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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친일파 • 안중근 • 이토히로부미 • 총독부

학살- 1937.12 : 난징 대학살ㆍ남경 대학살 (수도)

by 당대 제일 2022. 1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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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12.13~1938.02월까지 벌어진 "난징 대학살 (남경 대학살南京大)"은, "중일 전쟁때, "난징 (중화민국 장개석 정부 수도)"을 점령한 "일본 중지파견군 사령관 마쓰이 이와네" 휘하의 일본군이 자행한, "중국인 포로ㆍ일반 시민"등을 무차별 학살한 사건으로약 30만 명의 "중국인들"이 학살되었다하지만 그때"장개석"은 "공산당"을 쫓고 있었으며"일본 만행"을 묵인했다.

 

1.  난징 대학살 (남경 대학살ㆍ南京大屠殺ㆍNanking Massacre)

 "중국(난징 대도살)일본(난징 사건)서구권(아시아 홀로코스트)"라고도 한다. 1939.04월에는 "1644 부대"가 신설되어, "생체실험" 등이 자행되었다 전후 "극동 군사재판"에 제출된 자료에 따르면, "자선단체(2)" "난징"에서 매장한 유기시체만도 155,337(어린이가 859부녀자가 2,127)였고, 그밖에 "양쯔 강"에도 대량의 시체가 버려졌다.

일 시 : 1937.12.13 (새벽) ~ 1938.02월까지 (6주간) 성벽을 타고 공격 개시

장 소 : 난징 (중화민국 수도)

결 과 : 중국인 학살 - 30만 명난징 진격 중(25만 명) 살해점령 후(42,000) 살해

난징 대학살

2.  배 경

1937.07월, "루거우차오 사건 (마르코 폴로 다리ㆍ노구교사건)"으로 "중화민국ㆍ일본" 사이에 무력충돌이 터지면서, "중일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 초기에 "일본군"은 "베이징ㆍ톈진" 등 북부 주요도시들을 손쉽게 점령하고, 진격에 진격을 거듭하면서, "일본군" 수뇌부는 "단 3개월 안에 중국대륙을 점령하겠다."고 큰소리 쳤을 만큼 기세등등했었다.

그러나 "상하이 전투"에서 2~3개월이나 전투가 장기화되었는데, 여기서 "일본군"이 예상한 것과는 달리, "중국 국민당군"의 저항이 상상 이상이었다.  특히 "상하이 전투"에서 "중국군"은 "장제스(蔣介)"의 "엘리트 직계군대"가 투입되었고, 이들의 저항이 상당히 격렬했던 데다가, 여기서 "일본군"은 "오송 상륙 전투"에서 무모한 작전을 펼치다가 상당한 피해를 입으면서, "일본군"은 "중국군ㆍ중국인들"에 대한 적개심에 악이 받칠 대로 받쳐 있는 상태가 된다.

그리고 1937.11월, "일본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 어렵게 "상하이"를 점령하고, 예정도 없이 곧바로 "난징(중화민국의 수도)"를 향해, 진격을 한다. (일본군 9만 명 정도)

< 학살의 주요 책임자 >

• 아사카 야스히코(1887~1981): 일본의 황족ㆍ난징대학살 당시 일본군 현장 책임자모든 포로들을 죽이라는 명령서에 서명했다.

• 조 이사무(1895~1945): 아사카 야스히코의 참모난징대학살에 깊게 관여했고, 포로 학살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 마쓰이 이와네(1878~1948): 난징대학살 총 책임자그러나 "난징" 함락될 당시, "병"으로 전선에 있지 않았다.

• 다니 히사오(1882~1947): 난징에 주둔한 "일본군 6사단 육군 중장"난징 함락 직후, 항복한 중국군 포로와 비무장 민간인을 대대적으로 학살하도록 지시하였다.

3.  전 개

"일본군""난징"으로 진격하는 동안, "중화민국 정부" "난징"을 포기하고 "충칭(중경)""임시수도"로 정한다고 발표한다그러나 중국군 사령관 "탕셩즈(唐生智) 장군"은 결사항전을 주장했고,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수도를 키겠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난징"을 삼면에서 좁혀 들어오는 "일본군"포위 속에, "중국 국민당" 주요 관리부유층들은 빨리 손을 써서 도시를 빠져나갔고, "중일전쟁" 이전 110만 명에 육박했던 "난징"은 도시를 빠져나가려는 시민들과 "일본군"을 피해 도시로 피난 들어오는 피난민 등이 뒤엉켜 아수라장이었다.

"난징"을 완전히 포위한 "일본군""중국군 사령관"에게 투항하라는 경고를 했다그러나 "난징"을 지키고 있던 "탕셩즈 사령관" 휘하의 15만 명의 "중국군"은 투항을 끝내 거부했다"중국군"의 당시 전략은 도시 밖 요충지를 포기하고, 성 안에 고립한 채로 방어하겠다는 전략 방식으로 나가려했었다12.10, "일본군""중국군"에게 "항복하지 않으면, 피의 양쯔강을 만들겠다."고 최후통첩을 한다결국 역시 "중국군"은 끝까지 투항을 거부했고, "일본군"은 전면적인 공격에 들어간다.

12.13, "일본군""난징"을 점령하고, "난징성" 안으로 진격하기 시작한다"중국 군대"가 제대로 저항해보지도 못하고, 무참히 무너진 이유에 대해서는 "흐트러진 군기지휘관들의 부재무능함"에서 비롯되었으며, 여기에 단합이 안 되었던 것이 큰 한 몫을 했다결국 "중국군"은 제대로 전투도 못해본 채, 뒤숭숭한 혼란 속에 빠져있기만 했다.

그 무렵, "난징"이 함락되기 직전 전날, 결사항전을 주장하던 "중국군 사령관 탕셩즈"는 자신의 휘하 부대와 "난징 성"에 고립된 시민들을 뒤로한 채, "양쯔 강"을 가장 먼저 건너, 도망했다여기서 피난가지도 못한 채, 남아있던 50~ 60만의 "난징" 시민들과 군인들은 공황 상태 속에서 4~6주간 "일본군"에 의해 처참한 학살을 당한다.

4. 사건일지

1937.07 : "루거우차오 사건 (마르코 폴로 다리노구교사건)"을 계기로 "중일전쟁" 발발 일본 "관동군", 톈진베이징 점령

1937.08 : 일본군, "항저우만" 상륙"상하이" 공격"난징" 공습 시작 1937.09 : 일본군, "타이위안" 점령   1937.11 : "자퀴노 드 베 사제(프랑스인 로마가톨릭교회)" "상하이"에 중립지대 선포 → "상하이" 함락 "W.플러머 밀스"의 제안으로 "난징 안전지대" 설치 "욘 라베 (존 라베)ㆍ히틀러"에게 난징의 상황을 알리는 전보를 보냄  "국민당 탕셩즈 장군"은 기자회견을 열고, "난징" 결사항전 선언

12.07 : "마쓰이 이와네"의 병세가 악화되면서, 지휘권이 "아사카 야스히코"에게 넘어감 "100인 참수 경쟁" 관련 기사 게재 → 12.08 : 장제스, "난징" 철수 → 12.09 : "미국 경비정""파나이 호" 난징 철수. "난징국제위원회"3일간의 휴전교섭을 제안했으나, "장제스"는 이에 응하지 않고, "일본"은 폭격의 강도를 더욱 강화

12.11 : 장제스, "탕셩즈 장군"에게 퇴각 명령  12.12 : "일본" 해군, "난징" 부근 "양쯔 강"에서 "미 해군경비정" 파나이 호 격침 (파나이사건)    12.13 : "난징" 함락, "일본군" 66대대에 모든 포로를 처형하라는 명령 전달  12.17 : "마쓰이 이와네" 난징 도착

1938.01.01 : 친일 성향인 "난징자치위원회" 구성  1939.04. : "1644 부대" 중심으로 "생체실험" 실시   1946.08~ 1947.02: "난징 전범재판"으로, BC급 전범 재판   1946.05.03 : "극동 국제군사재판" 개정

5. 학살강간 (6주간)

"탕셩즈 사령관"이 도망가면서, "난징성"이 허무하게 "일본군" 수중에 들어오게 되자, "난징"에 남아있던 시민들병사들에게 재앙이 닥쳤다"일본군"은 백기를 들며 항복한 "중국군 포로" 뿐만 아니라, 젊은 남자들을 색출하여 닥치는 대로 끌고 가, 성 외곽 밖이나 "양쯔강" 하구에서 기관총 세례를 퍼부어,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다"패잔병을 처리한다"는 명목으로, "모자를 오래 쓴 흔적이 있거나, 손에 굳은살이 박힌 젊은 남자" 모두를 닥치는 대로, 끌어 모아, 기관총으로 "양쯔강"에 쓸어 넣었다.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10,000여 명이나 되는 단위로, "중국군" 포로와 민간인 남자들은 "일본군" "총검술 훈련용" 되거나, "목 베기 시합" 희생물이 되기도 했다여기에 적지 않은 "중국인"들은 총알을 아끼려는 "일본군"에 의해 산 채로 파묻혀서, 생매장 당하거나 칼로 난도질당했다.

"난징"의 한 광장에서는 1,000여 명의 사람들이 몇 개의 단위로 열로 구분되어 세워졌는데, 이들 가운데는 여자들과 어린아이 등 수많은 민간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일본군"은 이들에게 석유를 붓자마자, 곧바로 기관총을 난사했다"총탄"이 사람들의 몸을 꿰뚫을 때, 석유에 불이 붙었고, 시체더미는 산처럼 이루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난징대학살"에 참가한 어느 "일본군"의 일기가 발견되었는데, 일기내용에서는 "심심하던 중, 중국인을 죽이는 것으로 무료함을 달랜다."면서, "산 채로 묻어버리거나 장작불로 태워 죽이고, 몽둥이로 때려죽이기도 했다"고 적혀 있었다, "일본군"들은 군인 포로들이나, 민간인들 가릴 것 없이 무차별적으로 잔인하게 학살을 하였다.

이러한 잔인한 "인간 사냥"이 극에 달하면서, "일본군"은 여자들에게도 눈을 돌렸다이른바, "집단윤간선간후살(先姦後殺, 먼저 강간하고 다음에 죽임)""일본군"은 여성을 성노리개로 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강간 후 참혹하게 살해했다그 대상은 10살도 채 안되어 보이는 어린이부터, 60~ 70대 노파까지, 그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또한, "일본군"은 수녀비구니를 포함하여, "난징"의 여성들을 보이는 대로 능욕했다1938.01, "일본 외무대신 히로타 고키""주미 일본대사관"에 보낸 비밀 전문내용은 다음과 같다< 특별소식 : 믿을 만한 목격자들의 직접 추산과 신뢰도 높은 일부 인사들이 보내온 편지에 따르면 일본군이 저지른 모든 행위와 폭력 수단은 아틸라 왕과 흉노족을 연상시킨다 최소 30만 명의 민간인이 살육됐고, 많은 수는 극도로 잔혹하고 피비린내 나는 방식으로 살해됐다. 전투가 끝난 지 수주가 지난 지역에서도 약탈과 아동 강간 등 민간에 대한 잔혹 행위가 계속되고 있다.>

당시 "일본 외무부""난징"에서의 학살 사실을 숨기기 위해, "난징"에 있던 서방 외교관들을 불러 맛있는 음식과 공연을 제공하며, 매수를 시도했다고 한다.

100인 참수 경쟁

"난징 대학살" 시기인 1937.11.30일자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12.13일자 "도쿄 니치니치 신문"에서 "일본군 무카이 도시아키 소위노다 쓰요시 소위""일본도(日本刀)"로 누가 먼저 "100인을 참살(斬殺)시키는지를 겨뤘다"는 사실이 보도되었던 것을 말한다전 후, "무카이 소위노다 소위"는 함께 "난징"에서 군사재판을 받았고, 역시 최후까지 자신이 민간인 학살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으나, 결국 "육군 중장 다니 히사오"와 함께 총살되었다.

난징의 안전지대 (난징에 있는 욘 라베의 집)

"난징대학살" 당시, "욘 라베 (독일 나치스당원지멘스의 직원)" 이곳을 중심으로 "난징 안전지대" 설정해, 피난하는 중국인들을 도왔다"난징"에 근무하던 "욘 라베""외교관사업가" "난징"에 있던 다른 외국인들과 힘을 합쳐, "국제위원회"를 조직하고, 자신의 자택대사관 부지 등을 중심으로 "일본군"이 들어올 수 없도록 "난징 안전지대"를 설정해, 이곳에서, 피난하는 "중국인"들에게 음식과 머물 곳을 제공했었다.

"난징 안전지대"에 전체 약 20만 명이 넘는 "중국인"들이 "일본군"들로부터 대피할 수 있는 은신처 및 음식을 제공받았다"난징 안전지대" 구역은 모두 "난징 주재 외국대사관난징대학교" 주변에 설치되었다또한, 이러한 "안전지대"를 주도한 "욘 라베"는 자신의 소유지를 650명이 넘는 피난자들이 피신할 수 있도록 개방하였으며, "안전구역" 내의 행정 책임자들은 끔찍한 학살로부터 중국인들을 보호하고자 노력했다.

파나이 호 사건

1937.12, "난징대학살"이 한창 벌어지던 시기, "난징" 인근의 "양쯔 강" 유역에서 "일본 해군 소속 전투기"에 의하여, 당시 "양쯔 강" 유역을 순찰 중이던 "미국 아시아함대" 소속의 경비정인 "파나이 호"가 침몰당한 사건이다이 사건 이후, 공식적으로 "일본 정부"에서 "미국영국" 정부에게 정중하게 사과하였고, "미국 정부" 배상금을 지불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6. 대학살 이후

1937.12.13일, "난징"이 함락된 이후, 6주간의 대학살이 계속되었고, 1938년 봄에야 비로소 종결되었다. 그 후 "일본군"은 도시 전체를 완벽하게 통제하기 위한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일본 정부"는 "난징"에 있는 사람들을 "피라미드형 위계질서"에 따라, 편재하는 방식으로 통제하는 방법을 고안했었다. 1938.01.01일, "일본"은 새로운 시 정부인 "난징자치위원회"를 구성했다. "난징자치위원회"는 도시의 행정ㆍ복지ㆍ금융ㆍ상업ㆍ치안ㆍ교통 등을 담당하는 중국인 관리들로 구성되어, "일본의 꼭두각시" 역할을 했다.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의 통제 정책은 너무도 가혹하게 다뤘다. 1939.04월, "의학연구기관"을 설치하고, "마루타(통나무)" 같은 형식의 실험대상을 모아 "생체실험" 연구를 하곤 했었다. 이를 "Ei 1644부대"라 불리는데, 매주 10여 명의 사람들이 생체실험에 의해 희생당하고, 그 사체는 "Ei 1644부대"의 소각로에서 처리되었다.

이어서 1940년에는 "왕징웨이(汪精衛)"를 정부수반으로, 친일성향의 괴뢰정부인 "왕징웨이 정권"이 "난징"을 수도로 수립되었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세워진 "왕징웨이 정권"에 대한 지지가 거의 없었다.

※ 왕징웨이 (왕정위ㆍ汪精衛ㆍ1883~ 1944ㆍ향년 61세) : 중국의 대표적인 "매국노(漢奸ㆍ한간)"로 불린다ㆍ난징 국민정부의 제1대 주석(1940~ 1944)중국 국민당의 일원으로 쑨원과 친밀한 관계에 있었으며, "장제스"와 대립하는 라이벌로 유명하며 "중일 전쟁" 발발 이후, "친일파"로 변절하여, "난징""친일 괴뢰 정권"을 세웠다.

7. 대학살 증언 : 일본군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 학살했다.

100인 참수 경쟁 : "일본군"은 누가 100명을 먼저 살해하는가를 놓고, 경연대회를 열어 포상하기도 했는데, 당시 참수 경쟁 가담자는 1948, 중화민국 정부에 의해 총살당한 "무카이 소위노다 소위"였다.

 유키오 오마타 (종군 특파원)의 증언 :  "시아크완"으로 끌려 온, 중국인 포로들이 강을 따라 한 줄로 정렬해 있는 것을 목격했다 1번째 줄에 서 있던 포로들의 목이 잘렸다. 2번째 줄의 포로들은 자신의 목이 잘리기 전에 앞줄에 서 있던 포로들의 목이 잘린 몸통을 강물에 던져 넣어야 했다 살육은 아침부터 밤까지 계속되었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2,000명밖에 처리할 수 없었다 다음날 이런 방식의 처형에 싫증이 난 일본군은 포로들을 한 줄로 세운 후 기관총 사격을 가했다 방아쇠가 당겨졌다. 포로들은 강 속으로 뛰어들었지만 강 건너편에 도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총검훈련의 연습물 : 중국인 군인 포로들을 "총검 훈련"에 이용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일본의 만행"은 사진 촬영이 취미였던 "무라세 모리야쓰"가 촬영하였다 꽁꽁 얼어붙은 겨울의 연못에 밀어 넣어, 얼어 죽게 하거나, 살아있는 사람은 총을 쏘아 죽였다.

 기총( 機銃)에 의한 무차별 사격 : 수천~수만 명의 젊은 남성들은 마치 가축처럼 묶어, 도시 외곽으로 끌려가, 기관총 세례.  눈에 띈 사람은 모두 사정없이 구타당하고, 총검에 살해되었다.

 부녀자에 대한 강간 : 수녀비구니어린이는 물론, 늙은 노인까지 강간한 뒤, 잔인하게 살해했다고 전해진다. 여성들은 강간 직후, 즉시 살해됐는데, "주로 수족"을 절단하는 방식으로 살해되었다고 증언한다. 임신 중이거나 방금 출산한 여성도 강간의 희생자가 되었다. 임신한 여성을 강간한 후, 재미로 그녀의 배를 가르고, 태아를 꺼내는 경우도 허다했다고 한다. 임신 9개월의 한 여성은 강간을 당한 후 건강은 물론 정신마저도 이상해졌으며, 임신을 한 여성을 발로 걷어차 죽이는 일도 일어났다.

기타 방법 : 생매장ㆍ사람을 묶어놓고, 귀를 잘라내고, 죽임ㆍ가솔린(휘발유)를 뿌려서, 산 채로 불태워 죽임ㆍ살아있는 사람에게 가솔린을 붓고, 총을 쏘아 불을 붙여 죽임ㆍ장작더미 위의 나무기둥에 묶고, 불을 붙여, 익혀 죽임ㆍ어린 아이들을 전깃줄에 목을 매달아 죽임ㆍ소년에게 염산을 부어서 태워 죽임

8. 전범 재판

1945년, "일본"이 패망하면서, 일본군ㆍ일본인들은 "중화민국 군대"가 "난징"에 입성하기 전, 모든 데이터를 파괴하고, 도주했다.

① 난징 전범 재판 ( 1946.08~ 1947.02B급/C급 전범 재판)

"난징 전범재판"은 1946.08~ 1947.02월까지, "난징"에서 B급ㆍC급 전범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이 재판에서 1,000명이 넘는 중국인들이 460여 건의 살인ㆍ강간ㆍ방화ㆍ약탈에 관해, 증언했었다. 재판이 계속되면서 감춰졌던 증거들이 속속 공개되었는데, 여기서 "일본" 신문에 보도된 "100인 참수 경쟁"의 "노다 쓰요시 중위ㆍ무카이 도시아키 중위"가 재판받게 된다.

두 사람은 "살인시합"을 벌인 장본인이었는데, 재판 중, 둘 다 150명 이상을 죽였다는 사실을 일체 부인했으며, 급기야 한 사람은 외국인 특파원이 멋대로 상상해 기사를 만들어 냈다고 주장했고, 다른 한 사람은 일본에 돌아갔을 때, 아내를 놀래게 해주려고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 둘은 1947.12.18일 평결이 내려져, 사형을 언도받는다.

또한 재판에서, "다니 히사오 중장" 역시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는 1937년 "난징"에 주둔한 "일본군 6사단 육군 중장"이었는데, "일본군 6사단"은 "난징" 시내에서 온갖 많은 만행을 저질러왔던 부대였다.

1946.08월, 재판에 회부된 "다니 히사오 중장"은 "난징"으로 소환되었다. 그를 기소하기 위해 법의학 전문가들이 "난징" 시내 근처에 있는 매장지를 파헤쳐, 수천 구의 유골을 발굴했다. 1947.02.06일, "다니 히사오 중장"에 유죄판결이 내려지면서, 03.10일 "다니 히사오 중장"은 전쟁법과 전쟁포로에 대한 대우에 관한 "헤이그 협정"을 위반하고, 자신의 군대가 "난징"에서 30만 명 학살한 것에 동조한 혐의로 "사형"을 언도받으면서, "공개 총살"이 집행된다.

② 동경 재판 (극동 국제 군사재판도쿄재판1946.08~ 1947.02 ㆍA급 전범 재판)

"제2차 세계대전"과 관련된 동아시아의 전쟁 범죄인을 심판한 재판으로, "도쿄 재판"이라고도 한다. 60여 명 이상의 전쟁 범죄용의자로 지명된 사람 중, 28명이 기소되어, 판결 이전에 병사한 사람 2명과 소추가 면제된 1명을 제외한 "25명이 실형"을 선고받았는데, 이중 "난징 대학살"에 관련된 전범들 가운데, 당시 "난징 대학살 지휘관"이었던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는 "일본 황족"이란 이유로 처벌을 면해, 재판소에 출석하지 않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난징 대학살" 당시, 총책임자였던 "마쓰이 이와네"는 사형 판결을 받아 교수형을 당했고, "중일전쟁" 당시 "일본 외무성 장관"이었던 "히로타 고키"도 사형을 선고받아 교수형에 처했다. 하지만, "극동 국제 군사재판"은 "난징 대학살" 당시, 주요 범죄자들이 단 1명도 법정에 서지 않았다는 점이 한계다.

9. 최근 상황 (학살 논쟁)

① "난징 대학살" 피해 규모 논쟁ㆍ사상자의 숫자의 다양성

"난징 대학살" 사상자의 숫자가 매우 제각각으로 엇갈리는데, 서양의 서적 중에서는 42,000명 설을 언급하는 책이 있는가 하면, 15~ 20만 명, 설까지 다양하다. 20만 명설ㆍ15만 명설ㆍ1만 명설ㆍ3천 명설ㆍ심지어는 일본 우익 진영에서는 40~ 50명 설을 주장하고 있으며, 많아 봐야 1~2명 설, 아예 없었다는 설까지 있다.

오래전부터 "난징 대학살" 피해 규모에 대해 논쟁이 격렬히 났었는데, 최근 "중일" 양국의 전문가로 구성된 "중일 역사공동연구위원회"가 "난징 대학살"의 피해 규모에 대해 논의를 놓고, 2009.12.23일에 최종결론이라 불리는 보고서를 발표할 예정이었으나, 양측의 팽팽한 주장 대립 속에 합의점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측은 희생된 사람들 수가 30만 명이며, "일본은 계획적인 침략을 감행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일본" 측은 수만~ 최대 20만 명에 이른다는 다양한 주장이 존재하고 있다. 그 동안 "일본"에서는 "난징 대학살"을 "학살"이라 부르지 않고, "사건"이라 부르며, 역사적 사실을 축소해 왔는데, "일본"은 "일부 군부 세력에 의해, 전쟁에 끌려들어 갔고, 그리하여 전선을 확대했다"라는 수동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② "아이리스 장"의 책 - "난징의 강간 (The rape of Nanking)“

"아이리스 장"이 "난징 대학살"에 관해 쓴 "논픽션 책"으로, 1997년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책이다. 저자 "아이리스 장"이 "난징 대학살"에 관한 자료조사에 기초하여 서술했으며, 저자는 "난징의 강간"을 통해, "일본 정부"가 1931~ 1945년 사이에 전쟁 범죄를 부끄러워할 만큼 충분히 사과하지 않았다는 관점을 제시했다. "난징의 강간"은 "난징 대학살"을 서구에 처음으로 소개한 영어로 쓰인 중요한 책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으며,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출판되고 있다.

"아이리스 장"은 특유의 논리적인 웅변으로 "모르쇠"로 일관하는 "주미 일본대사"를 생방송에서, "일본대사"의 논점을 조목조목 반박하여, 제대로 논파하였다. 이를 계기로 "아이리스 장"은 "미국 내 중국 인권운동"의 상징적인 인물로 부각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일본" 일부 우익세력들은 "아이리스 장의 책은 왜곡과 날조"라 반박하며, "아이리스 장"에게 전화ㆍ메일ㆍ시위 등 방법으로 협박했었다. "아이리스 장"은 "일본 우익들"로부터 여러 협박과 우울증에 견디지 못해, 2004.11월, 자살로 추정되는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 책을 한 출판사가 "일본"에서 번역출판을 시도하자, 일본 우익세력들은 출간을 저지하기 위해 대규모 규탄집회를 열었고, 결국 "난징의 강간(일본어판)" 출간하려 했던 출판사는 계약을 파기하고 일본에서는 출판조차 되지 않은 이 책에 대한 비판서들이 등장하는 등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러한 논란과 극우파들의 저지 시도 끝에, "일본어 판"은 2007년에 출간됐다.

③ 난징 대학살 역사관 설립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7만평 규모의 "난징 대학살 역사관"을 설립하여, 매년 12.13일에 추모식을 가지며, "일본"의 만행을 국제적으로 홍보하고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하려고 하고 있다.

 일본의 부정 :  일본은 "난징 대학살"은 없었다고 주장

오늘날 "일본"에서는 일부 양심적 지식인을 제외하고는, 극우ㆍ우익 인사가 난징 대학살은 없었다고 주장하는 이른바 "환상설ㆍ부정론"을 내세우거나, 심지어는 교과서에서 "난징 대학살"을 언급하지 않거나, "난징 사건"이라고 사건을 일축하는 등, 오히려 "난징 대학살" 언급을 금기시되고 있어서 "중국" 측과 대립하고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일본" 내에서는 "양심적인 사학자"라고 불리는 사학자들도 "중국 측의 30만"이라는 숫자를 받아들이려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데, 대표자인 "가사하라 토쿠시(츠루 문과대학 교수)ㆍ호라 도미오(와세다 대학교 교수)" 조차도 "25만 명 이상설"을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일본 극우 부정파"들이 존재하는 반면, 일본에서도 "No more Nanjing"이라는 이름의 시민단체가 있어, "난징 대학살"의 사실을 묵살하는 일본 극우 세력과 현 정부의 행태에 반대해, 진실을 알리기 위해,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최근에는 "난징 대학살"을 소재로 한 영화ㆍ다큐멘터리 등이 제작되어, "난징 대학살"에 대한 논의가 확산되어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2010.05.16일에는 1937년 "일본군의 난징 대학살"에 군인으로 참가했던 일본인들이 최근 언론과 인터뷰하고 기록영화에 출연해 당시 상황을 증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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