ만지케르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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