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분류 전체보기1995

이토 : 박중양 (1872)ㆍ이토 히로부미 양자ㆍ제자ㆍ백작 "박중양 (朴重陽ㆍ1872~1959ㆍ87세)"은 조선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의 수양아들이다. 1900년, "관비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가 공부하고, 1903년 귀국했다. "총독부" 체제하에서 "충남도 지사ㆍ중추원찬의ㆍ황해도 지사ㆍ충북도 지사ㆍ중추원 칙임참의ㆍ중추원 고문ㆍ중추원 부의장ㆍ칙선 귀족원 의원"이 되었다. 1949.01월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에 검거되었다. 1. 박중양 (朴重陽ㆍ호추 시게요ㆍ1872~1959ㆍ향년 87세) 일제 강점기 신념적 친일파ㆍ백작ㆍ이토 히로부미의 양자(?)ㆍ이토 히로부미의 제자ㆍ대한제국 황해도 도지사 직책ㆍ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ㆍ일본 제국의회 귀족원 의원ㆍ"일본어" 외에도 "러시아어ㆍ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했고, 약간의 "영어"로도 대화할 수 있.. 2022. 10. 21.
을사 3흉 : 이하영 (1858)ㆍ대장군표 고무신 생산ㆍ이종찬 조부 "이하영 (李夏榮ㆍ1858~1929ㆍ71세)"은 1905년, "을사조약" 체결시, "법부대신"으로서, 표면상으로는 반대를 했으나 찬성으로 입장을 바꾸었고, 이후 조선귀족 "자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에서 고문으로 지내는 등 친일행보를 했다. (1905년, 을사삼흉(乙巳三凶): 이하영(법부대신)ㆍ민영기(탁지부대신)ㆍ이재극(궁내부대신)) 1. 이하영 (李夏榮ㆍ1858~1929ㆍ향년 71세)조선말 고종 통역관ㆍ외교관ㆍ대한제국 정치인(외부대신ㆍ법부대신)ㆍ일제 강점기 기업인ㆍ대표적인 매국노ㆍ민족반역자ㆍ경인선 철도 개설의 주역ㆍ1905년, "을사조약" 체결시, "법부대신"으로서, 표면상으로는 반대를 했으나 찬성으로 입장을 바꾸었고, 이후 조선귀족 "자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에서 고문.. 2022. 10. 21.
의열단 ④ 윤세주 (석정)ㆍ조선의용대 최고 이론가 "약산 (若山) 김원봉 (金元鳳ㆍ1898~1958.11(?)ㆍ60세)"의 "밀양" 동향사람으로, 3살 위인 "김원봉"과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냈다. 지금도 "밀양시 내이동"의 두 사람의 생가 자리가 서로 10m 거리에 마주보고 있다. 본디 겸손한 성격이었으나 가슴 속에는 뜨거운 애국심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경술국치" 당시에는 땅을 치며 대성통곡을 하였다고 한다. 1. 윤세주 (尹世胄ㆍ본명 : 윤소룡ㆍ1901~1942ㆍ향년 41세)독립 운동가ㆍ"약산 김원봉(윤세주가 3살 아래)"의 동향 사람으로, 함께 "의열단"에서 활동ㆍ"조선의용대"에서 손꼽히는 이론가ㆍ1919년, 3ㆍ1운동 때, "밀양 장터"의 만세시위 주동, "백범일지"에는 "석정"으로 기록되어 있다. • 출 생 : 경남 밀양 • .. 2022. 10. 20.
의열단 ③ 약산 김원봉 ② 논란ㆍ의혹ㆍ사상ㆍ가족사 "약산 (若山) 김원봉 (金元鳳ㆍ1898~1958.11(?)ㆍ60세ㆍ163cm)"은 남에서는 월북한 "빨갱이 공산주의자 두목"으로 낙인찍히고, 북에서는 남과 북으로 갈라진 조국의 진정한 독립을 위해 중립화 평화통일방안을 주장하다가 "국제간첩이라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숙청되었다. ("황장엽"은 주체사상을 정립하여, 김일성 세습 독재체제 수립에 결정적 역할을 했고,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까지 지냈는데, 북한 정권의 숙청을 피해 월남하는 데 성공→ 2010년 이명박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1. 논란ㆍ의혹① 공산주의자 논란김원봉은 "자신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라고 공개적으로 밝힌 적이 있었으나, 민필호와 장준하는 그를 공산주의자로 지목했다. 평소 김원봉에게 적개심을 갖고 있던 민필호는 .. 2022. 10. 20.
의열단 ③ 약산 김원봉 ① 의열단 단장ㆍ조선의용대 총대장 "약산 (若山) 김원봉 (金元鳳ㆍ1898~1958.11(?)ㆍ60세ㆍ163cm)"은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최고액 현상금(현상금 100만원(현 320억 원))이 걸렸던 인물이며, "김구"와 함께 1930년대 이후 중국 내 독립운동의 양대 산맥으로 불렸던 인물로, "의열단장(1919년 의열단 조직)ㆍ조선의용대장ㆍ조선민족혁명당 총서기(1930년대 후반)ㆍ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직" 등을 역임하며, 민족주의 운동가로서 평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살았다. 1. 김원봉 (金元鳳ㆍ1898~1958.11(?)ㆍ향년 60세) → 독립운동에 혁혁한 공적혁명가ㆍ독립운동가 (의열단 단장(의백)ㆍ조선의용대 총대장)ㆍ군인(중화민국 육군 소위(1927~1930))ㆍ광복군 부사령관 겸 제1지대장(1941~1945)ㆍ대한민국 임시정.. 2022. 10. 20.
의열단 ② 칠가살 (七可殺ㆍ임정)ㆍ오파괴 (五破壞ㆍ의열단) "친일파"들은 민족진영의 항일투쟁을 방해하거나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이들을 처단하기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칠가살 (七可殺)"을 , 의열단은 "오파괴 (五破壞)"라는 것을 정해서 "친일파"를 처단하였다. 1. 칠가살 (七可殺) : 대한민국 임시정부일제에 협조한 대가로 얻은 금전이나 직위를 이용해, 일신의 영달을 꾀해온 "친일파"들은 민족진영의 항일투쟁을 방해하거나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 때문에 그들 가운데 일부는 민족적 공분을 사서, 민족 지사들에 의해 처단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 같은 행위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공식적으로 표방한 "과업"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은 1920.02.05일자 1면에서 "칠가살(七可殺)"을 공식적으로 거론하였다. 이는 항일.. 2022. 10. 20.
의열단 ① 의열단 (1919)ㆍ한인애국단 (1931)ㆍ조선의용대 (1938) "의열단 (義烈團)"을 이끌던 "김원봉 (金元鳳ㆍ1898~1958.11(?)ㆍ60세)"과 "한인 애국단 (韓人愛國團)"을 이끌던 "김구 (金九ㆍ1876~1949ㆍ72세)"는 각각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한인 청년들을 대상으로 군사 교육을 실시하였다. 1. 의열단 (義烈團)1923년, "상해 일본 총영사"가 "외무대신"에게 보낸 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의열단 단원"이 1,0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 설립일 : 1919.11.07~1924.01. →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독립당 • 주 도 : "김원봉 (약산)"이 단장 • 성 격 : "아나키스트" 성격의 무장 독립운동단체• 단 원 : 김원봉ㆍ윤세주ㆍ한봉근ㆍ한봉인ㆍ이성우ㆍ곽경ㆍ강세우ㆍ이종암ㆍ김상윤ㆍ신철휴ㆍ배동선ㆍ서상락ㆍ권준ㆍ이수.. 2022. 10. 20.
황현 (매천ㆍ1856) : 매천야록 저자ㆍ문장가ㆍ역사가 "황현 (黃玹ㆍ1856~1910.09.07ㆍ46세)"은 "매천야록(梅泉野錄)"의 저자이며, 1910년, "한일병합조약" 체결을 통탄하며, "조약체결" 16일 후, "구례군" 자택에서 음독자살했다.  1. 황현 (黃玹ㆍ1856~1910.09.07ㆍ향년 46세)매천야록(梅泉野錄)의 저자ㆍ대한제국 시인ㆍ문장가ㆍ역사가ㆍ우국지사(대한민국 독립유공자)1892년 봄, "운현궁"에서 화약이 터지고, 여러 건물에 장치된 화약이 발각된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명성황후"를 배후로 지목했다. 그에 의하면, 이 사건은 "명성황후"가 "흥선대원군 일가"를 폭살하기 위해 벌였다. 1888년, "생원시 복시"에 장원급제했으나, 낙향하여 제자를 양성하며 지냈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 체결을 통탄하며, "조약체결" 16일 후,.. 2022. 10. 20.
최익현 (면암ㆍ1833) : 항일 의병장ㆍ위정척사파ㆍ조선의 마지막 선비 "최익현 (崔益鉉ㆍ1833~1907ㆍ향년 74세)"은 1906년, "을사늑약 체결"을 계기로 공개적으로 수백 명의 유림을 모아 "의병"을 모집했다. "임병찬ㆍ임락" 등과 함께 "전북 정읍" 에서 거병하였으나, 곧 관군에게 패하여 체포되었고, "대마도"에 유배되었다가, "발병(풍증)ㆍ단식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1. 최익현 (崔益鉉ㆍ1833~1907ㆍ향년 74세) 최익현(위정척사파 대표)-유길준(개화사상의 대변인)ㆍ독립운동가ㆍ정치인(조선국 호조참판 직책)ㆍ항일 의병장ㆍ위정척사파(노론 화서학파의 지도자)ㆍ조선의 마지막 선비 1905년 "을사늑약"에 저항한 대표적 의병장으로, "을사조약"의 무효를 선포하고, 국권회복에 힘쓴 문신ㆍ "흥선대원군"의 월권행위를 비판하였으며, "김기현ㆍ이항로"의 문하에서 수학하였.. 2022. 10. 20.
황족 ② 구 황실재산법 (1954.09)→ 문화재보호법 (1963) "이승만 정부"는  1954.09.23일 제정된 "구 황실재산법 (舊 皇室財産法)"을 만들어, "황실 재산"을 모두 국가 재산으로 환수했고, "박정희 정권" 때 상당수 토지를 매각해서 사용했다고 한다. 1. 구 황실재산법 (舊 皇室財産法)• 일 시 : 1954.09.23일 제정• 내 용 : 대한제국 황실의 재산 처리에 관한 법률로, "구황실 재산"은 국가 소유가 되었다.1954년 공포되었다가, 1963년 "문화재보호법 제정"으로 폐지된 법이다. 당시 재산으로, 토지만 1억5천5백만 평이 있었다고 한다.(5대 궁궐이 있는 땅과 보물 등 제외) "이승만 정부"는 이 법을 만들어, "황실 재산"을 모두 국가 재산으로 환수했고, "박정희 정권" 때 상당수 토지를 매각해서 사용했다고 한다. "아차산(서울 워커힐 .. 2022. 10. 19.
황족 ① 순종(3남ㆍ1874)ㆍ의친왕(5남ㆍ1877)ㆍ영친왕(7남ㆍ1897) "정궁"이었던 "경복궁"은 이제는 헐리고 없는 "조선총독부" 건물에 밀려 대부분이 파괴됐고, "경운궁(덕수궁)"은 주변에 들어선 각국 공사관들에게 터를 내주고 쪼그라들었다. "창덕궁"은 놀이터로 탈바꿈하는 치욕을 겪었고, 서울 역사박물관 터에 자리하고 있던 "경희궁"은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그마나 제 모습을 조금이라도 간직하고 있는 궁궐은 마지막 "황제 순종"이 머물렀던 "창덕궁" 뿐이다. 1. "고종" 자녀 (9남 4녀)중 어른으로 성장한 이는 4명뿐, 대부분 평탄한 삶을 살지 못했다."황손"들의 운명도 궁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고종"은 정비인 "명성황후"를 포함, 8명의 부인에게서 9남 4녀를 뒀지만, 어른으로 성장한 것은 "순종 (1874~1926)ㆍ의친왕 이강(1877~1955)ㆍ영친왕.. 2022. 10. 19.
독도 문제 ④ 1965.01월, 박정희 대통령의 "독도 밀약" 1965.01.11일, 서울 성북동 "박건석 (범양상선 회장) 자택"에서 "정일권(국무총리)ㆍ우노 소스케(자유민주당 의원)"가 만났다. "앞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으로써, 일단 해결한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한ㆍ일 기본조약에서는 언급하지 않는다"는 대원칙 아래, "4개 부속조항"으로 구성된 "독도밀약"이 맺어진다. 1. 독도 밀약① 1965.01.11일,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과 체결한 "독도에 관한 밀약"을 말한다.② "독도밀약"의 내용 "앞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으로써, 일단 해결한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한ㆍ일 기본조약에서는 언급하지 않는다."는 대원칙 아래, "4개 부속조항"으로 구성됐다. • "독도"는 앞으로 "대한민국"과 "일본" 모두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한다. 이에 반론하는.. 2022. 10. 19.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