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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 ② 칠가살 (七可殺ㆍ임정)ㆍ오파괴 (五破壞ㆍ의열단) "친일파"들은 민족진영의 항일투쟁을 방해하거나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이들을 처단하기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칠가살 (七可殺)"을 , 의열단은 "오파괴 (五破壞)"라는 것을 정해서 "친일파"를 처단하였다. 1. 칠가살 (七可殺) : 대한민국 임시정부일제에 협조한 대가로 얻은 금전이나 직위를 이용해, 일신의 영달을 꾀해온 "친일파"들은 민족진영의 항일투쟁을 방해하거나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 때문에 그들 가운데 일부는 민족적 공분을 사서, 민족 지사들에 의해 처단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 같은 행위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공식적으로 표방한 "과업"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은 1920.02.05일자 1면에서 "칠가살(七可殺)"을 공식적으로 거론하였다. 이는 항일.. 2022. 10. 20.
의열단 ① 의열단 (1919)ㆍ한인애국단 (1931)ㆍ조선의용대 (1938) "의열단 (義烈團)"을 이끌던 "김원봉 (金元鳳ㆍ1898~1958.11(?)ㆍ60세)"과 "한인 애국단 (韓人愛國團)"을 이끌던 "김구 (金九ㆍ1876~1949ㆍ72세)"는 각각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한인 청년들을 대상으로 군사 교육을 실시하였다. 1. 의열단 (義烈團)1923년, "상해 일본 총영사"가 "외무대신"에게 보낸 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의열단 단원"이 1,0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 설립일 : 1919.11.07~1924.01. →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독립당 • 주 도 : "김원봉 (약산)"이 단장 • 성 격 : "아나키스트" 성격의 무장 독립운동단체• 단 원 : 김원봉ㆍ윤세주ㆍ한봉근ㆍ한봉인ㆍ이성우ㆍ곽경ㆍ강세우ㆍ이종암ㆍ김상윤ㆍ신철휴ㆍ배동선ㆍ서상락ㆍ권준ㆍ이수.. 2022. 10. 20.
황현 (매천ㆍ1856) : 매천야록 저자ㆍ문장가ㆍ역사가 "황현 (黃玹ㆍ1856~1910.09.07ㆍ46세)"은 "매천야록(梅泉野錄)"의 저자이며, 1910년, "한일병합조약" 체결을 통탄하며, "조약체결" 16일 후, "구례군" 자택에서 음독자살했다.  1. 황현 (黃玹ㆍ1856~1910.09.07ㆍ향년 46세)매천야록(梅泉野錄)의 저자ㆍ대한제국 시인ㆍ문장가ㆍ역사가ㆍ우국지사(대한민국 독립유공자)1892년 봄, "운현궁"에서 화약이 터지고, 여러 건물에 장치된 화약이 발각된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명성황후"를 배후로 지목했다. 그에 의하면, 이 사건은 "명성황후"가 "흥선대원군 일가"를 폭살하기 위해 벌였다. 1888년, "생원시 복시"에 장원급제했으나, 낙향하여 제자를 양성하며 지냈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 체결을 통탄하며, "조약체결" 16일 후,.. 2022. 10. 20.
최익현 (면암ㆍ1833) : 항일 의병장ㆍ위정척사파ㆍ조선의 마지막 선비 "최익현 (崔益鉉ㆍ1833~1907ㆍ향년 74세)"은 1906년, "을사늑약 체결"을 계기로 공개적으로 수백 명의 유림을 모아 "의병"을 모집했다. "임병찬ㆍ임락" 등과 함께 "전북 정읍" 에서 거병하였으나, 곧 관군에게 패하여 체포되었고, "대마도"에 유배되었다가, "발병(풍증)ㆍ단식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1. 최익현 (崔益鉉ㆍ1833~1907ㆍ향년 74세) 최익현(위정척사파 대표)-유길준(개화사상의 대변인)ㆍ독립운동가ㆍ정치인(조선국 호조참판 직책)ㆍ항일 의병장ㆍ위정척사파(노론 화서학파의 지도자)ㆍ조선의 마지막 선비 1905년 "을사늑약"에 저항한 대표적 의병장으로, "을사조약"의 무효를 선포하고, 국권회복에 힘쓴 문신ㆍ "흥선대원군"의 월권행위를 비판하였으며, "김기현ㆍ이항로"의 문하에서 수학하였.. 2022. 10. 20.
황족 ② 구 황실재산법 (1954.09)→ 문화재보호법 (1963) "이승만 정부"는  1954.09.23일 제정된 "구 황실재산법 (舊 皇室財産法)"을 만들어, "황실 재산"을 모두 국가 재산으로 환수했고, "박정희 정권" 때 상당수 토지를 매각해서 사용했다고 한다. 1. 구 황실재산법 (舊 皇室財産法)• 일 시 : 1954.09.23일 제정• 내 용 : 대한제국 황실의 재산 처리에 관한 법률로, "구황실 재산"은 국가 소유가 되었다.1954년 공포되었다가, 1963년 "문화재보호법 제정"으로 폐지된 법이다. 당시 재산으로, 토지만 1억5천5백만 평이 있었다고 한다.(5대 궁궐이 있는 땅과 보물 등 제외) "이승만 정부"는 이 법을 만들어, "황실 재산"을 모두 국가 재산으로 환수했고, "박정희 정권" 때 상당수 토지를 매각해서 사용했다고 한다. "아차산(서울 워커힐 .. 2022. 10. 19.
황족 ① 순종(3남ㆍ1874)ㆍ의친왕(5남ㆍ1877)ㆍ영친왕(7남ㆍ1897) "정궁"이었던 "경복궁"은 이제는 헐리고 없는 "조선총독부" 건물에 밀려 대부분이 파괴됐고, "경운궁(덕수궁)"은 주변에 들어선 각국 공사관들에게 터를 내주고 쪼그라들었다. "창덕궁"은 놀이터로 탈바꿈하는 치욕을 겪었고, 서울 역사박물관 터에 자리하고 있던 "경희궁"은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그마나 제 모습을 조금이라도 간직하고 있는 궁궐은 마지막 "황제 순종"이 머물렀던 "창덕궁" 뿐이다. 1. "고종" 자녀 (9남 4녀)중 어른으로 성장한 이는 4명뿐, 대부분 평탄한 삶을 살지 못했다."황손"들의 운명도 궁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고종"은 정비인 "명성황후"를 포함, 8명의 부인에게서 9남 4녀를 뒀지만, 어른으로 성장한 것은 "순종 (1874~1926)ㆍ의친왕 이강(1877~1955)ㆍ영친왕.. 2022. 10. 19.
독도 문제 ④ 1965.01월, 박정희 대통령의 "독도 밀약" 1965.01.11일, 서울 성북동 "박건석 (범양상선 회장) 자택"에서 "정일권(국무총리)ㆍ우노 소스케(자유민주당 의원)"가 만났다. "앞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으로써, 일단 해결한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한ㆍ일 기본조약에서는 언급하지 않는다"는 대원칙 아래, "4개 부속조항"으로 구성된 "독도밀약"이 맺어진다. 1. 독도 밀약① 1965.01.11일,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과 체결한 "독도에 관한 밀약"을 말한다.② "독도밀약"의 내용 "앞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으로써, 일단 해결한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한ㆍ일 기본조약에서는 언급하지 않는다."는 대원칙 아래, "4개 부속조항"으로 구성됐다. • "독도"는 앞으로 "대한민국"과 "일본" 모두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한다. 이에 반론하는.. 2022. 10. 19.
독도 문제 ③ 독도 폭격 사건 (미 공군폭격대) 1948ㆍ1950 "미국"은 "독도"를 "미국의 폭격 연습장"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1948.06.08일, "미군정"은 이 사실을 주민들에게 전혀 알리지 않아, 결국 조업 중이던 한국 어민들은 "미 공군의 독도 폭격 연습"으로 인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1. 독도 폭격 : "미국 공군 폭격대"가 독도를 폭격한 사건 "미국"은 "대일 강화조약(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ㆍ1951.09.08)" 이후, "독도"를 "미국의 폭격 연습장"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미군정"은 이 사실을 주민들에게 전혀 알리지 않아, 결국 조업 중이던 한국 어민들은 "미 공군의 독도 폭격 연습"으로 인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1948년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간 선량한 어민들에 대한 진상 규명은 아직까지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상태여서, .. 2022. 10. 19.
독도문제 ② 독도 분쟁 요점 ② 1905년 : 일본의 독도 편입? 1905.01.28일, "일본 정부"에 의해 실시된 "독도의 시마네 현 편입"이 법적으로 유효한가? 아닌가? 가 문제화되어 있다. 한국 측은 "독도의 시마네 현 편입"이 법적으로 불충분한 부분이 있어, 비밀리에 이루어졌던 것이므로, 비합법적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에 대하여, 일본 측은 "국제 법에 의한 적법한 수속이 이루어졌고, 또한 신문 등에도 보도되어 비밀리에 이루어졌다는 지적은 정당하지 못하다"고 하고 있다. 1. 관련 연구ㆍ자료① 육안관측 불가론"세종실록ㆍ지리지"의 "二島相去不遠 風日淸明則可望見(두 섬이 서로 거리가 멀지 아니하여, 날씨가 맑으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는 부분과 관련, 여기서 두 섬은 "울릉도ㆍ독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논거의 하나로, 1966년 "가와카미 겐조"의 계산 값을 토대.. 2022. 10. 19.
독도 문제 ② 독도 분쟁 요점 ① 송도 (독도)ㆍ죽도 (울릉도) 1696년, "일본 막부"가 내린 "죽도(竹島)도해금지령"은 일본 어민이 "죽도 (울릉도)"로 고기 잡으러 가는 것을 금지한 "막부"의 명령이다. "조선ㆍ일본" 간, "울릉도ㆍ독도" 영유권 논쟁의 마침표를 찍었다고 한다. 한편 "막부"의 이 명령은 "죽도(울릉도)ㆍ송도(독도)가 조선 영토임을 확실히 인정하는 문서"로 받아들여진다. "독도가 한국 땅"이라고 하는 주장의 근거중 하나로 쓰이는 자료이다. 1. 독도 분쟁 요점 : 송도 (독도)ㆍ죽도 (울릉도)① 1696년 : "일본정부"가 만든 "죽도(竹島) 도해 금지령"이라는 문서 → "돗토리 시마네 현"을 지배했던 "마쓰타이라 신타료"는 "죽도(당시 울릉도)는 조선 땅이니 접근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 조선에서 "울릉도와 독도의 영토권"을 주장하자, "일.. 2022. 10. 19.
독도 문제 ① 독도 강치 (바다사자ㆍ일본 강치) 잡이 "독도 강치 (바다사자)"는 동해의 상징과 같은 동물이었다. "강치"는 "독도"를 포함해, 일본ㆍ러시아 등에서 서식했는데, 1900년대 초반에 수만 마리가 "독도" 인근에서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멸종됐다. 1. 황금 알을 낳아준 "독도 강치 (바다사자)"일본인들이 "독도"에서 "강치잡이"를 시작한 것은 1890년대로 거슬러 간다. "강치"의 가죽ㆍ기름 등이 돈이 된다는 걸 알게 된 일본인들이 독도로 몰려들었다. 봄철 산란기 때, 잡은 "어린 강치"는 생후 6개월~1년 사이가 훈련시키기에 좋아, 도쿄ㆍ오사카ㆍ고베 등 일본 전역의 동물원으로 팔려 나갔다.1903년, 독도 침탈의 원흉 "나카이 요자부로"가 처음 "독도 강치" 조업 개시그의 첫 시험조업 일지를 보면, 우리 돈 6,00.. 2022. 10. 19.
무관학교 ② 신흥강습소→ 신흥무관학교→ 경희대 "신흥무관학교 (新興武官學校)"의 "신흥"이란 이름은 "신민회의 신"자와, "부흥"을 의미하는 "흥"자를 합쳐 만든 것ㆍ이때부터 "신흥"의 이름은 곧 "독립군 무관을 양성하는 기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1. 신흥무관학교 (新興武官學校) : 신흥강습소→ 신흥무관학교→ 경희대학교 전신"신흥"이란 이름은 "신민회의 신"자와, "부흥"을 의미하는 "흥"자를 합쳐 만든 것ㆍ이때부터 "신흥"의 이름은 곧 "독립군 무관을 양성하는 기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1919년 "3ㆍ1운동"이후, "조선" 젊은이들이 몰려와 더 이상 수용할 수 없자, 다시 "류하현 대두자(大肚子)"로 학교를 옮겼다. 학교 터는 현재 "마을 뒷산"의 밭으로 변해 있다. 대표적인 사례는 "청산리 전투"로 "신흥 출신"이 대거 참여하였다. .. 2022.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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