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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사이비 종교 : 조선- 백도교ㆍ백백교ㆍ전용해

by 당대 제일 2022.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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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도교 (白道敎)ㆍ백백교(白白敎)"는 일제 강점기에 있었던 신흥 종교로 여러 차례에 걸쳐 신도 464명을 살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자는 전 재산을 상납하고, 여자는 성을 상납하여야 한다."는 사이비 종교였다.

 

1. 백도교 (白道敎)백백교(白白敎) : 백도교(白道敎)는 백백교(白白敎)의 전신

3명의 아들에 의해, "인천도(人天道, 1째 전용주)백백교(2째 전용해)도화교(3째 전용석)"로 분열.  교리는 주문을 외우며, 하늘과 땅에 예배하면, 무병장수하고, 신선이 된다는 것이다.

성인 남성은 "백백백의의의적적적감응감감응하시옵숭성 (白白白衣衣衣赤赤赤感應感感應하시옵崇誠)", 성인 여성은 "백의부인선선감감응 (白衣婦人善善感感應)"이라는 주문을 외우면, 무병장수한다고 믿었고, 교주는 "불로장수"하고, "지상신선"이 된다고 가르쳤다.

1899 : 전정예- 백도교 설립 (강원도 김화, 함경남도 문천)

 1923 : 전용주- 인천도(人天敎) 설립 전용해우광현차병간- 백백교(白白敎)로 교명 개칭 (강원도 가평)

 1924 : 우종일- 백백교에서 분파하여 천명도(天命道) 설립

2. 전용해 (全龍海? ~1937평북 영변백백교 교주)

가평에서 사이비종교인 "백백교"를 창시하였다민심 교화와 광명 세계의 실현을 명분으로 포교를 시작하여 신도들의 금품을 취하고, 여신도들을 속여 간음하였으며, 배반할 기미가 보이는 464명의 신도를 죽이거나 생매장하였다1937년 수사망을 피해 도망치다가, 자살하였다.

전용해는 교주가 되면서, 스스로 "대원님"을 자칭하고 경성의 "사쿠라이정(櫻井町)본부"를 두었다"김두선" 10가지의 다른 이름을 사용하면서, 신도들의 재산을 빼앗고 여신도를 변태적 방법으로 간음하는 등 횡포를 자행하였다고 비난받았다또한, 교에서 탈퇴하거나 배반할 기미가 보이는 100여 명의 신도들을 참살하거나 생매장하였다는 혐의를 받았다1937년 첩의 오빠인 "유곤룡"의 고발로 "이경득문봉조" 등 간부가 체포되자 도망 다니다가, 양평의 "도일봉(道一峰)"에서 자살하였다.

< 전용해의 머리에 관한 논란 >

사건 이후, 교주 전용해의 머리는 자살이후에 일본 경찰에 의해 잘리고, 그의 두개골은 "범죄형 두뇌의 본보기" 포르말린 용액에 담겨, "국립과학연구원"에서 보관하였으나, "불교 단체"가 비인도적이라고 진정하여, "정안전부"로부터 폐기 결정을 받아내고, 2011년에 화장하였다.

전용해

3. 백백교의 역사

"백백교(白白敎)"의 전신은 "동학"에서 파생된 "백도교(白道敎)"이다"전정예"는 중국 영변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동학"에 입도하였다그는 금강산에서 3년간 기도 끝에 천지신령의 계시를 체험하였다고 한다. 1899년경에는 아버지의 연고지인 "함경남도 문천군 운림면"으로 가서 도를 전하기 시작하면서, 입교하는 신자가 차차 늘었다1912년에는 강원도 김화군 근동면 수태리 오성산(五聖山)에 본거지를 두고, 동학계 신종교로서 정식 "백도교"를 창설, 교주가 되었다그 뒤 각지에 지부를 설치하고, 적극적인 포교에 나서 한때는 신도수가 1만여 명이 넘었다고 한다그는 60여명의 여인을 거느리고, 교인들의 재산을 갈취해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백도교의 교단은 비밀결사의 형태로 조직되었으며, 포교도 비밀리에 행하는 은도(隱道)에 의하여 이루어졌다전정예에게는 용주(龍珠), 용해(龍海), 용석(龍石) 등의 세 아들이 있었다1919"전정예"가 사망하자, 그의 세 아들이 각각 "인천교", "백백교", "도화교"로 분열되었으며, 그 중 둘째 아들인 "전용해"에 의해서 창시된 것이 "백백교"이다

1919년 그가 사망하자, 둘째 아들인 전용해가 간부 우광현(禹光鉉)과 의논 끝에 전정예가 사망한 것을 숨기고 몰래 암매장해버렸다그러나 뒤늦게 교주의 사망이 알려지면서 이탈하는 신도가 계속 늘어났고, 이 때 우광현의 횡포에 분개해오던 간부 이희룡(李禧龍)이 교주의 큰아들 용주를 내세워 백도교에서 이탈, 1923년에 인천도(人天道)를 세웠다그 해에 우광현· 전용해는 백도교의 교명을 백백교(白白敎)로 개칭하였다1924년 우종일(禹宗一)이 다시 백백교에서 떨어져나가 천명도(天命道)를 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정운이 죽자 교리가 변화되고, 포교방식도 공개되면서 내부에 분열이 일어나, 경성의 "이희룡(李禧龍)"와 경기도 가평의 "차병간(車秉幹)"로 갈라졌다1923"이희룡파""인천교", 차병간파는 "백백교"를 창립하였다백백교의 초대 교주는 "차병간"이었으나 형식적이었을 뿐, 실제 전용해가 권한을 행사하였으며, 얼마 안 되어 스스로 교주가 되었다그러나 1924년 교단 간부들 사이에 사기사건이 발생하여 교세가 위축되었으며, 1세 교주인 "전정운" 첩을 살해한 사실이 1930년 신문지상에 폭로되어 세인의 비난을 받게 되자, 더욱 교세가 약화되었다.

4. 성적 학대와 살인 사건

백백교는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켰는데, 그들은 신도들의 재산을 상납하게 요구하였고, 딸들을 자신의 시녀로 바치게 하여, 성적 학대를 일삼았다백백교는 자신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는 신도들을 여러 차례에 걸쳐 살해하였다그러다가 1937년에 일본 경찰에 의해서 대대적인 수사가 시작되었으며, 경찰에 쫒긴 교주 전용해가 시체로 발견되면서, 살인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그가 죽은 후, 일본 경찰은 경기도 양평군 일대에서 시체발굴 작업을 하였는데, 무려 300여구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백백교의 살인사건"1940년에 간부들에게 사형 및 무기징역이 선고되고, 이외의 사람들에게 징역형이 선고되면서 종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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